[묵상글]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송축하라

하현. 2026. 2. 19. 05:11

 

그 날에 네 입이 열려서 도피한 자에게 말하고 다시는 잠잠하지 아니하리라 이같이 너는 그들에게 표징이 되고 그들은 내가 여호와인 줄 알리라

겔 24:27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시 103:1

 

 

‘다윗의 시’는 언제나 스스로를 자책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자비하심을 찬송한다. 자책은 가장 비겁하고 쉬운 방법으로 죄를 회피하게 한다. 자신에게 책임을 전가하면서 실은 자포자기하는 것으로 해결하려 든다. 우리의 순종은 자포자기하는 게 아니다. 이를 인정하고 잘못을 회개하는 것은 그 반대의 용기다. 책임을 모면하는 게 아니라 이를 받아들임으로 주께 그 책임에 따른 용서를 구하는 일이다. 앞서 에스겔 23장에서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에 대하여 구체적인 죄악과 심판의 상황을 열거하였다. 이스라엘 전체를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으로 대표하여 포괄적으로 그 죄악의 내용들을 열거하였다.

 

오늘 본문은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하여 예루살렘의 죄악과 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묘사하고 있다. 즉 용서란 무엇에 대한 어떤 잘못인지 구체적으로 밝힘으로 가능하다. 오늘 본문은 이에 앞서서 바로 이와 같은 잘못을 연속적으로, 그러나 구체적으로 짚고 살핌으로 앞에서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을 비유적인 언어인 ‘오홀라’와 ‘오홀리바’로 지칭한 것에 비해 예루살렘에 대해서만 언급하며 ‘끓는 가마’로 비유하고 있다.

 

“고른 뼈를 가득히 담고 그 뼈를 위하여 가마 밑에 나무를 쌓아 넣고 잘 삶되 가마 속의 뼈가 무르도록 삶을지어다(5).”

 

이에 ‘각을 뜨고’ 곧 예루살렘 거민들 하나하나 모두 멸망케 할 것을 암시한다. ‘그 넓적 다리와 어깨 고기의 모든 좋은 덩이’는 제사를 위해 바쳐지던 희생 제물을 가리키는데, 이는 예루살렘 거민들 중 특별히 세력 있는 자들, 방백들을 비유한다. 이들을 ‘잘 삶되’ 하는 것은 끓는 가마 속에 있는 것을 불을 피워 삶되 온전히 삶으라는 뜻이다. 곧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상징하는 불로 저들의 죗값을 삶는 것으로, “그 그룹이 그룹들 사이에서 손을 내밀어 그 그룹들 사이에 있는 불을 집어 가는 베 옷을 입은 자의 손에 주매 그가 받아 가지고 나가는데 그룹들의 날개 밑에 사람의 손 같은 것이 나타나더라(10:7-8).”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거민들을 심판하시되 온전하고 철저하게 심판하심을 나타낸다.

 

선민과 주변 국가들에 대한 심판을 예언하는 것으로 남유다에 대한 말씀이다. 실제 “시드기야 제구년 열째 달 십일에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이 그의 모든 군대를 거느리고 예루살렘을 치러 올라와서 그 성에 대하여 진을 치고 주위에 토성을 쌓으매 그 성이 시드기야 왕 제십일년까지 포위되었더라(왕하 25:1-2).” 하고 이 모든 일은 이루어졌다. 매우 긴박하게 예언한다는 특징을 오늘 본문은 알게 한다. 녹슨 가마로 양고기를 삶는 비유를 통해 예루살렘 심판의 목적과 시한과 이에 대한 하나님의 확고한 집행의지를 천명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계시를 주셨던 날, 즉 바벨론 군대의 예루살렘 포위 개시 당일의 날짜를 기록하도록 명하셨다. “아홉째 해 열째 달 열째 날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겔 24:1).” 본문에 의하면 에스겔에게 하나님의 계시가 다시 임한 것은 제 9년 10월 10일로 이 날은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에 대한 포위를 시작하던 날이다.

 

에스겔은 이처럼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은 날을 기록하였다. 지금은 포로로 끌려가 이 모든 일이 이루어지는 것을 알지 못한다.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친히 에스겔에게 이와 같은 계시가 주어진 날을 기록하라 명령하셨다. 그 이유는 두 가지로, 첫째는 에스겔의 예언이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계시로 말미암은 것임을 증명한다. 앞서 포로로 잡혀간 에스겔이 거주하고 있던 바벨론의 그발 강가는 예루살렘으로부터 약 600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였다. 그러므로 결국 예루살렘 포위 소식을 들으려면 아무리 빨라도 최소한 며칠은 소요되었다. 따라서 예루살렘 포위 및 파멸과 관련한 사실은 본문에서 같은 날에 계시로 임하여 예루살렘이 포위되던 날인 것을 기록한다.

 

에스겔은 이 예언의 말씀이 하나님의 초자연적 계시로 말미암은 것임을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로는 범죄 한 남유다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심판하신 날을 기억하여 그와 같은 죄를 다시는 범하지 말 것을 교훈하기 위함이라 할 수 있다. 곧 오늘의 심판이 불가피하나 이를 토대로 끝이 아니라 남은 자들은 이를 듣고 더욱 근신하여 주의 뜻에 합한 삶을 살기를… 그와 같은 주의 긍휼하심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여기서 ‘녹슨 가마’는 죄로 오염된 예루살렘 성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이 녹슨 가마에 양을 삶되 한 마리 전체를 넣고 뼈가 무르도록 삶으라고 명하셨다. 이는 죄로 오염된 예루살렘 성 전체가 파멸에 이르게 될 것임을 나타낸다.

 

이처럼 예루살렘에 대한 가공할 만한 심판이 집행되는 상황을 비유하여 제시하는 것은 보면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가마에 있는 덩이를 제비뽑을 것도 없이 하나하나 꺼내라고 하신다. 이는 곧 닥치는 대로 하나님의 심판은 죄를 소멸하기까지, 죄로 인한 하나님의 분노가 풀릴 때까지 모두가 다를 게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분노가 풀리는 것은 그들의 녹이 다 벗겨지는 때까지이다. 곧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반드시 임한다. 죄는 회개와 사죄로 소멸된다. 죄를 자백하고 회개하면 그 모든 죄를 사하여 깨끗하게 하신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 1:9-10).”

 

오늘은 내란우두머리에 대한 1심이 선고된다. 좌우를 막론하고 피고인은 이에 대한 사죄가 없다.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 스스로는 잘못이 없다고 하면서 자신 외의 다른 자들에게 이를 전가한다. 멋대로 계엄포고령을 작성한 장관이 문제이고, 자신의 뜻을 왜곡하여 실행으로 옮긴 자들의 문제라고까지 변명한다. 하다못해 잘못을 인정하기는커녕 이를 정당화하느라, 줄줄이 자신으로 인하여 재판을 받고 선고를 받는 이들이 수두룩한데도 도무지 반성이란 게 없는 듯하다. 이러한 예로 알 수 있듯이 우리는 죄에 대해 아무나 이를 인정하고 회개할 수 있는 게 아님을 알 수 있다. 보면 다들 스스로는 억울할 뿐이어서 이를 동조하고 지지하는 자들로 자신을 정당화할 뿐이다. 우리가 알 수 없는 지옥이란 이런 곳일 것 같다.

 

결국 죄인은 멸망함으로써 죄에서 벗어나게 된다. 문제는 멸망한 자는 아무런 소망도 가지지 못한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바로 이러한 멸망을 통하여 그 죄가 소멸됨으로 영원한 절망 가운데 처하게 될 것이란 사실이다. 그것이 더 절망적인 것은 그런 가운데서도 억울함과 변명으로 남 탓을 하고 스스로는 잘못이 없다고 아우성일 것이다. 이를 예수님은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결국은 그런 지점에서도 잘못을 알지 못하고 자신의 정당함을 주장하지만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하심으로 그 결과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두렵다(마 7:22-23). 더는 돌이킬 수 없는 순간이 온다.

 

오늘 우리는 주 앞에서 자신의 죄를 뉘우치며 하나님의 은혜로우심을 소망하며 회개할 수 있는 것이 복이다. 산 것이 아름다운 것은 살아서 사는 동안에 돌이켜 회개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것이다. 더는 그럴 수 없을 때, 예수님은 더 이상 미련을 두지 말 것을 명하셨다. “어느 곳에서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거기서 나갈 때에 발 아래 먼지를 떨어버려 그들에게 증거를 삼으라 하시니(막 6:11).” 죄란 이처럼 악착같고 끈질겨서 멸망하기까지 이내 뉘우침을 바랄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케 하시며 구원의 소망으로 우리의 심령을 충족하게 채워주시기를 원하신다. 이때의 전제는 회개이다. 회개와 은혜가 비례하는 이유다.

 

은혜를 입은 자는 남을 비판하지 않는다. 옳고 그름을 자신이 평가하려는 것에 주의한다. 이로써 에스겔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임할 하나님의 심판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하여서 ‘끓는 가마’의 비유로 대하여 묘사하고(1-14), 에스겔은 아내의 죽음을 표징으로(15-24), 또한 선지자의 말을 기꺼이 듣는 청중들에 대한 표징을 묘사한다(25-27). ‘끓는 가마의 비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과 멸망을 묘사한다. ‘에스겔의 아내의 죽음’은 이스라엘 족속의 멸망을 예시한다.

 

“인자야 내가 네 눈에 기뻐하는 것을 한 번 쳐서 빼앗으리니 너는 슬퍼하거나 울거나 눈물을 흘리거나 하지 말며 죽은 자들을 위하여 슬퍼하지 말고 조용히 탄식하며 수건으로 머리를 동이고 발에 신을 신고 입술을 가리지 말고 사람이 초상집에서 먹는 음식물을 먹지 말라 하신지라 내가 아침에 백성에게 말하였더니 저녁에 내 아내가 죽었으므로 아침에 내가 받은 명령대로 행하매(16-18).”

 

곧 ‘네 눈에 기뻐하는 것’ 이는 사랑과 욕망의 대상으로 아내를 지칭한다. 직접적으로 에스겔의 아내를 가리킨다. ‘한 번 쳐서’는 염병이나 재앙을 뜻한다. 그녀가 갑작스럽고 치명적인 병에 걸려 죽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슬퍼하거나 눈물을 흘리거나 하지 말며’ 하신다. 본래는 애곡하고 슬퍼할 수 있으나 “울거나 눈물을 흘리거나 하지 말며 죽은 자들을 위하여 슬퍼하지 말고 조용히 탄식하며 수건으로 머리를 동이고 발에 신을 신고 입술을 가리지 말고” 하는 부분에서 놀라게 된다. 실제 대제사장은 부모나 어떤 친족의 죽음에도 가까이 하거나 애곡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다. “자기의 형제 중 관유로 부음을 받고 위임되어 그 예복을 입은 대제사장은 그의 머리를 풀지 말며 그의 옷을 찢지 말며 어떤 시체에든지 가까이 하지 말지니 그의 부모로 말미암아서도 더러워지게 하지 말며(레 21:10-11).” 이는 하나님의 중보자로 대제사장들의 사명이 그만큼 엄숙하고 막중한 것을 알게 한다.

 

곧 죽음은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죄의 결과이다. 모든 사람은 죄를 범하였고 죽음으로 그 삯을 물어야 한다. 에스겔은 선지자이면서 동시에 대제사장처럼 그의 아내의 죽음을 애도하지 못하도록 명령받았다. 에스겔의 슬픔이 장차 이스라엘 족속이 보편적으로 당할 슬픔을 예시하는 것이다. 그만큼 예루살렘의 운명이 절망적임을 계시한다. 유다는 하나님의 선택된 민족이고, 장차 메시야가 탄생할 나라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에 물들어 있을 때에는 결코 용서받을 수 없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 합당한 삶을 영위하지 못할 때 이스라엘 족속이 멸망하는 것처럼 심판이 따를 것을 알게 한다.

 

“바벨론의 왕이 립나에서 시드기야의 눈 앞에서 그의 아들들을 죽였고 왕이 또 유다의 모든 귀족을 죽였으며 왕이 또 시드기야의 눈을 빼게 하고 바벨론으로 옮기려고 사슬로 결박하였더라(렘 39:6-7).”

 

이 끔찍하고 철저한 파괴는 결국 회개가 없는 죄 때문이다. 그러므로 에스겔은 아내를 잃은 것이 이스라엘에 임할 엄청난 진노의 예표임을 알고 슬픔 가운데서도 애곡하지 않았다. “내가 아침에 백성에게 말하였더니 저녁에 내 아내가 죽었으므로 아침에 내가 받은 명령대로 행하매(겔 24:18).” 고로 오늘 우리의 사명은 냉정하고 냉철해야 한다.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자신의 개인적 슬픔까지 인내하고 희생하는 신앙의 삶이 되어야 한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먼저 해야 할 것과 그러므로 나머지는 거저 더하심으로 말씀은 우리 삶을 이끈다.

 

곧 우리는 기쁘고 즐거운 것 이상으로 슬픔과 수치를 기억해야 한다. 좋은 것만 생각하고 살면 신앙의 탈선은 예고돼 있다. 이번에 들은 이야기인데, 어느 목사님이 췌장암 말기 판정을 받고 교회를 사임하고 후임자를 위해 노회와 총회에 사직한 후 죽음을 준비하였다. 항암치료가 시작되고 수술을 할 때만 해도 서로들 마음에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기적 같이 나았다. 병원에서도 기적이라 할 정도로 저는 빠르게 회복되어 삶이 연장되었다. 그렇게 가료(加療)하며 요양하면서 가지고 있던 주식을 좀 했는데 그게 대박이 난 모양이다. 다시 목회를 했는지, 할 것인지 그 다음 이야기는 듣지 못했는데 여하튼 졸지에 부자가 되었다나…. 그저 이야기를 들으며 놀라워하다 이게 복일지, 저주일지 나는 잠깐 생각했던 것 같다. 문득 히스기야의 기도 응답도 생각나면서….

 

“너는 광야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격노하게 하던 일을 잊지 말고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나오던 날부터 이 곳에 이르기까지 늘 여호와를 거역하였으되 호렙 산에서 너희가 여호와를 격노하게 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진노하사 너희를 멸하려 하셨느니라(신 9:7-8).”

 

우린 늘 우리가 회개하고 용서함을 받은 것에 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삶이 적당해지고 살만해지면 우리의 속성은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린다. 사명을 팽개치고 죄악으로 쓸려가는 일은 순식간이다. 하여 바울은 자주 언급하길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딤전 1:13).” 이를 설마 자랑하려 하는 말이겠나? 그게 아니라 스스로도 끊임없이 상기하기를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14).” 그러므로 오늘 이와 같은 예언의 말씀이 우리에게 일러주시는 게 무엇인가를 알아야 한다.

 

“지금부터 일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너희에게 일러 둠은 일이 일어날 때에 내가 그인 줄 너희가 믿게 하려 함이로라(요 13:19).” 하여 말씀을 묵상함은 성경을 잘 알고자 하는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남은 삶을 보다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경고의 말씀으로 들어야 한다. 곧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롬 4:20-22).”

 

하여 오늘도,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시 103:1-2).

 

먼저는 이 아침 나로 내게 말씀을 선포한다. 그러지 않으면 돌아서기 무섭게 내 안의 염려나 불평이나 근심이 한숨에 섞여 나를 요동치게 할 것이다. 이는,

 

여호와께서 공의로운 일을 행하시며

억압 당하는 모든 자를 위하여 심판하시는도다

그의 행위를 모세에게,

그의 행사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알리셨도다

(6-7).

 

오늘도 먼저 말씀으로 알리시는 뜻을 따라서,

 

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자주 경책하지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

우리의 죄를 따라 우리를 처벌하지는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우리에게 그대로 갚지는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의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8-11).

 

그러므로

 

능력이 있어 여호와의 말씀을 행하며

그의 말씀의 소리를 듣는 여호와의 천사들이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그에게 수종들며 그의 뜻을 행하는 모든 천군이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여호와의 지으심을 받고

그가 다스리시는 모든 곳에 있는 너희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20-2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