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너를 패망하게 하여 다시 있지 못하게 하리니 사람이 비록 너를 찾으나 다시는 영원히 만나지 못하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겔 26:21
여호와께 감사하고 그의 이름을 불러 아뢰며 그가 하는 일을 만민 중에 알게 할지어다 그에게 노래하며 그를 찬양하며 그의 모든 기이한 일들을 말할지어다
시 105:1-2
유다 주변 나라들에 대한 심판이 예언되고 있다. 앞서 요단 동편에 위치하였던 세 나라 곧 암몬, 모압, 에돔과 요단 서편 지중해연안에 위치하였던 블레셋에 대한 심판이 예언되었다. 이어 오늘은 이스라엘의 북서쪽에 위치하였던 페니키아의 두 자매 도시국가인 두로와 시돈에 대한 심판을 예언하고 있다. 두로와 시돈에 대한 예언은 주전 586년, 예루살렘이 함락되던 해 어느 달 초하루에 주어졌다.
여기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두로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 결정적인 원인이 선민의 멸망을 기뻐한 데 있다는 사실이다. “너는 암몬 족속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주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 성소가 더럽힘을 받을 때에 네가 그것에 관하여, 이스라엘 땅이 황폐할 때에 네가 그것에 관하여, 유다 족속이 사로잡힐 때에 네가 그들에 대하여 이르기를 아하 좋다 하였도다(25:3).” 이렇듯 두로가 이스라엘의 멸망을 기뻐한 것은 자신들의 상업적 경쟁 상대가 사라져서 모든 이득이 자기들에게 돌아오게 되었기 때문이다. 두로와 예루살렘은 애굽과 메소포타미아를 잇는 무역에서 이익이 많은 무역로를 놓고 서로 경쟁하였다.
두로에 대한 심판을 예언하고 있는데, 본문은 그 개시 부분으로 선민의 멸망을 기뻐하는 두로를 향한 사중의 심판을 예언한다. 먼저 두로에 대한 심판의 결정적 원인으로 선민의 멸망을 기뻐한 것을 지적하고 있다(1-2). 이어 열국에 의한 파괴와 자연 재해가 나타난다(3-6). 이에 바벨론에 의해 두로가 파괴될 것을 알린다(7-14). 또한 주변 해양 국가들의 놀람과 두려움이 부각된다(15-18). 이는 여호와가 직접 주도하실 대재앙임을 알린다(19-21).
그에 반해 예루살렘은 육상 무역로를 장악하였다. 예루살렘은 애굽에서 메소포타미아로 이어지는 국제 남북 도로상에 위치하여 있었다. 상업과 교통의 중심지로 두로와 예루살렘은 상업적 이익을 두고 서로 경쟁하였다. 이에 두로는 경쟁하던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의해 함락되어 황폐화되자, 예루살렘과 두로를 통하던 교역로가 두로로 단일화되었다. 두로는 모든 무역을 독점함으로 그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었다. 그로 말미암아 예루살렘의 멸망을 보고 기뻐한 것이다.
이를 감안할 때 예루살렘의 멸망을 기뻐한 두로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심판을 선포하신 것은 일면 남이야 어찌되든지 자기의 배만 생각하는 자들에 대한 포괄적인 경고의 예언이다. 하나님께서 두로를 심관하신 데는 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두로가 자신들의 이기적인 유익에만 눈이 어두워 자신들의 구원의 통로가 되는 선민을 멸시하였기 때문이다. 구약 시대에 선민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구속사의 전개 통로였다. 따라서 두로가 선민의 멸망을 기뻐하였다는 것은 재물에 눈이 어두워 그들의 구원의 통로가 되는 선민을 멸시한 것이다.
이렇게 선민을 멸시한 까닭에 구원에 이르지 못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결과이다. 즉 오늘 날 교회와 우리 믿는 성도들은 하나님의 구속 역사의 주역이다. 안 믿는 사람들로 구원의 길에 이르도록 하는 통로이다. 따라서 교회와 성도들을 멸시하는 자들은 두로와 같은 멸망의 대상이 된다. 또한 우리의 사명은 단지 저들과 경쟁하여 이 땅에서의 이익을 창출하는 것으로 끝이 아니다. 우리가 믿는 자들로 가진 사명은 이처럼 영적으로 막중하다.
정리하면 표면적으로는 무역의 경쟁상대로 그 통로를 차지하고 숙적을 제거하는 것으로 기뻐할 것이 아니다. 정작 이 땅에서의 현실은 그와 같은 경쟁구도를 감안할 수밖에 없는 일이겠으나 영적으로는 구원의 문제가 달렸다. 우리로서는 이와 같은 사명자로의 역할을 바로하지 못할 때 멸망이 오고, 세상은 그러한 우리의 멸망으로 더불어 멸망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또 주목하게 되는 것은 우리가 세상에서 멸시를 당하고 보잘것없는 존재인 듯하나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이를 바울은 설교하면서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8-10).” 하였는데 이는 놀라운 사실이다.
모든 게 사라지고 소경이 되어 나환자로 일생을 살다 초로로 죽어간 것 같으나 ‘소경 장로’는 나를 비롯하여 수많은 영혼을 위해 기도했고, 말씀을 전했으며 저의 생은 두고두고 강한 영향력으로 세상을 바꾸었다. 브레이너드는 스물아홉에 인디언 선교지에서 폐렴에 걸려 죽은 것 같으나 그가 쓴 5년여 시간의 일기가 훗날에 영국 국교회를 흔들었고 많은 젊은이들로 선교사의 사명을 갖게 하였다. 이렇듯 직간접적으로 우리 성도는 하나님의 뜻을 수행한다. 성도들은 자신이 세상으로부터 절대 멸시를 당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현실적으로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하는 삶을 사는 것 같으나 그 존재 이유만으로 역사하는 바가 크다.
세상에서 구원과 축복의 통로는 교회와 성도의 역할이다. 우리 부친의 경우도 조상 대대로 안 믿는 집안으로 강원도 두메산골에서 토속신앙의 후예로 살았을 계대를 끊었다. 고등학교 때 홀로 마을 작은 예배당에서 주를 영접한 뒤 그것으로 끝인가, 싶더니 이내 하나님의 강권하심으로 목사가 되어 그야말로 전투적인 사역의 길을 걸었다. 어릴 적 나는 그런 부친의 모습이 싫으면서도 존경스러웠고 주의 강권함으로 거부하는 길을 갔으나 그러면서도 늘 경이로웠다. 후에 이렇듯 나까지 해서 우리 사남매가 모두 사역자로 그 역할을 감당하게 된 것은 실로 기적 같은 일이다. 이를 누가 시켜서 될 것도 아니어서,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한 사람의 성도로 끝나는 게 아니다. 그에 따른 개체발생이 새로운 계통방생을 일으키며 부친의 형제들과 그 가정과 그 자녀들에게도 이어졌다. 곧 우리가 사는 동안 구원의 문은 열렸다.
안 믿는 가정에서 홀로 신앙생활을 하는 아이들에게 나는 종종 이와 같은 사명을 일깨운다. 오늘 두로의 멸망에 따른 예언은 상대적으로 예루살렘의 멸망이라는 원인으로 주어진 저들의 운명이다. 단지 이스라엘의 멸망을 보고 ‘아하 좋다’ 하여서 끝나는 게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존재 이유는 사라지는 것이다. 이스라엘 북서쪽에 위치한 해상도시 두로에 대한 심판이 주는 교훈은 놀랍다. “인자야 두로가 예루살렘에 관하여 이르기를 아하 만민의 문이 깨져서 내게로 돌아왔도다 그가 황폐하였으니 내가 충만함을 얻으리라 하였도다(겔 26:2).” 하는 것이 결정타이다.
문득 주목하게 되는 것이 일생을 사울에 쫓겨 고난의 삶을 살았다 해도 과언이 아닐 다윗은 사울의 죽음을 애도하며 슬퍼했다.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과 여호와의 백성과 이스라엘 족속이 칼에 죽음으로 말미암아 저녁 때까지 슬퍼하여 울며 금식하니라(삼하 1:12).” 이러한 소식을 전하며 사울을 자기 손으로 죽였다며 상을 기대하였던 아말렉 사람을 처벌하였다. “다윗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 죽이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느냐 하고(14).” 여기서 우리의 사명은 물론 그 처신에 있어서도 교훈을 얻는다.
결코 이 땅에서의 이득이나 성공으로 승패가 나는 게 아니다. 상대적으로 우리를 미워하는 자의 고난이라 할지라도 위로하며 함께 슬퍼할 수 있어야 한다. 오늘 시편의 요셉은 그리스도를 상징하면서 성도의 사명을 일깨운다.
그의 발은 차꼬를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
(시 105:17-18).
이에 요셉은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창 45:5).”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여정이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뜻인 것을 인정하였고, 더하여서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50:20-21).” 하면서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을 온전히 받들었다.
욥은 “내가 언제 나를 미워하는 자의 멸망을 기뻐하고 그가 재난을 당함으로 즐거워하였던가 실상은 나는 그가 죽기를 구하는 말로 그의 생명을 저주하여 내 입이 범죄하게 하지 아니하였노라(욥 31:29-30).” 하는 고백으로 우리의 자세를 바로 하게 한다. 지혜자도 이르기를 “네 원수가 넘어질 때에 즐거워하지 말며 그가 엎드러질 때에 마음에 기뻐하지 말라 여호와께서 이것을 보시고 기뻐하지 아니하사 그의 진노를 그에게서 옮기실까 두려우니라(잠 24:17-18).”
결국 우리는 우리의 원수까지 사랑하라 하심을 바로 알게 된다. 두로의 교훈은 그렇듯 먼저는 성도의 사명이 끝나면 자신들의 구원도 끝인 것을 세상에 알린다. 동시에 우리 성도들도 설령 세상이 우리를 노엽게 한다 해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 것은,
진실로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시리이다
(시 76:10).
하여 그것까지도 주가 더하신 것으로 여겨 섬기는 마음을 잃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신설하신 것처럼 우리들도 신실하고 믿음의 삶을 살아야 한다. 비극적 결말이나 파멸은 이 땅으로 끝이 아니다. 우리가 이 비극적인 세상을 두고 애통하는 것은 우리의 신세를 한탄하는 게 아니라, 주의 긍휼하심으로 저들을 용서하시기를 비는 마음으로다. 마치 죽으면서도 스데반 집사의 기도와 같이,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행 7:60).” 비록 여느 사도들과 같이 요란하게 사역을 감당한 것도 아니다. 되레 이름도 없이 말씀 전하는 일로 살다 돌에 맞아 죽는 비극적인 결말을 보는 것 같으나… 무력하게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생을 마치는 듯 죽으셨던 예수님과 같이… 그러나 저의 부활은 우리의 영생으로 속죄함과 부활의 역사로 이어졌다.
이에 우리는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삶을 살아야 한다.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욥 1:8).” 뿐만 아니라 포로로 잡혀 갔으나 주신 자리에서 충성하였던 다니엘 같이 “이에 총리들과 고관들이 국사에 대하여 다니엘을 고발할 근거를 찾고자 하였으나 아무 근거, 아무 허물도 찾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가 충성되어 아무 그릇됨도 없고 아무 허물도 없음이었더라(단 6:4).” 우리는 주 안에서 흠 없이 순결한 자로 살면 된다.
세상에서는 가진 게 없고 부족하여 늘 남의 눈총도 받고 시빗거리가 되기도 하겠으나 우리는 예수와 같이 ‘만민의 문’이 되어야 한다. 세상을 향하신 하나님 구원과 축복의 통로가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이에 오늘 우리에게 맡기신 그 사명의 길이 보인다.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10:8).” 그러므로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9).” 곧 우리는 예수께로 나아가는 문이다.
내게 의의 문들을 열지어다
내가 그리로 들어가서 여호와께 감사하리로다
이는 여호와의 문이라
의인들이 그리로 들어가리로다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고 나의 구원이 되셨으니
내가 주께 감사하리이다
(시 118:19-21).
하여,
“그 날에 유다 땅에서 이 노래를 부르리라 우리에게 견고한 성읍이 있음이여 여호와께서 구원을 성벽과 외벽으로 삼으시리로다 너희는 문들을 열고 신의를 지키는 의로운 나라가 들어오게 할지어다(사 26:1-2).”
오늘 이 두로의 멸망은 한낱 이방의 주변국이 멸망한 게 아니다. 저들의 멸망으로 우리의 존재의 이유가 선명해진다. “그러므로 자기 행위의 열매를 먹으며 자기 꾀에 배부르리라 어리석은 자의 퇴보는 자기를 죽이며 미련한 자의 안일은 자기를 멸망시키려니와 오직 내 말을 듣는 자는 평안히 살며 재앙의 두려움이 없이 안전하리라(잠 1:31-33).” 그러므로 우린 스스로를 속이지 말아야 한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 6:7).” 곧 오늘의 여러 문제나 상황 속에서 세상을 탓할 필요가 없다. 우리의 약한 육신을 원망할 게 아니다. 본래 그런 것이다.
다만 그것으로 주를 부를 것인지, 세상을 추구하며 살 것인지를 오늘 예루살렘의 멸망이나 두로의 멸망을 보며 결정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너무도 분명하며 하나도 남김 없어 성취된다. 기어이 나를 끌어다 주의 일에 쓰시는 것 같이, 내 곁의 형제들부터 이런저런 인연으로 맺어진 사람들의 변화된 삶을 보면서도 확신할 수 있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
여호와의 말씀은 정직하며
그가 행하시는 일은 다 진실하시도다
(시 19:7, 33:4).
그리하여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하지 못할 사실로 말미암아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은 우리에게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 가나니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 가셨느니라(히 6:18-20).”
이에,
여호와께 감사하고 그의 이름을 불러 아뢰며
그가 하는 일을 만민 중에 알게 할지어다
그에게 노래하며 그를 찬양하며
그의 모든 기이한 일들을 말할지어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자랑하라
여호와를 구하는 자들은 마음이 즐거울지로다
(시 105:1-3).
이와 같은 사명으로 살면서,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
(19).
오늘도 이와 같이 말씀으로 나를 붙드시길. 하여서 나의 남은 날들로 구원과 축복의 통로로 삼으시기를.
왕이 사람을 보내어 그를 석방함이여
뭇 백성의 통치자가 그를 자유롭게 하였도다
(2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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