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요나 3장 / 선포하라

하현. 2026. 2. 20. 08:24

260222 주일
 

요나 3장
선포하라

 
욘 3:1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욘 3:2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하신지라
욘 3:3 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니라 니느웨는 극히 큰 성읍이므로 삼 일 길이라
 
 
들어가는 말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에 대해 책임지신다. 그 마음이 돌아섰을 때도 이를 포기하지 않으신다. 요나는 사명을 받고 ‘니느웨’가 아닌 ‘다시스’로 가려 했다. 그러자 풍랑을 만나고, 바다에 던져져서, 물고기 뱃속에서 3일 밤낮을 보냈다. 이는 하나님이 저를 돌이키려 예비하신 것이다.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요나가 밤낮 삼 일을 물고기 뱃속에 있으니라(1:17).”
 
이후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회개와 서원을 회복하였다. “주께서 나를 깊음 속 바다 가운데에 던지셨으므로 큰 물이 나를 둘렀고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쳤나이다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2:3-4).” 곧 우리가 자녀인 것을 알 수 있는 것 가운데 하나는 징계다.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계 3:19).” 이를 위하여는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1:32).”
 
하여 오늘 요나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 요나에게 임하니라(1).”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며 우리를 향한 은총이다. 주의 뜻에 반하여 그릇된 길로 갔던 요나는 징계를 통해 새 힘을 얻고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분명히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게 된다.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2).”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고난이 우리에게 복인 것은 우리의 영혼이 새로워진다. 요나에게 ‘풍랑’과 ‘물고기 뱃속’은 연단의 시간으로,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니라(3).” 하는 주의 뜻에 순종하게 되었다.
 
우리가 신앙으로 산다는 일은 무난하고 느슨하지 않다. 거듭되는 충돌과 회의와 갈등이 있다.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설면서 순순히 주의 뜻으로 살기란 태생이 불가능하다. 하여 바울은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롬 7:19-20).” 하고 확인하며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23).” 이와 같이 우리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의 소욕은 우리의 뜻을 거스른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 5:17).”
 
그렇듯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식들’로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 2:3).” 이제는 아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5:8).” 그 결과 이방의 땅에 회개가 일어났고, 하나님의 재앙은 미뤄졌다. “하나님이 그들의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감찰하시고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욘 3:10).”
 
본문 이해
 
요나를 통해 이방 선교의 가능성을 보여주셨다. 사역에 따른 명령에는 우리의 이해가 필요하지 않다.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신다. 요나의 불순종과 폭풍, 바다에 던져짐, 물고기 뱃속으로 이어지는 요나의 생환은 믿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의지를 알게 한다. 이를 통해 우리가 주목할 것을 살펴보았다.
 
1. 주의 길을 가는 경로
 
첫째, ‘의식’이 ‘행동하기’를 제한하면 안 된다.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그들과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배삯을 주고 배에 올랐더라(1:3).”
 
요나는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도망하였다. 이는 나름의 판단과 두려움이 중첩된 결정이다. 이방 나라에 주의 복음을 전하는 것에 대한 판단도 있었다. 당시 선민의식으로 용납할 수 없었다. 가령 베드로에게 고넬료는 이방인이었다. “가이사랴에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달리야 부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라(행 10:1).” 저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당시 유대인으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와 같은 선민의식으로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내가 결코 먹지 아니하였나이다 한대(14)” 베드로는 선민으로서의 신념을 고수하려 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15).”
 
초대교회에서 유대인 그리스도인과 로마나 이방인 그리도인들 사이에 많은 논쟁이 있었다. 이때 베드로는 설명하였다.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언하시고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사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셨느니라(행 15:7-9).” 곧 우리의 선입견이 복음을 전할 때 ‘행동하기’를 주저하게 한다.
 
둘째, 회개의 위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주께서 나를 깊음 속 바다 가운데에 던지셨으므로 큰 물이 나를 둘렀고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쳤나이다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2:3-4).”
 
분명 회개할 수 있는 자는 복되다. 그것이 인생의 원치 않는 좌절과 낙심으로 고통 가운데 던져지는 일에서이다. 고난이 축복이란 말은 돌이켜 하나님을 온전히 바랄 때 나오는 간증이다. 하여,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하는 고백과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하는 놀라운 세계관을 가지게 된다(시 119:67, 71).
 
욥은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욥 13:15).” 하는 고백과 함께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42:5).” 하는 또 다른 세상을 고난을 통과한 후에 마주했다. 다윗은 그렇게 해서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시 63:3).” 하는 찬송을 올렸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인물이 회개하고 돌이켜 주의 길을 간다. 존 뉴턴은 노예선 선장이었으나 돌이켜 목사가 되었다. 중이었던 자도 무당이었던 자도 어느 순간으로 돌이킨다. 살인자도 증인이 된다. 회개는 우리가 전혀 예상치 못한 인생 경로에서 돌이키게 한다.
 
2. 복음 전파와 회개는 불가역적이다.
 
첫째, 복음전파는 모든 믿는 자의 사명이다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하신지라(3:2).”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면 저마다 명령을 받는다. ‘일어나라, 가라, 선포하라’는 것이다. 그곳이 어디든, 누구든, 우리가 선택하고 판단할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은 행하신다. “내가 그들로 나 여호와를 의지하여 견고하게 하리니 그들이 내 이름으로 행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슥 10:12).” 도저히 그럴 수 없을 것 같은 자들로 돌이켜 주의 자녀인 것을 알게 하신다.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마 24:40-41).” 이를 우리는 판단할 수 없다.
 
다만 순종뿐이다. 요나는 다시 사명을 받았고 거기에 순종하였다. 예수께서 전신불구를 고치신 뒤, “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요 5:5, 8, 14).” 이에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모든 불운과 고통과 실패와 좌절, 죽음에 이르기까지 이는 다 죄로 인한 것이다.
 
둘째, 회개와 행함은 동일체다.
“요나가 그 성읍에 들어가서 하루 동안 다니며 외쳐 이르되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3:4).”
 
회개가 있었다면 언행심사도 달라진다. 고난은 우리를 떠나갔던 자리로 돌아오게 한다. 하나님의 은혜는 회개를 타고 흐른다. 회개가 없거나 미지근한 성도는 은혜도 막연하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도 크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롬 5:20).” 그렇다고 죄로 살까? 그만큼 삶이 피폐하고 고통으로 일그러질 뿐이다. 애굽의 430년이 노예로 종노릇하며 저들의 우상에 절었다. 이스라엘은 이에 불순종을 벗어나느라 광야 40년을 통과해야 했다. 룻은 소돔에서 죄악 중에 거하느라 그 생이 고달팠다. “무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로 말미암아 고통 당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이는 이 의인이 그들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이 상함이라)(벧후 2:7-8).”
 
나오는 말
 
은혜를 더하심으로 고난 중에 주를 찾게 하신다. 회개는 값지다. 천하의 앗수르 수도 니느웨가 돌이켜 회개하였다. 요나는 전할 뿐이다. “요나가 그 성읍에 들어가서 하루 동안 다니며 외쳐 이르되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4).” 그러자 생각지도 못했는데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높고 낮은 자를 막론하고 굵은 베 옷을 입은지라(5).” 그뿐인가? “그 일이 니느웨 왕에게 들리매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왕복을 벗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재 위에 앉으니라(6).” 곧 회개의 영이 하시는 일을 우리는 예측할 수 없다.
 
나이 서른에 문둥병을 얻어 소록도로 끌려갔다. 온 몸이 뒤틀리고 두 눈이 빠진 뒤에야 음성판정을 받고 나환자촌의 교회로 왔다. 저는 남은 일생을 소경으로 살면서 성경 66권을 암송하고, 인근 병원으로 오는 환우들을 찾아다니며 복음을 전했다. 앞서 그 교회 목사는 공산당에 의해 두 아들의 목숨을 잃었다. 그런 가운데 아들을 죽인 자를 양자로 삼아 주의 길을 가게 하였다. 어떤 이는 다이빙을 하다 목이 부러지며 전신마비가 되었다. 저는 평생을 누워 입으로 연필을 물고 찬송을 지었다.
 
상대적으로 누구는 그와 같이 닥친 고통으로 자살을 한다. 어떤 이는 결국 안락사를 선택하여 생을 마친다. 고난은 누구에게나 느닷없이 찾아오지만 그것으로 누구는 주께 회개하고 서원한다. 요나는 다시 일어났다. 그리고 선포하라는 말씀을 앗수르의 수도에서 외쳤다. 이는 죽음을 각오하고 하는 순종이었다. 회개는 불가사의한 일이다.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높고 낮은 자를 막론하고 굵은 베 옷을 입은지라 그 일이 니느웨 왕에게 들리매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왕복을 벗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재 위에 앉으니라(5-6).”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회개와 동시에 하나님은 진노를 멈추신다. 돌이킬 수 있다는 게 살아있음의 소망이다. 인생을 살면서 우리는 상상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일을 겪는다. “하나님이 그들이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10).”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