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요나 4장 / 요나의 박넝쿨

하현. 2026. 2. 26. 15:49

260301 주일

 

요나 4장

요나의 박넝쿨

 

 

욘 4:9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 하시니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 하니라

욘 4:10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욘 4:11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들어가는 말

 

하나님은 악인이라도 악으로 인하여 죽는 것을 바라지 않으신다. 그러나 “악인은 은총을 입을지라도 의를 배우지 아니하며 정직한 자의 땅에서 불의를 행하고 여호와의 위엄을 돌아보지 아니하는도다(사 26:10).” 이것이 죄악의 본성이라, “내 하나님의 말씀에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57:21).” 곧 저들 스스로가 볶이고 괴로워서 절규하며, 사는 게 지옥 같다. 악은 바쁘고 피곤하다. 그러나 “만일 악인이 돌이켜 그 악에서 떠나 정의와 공의대로 행하면 그가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겔 33:19).” 오늘 본문은 이에 따른 증거이다.

 

요나는 자기 판단으로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를 피하여 다시스로 갔다. 니느웨는 이방의 땅이다. 악인들인 그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것은 가당치않다. 그래서 요나는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였다가 풍랑을 만났고, 바다에 던져졌으며, 물고기 뱃속에서 3일 밤낮을 보내다가 잃어버린 기도와 서원을 되찾았다. 요나는 사흘 길이 넘는 니느웨를 하루에 돌며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저들은 이에 반응하였다.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높고 낮은 자를 막론하고 굵은 베 옷을 입은지라(욘 3:5).” 이는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시고 그 진노를 그치사 우리가 멸망하지 않게 하시리라 그렇지 않을 줄을 누가 알겠느냐 한지라(9).” 곧 자신들의 죄악을 돌이켜 회개한 것이다.

 

그러자 “하나님이 그들이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10).” 이것으로 지난 주일에 우리는 니느웨의 반전을 보았다. 그러자 오늘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4:1).” 자신이 억지로라도 돌이켜 회개를 선포하기는 하였으나, 저들이 돌이켜 회개하였다고 해서 하나님이 즉시로 용서하시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그래서 요나는 그 마음에 성질이 났다.

 

그런 요나가 주께 아뢰었다.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2).” 다시 말하면 ‘내가 이러실 줄 알았다’는 것이다. 이럴 거였으면서 뭘 그렇게까지 자신을 억지로 보내서 심판을 선포하게 하셨단 말인가?

 

요나는 화가 나서 거꾸로 생각했다. 그래도 자신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저들에게 심판을 선포함으로 저들이 돌이켜 회개하고 멸망을 피한 셈이면 성공한 것인데… 요나는 오히려 저들이 구원 받는 것이 못마땅하였다. 니느웨 성 사람들도 의외였다. 죄악을 지적하자 이렇듯 순순히 돌이킬 줄 몰랐다. 또한 하나님께서도 그렇게 곧이곧대로 용서하시고 자비하심으로 긍휼을 베푸실 거라 생각하지 못했다. 이런 극적인 반전이 요나를 화나게 했다. 심판을 철회하신 하나님을 향해 불평이 쏟아졌다.

 

요나는 자신의 편협하고 배타적인 마음을 돌아보지 못했다. 요나는 하나님의 긍휼하고 자비하신 사랑을 용인할 수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그 어떤 악한 사람이라도 죄를 돌이켜 회개하면 용서하시고 멸망을 거두신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었다. 실은 자신도 악인이었던 것을 알지 못하고 말이다. 이는 선민의식에 의한 고정관념 때문이다.

 

첫째, 자신은 구별된 선민이라고 생각했다. 둘째, 구원은 선민들만이 독점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셋째, 하나님의 긍휼하심 앞에 격렬하게 불평하였다.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하니(3).” 할 정도로 요나는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자비하심이 이해가 안 되었다. 요나의 이런 태도가 어이없어서 하나님이 물으셨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하시니라(4).” 저들이 죄에서 돌이키고, 그러자 하나님은 긍휼히 여기시는 게 합당하지 않은가?

 

첫째, 모든 인간은 죄인이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 3:10)” 둘째, 우리도 진노의 자녀들이었다: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 2:3)” 곧 우리 자신이 회심하여 돌이켜서 주를 영접함으로 주의 자비와 긍휼하심으로 용서함을 받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그러면서 남의 경우에 대해서는 요나와 같이 이를 선뜻 인정할 수 없다. 오늘 본문은 이에 따른 요나의 불평과 하나님의 산교육이 이루어지는 내용이다.

 

1. 요나의 불만(1-4)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2).”

 

1) 요나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부당하다고 여긴다: 하나님의 긍휼을 문제 삼는 요나는 우리의 모습이다.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셨다는 게 용인할 수 없는 일이다. 요나는 니느웨 사람들에게 진노를 피할 수 있는 자격이 없다고 속단했다. 그들의 회개는 있을 수 없다. 설령 회개를 했다 해서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그렇게 간단하게 용서하시면 안 된다! 요나는 하나님의 공의를 요구했다. 요나는 하나님의 자비심을 심히 싫어했고 화가 났다. 곧 우리가 남에게 엄격하고 자신에게는 관대한 본능을 그대로 보여준다. 저마다 상대의 호의나 친절을 당연한 권리로 안다.

 

2) 이방인, 곧 안 믿는 자에 대한 적개심이 강하다: 우상을 섬기고 온갖 부정한 일을 일삼는 민족으로 취급한다. 요나는 정작 자신도 주의 긍휼하심으로 죽어 마땅했을 죄인인 자신이 구원 받고 용서하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부정한다. 심지어 ‘바다에 던져지고, 물고기 뱃속’에까지 들어갔다 용서하심으로 다시 사명을 부여받았다는 사실을 생각지 못한다. 그리고는 저들 니느웨 사람들은 무조건 자신보다 더 악하고 죄악되다고 단정한다.

 

3) 요나는 선민의식으로 모욕감을 느꼈다: 니느웨의 회개와 개혁은 말이 안 된다. 그러면서 자기 민족 이스라엘은 회개하지 않고, 개혁하기 싫어하는 민족임을 망각한다. 이스라엘이 완고함으로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다. 자신은 절대 그렇지 않다는 착각으로 산다. 부끄러운 줄 모르는 사람의 특징은 자신에게 관대하다. 같은 잘못도 상대보다 자신은 낫다고 여긴다. 하나님께서 이를 똑같이 취급하시면 부당하다고 생각한다. 회개는 선민의 특권이라 생각한다. 이방인은 하나님의 은총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여긴다.

 

4) 요나의 열심을 자신의 의로 삼는다: 이를 두고 바울은 스스로를 반박하였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롬 10:2).”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그들의 악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외식하는 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마 22:18).” 저들은 모두 당대의 의인이라 일컫는 위인들이다. 자신들의 열심으로 의를 삼았다. 오늘 요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고려한다는 구실로 하나님의 행위를 불쾌히 여기는 자가 되었다.

 

정리하면, 베드로도 그러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별하지 않는다는 것에 동의할 수 없었다.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하고 항의했다. “내가 이르되 주님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거나 깨끗하지 아니한 것은 결코 내 입에 들어간 일이 없나이다 하니 또 하늘로부터 두 번째 소리 있어 내게 이르되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고 하지 말라 하더라(행 11:8-9).” 그렇게 로마인 관료 그리스도인 고넬료를 만나는 일에 거부감을 느꼈다.

 

2. ‘박넝쿨’을 통한 하나님의 산교육(5-11)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 하시니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 하니라(9).”

 

1) 하나님은 자연을 통해 교육하신다: 요나가 여기서 자신의 불만족을 고집하는 것을 두고 자연의 한 이치로 교육하신다. 하나님과 논쟁하는 것은 우리를 감정적으로 상하게 한다. 니느웨의 운명을 요나가 예단하였다. 기대도 안 했다. 니느웨 사람들이 요나의 선포하는 말씀을 듣고 이처럼 즉각적으로 돌이킬 줄 몰랐다. 그런 저들의 회개가 언짢았다. 우리도 이를 인정하는 일이 쉽지 않다. 사회현상에서 또는 안 믿는 자들의 악함에 대해 비판한다. 가차 없는 비난도 서슴지 않는다. 장작 자신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부정한다.

 

2) 인간은 인간의 죄악의 정도를 판단할 수 없다: 가령 살인이나 강간을 저지른 자가 돌이켜 회개했을 때 우리는 이를 용납할 수 없다. 강한 거부감은 복수뿐이다. 영화 <밀양>의 소재도 그러했고, 모든 이야기의 소재가 된다. 복수는 자신의 악함보다 상대의 악함을 저주한다.

 

3) 인간은 불구경 하듯 남의 멸망을 기대한다: 요나는 니느웨 성 동편에 올라, 니느웨가 멸망하는 결정적인 장면을 구경하려 했다. “요나가 성읍에서 나가서 그 성읍 동쪽에 앉아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성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려고 그 그늘 아래에 앉았더라(5).” 우선은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며, 화를 입을까 하여 성 밖으로 갔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악인의 멸망을 공의로 여긴다. 정작 자신은 제외하고 말이다. 요나는 니느웨가 멸망하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4) 요나는 뙤약볕을 피해 임시로 큰 나무 가지로 초막을 지었다: 요나는 자기가 만든 초막에 앉아 밤의 냉기와 낮의 열기를 피하고자 했다. 사실 하나님이 요나를 위해 박넝쿨을 준비하셨다. 박은 잎사귀가 넓고 풍성한 식물이다. 박넝쿨이 갑자기 자라 요나의 초막을 뒤덮었다. 요나는 더위와 추위를 피할 수 있었다. 그의 괴로움을 면케 해 준 박넝쿨의 그늘이 귀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고난 중에 있는 백성에게 자애로우시다. 비록 어리석고 패역하여도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요나를 바닷물에서, 저를 위해 큰 물고기를’ 앞서 준비하셨다. 이번에는 박넝쿨을 준비하셨다.

 

정리하면, 박넝쿨은 일시적이다. 요나는 박넝쿨로 인해 큰 위안을 얻었다. 요나는 스스로 호기심을 갖고 의기양양했다. 격했던 감정이 누그러졌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넝쿨을 예비하사 요나를 가리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 하며 그의 괴로움을 면하게 하려 하심이었더라 요나가 박넝쿨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였더니(6).” 이는 하나님의 산교육이다. 이어서 “하나님이 벌레를 예비하사 이튿날 새벽에 그 박넝쿨을 갉아먹게 하시매 시드니라(7).” 순간 요나의 만족은 사라졌다. 죽을 정도로 괴로웠다.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쪼이매 요나가 혼미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이르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하니라(8).”

 

이에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 하시니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 하니라(9).”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다. 그러자 주께서 교육하신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10-11).”

 

나오는 말

 

우리의 ‘오만과 편견’은 그릇된 선민의식으로 더욱 교만하여진다. 스스로는 옳다 하고 남과는 다르다고 판단한다. 그렇게 우리의 공의란 ‘남에게 엄격하고 자신들에게 관대하다.’ 개인적으로도 문제지만 집단을 이루면서 더욱 끔찍해진다. 서로가 서로를 묵인하고 두둔하면서 과격해진다. 오늘 날 우리 사회의 집단이기주의가 그와 같은 단적인 예이다. 사법부 개혁이니 검찰개혁이니 하는 것도 결과적으로는 자신들이 초래한 결과이고 동시에 상대에 대한 엄격한 기준 때문이다.

 

요나의 박넝쿨은 우리의 일시적이고 단편적인 이기심의 결정체다. 결국 우리의 만족은 고난을 통해서만 지혜와 은혜의 자리로 나온다. 그런 우리에게 하나님은 박넝쿨의 산교육을 실시하신다. 부와 명성과 권세 잡은 자의 권력이란 게 한낱 지나가는 바람 같을 뿐인데, 이를 영원하신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하심과 나란히 놓고 판단한다.

 

하여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고전 7:30-31).” 곧 우리는 오늘 요나의 박넝쿨로 신앙은 의연하게, 믿음은 굳건하게, 하나님의 뜻에 대한 의지는 전폭적이어야 한다. “그런즉 내가 하나님의 제단에 나아가 나의 큰 기쁨의 하나님께 이르리이다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시 43: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