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두로를 향하여 이르기를 바다 어귀에 거주하면서 여러 섬 백성과 거래하는 자여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두로야 네가 말하기를 나는 온전히 아름답다 하였도다
겔 27:3
우리의 조상들이 애굽에 있을 때 주의 기이한 일들을 깨닫지 못하며 주의 크신 인자를 기억하지 아니하고 바다 곧 홍해에서 거역하였나이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이름을 위하여 그들을 구원하셨으니 그의 큰 권능을 만인이 알게 하려 하심이로다
시 106:7-8
두로에 대한 예언이 이어지고 있다. 오늘은 선민의 멸망을 기뻐하는 두로의 심판을 예언한 것에 이어 저들 스스로 자칭 훌륭하다 하고 좋은 성과로 여겼던 것들에 대해 반박한다. 곧 두로의 번영과 영화에 대해, 이를 두고 애가(哀歌)를 지어 부르라 하신다. 곧 우리가 살면서 누리는 번영과 성공이 화가 되어 죄의 씨앗이 되었음을 알게 한다. 곧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10).” 보면 더러 고상한 언사로 표현을 달리하지만 결국은 돈으로 귀결된다. 예술성이 어떻고 상징성이 어떻고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그 가치가 돈으로 환산된다.
이에 에스겔을 향하여 두로를 위한 애가를 선포할 것을 명하신다. 그와 같은 번영과 영화를 구가하다 두로는 교만하였다(1-11). 두로가 고용한 인력과 용병들의 위용을 열거하며(8-11) 그와 같은 원천이 해상무역으로 이루어졌음을 상세히 알린다(12-25). 두로는 약 25개 나라를 상대로 40가지 이상의 물품을 무역하였다. 여기에는 사람도 포함되어 당시 노예무역이 성행하였음을 시사한다. “야완과 두발과 메섹은 네 상인이 되었음이여 사람과 놋그릇을 가지고 네 상품을 바꾸어 갔도다(13).” 두로는 물질적 이윤을 위해 사람까지 사고파는 사악한 일을 서슴지 않았다. 두로는 지중해상에 위치한 작은 섬나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로는 지정학상의 이점으로 당대 최고의 번영과 영화를 누리며 주변 나라들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두로 왕은 ‘내가 하나님의 자리 곧 바다 가운데에 앉았다.’고 말하였다. 하여 스스로 “네가 말하기를 나는 온전히 아름답다 하였도다.” 즉 그러한 번영과 영화를 누리고 이익을 얻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자신들의 재물을 의지하고 교만하여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몰락할 수밖에 없었음을 깨닫게 한다.
이는 오늘의 국제정세나 우리 사회의 한 모형이기도 하다. 가진 재물이 곧 권력이 되고 힘이 되어,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곧 왕이다. 성경은 이를 ‘일만 악의 뿌리’로 규정하지만 실생활에서 모든 만족의 척도는 돈이다. 요즘 미국의 ‘관세전쟁’은 자국의 대법원 판결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힘으로 세계의 패권을 쥐고 흔들며 그때마다 다른 저울로 행사하는 것과 같다. 소위 우리 사회의 ‘갑질’ 논란도 있는 자들의 행패가 아닐 수 없다. 모든 중심이 소비문화로 가진 자는 더 가지려고 기를 쓰고 있는 자는 그 있는 것으로 자신의 위상을 과시한다.
가령 어제도 딸애 결혼을 앞두고 상견례를 치른 뒤 몇 주 후에 만나서 안 사람들의 한복을 정하면서 같이 식사를 하는 자리였다. 결혼식장이다 보니 많은 인파가 몰렸고 그 인근의 높다란 빌딩과 상점들은 저마다의 위용을 과시했다. 식사를 먼저 하고 잠깐 시간이 돼서 모 커피점에 갔는데 무슨 커피 한 잔이 13000원이었다. 손으로 직접 내린 것이라 그런다는데, 잘 꾸며진 매장 안의 가구들과 높은 천장은 고급스러웠다. 사람들은 가득하였고 점원들은 분주하였다. 통 창으로 내다보이는 바깥세상은 아이러니하게도 노점상들이 줄지어 있었고 두껍게 차려입은 상점 주인들은 찬바람을 피하느라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이와 같은 서로 다른 장면을 보면서 오늘 이 두로의 번영과 그 뒤의 어둠을 상상할 수 있었다.
곧
포악을 의지하지 말며
탈취한 것으로 허망하여지지 말며
재물이 늘어도
거기에 마음을 두지 말지어다
(시 62:10).
하시는 시각으로 볼 때,
아, 슬프도다 사람은 입김이며
인생도 속임수이니 저울에 달면
그들은 입김보다 가벼우리로다
(9).
이는 물질적 번영과 현실적 영화가 지나고 있는 다른 쪽의 배면을 연상하게 하기에 충분하다. 이 땅에서 누리며 사는 삶에 익숙해진 우리로서는 이와 같은 말씀이 사뭇 거북하기도 하겠다. 우리가 정작 사로잡혀 가는 마음으로는 두로의 안정과 복락이 아닐까? 그럼에도 이와 같은 말씀에서 하나님의 시각으로 세상을 보아야 한다. 오늘 본문 전체가 두로를 위한 애가를 지으라는 것이고 그에 따른 근거로 저들이 누리고 사는 번영과 영화인데, 애가란 사람이 죽었을 때 지어 부르는 노래다. 그렇다면 우리가 오늘 에스겔의 입장에서 ‘두로’와 같은 세상을 살면서 과연 있는 것으로 누리는 일에 멈칫, 과연 애가를 부를까?
믿는 자나 안 믿는 자나 동일하게 ‘돈의 왕국’을 살면서 과연 ‘애가’를 부른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왕국이 곧 멸망할 것을 알아야 한다. 곧 우리의 부요함과 넉넉함으로 우리의 영혼이 망할 수 있다는 소리다. 이와 같은 애가를 부르라 하실 때 이미 예루살렘은 함락된 뒤였다. 두로가 멸망하기까지 10년 이상의 기간이 더 있었다(주전 573). 두로는 예루살렘의 멸망으로 기뻐하였다는 것을 살폈다. 그러므로 이 또한 에스겔이 애가를 지어 부르는 것이 현실적으로 적절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선 두로는 에스겔이 애가를 지어 부를 당시만 해도 멸망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두로는 무역 경쟁 상대국이었던 예루살렘의 멸망함으로 한창 더 번영하고 있었다. 그러한 이유로 두로는 ‘아하 만민의 문이 깨져서 내게로 돌아왔도다 그가 황폐하였으니 내가 층만함을 얻으리라.’ 하면서 좋아하였다. “인자야 두로가 예루살렘에 관하여 이르기를 아하 만민의 문이 깨져서 내게로 돌아왔도다 그가 황폐하였으니 내가 충만함을 얻으리라 하였도다(26:2).”
이를 우리 현실로 가져오면 교회가 점점 세속화되고 사회의 짐이 되어서 심지어는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다. 세상을 경계하고 조심해야 할 게 아니라 교회와 말씀에 함몰되지 않도록 주의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안 믿는 자들이야 그렇다 쳐도 믿는 자로서도 신앙의 합리성과 이성적인 상식을 우선하여 ‘적당히 믿는 믿음으로’ 나아가야 할 것 같다. 특히 젊은이들이 떠난 중견 교회들은 노년층으로 명맥을 이어간다. 청년들이 몰리는 모 교단 여느 대형 교회들은 청년들의 소비문화나 선호도 등을 고려하여 장단을 맞추듯 시대의 흐름에 따라가야 한다. 저들이 추구하는 말씀 묵상이나 공유하여 삶으로 적용하는 게 다르다. 주일 성수나 예배 참여는 더는 필수적인 게 못된다.
그런 가운데 오늘 본문의 애가를 선포하는 일은 두로의 번영과 영화가 얼마나 크고 대단했는지 알게 한다. 저마다의 선호도나 자신을 위한 투자나 소비는 이제 별다른 문제의식을 갖게 하지 않는다. 헌금과 봉사는 간헐적으로 하고 자기계발을 위한 투자나 미래전략에 있어서는 ‘영혼을 끌어서’라도 과감하게 행동하게 한다. 특히 요즘 주변에서 주식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는데 특히 젊은 세대들의 과감한 선택이 우려되기도 한다. 나야 물론 잘 모르니까 하는 소리겠으나, 성경의 수천 년 전의 세계나 오늘이나, 두로나 이 사회나 다를 게 없다는 정도는 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성경으로 볼 때 에스겔이 아닌 두로인들을 비롯한 이방인들이 더욱 무지하고 어러석게 보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 일은 하나님에 의해 실제로 이루어질 일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이 애가의 대상은 믿음으로 사는 자들의 몫이다. 하나님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는 세상을 통해 하나님의 궁극적인 이유와 목표를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아이들아 지금은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오리라는 말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요일 2:17-18).”
결국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란 말씀에 주목해야 한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 16:18).” 결국은 돈인데 돈을 추구하는 삶이라는 게, “다툼을 좋아하는 자는 죄과를 좋아하는 자요 자기 문을 높이는 자는 파괴를 구하는 자니라(17:19).” 요즘은 다들 그런다면서 나의 우려를 일축하는데, 결혼비용이 수천만 원을 호가하고 그것에도 질적 차이는 다 있어서 누구는 억 대를 훌쩍 넘겨서라도 ‘한 번 뿐’이라는 식으로 이를 감수할 것을 강요한다. 양가 어머니의 한복대여가 60만원을 넘겼다. 양가 조모들의 한복 대여 역시 50만원을 넘겼다. 식사비가 10만원에 육박한다. 그러니 축하의 자리가 아니라 부담이다. 누굴 초대하기도 어디 가는 것도….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에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말 4:1-2).”
우린 이 모든 것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까? 혼자야 어찌 그럴 수 있다 해도… 사는 데 따른 드는 경비가 너무 막중하여 우리는 두로의 번영과 영화를 포기하기 어렵다. 그 배면의 어둠은 외면한 채 나는 한 잔에 만 원 이상 하는 커피 매장 안쪽에 앉아 있고, 세찬 바람으로 흩어지는 물건들을 추스르고 옷깃을 여미는 사람들의 고달픔은 외면하거나 무심해야 한다. 거대한 빌딩과 초고층 아파트가 들어서기까지 그곳에서 수십 년을 살았던 사람들이 내쫓겼을 억울함과 원통함은 애써 방치하고 무관심해야 한다. 두로의 번영 이면에 있는 교만과 패역함을 지적하는 말씀을 묵상하면서도 그건 그것대로, 우리의 안녕은 안녕으로 유지돼야 한다. 그러니 성경은 이와 같은 말씀에서 우리의 자세를 염려하는 것이다.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사 52:7).”
이를 일깨우는 오늘 말씀이 나로 아름다운가? 나는 그리 여기며 나의 삶을 돌아보고 있기는 한지? “네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딤전 6:17-18).”
말씀 앞에서 나의 이 면구스러움과 동시에 이율배반적인 마음이 충돌한다. 양가 조모의 당일 한복대여료를 현금으로 결제해야 얼마가 저렴하다는 말에 나는 지갑에 만 원 한 장이 전부라, 딸애는 옆 건물 은행으로 가서 자신이 뽑아다 그 값을 물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딸애가 준비한 것으로 하고, 그야말로 우리는 뭐라도 얼마 보태지도 못하는 입장이라… 돈만 있으면 이것도 해주고 싶고 저것도 사주고 싶다며 지청구를 놓는 아내의 넋두리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미안하다는 말도 미안하여 말도 못하고 그저 답답한 마음이었는데, 오늘 이 두로의 번영과 영화를 두고 과연 나는 애가를 지어 부를 수 있을까?
주 앞에 이 서러운 마음으로 앉아서,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소서
내가 주께 기도하나이다
(시 16:2, 5:2).
그럼에도 내 안에서,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하는 고백으로 울컥, 하는 마음을 달래며, 나의 없음과 빈약함으로 감사하며….
할렐루야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누가 능히 여호와의 권능을 다 말하며
주께서 받으실 찬양을 다 선포하랴
(시 106:1-2).
부디 말씀으로 살자, 오늘 이 두로의 번영을 교훈으로,
여호와여 주의 백성에게 베푸시는 은혜로
나를 기억하시며 주의 구원으로 나를 돌보사
내가 주의 택하신 자가 형통함을 보고
주의 나라의 기쁨을 나누어 가지게 하사
주의 유산을 자랑하게 하소서
(5).
세상 그 무엇으로가 아니라,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여
우리를 구원하사 여러 나라로부터 모으시고
우리가 주의 거룩하신 이름을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찬양하게 하소서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영원부터 영원까지 찬양할지어다
모든 백성들아 아멘 할지어다 할렐루야
(47-4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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