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그를 찬송할지로다

하현. 2026. 2. 23. 05:06

 

너는 기름 부음을 받고 지키는 그룹임이여 내가 너를 세우매 네가 하나님의 성산에 있어서 불타는 돌들 사이에 왕래하였도다 네가 지음을 받던 날로부터 네 모든 길에 완전하더니 마침내 네게서 불의가 드러났도다

겔 28:14-15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 백성의 모임에서 그를 높이며 장로들의 자리에서 그를 찬송할지로다

시 107:31-32

 

 

유다 주변국 가운데 두로와 시돈에 대한 심판의 예언이 이어지고 있다. 이를 애가로 지어 두로 왕을 향한 심판과 그의 멸망을 선포하게 하신다. 그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자신을 하나님의 지위에 올려 교만하였다. “인자야 너는 두로 왕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네 마음이 교만하여 말하기를 나는 신이라 내가 하나님의 자리 곧 바다 가운데에 앉아 있다 하도다 네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 같은 체할지라도 너는 사람이요 신이 아니거늘(2).” 이에 자신을 스스로 신격화하여 사는 삶을 두고 경고하신다. 이는 교만이다. “네 큰 지혜와 네 무역으로 재물을 더하고 그 재물로 말미암아 네 마음이 교만하였도다(5).”

 

다니엘은 당시 하나님의 지혜를 받은 사람이었다. 바벨론에 끌려왔으나 당대의 최고 지혜자로 여겨졌다. 그 지혜가 온 세계에 알려질 정도였다. 두로 왕은 자신을 다니엘보다 지혜롭다고 말함으로 자신을 하나님과 같은 위치에 둔 것이다. “네가 다니엘보다 지혜로워서 은밀한 것을 깨닫지 못할 것이 없다 하고(3).” 이렇듯 교만은 스스로를 정당화한다. 옳고 그름의 판단을 자기 기준의 것으로 삼아 하나님의 뜻을 대신한다. 교만은 자신의 능력을 탁월하게 여겨 하나님의 보좌를 찬탈한다. 사탄의 교만도 그러하였다. “인자야 두로 왕을 위하여 슬픈 노래를 지어 그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너는 완전한 도장이었고 지혜가 충족하며 온전히 아름다웠도다(12).”

 

그런 그를 위해 애가를 지으라 하신다. 슬픈 노래의 주인공으로 ‘너는 완전한 도장이었고’ 하는데, 당시 두로 왕이 두로를 해상의 중심지로 이룩할 수 있었던 것과 연관시키고, ‘지혜의 완전함’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곧 두로 왕이 완전한 지혜로 통치하며 해상중심무역을 활성화하여 부강하게 해상 중심지로 만들었음을 나타낸다. 그러나 이와 달리 두로 왕이 하나님께 전적으로 속해 있음과 그 사람에게 주어진 권세가 큼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이 말씀은 두로 왕을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수행하는 사역자로 삼으셨음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 해석은 다음 구절과 조화되지 않는다. “네가 옛적에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있어서 각종 보석 곧 홍보석과 황보석과 금강석과 황옥과 홍마노와 창옥과 청보석과 남보석과 홍옥과 황금으로 단장하였음이여 네가 지음을 받던 날에 너를 위하여 소고와 비파가 준비되었도다(13).”

 

‘하나님의 동산 에던에 있어서’란 두로 왕이 하나님의 직접적인 임재 안에 머물고 있음을 가리킨다고도 보여진다. 그를 앞서 “너는 완전한 도장이었고 지혜가 충족하며 온전히 아름다웠도다.” 하심으로 그리 여겨진다(12). 그러나 이 말씀은 ‘하나님의 사역자’와 연관시킨 데서 비롯된다. 두로 왕이 누린 영광을 에덴동산의 영광에 비유한 것은 그 영광으로 인해 그가 신적 존재처럼 되었음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이어지는 각종 보석으로 단장한 데서 잘 묘사되고 있다. 곧 ‘소고와 비파가 예비되었었도다’ 할 때 ‘소고와 비파’는 주로 예배에 사용되는 악기이다. 이런 악기가 두로 왕이 태어날 때 저를 예비하심인데, 그가 얼마나 영광스러운 지위를 누리고 살았는지를 암시한다.

 

결국 두로 왕의 교만과 타락은 사탄의 교만과 타락으로 연결될 수 있다. 교만한 두로 왕을 향한 심판을 예언하는 데 있어 하나님께서는 이방의 강포한 자를 통하여 두로 왕의 교만을 꺾으실 것을 알린다. 그가 잘난 줄 아는 지혜로 이룩한 모든 것을 치고 그를 바다 가운데서 죽임으로, 그는 일개 사람일 뿐이요 신이 아님을 보이실 것을 선언한다. “만민 중에 너를 아는 자가 너로 말미암아 다 놀랄 것임이여 네가 공포의 대상이 되고 네가 영원히 다시 있지 못하리로다 하셨다 하라(19).”

 

이와 같이 성경은 무엇보다 우리의 교만을 경계한다. “겸손한 자와 함께 하여 마음을 낮추는 것이 교만한 자와 함께 하여 탈취물을 나누는 것보다 나으니라(잠 16:19).” 그런데 요즘은 이를 부추기는 교육으로 ‘자기주도적인 학습관’을 심어주어 스스로의 판단과 기준을 존중하고 높이 둔다. 그러다 보니 어른의 존재감은 사라지고 뭐라 꾸짖거나 나무라는 일은 극히 제한적이게 되었다. 충고와 격려를 ‘꼰대’로 두어 거리를 멀리하는 근저에는 자신의 판단으로 살고자 하는 욕구가 어려서부터 강하였기 때문이다. 이를 부추긴 것은 부모들 세대이다. 법적으로도 촉법소년법이라 해서 아이의 의사를 우선하여 존중한다. 그러다보니 선생은 사라지고 스승은 희귀한 존재가 되었다.

 

모두가 실용의 범주에서 필요에 의한 존재로 전락하였다. 선생도 기능직의 하나이다. 제자라는 개념은 배움의 이치나 깊이를 계승하는 데 있지 않고 스승이란 존재는 그 가치와 기준이 퇴색하여 진정함을 잃었다. 초등학교부터 선생의 가르침은 어떤 기준에 따른 매뉴얼대로 작동한다. 실로 교만은 패망에 이르는 길임은 증명하고 있는 셈이다. 선배나 동료의식도 그때의 필요에 따른 호칭 그 이상의 존경을 바라는 것이 사치기 되었다. 지극히 영광스러웠던 관계나 그 위상을 스스로들 퇴보시키면서까지 개인주의와 각자의 선택으로 만족해한다. 모두 교만이 그 원인이다. 사람은 이러한사탄의 성향을 그 속성에 담고 살게 되었다.

 

하나님의 높으심과 우리의 피조물 됨을 가벼이 여긴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누리는 삶을 살기를 원하는 것은 나태와 무력한 존재로 전락시킨다. 하나님께 감사하며 사는 일에는 그만한 보상이 따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점점 더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겸손해야 할 이유가 사라지고 있다. 믿는 자로서 하나님을 인정하는 성도의 바른 태도가 절박하게 필요하다.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약 4:6).”

 

하여,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벧전 5:5).”

 

이와 같은 성경의 이치는 믿는 자들조차 거부한다. 그러다 보니 교회마다 세대 간 격차가 늘고 심지어는 교회도 양분화 되어 청년들이 주를 이루는가 하면 노년층만 남아 근근이 예배를 이어가는 경우로 나뉜다. 우린 결국 각자도생의 시대를 사는 것 같다. 그런 가운데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남을 따라 해서는 어림없고,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내가 모든 교회에서 이와 같이 명하노라(고전 7:17).” 누가 뭐라든지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하시는 시대를 살아야 한다.

 

하여,

 

“우리는 자기를 칭찬하는 어떤 자와 더불어 감히 짝하며 비교할 수 없노라 그러나 그들이 자기로써 자기를 헤아리고 자기로써 자기를 비교하니 지혜가 없도다 그러나 우리는 분수 이상의 자랑을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누어 주신 그 범위의 한계를 따라 하노니 곧 너희에게까지 이른 것이라(고후 10:12-13).”

 

맡기신 대로, 부르신 자리에서 묵묵히 주의 감당하는 일이 오늘 두로와 그 왕의 교만을 빗대어 우리에게 더하시는 교훈이다. 우리 스스로 하나님인 체 한들 “네 마음이 교만하여 말하기를 나는 신이라 내가 하나님의 자리 곧 바다 가운데에 앉아 있다 하도다(2).” 하여 마치 자신의 판단과 기준으로 말씀을 재해석하고 대중을 선동하는 일이나 이에 부화뇌동하여 스스로의 판단으로 그리 행하여 따르는 모두가 다 교만이다. 이를 알면서 나는 늘 예배에 앞서 성령이 이 시간 강림하시기를 찬송한다.

 

“성령이여 강림하사 나를 감화 하시고/ 애통하며 회개한 맘 충만하게 하소서/ 예수여 비오니 나의 기도 들으사/ 애통하여 회개한 맘 충만하게 하소서.”

 

그렇게 하지 않으시면 전하는 자나 듣는 자나 자기 식대로 말하고 듣고 하여 주의 뜻을 바로 알 수 없는 일이어서,

 

“성령이여 강림하사 크신 권능 주소서/ 원하옵고 원하오니 충만하게 하소서/ 힘이 없고 연약하나 엎드려서 비오니/ 성령강림 하옵소서 충만하게 하소서/ 정케하고 위로하사 복을 받게하소서/ 충만하게 하시오니 무한 감사합니다.” (새찬송가 190장).

 

성령으로가 아니면 교만뿐이다. 전하는 이의 말에서 교만이 섞여 나오면 자신의 소신과 견해와 신념이 많은 영혼을 오염시킨다. 목사는 신이 아니다. 자신이 하나님인 줄 안다. 하나님인 체 한다. 말씀을 전할 때 이를 경계해야 한다. 우린 다만 '광야의 소리'다. 전하고 난 뒤 나는 없다어져야 한다. 목사의 존재감이 크면 위험신호다. 듣는 자의 귀가 성령으로 분별하지 않으면 맹목적인 추종과 그 신앙은 신학적인 오류는 물론 교리에서도 벗어나서 한데 뒤섞은 화합을 강조하거나 스스로의 주장을 돈독히 하는 자기아집에 빠진다. 결국 우리가 교만하면 하나님은 이를 낮추신다. 그때의 저항은 오늘 우리 사회의 양분된 주장과 같이 대립하게 돼 있다. 이로써 하나님의 심판과 정의는 구현된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그것을 정하신 것이라 모든 누리던 영화를 욕되게 하시며 세상의 모든 교만하던 자가 멸시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사 23:9).”

 

하여,

 

“그가 마음이 높아지며 뜻이 완악하여 교만을 행하므로 그의 왕위가 폐한 바 되며 그의 영광을 빼앗기고 사람 중에서 쫓겨나서 그의 마음이 들짐승의 마음과 같았고 또 들나귀와 함께 살며 또 소처럼 풀을 먹으며 그의 몸이 하늘 이슬에 젖었으며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사람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누구든지 그 자리에 세우시는 줄을 알기에 이르렀나이다(단 5:20-21).”

 

결국은 주가 이기신다. 이김은 여호와의 것이다. 우리는 “싸울 날을 위하여 마병을 예비하거니와 이김은 여호와께 있느니라(잠 21:31).” 이는 신앙으로 살면 살수록 주 앞에 승복하게 되는 이유다. 그리하여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9-11).”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길,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마 23:11).” 이것이 진정으로 교만을 대적할 수 있는 힘이다. 누누이 강조하는 바, “사람이 교만하면 낮아지게 되겠고 마음이 겸손하면 영예를 얻으리라(잠 29:23).”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냐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약 4:5-6).” 곧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데 있어서는 그 사랑이 성령으로도 시기하게 할 정도로 ‘독생자까지 내어주진 바 되는 사랑’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고전 1:18-20).” 곧 우리로 오늘 주를 알게 하심은 우리의 지혜로 얻은 게 아니다. 우리의 판단과 기준으로도 아니다. 그러므로 오늘을 살면서 우리의 그 어떤 수고와 인내와 삶의 여러 방식도 모두 하늘에 쌓아두는 게 지혜이다.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마 6:20).”

 

주전 586년에 예루살렘이 함락되었다. 그해 어느 달 초하루에 주어진 계시로 페니키아의 두 자매 도시 국가 ‘두로와 시돈’에 대한 심판의 예언은 시돈을 향해서도 동일하다. 시돈에 대한 심판을 예언하시며 이스라엘 선민의 회복도 언급하고 있다(20-23). 지금까지 열방에 대한 심판의 예언을 그 이유와 함께 명시하였다. 시돈의 경우는 그 심판의 이유가 분명하게 명시되지 않았다. 시돈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원인을 짐작하면, “이스라엘 족속에게는 그 사방에서 그들을 멸시하는 자 중에 찌르는 가시와 아프게 하는 가시가 다시는 없으리니 내가 주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24).” 곧 저들도 ‘멸시하는 자’ 중에 하나였고, ‘찌르는 가시’와 ‘아프게 하는 가시’가 되었음을 알게 한다.

 

곧 우리가 주를 섬기는 데 있어서는 그 어떤 누구라도 하나님은 그 어떤 괴롭힘이나 방해를 용인하지 않으신다. 시돈이 이스라엘을 ‘찌르는 가시’가 되어 그들을 괴롭게 하였다는 것은 시돈이 이스라엘에게 ‘바알 숭배의 관습’을 전하였기 때문이다. 곧 믿는 자들로 곁길로 가게하고, 우상에 빠지게 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시돈은 바알 숭배의 본거지로 시돈의 공주 이세벨이 이스라엘의 왕 아합과 결혼하여 왕비가 되면서부터 이스라엘 내에 본격적으로 바알신상을 두어 우상숭배의 온상이 되게 하였다.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 행하는 것을 오히려 가볍게 여기며 시돈 사람의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을 아내로 삼고 가서 바알을 섬겨 예배하고 사마리아에 건축한 바알의 신전 안에 바알을 위하여 제단을 쌓으며 또 아세라 상을 만들었으니 그는 그 이전의 이스라엘의 모든 왕보다 심히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노하시게 하였더라(왕상 16:31-33).”

 

흔히 우리가 물든다는 말, 은연중에 허용하고 엮여 수용함으로 어느새 믿음을 잃거나 우상을 섬기는 일에 익숙해진다. 가령 누구는 그 부모의 사역에서 어그러지더니 결국은 안 믿는 자와 결혼을 하였다. 시댁이 부유하다보니 친정 부모의 사역에도, 교회에도 적잖이 물질적 도움을 주기는 했는데, 저들은 무신론자들이라… 결혼 전에는 교회를 나오고 신앙생활을 하는 데 있어 자유를 보장하는 듯하였으나, 엮기면 그렇듯 주말마다 어디로 여행을 가거나 온갖 대소사에 집안이 같이 가야 할 일이 생겼다. 그러다보니 은연중에 교회를 소홀히 하게 되고 예배는 편리한 쪽으로 따르게 되었다. 이런저런 물질적 도움도 받았지, 아이는 시집 가 그 집 사람이 되어 같이 어울리기 좋아하지… 그러니 친정부모의 애간장이 탄다.

 

본래 죄와 성령은 하나 될 수 없다. 강단 있게 선포하여 자신의 신앙을 지키지 않는 한 끌려가다 어느 지점에서 돌이켜 후회와 낙심만 가중할 것을. “이스라엘 족속에게는 그 사방에서 그들을 멸시하는 자 중에 찌르는 가시와 아프게 하는 가시가 다시는 없으리니 내가 주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겔 28:24).” 그런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회복을 알게 하신다.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가 여러 민족 가운데에 흩어져 있는 이스라엘 족속을 모으고 그들로 말미암아 여러 나라의 눈 앞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낼 때에 그들이 고국 땅 곧 내 종 야곱에게 준 땅에 거주할지라 그들이 그 가운데에 평안히 살면서 집을 건축하며 포도원을 만들고 그들의 사방에서 멸시하던 모든 자를 내가 심판할 때에 그들이 평안히 살며 내가 그 하나님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25-26).” 갑자기 선민의 회복에 대한 예언은 “이스라엘 족속에게는 그 사방에서 그들을 멸시하는 자 중에 찌르는 가시와 아프게 하는 가시가 다시는 없으리니 내가 주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24).”에 대한 약속이다.

 

오늘도 시편으로 호흡하듯,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여호와의 속량을 받은 자들은 이같이 말할지어다

여호와께서 대적의 손에서 그들을 속량하사

동서 남북 각 지방에서부터 모으셨도다

(시 107:1-3).

 

이와 같은 성경의 세계를 살면서,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8-9).

 

하신 약속으로,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 백성의 모임에서 그를 높이며

장로들의 자리에서 그를 찬송할지로다

(31-32).

 

이것으로 우리의 사명을 삼아서,

 

지혜 있는 자들은 이러한 일들을 지켜 보고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깨달으리로다

(4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