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네 무리가 용사 곧 모든 나라의 무서운 자들의 칼에 엎드러지게 할 것임이여 그들이 애굽의 교만을 폐하며 그 모든 무리를 멸하리로다
겔 32:12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이라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다 훌륭한 지각을 가진 자이니 여호와를 찬양함이 영원히 계속되리로다
시 111:10
애굽에 대한 멸망의 예언이 이어진다. 때는 주전 585년 12월 1일이다. 예루살렘이 함락된 지 이제 1년 7개월 정도 지났다. 애굽은 그물에 걸린 나일 강의 큰 악어로 비유된다. 바로에 대한 심판이 에언되고 있다. 애굽 왕 바로가 나일 강의 큰 악어다. 나일 강은 애굽을 상징하며 거기서 살아가는 생물들을 지배하는 것이 큰 악어다. 애굽과 바로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무엇보다 바로의 포학함과 교만 때문이었다. 이스라엘의 출애굽 당시의 바로나 오늘의 바로나 다를 게 없다. 바로의 멸망은 열국의 왕들을 공포에 사로잡히게 할 것이다(1-10).
그렇듯 애굽 전역에 대한 심판이 예언되고 있다(11-15). 이는 바벨론에 의해 바로와 모든 백성들과 그 동맹국들이 멸망하고 그 땅들이 황폐하게 될 것이다. 이에 슬픈 노래를 지으라고 하신다. “이는 슬피 부를 노래이니 여러 나라 여자들이 이것을 슬피 부름이여 애굽과 그 모든 무리를 위하여 이것을 슬피 부르리로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16).”
세상에서 공중 권세를 잡은 사탄의 최후도 그러할 것을 암시한다. 애굽과 바로에 대한 심판은 장차 악한 세상과 사탄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할 것을 보여준다. 이 예언은 애굽에 대한 예언의 연속 가운데 맨 나중에 언급되고 있으나 애굽에 대한 맨 마지막 에언은 앞서 주어졌다(29:17-30:19). 이에 애굽과 함께 동맹국 군사들이 스올에 던져질 것을 예언하고 있다(18-21). 이는 앗수르를 비롯한 다섯 나라의 ‘할례 받지 못한 자들’이 이미 스올에 누웠음을 말하며 애굽 사람들도 이들과 같은 운명에 처하게 될 것임을 알린다(22-30). 그리하여 스올에 들어간 바로와 애굽 군대가 그곳에서 이미 다른 무리가 있음으로 인하여 위로를 받을 것이라고 역설적으로 예언한다(31-32).
구약의 관점은 죽은 자들이 모두 스올로 간다. 신약은 낙원과 음부로 나뉘어 낙원은 의로운 자들이 들어가고 음부는 악한 자들이 들어갈 것임을 밝힌다. 하여튼 애굽 군사들이 스올에 들어가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할 것임을 확증한다. 그곳에는 이미 앞서 들어간 다섯 나라의 군사들이 누워 있다고 소개한다. “거기에 죽임을 당한 자와 함께 내려간 북쪽 모든 방백과 모든 시돈 사람이 있음이여 그들이 본래는 강성하였으므로 두렵게 하였으나 이제는 부끄러움을 품고 할례를 받지 못하고 칼에 죽임을 당한 자와 함께 누웠고 구덩이에 내려가는 자와 함께 수치를 당하였도다(30).”
이에 15장부터 32장에 나타난 일곱 나라로만 국한되지 않을 것임을 보여준다. 25장에서 29장에 언급된 일곱 나라는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로 사용될 바벨론에 의해 멸망할 나라들을 대표한다. 본문은 언급하고 있는 나라들뿐 아니라 다른 수많은 나라들도 함께 심판을 받아 멸망할 것을 알게 한다. 저들을 통틀어 ‘할례 받지 못한 자들’로 표현한다. 할례 받지 못한 자란 이방인이라는 의미다. 하나님의 언약에서 제외된 자들이다. 곧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사람들이다. 할례는 하나님의 언약의 표징이다. 할례는 ‘마음의 가죽을 베는 것’이다. 곧 죄악 된 자아를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이는 일이다. 그러할 때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다. 나름들 하나님의 백성과 성도로 자처하며 종교적인 의식을 자행하기는 하나 ‘마음의 가죽을 베지 아니한 자’ 곧 ‘마음에 할례를 받지 못한 자’는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다. 사탄의 권세아래서 종노릇하는 세상에 속해 사는 사람들이다.
마음의 가죽을 벗긴다는 것은 우리의 근본적인 자아를 벗고 새 사람이 되는 것이다. 오늘도 세상 권세를 이용하여 우리로 불순종의 자리로 내모는 사탄의 권세를 말한다. 흔히 이를 영적 전쟁이라 선포한다. 순종하는 삶을 사는 일은 ‘의의 싸움을 싸우는 일’로 성도의 삶이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애굽의 바로를 위하여 애가를 부를 것을 명하신다. “인자야 너는 애굽의 바로 왕에 대하여 슬픈 노래를 불러 그에게 이르라 너를 여러 나라에서 사자로 생각하였더니 실상은 바다 가운데의 큰 악어라 강에서 튀어 일어나 발로 물을 휘저어 그 강을 더럽혔도다(2).” 우리가 세상의 권세를 두고 슬픈 노래를 부름은 장차 누릴 영광의 찬송과 대조된다.
이와 같은 명령은 주전 585년 12월 1일, 예루살렘이 함락된 지 1년 7개월 정도가 지난 때이다. 예루살렘은 멸망하였지만 예루살렘이 그 동안 믿고 의지한 애굽은 당시에도 건재하여 자신들의 멸망을 상상하지 못하였다. 그런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을 향해 이스라엘을 위한 애가가 아니라, 애굽 왕과 그 나라를 위한 애가를 부르게 하신다. 왜 하나님께서는 아직 멸망하지도 않은 애굽을 위해 애가를 부를 것을 명하신 것일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시간에 구애 받지 않으시고, 시공간을 초월하여 계신 분이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아직 건재한 애굽이 이미 멸망한 것이나 다를 게 없다. 실제 애굽은 주전 568년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18년 후에나 바벨론에 의해 멸망하였다.
이에 오늘의 애가는 저들의 멸망이 확실함을 굳힌다. 하나님께서는 이전에도 애굽이 심판을 받아 멸망할 것을 거듭 예언하셨다. 이제 애굽에 대한 애가를 계시로 애굽의 멸망은 반드시 성취될 일임을 강조하게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성취되고, 이를 인정하는 것으로 영광이 된다. 애굽에 대한 심판과 멸망에 대한 예언은 말씀의 진실성을 아는 백성들로 하여금 ‘말씀의 성취’를 보게 하실 목적이다. 오늘을 살면서 더러는 성경의 예언이 황당하고 막연하여 너무 멀게 느껴지거나 여전히 현실감을 얻지 못하는 주의 자녀들에게, 심판의 메시지가 이미 선포된 때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구약의 이 애가가 실은 오늘 우리를 위한 슬픈 노래인 것을 알게 한다. 예루살렘은 이미 멸망하였어도 애굽은 건재할 때에, 우리의 삶은 어려움에 봉착한 것 같은데 세상은 여전히 잘만 돌아가고 있는 것 같은 이때에, 우리는 슬픈 노래를 불러야 한다.
그리하여 나는 어려움에 처한 내 곁의 영혼들을 위로하며 기쁨의 소식을 알린다. 내가 겪는 어려움에 대해서도 앞선 애가로 듣는다. 날씨 탓이었겠거니, 이번 주만 두 번 진통제 주사를 맞으면서 보냈다. 이른 새벽에 묵상을 하며 고요하고 평안한 때에 멈칫, 신경안정제를 먹고 두근거리는 가슴을 달래야 할 때… 그야말로 그럴 이유가 없는데도 내 의지와 상관없는 몸의 일과 마음의 일에서 힘에 겨워, 기도할 뿐이다. 늘 나의 하루는 어디가 덜 아프고 오늘은 어떤 상태로 견딜 만하여 감사한다. 일어나 침대에 앉아 몸을 풀며 어디가 덜 아픈 것과 운전을 하고 오면서 무사하였던 순간으로 감사한다.
내 곁의 아픈 영혼을 두고 애가를 부른다. 부디 주어진 한 날의 수고로 족한 줄 알고 주 앞에 그 한 날을 살아내기를. 더러는 이유가 없다. 누구에게 뭐라 말하기도 어렵다. 아프고 힘든데 그게 어떻게 어째서 아프고 힘든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러면서 억지로라도 일으켜 새벽 세 시 교회로 온다. 새벽에는 몸이 삐거덕거린다. 냉장고에 무엇을 넣거나 꺼낼 때 끙, 하고 힘들다. 앉아서 말씀을 읽고 묵상글을 쓰면서 얼마 지나지 않아 불안이 또는 어떤 초조가 엄습한다. 이유가 없다. 의사는 유독 오전에 우리 인체의 급발진이 이루어져서 그렇다고 했다. 고혈압 약을 같이 먹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나는 약통을 들고 다니면서 언제든 먹을 수 있게 한다. 동선을 따라 산책을 하다, 누구를 만나거나 어떤 내용의 통화를 할 때 가슴에 돌덩이를 얹고 짓누른 듯 답답하게 통증이 온다. 심리적인 요인으로 그렇다는데 나는 그 이유를 알 길이 없다.
그럼에도 가보자, 하고 언제든 쓰러져 죽을 각오로 산다. 너무 비장하게 표현하는 것 같지만 나의 이 사소한 끙, 하고 산책을 하거나 헉, 하고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견뎌야 한다. 곧 딸애의 결혼을 앞두고도 불안이 먼저 엄습한다. 아직 두 달이나 남았는데 말이다. 나는 이와 같은 예기불안을 슬픈 노래 곧 애가로 듣는다. 중증 장애를 가지고 혼자 사는 누구의 어려움과 그 현실을 위로하면서도 그렇게 말했다. 우리의 어려움이 애가가 되어 들을 수 있는 영혼에게 들려져야 한다. 예루살렘은 앞서 멸망하였으나 그런 가운데서도 남은 자들, 숨겨 놓으신 자들에게 들려져야 한다. 세례요한이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로 전하여졌던 것처럼 애가는 단지 슬픔의 노래가 아니다. 우리 영혼에 소망의 메시지다.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진실성을 믿게 하기 위함이다. 심판의 목적은 멸망이 아니라 ‘할례 받지 못한 자들’이 아닌 ‘할례 받은 자들’을 위한 노래다. 멸망당할 자들을 위한 게 아니라, 멸망 중에도 주와 함께 살고자 하는 자들을 위한 것이다. 세상에 대한 심판의 예언은 세상을 위한 게 아니라, 그 세상에 속해 사는… 아직 돌이켜야 할 한 영혼을 위한 소식이며 노래이다. “어찌하면 내 머리는 물이 되고 내 눈은 눈물 근원이 될꼬 죽임을 당한 딸 내 백성을 위하여 주야로 울리로다(렘 9:1).” 곧 오늘 나의 고통을 나는 그리 받아내고 있다.
가령 딸애의 손을 잡고 신부입장을 할 때, 이를 두고 아내는 행여 내가 넘어지거나 심리적 불안으로 사람들 앞에 어떤 불상사가 일어날까 하여 노심초사다. 나도 내심 회피할 수 있으면 피하고 싶은 심정뿐이다. 그런데 지난 번 상견례 후 두 번째 식사자리에서 뜻하지 않게 사돈 될 이가 그 말을 먼저 꺼냈다. 며느리 될 우리 딸애에게 하는 소리였다. 서로가 그런 이야기 정도는 있었던 모양이다. 아무려면 그 모든 게 감동일 것이라는 저의 말에 다소 놀랐다. 아내가 우려를 표하자 그 또한 딸애를 더 빛나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이 될 것이란 취지로 말하였다. 당사자인 나로서는 듣기만 하였는데 저의 시각이 귀하다는 생각을 했다.
오늘을 살면서, 마치 유다까지 멸망하고도 18년 가까이 여전히 건재하였던 애굽에 대하여 멸망한 나라의 선지자로 애가를 부르라고 하심은 무슨 의도이겠나? 믿음으로 산다고 사는데 뜻하지 않는 질병과 우울증으로 마치 모든 삶이 중단된 것 같은 시절에, 우리의 이러한 슬픈 노래가 주의 영광이 될 것을… 주가 역사하심을 더욱 만방에 알리는 계기가 될 것을… 눈이 어두운 세상에서 예수께서 운다.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눅 19:41-42).”
오늘 이 애굽에 대한 애가는 애굽을 위한 슬픈 노래가 아니다. 이러한 명령이 처음 주어진 것은 주전 585년 1월 1일이다. 이때는 예루살렘이 멸망한 지 1년 7개월이 지난 때이다. 그런 가운데 유다에 남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일어난 사건은 의미가 있다. 주전 586년 4월 9일에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5월 7일에 왕궁과 성전을 불사른 바벨론 군대는 그다랴를 유다 총독으로 임명한 후 소수의 군대만 남겨둔 채 철군하였다. 유다는 그다랴의 통치를 받으며 바벨론의 속국으로 다시 재건할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러나 그다라는 총독에 임명된 지 겨우 두 달만에 유다 왕족 출신 이스마엘에 의해 암살되었다.
겨우 안정을 찾아가던 유다는 다시 급격하게 혼돈으로 빠져들었다. 그때 군대장관 요하난이 백성들을 부추겨 애굽으로의 이주를 결정하였다. 그러나 선지자 예레미야는 유다 백성들의 애굽 이주를 강력히 반대하였다. 이미 하나님의 멸망이 예고된 애굽을 의지하려 이주하는 것은 그야말로 파멸을 자처하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예레미야의 경고를 무시하고 애굽으로의 이주가 강행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애굽에 대한 애가를 지어 부르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애굽으로 이주하는 것을 막기 위한 애가라는 사실이다. 바벨론 포로 후 유다에 남은 자들에게 예레미야와 에스겔의 경고는 애가로 축약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굽을 의지하고자 애굽으로의 이주 행렬은 늘어갔다.
결국 애굽의 멸망을 앞당긴 셈이다 바벨론 군대는 애굽을 섬멸하였다. 유다의 남들 자들 가운데 상당수가 애굽으로 이주하여 끝내 멸망에 이르렀다. 곧 우리의 무지함과 어리석음으로는 한 치 앞도 분간하지 못한다. 이에 말씀을 전하고 애가를 불러 아무리 경고음을 크게 울려도 아랑곳하지 않는 게 불순종의 현실이다. 오늘 우리의 애가는 우리로 마땅히 가야할 길을 가게 한다. 아직도 남은 길에서 우리는 선지자의 슬픈 노래로 새 힘을 얻고 돌이켜 자신을 바로 해야 한다. 이 슬픈 노래는 ‘할례 받지 못한 자들’을 위한 애가가 아니다. 마땅한 삶의 길을 저버리고 ‘애굽으로 이주하는 유다의 남은 자들’을 위한 노래다. 곧 우리 자신을 위한 애가다. 오늘도 이 한 날의 수고로 족한 줄 알게 하려 하심이다.
하여 오늘 우리의 어려움은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약 4:4).” 하고 우리가 부르는 애가다. 나의 어떤 어려움, 누구에게 말하기 어려운 어떤 심리적인, 또는 육체의 고통으로 나는 내 곁의 상한 영혼들이 보인다. 생각해보면 평생을 외면하고 살았던 저들을 한꺼번에 만나게 하시는 것 같다. 한참 글방 때 내 곁에 이상하다고 여겼던 아이들이나 그 부모들이 실상은 아픈 영혼들이었다. 나는 그때 이를 외면했다. 더러는 엄격하게 ‘그런 아이’는 돌려보냈고, 남에게 말하기 어려운 사연을 어렵게 찾아와 상담하는 아이엄마들을 논리적으로 판단하곤 하였다. 그러자 하나님은 나로 하여금 ‘애가’가 되게 하셨다. 공황이니, 우울이니, 불안이니 하는 게 그저 마음 단단히 먹으면 될 일이라고 치부하고 살았었다.
이제 나로 그 자리에 두어, 나로 하여금 나의 모든 사소함으로 신음하게 하셨다. 지난 주말에 송도 신도시 아이 결혼식장에서 우선하여 마련된 자리에 갔을 때, 와글거리며 가득 찬 사람들로 힘들었다. 식당에서 시식을 하는 거였는데, 사람들이 들어차면서 밖으로 나오자 무리지은 사람들의 왁자한 말소리에 예민해져 불안은 가중되었다. 그럼에도 아내가 한복을 입어보고 모든 일이 끝나기까지 나는 의연하게 고요하였다. 그때마다 속으로 기도한 것은 주가 함께 하심을 구하며 여기까지, 여기까지 하면서도 속절없었다. 그런데 그게 은혜였다. 그러는 동안 나는 간절하였고 나의 간절함으로 우리의 사소함은 나의 애가가 되어주었다.
가장 예민하고 약한 신체가 몸의 실체를 알린다. 우리의 말할 수 없는 고통이 우리 영혼의 상태를 알린다. 이와 같은 예민함으로 주가 하시는 일을 곁에서 본다. “여호와의 손이 이 산에 나타나시리니 모압이 거름물 속에서 초개가 밟힘 같이 자기 처소에서 밟힐 것인즉 그가 헤엄치는 자가 헤엄치려고 손을 폄 같이 그 속에서 그의 손을 펼 것이나 여호와께서 그의 교만으로 인하여 그 손이 능숙함에도 불구하고 그를 누르실 것이라(사 25:10-11).” 그리하여 “깨어서 그들을 뿌리 뽑으며 무너뜨리며 전복하며 멸망시키며 괴롭게 하던 것과 같이 내가 깨어서 그들을 세우며 심으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31:28).”
오늘도 주가 이루어 가시는 나라에서 우리는 애가를 부르며 앞서 산다. 슬픔과 어려움으로 신음하는 영혼에게, 우울증으로 시달리며 두려움으로 옥죄어 숨이 가쁜 영혼들에게, 우리의 그와 같은 신음소리와 애통함이 남은 자들의 애굽으로의 이탈을 조금이라도 저지할 수 있는 애가가 되어 불린다. 그러므로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고전 15:33-34).” 하여 오늘도 나의 상황 속에서,
할렐루야, 내가 정직한 자들의 모임과
회중 가운데에서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리로다
여호와께서 행하시는 일들이 크시오니
이를 즐거워하는 자들이 다 기리는도다
(시 111:1-2).
이는,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양식을 주시며 그의 언약을 영원히 기억하시리로다
…
그의 손이 하는 일은 진실과 정의이며
그의 법도는 다 확실하니 영원무궁토록 정하신 바요
진실과 정의로 행하신 바로다
(5, 7-8).
오늘도 나의 삶이 ‘슬픈 노래’가 되어, 역설적으로 기쁨의 복된 소식이 되기를 기도하며,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속량하시며
그의 언약을 영원히 세우셨으니
그의 이름이 거룩하고 지존하시도다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이라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다 훌륭한 지각을 가진 자이니
여호와를 찬양함이 영원히 계속되리로다
(9-1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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