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그의 마음을 굳게 정하였도다

하현. 2026. 2. 28. 04:45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삼음이 이와 같으니라 그런즉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에게 경고할지어다

겔 33:7

 

그는 흉한 소문을 두려워하지 아니함이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그의 마음을 굳게 정하였도다 그의 마음이 견고하여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이라 그의 대적들이 받는 보응을 마침내 보리로다

시 112:7-8

 

 

악인이라 할지라도 악인이 죽는 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으신다. 하물며 주의 자녀들에 대하여는 죽여서라도 살리시는 사랑이시다.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1:32).” 곧 오늘의 어떤 어려움, 그와 같은 고통으로 우리가 산다. 그때에 우리 곁에는 ‘흉한 소문’이 돈다. 이는 우리들로 하여금 그 마음이 노엽게 한다. 자주 되새기지만 우리도 우리 자신에게 말씀을 선포하지 않으면 내 안에서부터 염려나 근심, 불평이나 원망이 흉한 소문 같이 요동친다. 그 마음은 노여워서 죽고 싶은 마음으로까지 치닫는다.

 

하나,

 

진실로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시리이다

(시 76:10).

 

우리의 사명은 선포하는 것이다. 먼저는 자신에게와 곁에 두신 한 영혼에게와 익명의 모든 이들에게 할 수만 있으면 외쳐 선포해야 한다. 오늘 말씀은 이를 강조한다. “너는 그들에게 말하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의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하셨다 하라(11).” 행여 우리가 외친 선포의 한 가닥 음성으로 한 영혼이라도 돌이켜 주를 영접한다면 이는 온 우주를 얻은 것보다 귀한 일이다.

 

설령 그들이 우리를 오해하거나 가벼이 여길 수 있다. 호기심으로라도 들어보자, 할 때 “인자야 네 민족이 담 곁에서와 집 문에서 너에 대하여 말하며 각각 그 형제와 더불어 말하여 이르기를 자, 가서 여호와께로부터 무슨 말씀이 나오는가 들어 보자 하고(30).” 듣기는 하나 행하지는 않을 때 “백성이 모이는 것 같이 네게 나아오며 내 백성처럼 네 앞에 앉아서 네 말을 들으나 그대로 행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 입으로는 사랑을 나타내어도 마음으로는 이익을 따름이라(31).” 그것은 저들이 자신의 이익을 따름이라 뭐라 할 수 없다. 오히려 “그들은 네가 고운 음성으로 사랑의 노래를 하며 음악을 잘하는 자 같이 여겼나니 네 말을 듣고도 행하지 아니하거니와 그 말이 응하리니 응할 때에는 그들이 한 선지자가 자기 가운데에 있었음을 알리라(32-33).” 그저 좋은 말로 하는 자 혹은 들어주는 자로 여긴다 해도 선포된 말씀이 응할 때에 알 것이다.

 

곧 오늘 본문은 선민의 타락에 대한 공의의 심판을 외친다. 유다의 멸망과 여호와의 명예와 무조건적인 은혜에 의한 선민의 회복을 전한다. 주전 586년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그에 따른 심판과 회복을 동시에 선포한다. 곧 우리 인생에서도 바닥을 칠 때 비로소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것과 같다. 오늘 본문부터 48장까지 이어서 선민의 회복을 전하고 있다. 결국 “네 말을 듣고도 행하지 아니하거니와 그 말이 응하리니 응할 때에는 그들이 한 선지자가 자기 가운데에 있었음을 알리라.” 그때는 몰랐고 이제는 알 게 된다. 적당하고 아직 여력이 될 때는 듣지 않는다. 사람의 생리가 그렇다.

 

누구에게 나는 일러 아직 자신의 판단과 의지로 스스로 삶을 주도할 것 같으나 때가 이르러 모든 게 거둬질 때를 대비해야 한다. 가령 평소에 말씀을 읽을 수 있는 눈이나 들을 수 있는 귀가 없으면 그때에는 옴짝달싹 못하고 우리 안에서 들끓고 요동치는 노여움으로 괴로울 것이다. 극단적인 생각도 서슴지 않게 될 것이다. 그리 말할 때는 그럴 리 없다고 했다. 스스로 더 열심히 살고 나름의 준비로 대비한다면 어떤 일이 와도 견주어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정작 뜻하지 않은 질병이 또는 실패가 찾아오고 더는 어쩔 수 없는 비참한 상황에 처했을 때 생각이 났다. 누구와의 통화에서 저의 고백이었다.

 

자기연민이나 남의 동정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다. 스스로 그 주어진 상황에서 주를 바라며 주께 의뢰할 수 있는 능력이 없으면 난감하다. 욥은 이를 극한의 고통으로 깨달았다. 하여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욥 13:15).” 그저 쉬운 말 같지만 아무도 할 수 없는 고백이다. 지금 처한 상황에서 그럼에도 주를 의지함으로 아뢰겠다는 신앙이 저절로 생겨난 게 아니다. 어려운 수술 후에 1년 이상 거동도 어렵고 원초적인 생리활동도 마비되어 기저귀를 차고 생활해야 할 때의 수치심과 자괴감은 죽고 싶은 심정뿐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주를 인정하고 의뢰하며 주께 아뢰겠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이에 오늘 본문에서 이르시는 바, 선민의 회복은 새 성전과 새 제사와 새 땅에 대한 환상이 주어진다(33-39장). 일련의 종말론적인 환상을 보여주며 ‘민족의 파수꾼으로’ 그 책임을 강조하고 회개를 촉구하며 경고한다(40-48장). 이를 전달할 명령을 우리는 받았다. 지금 처지나 내 코도 풀지 못하는 ‘내 코가 석 자’라는 상태에서도 이와 같은 명령을 준행해야 한다. 먼저는 자신에게다. 스스로 자기 자신을 한 영혼으로 두고 말씀을 선포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나는 말씀 묵상을 강조한다. 어느 유명한 목사나 누구의 절절한 간증을 듣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가 눈으로 읽고 귀로 들으며 나의 외침이 이루어져야 한다.

 

묵상은 더하여 주시는 것으로 아브라함, 다윗, 바울의 이야기가 동시에 오늘 나의 이야기와 더해져서 생생하게 나의 삶이 되게 한다. 본문의 유다 주변국들의 최후와 그 멸망과 그에 따른 원인과 결과 또한 내 삶의 흔적으로 읽히고 나를 채찍 해야 한다. 읽으면서 내가 찔리고 부끄러워야 한다. 송구하여 입을 열 수 없어야 한다. 주께 회개하며 돌이켜야 한다. 다른 누가 아니라 오늘의 나 자신이 말이다. 그래서 바울은 ‘날마다 자신을 쳐 복종시켰다.’ 자신은 ‘날마다 죽노라.’ 하고 고백하였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그리하여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15:31).”

 

이처럼 묵상은 나로 말씀에 세운다. 말씀을 살게 한다. 종종 나는 ‘시편을 산다’고 표현하는데 누구의 어떤 의도로 쓰인 시편이 아니라 오늘의 나의 노래이고 고백이고 기도이다. 이에 오늘 본문은 우리로 ‘파수꾼’이라 한다. “인자야 너는 네 민족에게 말하여 이르라 가령 내가 칼을 한 땅에 임하게 한다 하자 그 땅 백성이 자기들 가운데의 하나를 택하여 파수꾼을 삼은 그 사람이 그 땅에 칼이 임함을 보고 나팔을 불어 백성에게 경고하되 그들이 나팔 소리를 듣고도 정신차리지 아니하므로 그 임하는 칼에 제거함을 당하면 그 피가 자기의 머리로 돌아갈 것이라(2-4).” 이를 풀어보면 우선 나 자신으로 국한지어 내가 내게 선포하여 경고하여야 한다. 더하여 내 곁에 두시는 한 영혼에게도 전하여야 한다.

 

살면서 살아서 사는 동안에 할 수 있는 최선은, “예루살렘이여 내가 너의 성벽 위에 파수꾼을 세우고 그들로 하여금 주야로 계속 잠잠하지 않게 하였느니라 너희 여호와로 기억하시게 하는 자들아 너희는 쉬지 말며 또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세워 세상에서 찬송을 받게 하시기까지 그로 쉬지 못하시게 하라(사 62:6-7).” 나로 인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쉬지 못하시게 한다?! 가령 나의 기도는 운전을 하면서, 길을 걸으며, 누구와 앉아 대화하다, 어떤 이의 통화를 들으면서도 주께 기도한다. 저가 어떤 어려움을 토로한다. 그 일로 나는 속상하고 속이 볶여 주님, 하고 부르다 눈물을 글썽인다. 당장 다음 주부터 대학에서 강의를 해야 하는데 극심한 우울증으로 꼼짝을 할 수 없다. 머리로는 알지만 몸이나 마음으로는 감당이 안 된다. 약물로도 제어하기 어렵다.

 

어찌 내게 이런 일이… 하는 노여움이나 슬픔이 우리 영혼을 짓누르고 있다. 나는 공황과 우울, 불안과 망상을 얼추 경험하여 안다. 마치 땅이 꺼지는 듯 한없이 가라앉는 공포가 있다. 물에 잠겨 숨을 쉴 수 없는 극한의 질식현상도 느낀다. 단지 느낌이나 환상이 아니라 실제 몸의 반응으로 대응할 수 없다. 아이는 그렇게 충동적으로 소비욕구가 있어 명품을 구매한다. 누구는 도벽이 발동하여 도둑질을 한다. 또는 성적 충동으로 기괴한 상상에 시달린다. 이것들이 망상을 부추겨서 현실을 뒤집는다. 스스로 그리 생각하는 것이 저의 세상이다. 달리 모든 것을 용납할 수 없다. 머리로는 아닌 것을 안다.

 

가령 나의 발동은 순간 몸이 굳어지는 것 같다. 딸아이 결혼식장의 음식을 시식해야 하는 날, 양가 어른들이 모이는 자리라 내가 빠질 수 없었다. 순간 넓은 홀에 압도됐다. 헉, 하고 숨이 막힌다. 내색을 할 수는 없다. 음식을 먹으며 대화를 좀 하다 보니 실제 예식을 치르는 쪽의 손님들이 떼로 밀려들었다. 왁자하니 실내가 꽉 찼다. ‘어떤 불안’으로 나는 노랗게 질린다. 이런 설명은 백날 해봐야 소용없다. 겪지 못한 사람은 알 수 없다. 나도 머리로는 안다. 이럴 때 저렇게 하면 돼, 하는 따위의 판단을 못하는 게 아니다. 그것과 별도로 몸과 마음의 증상은 통제가 불가능하다. 때로는 그냥 쓰러져 누워 응급실로 실려가고 싶을 정도이다.

 

이것이 죄의 속성과 닮았다는 것을 인정한다. 양심에 찔리고 내 안의 어떤 적색신호가 경고음을 내는데도, 에브라임 곧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무시하고 우상을 숭배하였다. 이방 족속들에게 심판이 내려지고 하나님의 경고의 메시지를 선지자들이 그 시대마다 외치는데도 듣기 싫어하였다. 이에 성경은 명한다.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히 13:17).” 그러나 듣지 않는 것은 아직도 스스로 잘 할 수 있다고 여기는 까닭이다. 마치,

 

“에브라임은 나의 하나님과 함께 한 파수꾼이며 선지자는 모든 길에 친 새 잡는 자의 그물과 같고 그의 하나님의 전에는 원한이 있도다(호 9:8).”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영혼으로는 어쩔 수 없다. 속된 말로 갈 데까지 가야 한다. 별 수 없다. 그러므로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빌 2:15-16).” 우리의 자세가 어떠하면 좋을지, 우린 대체 누구인지,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나는 속상하고 답답하여 더 일찍 눈이 떠져 이른 새벽에 교회로 왔다.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이란 이처럼 서둘러 주의 성전으로 와서 말씀 앞에 앉는 일, 누굴 위해 기도하며 주의 이름을 부르고 또 부르는 것뿐이다. 내 곁의 고통당하는 이들 때문에 나 하나로도 죽을 맛인데, 뭘 어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런 그들에게 예배하자, 기도하자, 말씀 묵상하자 하며 권한다. 누구는 주일에 같이 줌으로나마 예배에 참여하기로 했다. 몇 년 전서부터 권하였던 일인데, 지금의 답답하고 안타까운 현실에서 그러겠다며 어제는 그리 대답하였다. 우리가 끝까지 내려놓지 못하는 것은 실상 자신의 의지다. 나의 판단과 내 생각으로 납득이 안 가는 하나님의 처사 때문에 화도 난다. 어떻게 나한테 이러실 수 있어? 하는 심정으로다. 그 심정이 어느 정도냐 하면,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하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하시니라(욘 4:3-4).”

 

어제도 누구 일로 대화하다 저는 자꾸 그렇듯 극단적인 생각이 든다면서 두렵다고 했다. 나는 일부러 성경의 몇몇 인물도 그러했음을 말해주었다. 더욱이 엘리야와 같이 위대한 선지자도 자신 외 전부였던 거짓 선지자들과 맞서 당당하였던 그가 왕비 이사벨이 죽이려 한다고 해서 광야로 도망쳐 로뎀나무 아래에서 죽으려 했다. 죽는 게 사는 것보다 나을 것 같은 지경에서, 요나의 성질은 고약하기까지 하다. 이때 하나님은 니느웨 성이 내려다보이는 자리에 ‘초막을 짓고, 그 성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하고 구경하려던 그에게 ‘박넝쿨을 예비하사 요나를 가리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하며 그의 괴로움을 면하게 하려 하심이었더라.’ 하여 ‘요나의 박넝쿨’은 순간 기쁨을 주었다.

 

그런데 곧 ‘하나님이 벌레를 예비하사 이튿날 새벽에 그 박넝쿨을 갉아먹게 하시매 시드니라’ 그러자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쪼이매 요나가 혼미하여졌다.’ 그러자 그 일로 성질이 나서 다시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이르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하니라.’ 이는 마치 오늘 우리의 얄팍한 신앙의 단면 같지 않은지? 나 역시 ‘들어갈 때 다르고 나올 때 다른 변덕스런 마음’으로 주를 믿는다고 하며 살고 있지는 않는지? 성경은 묻고 있다. “나는 내 마음에 이르기를 자, 내가 시험삼아 너를 즐겁게 하리니 너는 낙을 누리라 하였으나 보라 이것도 헛되도다 내가 웃음에 관하여 말하여 이르기를 그것은 미친 것이라 하였고 희락에 대하여 이르기를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하였노라(전 2:1-2).”

 

이 모든 걸 다 누리고 살아본들? 정작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의 영혼이다. 우리의 영혼이 잘 됨 같이…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 1:2).” 먼저는 영혼의 일이다. 이 땅에서 모든 게 형통하고 만사가 순조로워서 복에 복을 더한 듯 살았다고 한들? 그렇게 100년을 살면서 이름을 날리고 후대에 남을 인물이라 추앙받는다 한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3).” 우리 삶의 선행과 의로움이 제아무리 공덕을 많이 쌓는다 해도,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일하는 자가 그의 수고로 말미암아 무슨 이익이 있으랴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노고를 주사 애쓰게 하신 것을 내가 보았노라(전 3:1, 9-10).”

 

사는 게 지옥이라는 말, 그리하여 우리는 천국을 더욱 사모하여 우리 영혼의 잘 됨 같이 살아가는 것일 테니….

 

할렐루야,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 112:1).

 

다른 그 무엇보다 복된 것은,

 

그는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함이여

의인은 영원히 기억되리로다

(6).

 

하여 내 안의 소요나 주변일로 괴롭지 않을 것은,

 

그는 흉한 소문을 두려워하지 아니함이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그의 마음을 굳게 정하였도다

그의 마음이 견고하여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이라

그의 대적들이 받는 보응을 마침내 보리로다

(7-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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