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자야 너는 이스라엘 목자들에게 예언하라 그들 곧 목자들에게 예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자기만 먹는 이스라엘 목자들은 화 있을진저 목자들이 양 떼를 먹이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내 양 곧 내 초장의 양 너희는 사람이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겔 34:2, 31
할렐루야, 여호와의 종들아 찬양하라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라 이제부터 영원까지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할지로다
시 113:1-2
선민의 회복에 따른 예언이 이어지고 있다. 종말론적인 새 왕국의 이상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여호와의 심판으로 멸망했던 구약 선민들의 회복을 다룬다. 예루살렘 함락 소식에 이어 본토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와 주권적인 구원 행동에 대해 선포하고 있다. 이에 본문은 우선 이스라엘의 ‘악한 목자들’에 대한 책임을 추궁하고 파면을 선언한다. “인자야 너는 이스라엘 목자들에게 예언하라 그들 곧 목자들에게 예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자기만 먹는 이스라엘 목자들은 화 있을진저 목자들이 양 떼를 먹이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냐(2).” 여기서 양들은 주의 선민들이다.
“내 양 곧 내 초장의 양 너희는 사람이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31).” ‘이제부터 영원까지 여호와의 이름’으로 이스라엘의 양떼들에 대한 여호와의 직접적인 목양과 그에 따른 양들의 복락에 대한 예언을 선언하시는 것이다. 이에 이스라엘 목자들의 탐욕과 방임에 의한 양떼들이 흩어지고 수난을 당한 것을 지적한다(1-6). 목자들이 양떼를 먹이고 돌보는 게 마땅한데 오히려 살진 양을 잡아 오직 자기들만 먹고, 양떼들은 유리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양떼가 노략거리가 되고 들짐승의 밥이 된 것은 목자들이 그 사명을 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7-10). 이에 하나님께서 악한 목자들로 인해 흩어진 하나님의 양떼를 찾아 구원하실 것을 밝힌다(11-16).
이에 따른 경고는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마 18:6).” 이와 같이 강력한 경고의 말씀으로 주어졌다. 단 한 영혼이라도 참된 목자는 충성을 다해 돌보아야 한다. 이는 ‘지배’가 아니라 ‘돌봄’의 의미다. 일련의 이단이나 사이비종파의 내부를 보면 교주나 목회자가 추앙받으며 교인들을 휘하처럼 부리는 것을 볼 수 있다. 수행하고 떠받듦을 받는 것도 그렇고 그의 말 한 마디에 정치적인 진영이 갈리고 개인의 가정이나 생활이 붕괴되는 것을 본다. 어느 순간 섬김과 돌봄이 아니라 지배구조가 형성된 것이다.
이에 서두에서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불의함으로 맡겨진 양무리의 핍절함이 지적되고 있다(1-10). 곧 “너희가 그 연약한 자를 강하게 아니하며 병든 자를 고치지 아니하며 상한 자를 싸매 주지 아니하며 쫓기는 자를 돌아오게 하지 아니하며 잃어버린 자를 찾지 아니하고 다만 포악으로 그것들을 다스렸도다(4).” 그렇듯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요 10:1-12).”
이어서 이스라엘 양떼 중에 악한 무리를 향한 심판을 선언하고 있다(17-22). 저들은 하나님의 양떼를 착취하고 방임한 악한 목자들이다. 정치 권력자들로 자신들의 이익과 권력에 눈이 멀어 백성들을 착취하고 횡포를 감행하였다. 그러나 축복의 예언으로 이어지며 선한 목자 다윗으로 왕이 되게 하신 것과 같이(23-24) 더불어 종말론적인 화평의 언약을 체결하신다(25-31). 선민들 가운데 악한 자들에 대한 심판이 예언된다. 이어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다스리심을 받게 될 신약의 선민들 곧 교회에 대한 예언이 이어진다. 곧 우리가 교회에 속한 것으로 심판을 피할 수 있다.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나의 양 떼 너희여 내가 양과 양 사이와 숫양과 숫염소 사이에서 심판하노라(17).”
하나님께서는 양 무리를 강포로 다스리며 흩어지게 한 악한 목자들을 심판하실 것이다. 그러나 그 대상이 악한 목자들만이 아니라, 양무리 가운데서도 선악을 구별하여 심판하실 것이다(17-22). 곧 교회는 하나님의 선민 공동체로 오늘날 하나님의 선민이라 할 수 있는 교회 공동체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하여 주의 길을 예비하며 세례요한이 외치시되,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마 3:9-10).”
이는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 4:16-17).” 그러므로 오늘 본문도 이를 강조하고 있다. “너희가 좋은 꼴을 먹는 것을 작은 일로 여기느냐 어찌하여 남은 꼴을 발로 밟았느냐 너희가 맑은 물을 마시는 것을 작은 일로 여기느냐 어찌하여 남은 물을 발로 더럽혔느냐 나의 양은 너희 발로 밟은 것을 먹으며 너희 발로 더럽힌 것을 마시는도다 하셨느니라(겔 34:18-19).”
사실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 엊그제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어눌한 말투로 자신이 성매매업체에서 도망쳤고, 현재 임신 중이며, 그러한 이유로 도움을 받고자 하여 교회에 왔는데 문이 잠겼다며 전화가 온 것이다. 당시에는 내가 집에 있어 당장 달려갈 수도 없었지만 설령 그렇다 한들 내가 어떤 도움을 줄 수 있겠나? 또 한편으로는 왠지 어설픈 말투와 어떤 의도가 있는 듯하여 미심쩍기도 하였다. 어쨌든 나로서는 도움이 될 것 같지 않고, 하여 같은 층 맞은편에도 교회가 있고 위아래로 같은 건물에도 교회에 여럿 있으니 어찌 그곳으로 찾아보시라 하고 끊었다. 그래놓고는 내심 마음이 좋지 않은 것이다.
예전에 다녔던 교회의 일이다. 주일 날 목사님은 예배 전부터 어딘가 불안해보이고 눈물을 흘리며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예배가 시작되고 그러한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는데, 그 주간에 길 건너 오토바이센터를 운영하는 젊은 사장이 술에 취해서 교회로 온 적이 있다고 한다. 저는 횡설수설하며 이른 저녁인데도 만취해서 교회가 어쩌고 자신이 뭐 그리 죄가 큰지? 하는 말들로 술주정을 하듯 뒷자리에 널브러져 이 말 저 말을 했던 것이다. 그러자 목사님 입장에서는 대화가 어렵고 평소 오토바이센터를 운영하며 소음과 여러 소란으로 종종 주변 상인들과 마찰이 있던 터였다. 어쨌든 술 깨고 다음 날 얘기하자며 돌려보냈는데, 그날 저녁 그 젊은 사장이 자살을 한 것이다. 이를 두고 목사님으로서는 마음이 너무 어려웠다.
그렇듯이 이 모든 것을 가벼이 여길 수 없는 것이라, 나 역시도 그런 전화에 어찌해야 했을까? 하는 생각으로 내심 마음이 무겁고 어렵기도 하다. 오늘 본문 16절에 “그 잃어버린 자를 내가 찾으며 쫓기는 자를 내가 돌아오게 하며 상한 자를 내가 싸매 주며 병든 자를 내가 강하게 하려니와 살진 자와 강한 자는 내가 없애고 정의대로 그것들을 먹이리라.” 하심과 그리하여 “내가 한 목자를 그들 위에 세워 먹이게 하리니 그는 내 종 다윗이라 그가 그들을 먹이고 그들의 목자가 될지라 나 여호와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내 종 다윗은 그들 중에 왕이 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23-24).” 하심은 우리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함축한다.
하나님의 무조건적 은혜와 주권적인 구원 행동에 나는 종종 나의 역할과 사명을 두고 회의를 느낀다. 이번에 그런 일에서도 그렇고 엉거주춤하니 관계가 소원해지거나 서먹해졌을 때 그 책임이 다 나 때문인 것 같아서 말이다. 가령 자해를 하는 아이와 그 엄마를 대하는데 있어 언제까지 그저 글방 선생으로 저들을 위할 수는 없어서 같이 예배를 권하고 복음을 전하자 바로 관계를 끊었다. 또는 어느 미망인의 하염없는 넋두리와 푸념을 들어주다 두어 달쯤 됐을까? 예배로 인도하려니까 자신은 믿지 않는다며 그만두었다. 이렇듯 결말이 나면 나는 한동안 어리둥절하다. 그냥 묵묵히 더 참고 기다리며 저가 원하는 대로 했어야 하나? 싶은. 무엇보다 정중한 거절도 어렵고 권하여 말씀으로 이끄는 일은 더 어렵다.
늘 들어줘야 하고 그러려니 저의 편이 돼야 좋다고 하지, 조금 진지하게 또는 말씀으로 권하려 하면 열에 아홉은 그 관계가 깨지거나 어려워진다. 나는 그럴 때면 그 모든 게 내 책임인 것 같아서 한동안 마음이 쓰이고 어려워만 한다. 나는 늘 어줍은 목사로 빙충이 같다. 혼자 먼저 감정이입이 심하고 몰두하여 나만 힘들다. 다음에 그 내용을 어찌 어렵게 물으면 저는 언제 그런 말을 했던가? 하는 식으로 대수롭지 않다는 듯 넘긴다. 그럼 한 주간 동안 나 혼자 끌탕하던 마음이 억울할 때도 있다.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지 나는 늘 분간하기 어려워한다. 가끔씩 자신의 어려운 처지를 호소하며 댓글을 남겨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일 또한 어찌 감당해야 할지 모르겠다.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자기도 윤택하여지리라 곡식을 내놓지 아니하는 자는 백성에게 저주를 받을 것이나 파는 자는 그의 머리에 복이 임하리라(잠 11:25-26).”
나로서는 감당할 수 있는 만큼으로 한정한다고는 하나 때로는 내가 더 힘들어서 어찌 거절해야 할지, 난감하고 속상하여 혼자서 운다. “가옥에 가옥을 이으며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빈 틈이 없도록 하고 이 땅 가운데에서 홀로 거주하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만군의 여호와께서 내 귀에 말씀하시되 정녕히 허다한 가옥이 황폐하리니 크고 아름다울지라도 거주할 자가 없을 것이며 열흘 갈이 포도원에 겨우 포도주 한 바트가 나겠고 한 호멜의 종자를 뿌려도 간신히 한 에바가 나리라 하시도다(사 5:8-10).” 워낙에 거짓이 난무하기도 하지만 나야말로 어떤 도움을 주기가 어려운 처지라서 공연히 어렵고 미안하다.
이때에 교회를 중심으로 말씀을 가지고 대한다고 하지만 실질적인 도움이 안 되는 것 같아 미안하고 괴롭기도 하다. 분명 이때는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은 어떠하며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받으면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은 어디에 서리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에 그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할지어다(벧전 4:17-19).” 고로 더불어 사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와 상관없는 자를 우리가 분별하기란 어렵다. 더욱이 점점 사회 양극화는 물론 교회 양극화도 심화되어 삶은 윤택하다 한들 영혼은 피폐해져가는 세상에서,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공경하는 자니라(잠 14:31).”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으로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 3:17-18).” 이와 같은 말씀을 기준으로 삼아 주의 길로 나아간다. 이는 주께서 이루시는 것으로,
그는 궁핍한 자가 부르짖을 때에 건지며
도움이 없는 가난한 자도 건지며
그는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불쌍히 여기며
궁핍한 자의 생명을 구원하며
그들의 생명을 압박과 강포에서 구원하리니
그들의 피가 그의 눈 앞에서 존귀히 여김을 받으리로다
(시 72:12-14).
결국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통치가 필요하다. 나의 이러한 갈등이나 회의나 낙심하는 마음까지도 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더해져서, 오늘 본문의 “나 여호와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내 종 다윗은 그들 중에 왕이 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겔 34:24).” 하심을 이루신다. 곧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살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
(시 65:4).
할 때에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고후 3:5).” 그러므로 나는 오늘 주의 분별력을 구한다. 누가 와서 함께 같은 하나님을 믿고 어떤 어려움을 겪는지를 말하다는 듣다보니 이단이었고, 그러한 언질에 저는 나의 편협함을 지적하며 ‘같은 하나님’을 운운하는데 도무지 뭐라 한들 소용이 없었다. 조금은 편견이겠으나 지나치게 친절하다 싶으면 이단이거나 사이비종파이다. 저는 자신의 친절로 구원의 여부가 판결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아, 나는 이런 게 어렵다. 누가 나를 동정하며 동질감으로 다가올 때는 속수무책이다.
결국 오늘 말씀에서 나는 주가 나의 목자가 되시길. 나로 하여금 옳은 길을 가게 하시길. “그러므로 목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그러므로 너희 목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나 곧 내가 내 양을 찾고 찾되 목자가 양 가운데에 있는 날에 양이 흩어졌으면 그 떼를 찾는 것 같이 내가 내 양을 찾아서 흐리고 캄캄한 날에 그 흩어진 모든 곳에서 그것들을 건져낼지라(7, 9, 11-12).” 그리하여 “좋은 꼴을 먹이고 그 우리를 이스라엘 높은 산에 두리니 그것들이 그 곳에 있는 좋은 우리에 누워 있으며 이스라엘 산에서 살진 꼴을 먹으리라(14).” 이는 “내가 친히 내 양의 목자가 되어 그것들을 누워 있게 할지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15).”
오늘도 주가 우리의 목자 되심에 감사하며,
할렐루야, 여호와의 종들아 찬양하라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라 이제부터 영원까지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할지로다
(시 113:1-2).
오늘도,
스스로 낮추사 천지를 살피시고
가난한 자를 먼지 더미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자를 거름 더미에서 들어 세워
지도자들 곧 그의 백성의 지도자들과 함께 세우시며
또 임신하지 못하던 여자를 집에 살게 하사
자녀들을 즐겁게 하는 어머니가 되게 하시는도다
할렐루야
(6-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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