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하나님 앞에서 떨지어다

하현. 2026. 3. 2. 04:49

 

이스라엘 족속의 기업이 황폐하므로 네가 즐거워한 것 같이 내가 너를 황폐하게 하리라 세일 산아 너와 에돔 온 땅이 황폐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무리가 알리라 하셨다 하라

겔 35:15

 

땅이여 너는 주 앞 곧 야곱의 하나님 앞에서 떨지어다 그가 반석을 쳐서 못물이 되게 하시며 차돌로 샘물이 되게 하셨도다

시 114:7-8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과 은혜가 있어 우리는 산다. 우리의 허물과 죄로 더는 용서하심을 받지 못할 때도 하나님은 긍휼하심으로 기다리신다. 오늘 본문도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와 그의 주권적인 구원으로 선민의 회복을 예언하고 있다. 이스라엘을 양떼로 비유하여 악한 목자와 무리에 대한 심판을 예언하였다(34:17-31). 이어서 선민의 원수로 에돔을 향한 심판을 선언하고 계신다. “인자야 네 얼굴을 세일 산으로 향하고 그에게 예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세일 산아 내가 너를 대적하여 내 손을 네 위에 펴서 네가 황무지와 공포의 대상이 되게 할지라(35:2-3).”

 

‘세일 산으로 향하고 그에게 예언하여’ 하심으로 ‘세일 산’은 아라바 동쪽 사해 남동부로부터 남쪽으로 뻗은 산악 지대를 가리킨다. 여기는 에돔 족속의 거주지다. 성경은 종종 이를 에돔 족속으로 지칭하는 말로 사용하였다. 이곳을 주목하여 시선을 고정시켰다. 곧 확고한 목적 아래 극단의 적대적 감정을 주시한다는 의미로 읽힌다. 에돔의 멸망은 필연적이었다.

 

본문은 앞으로 36장에서 언급될 이스라엘의 회복을 극적으로 부각시키기 위한 의도이다. “인자야 너는 이스라엘 산들에게 예언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 산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36:1).” 하는 말씀과 “인자야 네 얼굴을 세일 산으로 향하고 그에게 예언하여(35:2).” 하는 말씀이 대조적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기술한다. ‘세일 산’은 이스라엘의 소멸을 위해 끊임없이 적대적이었고, 틈만 나면 괴롭혔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에돔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가 칼로 그의 형제를 쫓아가며 긍휼을 버리며 항상 맹렬히 화를 내며 분을 끝없이 품었음이라(암 1:11).” 그러다 이스라엘의 멸망을 조롱하고 즐거워했다.

 

여호와여 예루살렘이 멸망하던 날을 기억하시고

에돔 자손을 치소서 그들의 말이

헐어 버리라 헐어 버리라 그 기초까지

헐어 버리라 하였나이다

(시 137:7).

 

그렇듯 에돔 족속을 지칭하는 세일산으로 에돔에 대한 심판의 예언은 이미 25장에서 주어졌다.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에돔이 유다 족속을 쳐서 원수를 갚았고 원수를 갚음으로 심히 범죄하였도다(12).” 그렇게 하여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손으로 내 원수를 에돔에게 갚으리니 그들이 내 진노와 분노를 따라 에돔에 행한즉 내가 원수를 갚음인 줄을 에돔이 알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14).” 이에 오늘 본문은 에돔에 대한 심판이 보다 구체적으로 기술된다. 이웃한 에돔의 제거가 이스라엘의 회복에 있어 전제조건으로 필연적 선행임을 밝힌다. 한편 에돔의 심판이 단순하게 이스라엘에 대한 적대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잔악함과 우상 숭배에 기인한다는 점에서도 에돔은 근본적으로 구원의 반열에 동참할 수 없다.

 

타락한 모든 이방 세력을 대변하는 것이다. “에돔에서 오는 이 누구며 붉은 옷을 입고 보스라에서 오는 이 누구냐 그의 화려한 의복 큰 능력으로 걷는 이가 누구냐 그는 나이니 공의를 말하는 이요 구원하는 능력을 가진 이니라(사 63:1).” 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예표하는 이스라엘의 회복의 회복은(36장) 상극이 되는 이방국가들의 멸망을 우선하고 있다.

 

오늘 본문은 그렇게 에돔을 향한 심판을 선언하고 있다. 여기서 하나님이 왜 에돔을 심판하시는지 그 이유를 세 가지로 찾아보았다. 첫째는 옛날부터 선민에 대하여 원한을 품고 있다가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의해 함락될 때 선민을 살육하는 범죄를 저질렀다(3-9). 둘째는 하나님의 백성과 그 기업인 선민의 땅을 탐냈기 때문이다(10-11). 결국 에돔은 이 하나님의 심판의 예언대로 완전히 파멸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12-15). 이것으로 볼 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이 범죄 하면 징계하신다.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을 정계하신다고 해서 악한 자들이 이를 함부로 조롱하거나 유린하면 이를 간과하지 않으신다.

 

곧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정계가 그치면 반드시 저들을 정죄하신다는 것이다. “네가 말하기를 이 두 민족과 두 땅은 다 내 것이며 내 기업이 되리라 하였도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거기에 계셨느니라 그러므로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네가 그들을 미워하여 노하며 질투한 대로 내가 네게 행하여 너를 심판할 때에 그들이 나를 알게 하리라(10-11).” 이는 결국 하나님의 선민을 조롱한 것은 하나님을 조롱하고 업신여긴 것이다.

 

“네가 이스라엘 산들을 가리켜 말하기를 저 산들이 황폐하였으므로 우리에게 넘겨 주어서 삼키게 되었다 하여 욕하는 모든 말을 나 여호와가 들은 줄을 네가 알리로다(12).”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죄악으로 그 땅을 황폐케 하여 영원히 파멸에 이르게 하신다(13-15). 그렇게 하여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온 땅이 즐거워할 때에 내가 너를 황폐하게 하되 이스라엘 족속의 기업이 황폐하므로 네가 즐거워한 것 같이 내가 너를 황폐하게 하리라 세일 산아 너와 에돔 온 땅이 황폐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무리가 알리라 하셨다 하라(14-15).”

 

이로써 “내가 여호와인 줄을 무리가 알리라.” 하심으로 오늘 본문은 그 위엄을 나타낸다. 앞서 멸망에 대한 예언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25:12-14), 다시 또 에돔에 대해 심판의 말씀을 선포하는 오늘 본문은 단순한 반복이 아니다. 선민의 온전한 회복을 위해서는 선민의 대적들의 파멸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선민에 대한 회복을 대적하는 자들을 응징하는 것으로 시작하신다. 악한 사정과 형편이 우릴 괴롭게 하며 대적하는 일에 있어서 이를 해결하고 사하심으로 우리의 참 자유를 회복하시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어려움 속에서 낙심하지 말 것은 주가 나와 함께 하심이라.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시 23:4-5).

 

하는 시편을 산다. 곧 우리의 진정한 회개는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의 원수 되는 삶의 고통과 어려움을 물리치심에 있어 기틀이 된다. 그리하여 ‘그 원수들의 목전에서’ 우리에게 승리의 상을 차려주신다는 것이다. 곧 하나님께서는 구원을 베푸시되 완전한 구원을 우리에게 베푸신다. 이는 33장 이후에 드러나고 있는 선민에 대한 회복의 말씀이 갑자기 다시 에돔에 대한 심판을 예언하는 것으로 주어지고 있는 것도 그런 의미다.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에 의해 우리는 이 모든 역경과 환난과 괴로움에서 회복될 것이다. 단지 이 땅에서의 어려움으로만 국한 지을 게 아니라 궁극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하시는 데 있어서 오늘의 원수, 우리의 괴로운 현실이 그 길을 더욱 선명하게 한다. 곧 어둠이 짙을수록 작은 빛도 선명하게 보인다.

 

그러므로 왜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선민의 회복에 대한 예언들 사이에 그것도 이미 앞서 심판을 예언하신 에돔에 대한 심판을 다시금 예언하게 하시는지, 그 이유를 알겠다. 곧 에돔의 멸망이 선민의 회복을 위한 필수적인 요청이다. 사실 에돔은 바벨론이 유다를 침공하였을 당시 바벨론을 도우며 유다의 남방 지역 일대를 유린하고 약탈하였다. 뿐만 아니라 유다가 멸망한 후 유다의 일부를 차지하였다. 또한 이스라엘 전체를 자신들의 영토로 삼고자 하는 야욕을 가지고 있었다. “네가 말하기를 이 두 민족과 두 땅은 다 내 것이며 내 기업이 되리라 하였도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거기에 계셨느니라(겔 35:10).”

 

이렇듯 오늘 우리의 현실에서 겪는 어떤 어려움을 에돔으로 묵상한다. 누구에게는 느닷없이 찾아든 우울증으로 힘차게 달려가던 삶을 일순간에 정지시킨 일이다. 누구에겐 남들과 다른 역경과 환경에서도 그 삶을 스스로 일구어오며 성실히 살았는데도 극한 장애가 또는 외로움이 저의 삶과 그 영혼을 피폐하게 한 것이다. 저가 내게 죽고 싶다는 말을 할 때 나는 그 심정과 환경을 잘 알고 있어서 충분히 그럴 것 같은 마음이라 더욱 속상하고 어려웠다. 누구에게는 뒤늦게 본 아들이 지능이 떨어지고 어떤 정신과적인 치료를 받아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우린 이처럼 다방면으로 ‘에돔’에 둘러싸였다. 저것들은 호시탐탐 우리의 절망과 낙심을 노린다.

 

이에 하나님은 우리를 바로 세우시고 온전하게 주의 길을 가게 하시는 데 있어 이와 같은 ‘에돔’이 멸망해야 할 것을 먼저 하신다. 본문은 단순한 에돔의 멸망이 아닌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통한 선민으로의 우리의 영생을 바로 하는 데 주목하게 한다. 구약의 선민 이스라엘이 모든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예표하고,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그의 모든 백성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에돔은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는 모든 악한 원수들을 상징한다. 이를 두고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마 24:4-5).” 먼저는 저들의 미혹함을 경계하게 하셨다.

 

오늘 우리가 일상에서 여느 사람들의 문화나 시각으로 세상을 받아들이는 데 있어 먼저는 인격적인 관계가 붕괴되면서 비인격적인 관계로 나아가는 것을 본다. 가령 각 가정의 관계는 와해되어 각자의 삶을 구성하고 개인의 단독 생활이 일상적이다. 그러면서 노인들만 남은 가정이나 홀로 사는 개인주택에 반려동물들이 사람의 자리를 대신한다. 사랑의 교류가 사람에서 짐승으로 옮겨진지 오래다. 더 나아가 이제는 기계나 사물과의 교류로 확산된다. 내 곁에도 핸드폰과 말을 하고 저에게 묻고 하면서 오히려 그의 정보와 지능을 더욱 신뢰한다. 소위말해 AI 시대를 맞으며 인공지능의 기계들이 인격화된 듯 사람들과 교류하는 세상이다.

 

또한 예수님은 이어서 말씀하시길,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은 재난의 시작이니라(마 24:6-8).” 이는 오늘에도 펼쳐지는 전쟁의 위기로 세계가 촉각을 곤두세운다. 미국주의와 유대주의가 이란을 공격했다. 이란도 반격을 가하며 중동 전역이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난리다, 난리. 나라가 나라를 대적한다. 우리 작은 사회 속에서도 적개심으로 상대를 억압하고 무시하며 마치 나라의 운명을 저들이 좌지우지하는 것처럼 정파간의 싸움이 연일 계속된다.

 

그런 가운데 우리가 자칫 놓치고 있는 자연의 반격이 점점 더 위협적으로 다가온다.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제 더는 자연재해가 먼 이야기가 아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모든 것은 재난의 시작이니라.” 하심과 같이 이제 더욱 가열 차게 우릴 공격적으로 몰아갈 것이다. 그런 가운데 우리는 여전히 말씀을 뒤로 하고 사람들의 전망과 인공지능의 AI의 예측에 기대어 미래를 맡기려는 형국이다. 누가 혼자 성경공부를 하는데 여느 설교나 성경공부보다 AI의 설명이 더 정확하고 이해가 쉽다며 감탄하였다. 인공지능의 시대는 물질만능의 최고봉을 차지한다. 그런 가운데 우리는 어떨 것인지?

 

“거기에는 사자가 없고 사나운 짐승이 그리로 올라가지 아니하므로 그것을 만나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받은 자만 그리로 행할 것이며 여호와의 속량함을 받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들의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로다(사 35:9-10).”

 

하나님이 베푸시는 구원만이 온전한 구원이다. 그분이 이끄시는 천국만이 온전하고 영광된 나라이다. 우리가 인위적으로 이끌고 이루어가는 나라는 허상이다. 이처럼 악한 세상에서 저마다의 선을 추구하며 전쟁을 일으키고, 그 속내를 다 알 수 없지만 명분은 언제나 정의롭게 포장된다. 동물들을 위하고 보살피는 것은 좋지만 너무 과하다. 사람 하나 지키는 것 이상으로 돈이 들고 애정을 쏟아야 한다. 물론 그러다가도 사람보다는 쉽게 파양이 결정된다. 그러니 우리의 위선과 거짓을 우리는 미리 알 수가 없다. 모 연예인이 방송에서는 그렇듯 잘 베풀고 남을 위하며 사는 줄 알았는데 실상은 거짓이었다. 뭔가 정의롭고 의로운 역할과 그런 이미지로 대중의 사랑을 받던 이가 실은 매우 악랄하고 자기 이익에 목숨 걸고 살았다. 이런 사실이 이젠 이상하지 않다.

 

이처럼 온전한 구원과 영광스러운 구원을 받아 누릴 자로 우리는 누구라도 그 자격을 운운하여 하나님 앞에 당당히 설 수 있을까? 오늘 에돔의 멸망에 대한 예언은 물론 선민의 회복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전적은 사랑과 불가항력적인 은혜가 아니면 무엇으로 내가 이 앞에 설 수 있을까? 누구를 탓하고 경계하나 실상은 나 역시 다를 게 없지 않던가? 에돔이 아무리 원수였다 하나 선민으로의 유다는 주 앞에 온전하였던가? 다만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사 11:9).”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룸 9:8).” 고로 오늘 우리가 육신으로 살면서 그 영혼의 온전하심으로 사는 것이니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엡 2:12-13).” 하여서,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며 불평하지 말라

오히려 악을 만들 뿐이라

진실로 악을 행하는 자들은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소망하는 자들은 땅을 차지하리로다

(시 37:8-9).

 

그러므로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행 4:32).”

 

우리가 어떻게 이 땅을 살아야 하는가를,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오며 야곱의 집안이

언어가 다른 민족에게서 나올 때에

유다는 여호와의 성소가 되고

이스라엘은 그의 영토가 되었도다

(시 114:1-2).

 

이는 우리가 주의 부르심에 합한 삶을 살면서 성도의 귀한 사명으로 사는 일인데,

 

땅이여 너는 주 앞 곧

야곱의 하나님 앞에서 떨지어다

그가 반석을 쳐서 못물이 되게 하시며

차돌로 샘물이 되게 하셨도다

(7-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