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넣으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또 내가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리라 하셨다 하라
겔 37:5-6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그를 사랑하는도다 그의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
시 116:1-2
며칠째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에 대해 묵상한다. 이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구원의 행하심이다. 선민을 회복시키시고 불가항력적인 역사로 이 모든 예언을 성취하신다. 앞서 먼저 ‘마른 뼈들의 소생’을 환상으로 보이시며 선민의 회복을 확증하셨다(36:16-38). 이어 오늘 에스겔은 ‘마른 뼈들’에게 대언한다.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넣으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또 내가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리라 하셨다 하라(37:4-6).”
이어서 ‘두 막대기가 하나 됨’을 전개함으로 유다와 에브라임의 하나 됨을 알린다. “인자야 너는 막대기 하나를 가져다가 그 위에 유다와 그 짝 이스라엘 자손이라 쓰고 또 다른 막대기 하나를 가지고 그 위에 에브라임의 막대기 곧 요셉과 그 짝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쓰고 그 막대기들을 서로 합하여 하나가 되게 하라 네 손에서 둘이 하나가 되리라(16-17).” 하나님은 환상 중에 당신의 영으로 에스겔을 뼈가 가득한 골짜기로 이끌어가셨다. 그리고 마른 뼈들을 향해 소생을 선포하게 하셨다. 에스겔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자 마른 뼈들이 서로 연결되고 그 위에 힘줄과 살이 붙어 사람의 모습을 갖추고 생기가 돌아, 마침내 소생하여 큰 군대를 형성한다. “이에 내가 그 명령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나서 일어나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10).”
마른 뼈는 곧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선민들이다. 그들은 당시 절망에 빠져 무덤과 같은 이방 땅 바벨론에서 마른 뼈와 같이 지냈다. 이에 에스겔을 통하여 곧 본토로 귀환하는 것과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으로 생명력이 넘치는 삶을 살게 될 것을 선포하는 것이다. 마른 뼈와 같이 무덤 속 같은 바벨론의 포로 생활을 끝내고 다시 저 소망의 나라로 귀환할 것을 알린다. “그러므로 너는 대언하여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에서 나오게 하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게 하리라(12).”
여기서 붙들게 되는 것은 현재 우리의 삶이 허망함과 절망스러운 지경에 빠져서,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은 무덤 속 같을 수 있다. 저마다 이런저런 일상의 단조로움과 혹은 극한 어려움의 현실에서 마른 뼈들 같이 생명력을 잃었다. 누구는 허리 수술 후유증으로 대소변의 신경을 건드려 거동도 어려운 상황에 수치심과 부끄러움으로 몸부림친다. 병원에서는 1년 이상 회복이 필요하고, 재활을 해야 하는데 좀 더 지켜보자는 것 외에 다른 말을 못한다. 저는 장애로 인한 기형적인 몸으로 50년을 살아오는 동안 나름은 수고하고 애쓰며 열심히 산다고 살았다. 그런데 이 지경이라 그 두려움은 좌절로 저를 이끌어 가두었다.
누구는 저의 학문과 지식으로 현재 자신의 상태를 머리로는 다 이해하는데 몸과 마음이 따르지 않는 우울증을 앓고 있다. 약물을 복용하고 그 약효가 어떤지 저는 누구보다 더 잘 안다. 그러면서도 일상을 유지하기 어려운 처지라, 이러다 모든 것을 다 잃을 것 같은 두려움이 엄습한다. 남다른 노력으로 학위를 두루 섭렵하고, 해외봉사도 자원하여 다녀오고, 믿음으로 가정을 잘 이뤄오며 살았는데 현재 처한 상황은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된다. 어떤 죄, 무슨 잘못 때문일까? 하고 이런저런 것들을 회개하며 주 앞에 열심을 다해 기도하지만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야말로 무덤에 던져진 마른 뼈들 같다. 우린 저마다 이런저런 일로 갇힌 자처럼, 마른 뼈 같은 심령으로 살아간다.
이때 오늘 말씀은 ‘하나님은 생명의 주이시다.’ 하는 메시지다. 나이 60을 넘기면서 회사에서는 그만 퇴사하기를 바라는 눈치가 보이는데도 나오면 더는 할 게 없는지라, 돈도 돈이지만 남은 날이 막연하여 또 하루를 연명하듯 눈치껏 출근을 한다. 나는 저에게 ‘다른 일’ 곧 지금의 현실적인 문제에서 좀 더 나아가 주께서 쓰시기에 합당한 ‘어떤 일’을 제시하고자 하는데 말이 궁하여서 막힌다. 저는 스스로도 이과적인 사고와 이성적인 판단으로 그런 무책임한 선택을 할 수 없다고 무시한다. 실재하지 않을 것 같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주께 맡긴다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다. 믿음도 자기 능력 안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곧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면서 믿음도 믿음이고 신앙도 신앙인 것이지… 하는 심사로 저는 안간힘을 다해 스스로의 삶을 살려한다. 이를 무엇으로 반박할 수 있겠나? 문제는 그러느라 여전히 시간이 없다!
이렇듯 나를 비롯하여 내 주변의 많은 이들이 주께 맡긴다는 것에 불안을 느낀다.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 초조함과 긴장으로 염려는 가중된다. 누구는 돈 때문에, 누구는 건강으로, 누구는 자신의 이상과 남은 생의 희망에 대해 억울할 뿐이다. 어제도 누구와의 통화에서 저의 현재 사정으로 한참을 듣다 나는 내가 얻는 은혜의 말씀으로 함축하여 말을 이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하여 나는 오늘에도 자유하다고 했다. 목회자로도 이룬 게 없고, 교회는 늘 답보상태처럼 새로운 게 없고, 곁에 있는 이들에게는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하는 것 같으며, 부모로서도 딸애 결혼에 단돈 얼마라도 도움을 주기는커녕 날짜가 다가올수록 그 큰 행사를 치러야 하는 부담으로 벌써부터 나의 마음은 안달할 뿐이다.
그럼에도 나의 하루는 자유하다 할 수 있는 것은 내가 내 것이 아니어서 말이다.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는 말씀과 ‘나의 나 된 것이 주의 은혜’라는 말씀으로,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그리하여 나는 나의 약한 것뿐이라, 더러는 송구하고 한심하여 무력할 따름일 때,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어쩌면 나는 무책임하고 게으르다. 약하고 비루하다. 주어진 현실에서 도피하는 자로 기회주의적이고 무감각한 회피주의자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지적하며 오늘의 나를 무색하게 하는 이들도 더러 있다. 가장 가까웠던 선생은 유독 내가 목사가 되고, 지금 이러고 있는 모습 때문에 크게 실망하였다. 어제 그 친구에게는 위로랍시고 나의 묵상과 말씀 준비가 나의 날들의 전부라고 하였더니 무슨 소린가, 하고 알아듣지 못했다. 저들은 어찌 들을지 모르겠으나 실제 내가 더는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데서 자유하다는 것이 어리석을 뿐이다. 곧 나의 무능력함으로 아내가 늘 돈 걱정을 하고 쪼들리는 생활로 어려움을 호소한다. 그럴 때면 나 역시 더더욱 할 말이 없어 숨고만 싶다. 나야말로 무덤 속에 던져져 생명력을 잃은 마른 뼈 같이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하고 슬퍼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래서도 주께 의뢰한다. 주를 의지하지 않으면 하루도 살 수 없다. 살 수 없는 하루가 나로 하여금 자유하게 한다. 주께 맡기지 않으면 한 순간도 내 힘으로 설 수 없는 날들이 오히려 말이다.
이렇듯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서 우리는 기도와 말씀으로 생명의 주를 생각한다. 하나님을 바라고 믿는 믿음으로 ‘죽음의 자리’에서 우리를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낀다. 저녁께 누구와의 절망적인 통화 때문이었을까? 죽고 싶다는 말, 그 속상하고 답답한 심정에게 뭘 어찌 해야 할지 몰라서 내가 숨이 막힐 때, 그래서 더 여느 때보다 일찍 눈을 떴다. 어린아이 같이 저는 종일 설교 영상을 듣는다. 처음으로 나의 묵상글을 끝까지 읽었다고도 했다. 느닷없이 묻기를, 드라마를 보곤 하는데 거기서 죄의식이 든다고도 했다. 나는 나의 자유하다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건넬 수는 없다. 모두가 믿음의 분량에 따른 것이라, 저의 마음씀이 오리려 순수하게 여겨졌다. 결국은 그 마음으로 주를 바라는 것일 테니, 실상 우리는 마른 뼈와 같은 자신의 실존을 자각하면서야 죽은 영혼으로가 아니라 산 자로 산다!
오늘 1-2절의 말씀도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재하시고 그의 영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가게 하시기로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곧 주의 임재가 우선이다. 영으로 우리를 이끄셔야 안다. 오늘 이 현실의 골짜기에 서야 한다. 저마다 생명력을 잃어가거나 이미 마른 뼈와 같이 별 감흥이 없다해도, 심판의 예언의 말씀이 별로 두려움으로 느껴지질 않는다 해도. 중동 전역으로 전쟁이 번지는데도 그저 다들 그러려니 하면서 오히려 그로 인해 주식이 떨어지고, 기름 값이 오르는 것에 정신이 팔린 현실에서, 심판의 날이 다가오는데도 ‘농담으로’나 듣는 우리의 마른 뼈 같은 영혼에, 오늘 이 ‘마른 뼈의 환상’은 우리의 비극적인 영혼의 상태를 돌아보게 한다(1-14).
이에 따른 회복은 두 개의 마른 막대기를 하나로 접목하여 새 생명으로 이어간다. “인자야 너는 막대기 하나를 가져다가 그 위에 유다와 그 짝 이스라엘 자손이라 쓰고 또 다른 막대기 하나를 가지고 그 위에 에브라임의 막대기 곧 요셉과 그 짝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쓰고 그 막대기들을 서로 합하여 하나가 되게 하라 네 손에서 둘이 하나가 되리라(16-17).” 그리하여 “내가 내 종 야곱에게 준 땅 곧 그의 조상들이 거주하던 땅에 그들이 거주하되 그들과 그들의 자자 손손이 영원히 거기에 거주할 것이요 내 종 다윗이 영원히 그들의 왕이 되리라(25).” 곧 이는 오늘 이 현실의 문제가 아니라 그 너머의 영생의 영원한 다윗, 곧 우리의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영원한 나라의 소망을 갖게 한다.
이번 주일부터 히브리서를 준비하는데 단도직입적으로 그 주제는 이 모든 성경의 예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는 것이다. 구약의 이 모든 환상과 사건과 상황과 그때마다의 선지자들의 예언과 선포가 가리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궁극적으로 오늘 이 말씀도 “내가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세워서 영원한 언약이 되게 하고 또 그들을 견고하고 번성하게 하며 내 성소를 그 가운데에 세워서 영원히 이르게 하리니 내 처소가 그들 가운데에 있을 것이며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26-27).” 그리하여 “내 성소가 영원토록 그들 가운데에 있으리니 내가 이스라엘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을 열국이 알리라 하셨다 하라(28).”
곧 우리가 어떤 어려움으로 기도하고 바라고 구하는 그 이상의 소망은 이 땅에서의 회복이나 성취가 아니다. 그게 전부가 아니다. 물론 오늘의 고통이 또는 침체된 영혼으로 구할 수 있는 범주가 이 한 날의 수고를 두고 하는 것이겠으나…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 하여 오늘의 어떤 상황이 우리로 회개하게 하고,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3-4).” 곧 우리로 이 소망을 이루시는 것은 분명한 목적이 있다.
곧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5-6).” 하여 저의 죽으심으로 그 영생의 생기가 오늘 우리 마른 뼈들 같은 영혼에 부어져서 ‘인자야 이 뼈들어 눙히 살 수 었겠느냐?’ 하고 물으시는 것이다.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 하시기로” 때 우리의 대답은 명확하여서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겔 37:3).” 곧 나의 오늘 이 나 됨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나의 인생이 비록 실패자요, 낙오자로 끝날 것이라 해도 ‘능히 살 수 있겠느냐?’ 하실 때, ‘주께서 아시나이다.’ 하는 믿음으로만이 산다.
당연히 나는 할 수 없으나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이와 같은 능력을 얻을 줄 알고,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12).” 곧 오늘도 우리의 배움은 주를 인정하는 것이다. 설령 나의 기도가 들어지지 않고, 주의 침묵은 나의 영혼을 더욱 옥죈다 해도 그로 인하여 ‘일체의 비밀’을 배우는 것인데… 모든 고난은 ‘주께서 아시나이다.’ 하는 답을 찾게 한다. 다시 말해 ‘주께서 하시나이다.’ 하는 믿음으로 나아가게 한다. 그렇게 우리 구원의 소망은 이율배반적이게도 더는 희망이 없는 데서 확인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고후 1:9-10).”
그렇게 욥은 고난으로 ‘귀로만 듣던 것을 이제 눈으로 본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 42:5).” 그래서 욥은 하나님이 오늘 나를 죽이신다 해도 주께 아뢰겠다고 하였다.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13:15).” 그리하여 시편의 세계는 열려서 자신의 생명보다 주의 인자하심을 구하였다.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시 63:3).
하여 시편으로 살기를 바라는 것은,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23:6).
하는 기도와 함께,
주의 인자하심이 내 목전에 있나이다
내가 주의 진리 중에 행하여
…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하심이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사람들이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피하나이다
(26:3, 36:7).
이를 우리는 증거 하는 삶으로 오늘도 고통 중에서도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으로, 나의 나 된 것이 주의 은혜인 것으로,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는 사실로….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의 성실하심이 대대에 이르리로다
(100:5).
하여서 오늘도 시편으로 마른 뼈 같은 우리 영혼에 생기를 불어넣고, 두 마른 막대기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심을 믿어 의심치 않으면서….
사망의 줄이 나를 두르고
스올의 고통이 내게 이르므로
내가 환난과 슬픔을 만났을 때에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기도하기를
여호와여 주께 구하오니
내 영혼을 건지소서 하였도다
(시 116:3-4).
기도할 때에,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의로우시며
우리 하나님은 긍휼이 많으시도다
…
내 영혼아 네 평안함으로 돌아갈지어다
여호와께서 너를 후대하심이로다
주께서 내 영혼을 사망에서,
내 눈을 눈물에서,
내 발을 넘어짐에서 건지셨나이다
(5, 7-8).
고로,
내가 생명이 있는 땅에서
여호와 앞에 행하리로다
(9).
그리하여,
내가 여호와께 서원한 것을
그의 모든 백성이 보는 앞에서
내가 지키리로다
예루살렘아, 네 한가운데에서 곧
여호와의 성전 뜰에서 지키리로다
할렐루야
(18-1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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