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데리시고 거기에 이르시니 모양이 놋 같이 빛난 사람 하나가 손에 삼줄과 측량하는 장대를 가지고 문에 서 있더니 그 사람이 내게 이르되 인자야 내가 네게 보이는 그것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며 네 마음으로 생각할지어다 내가 이것을 네게 보이려고 이리로 데리고 왔나니 너는 본 것을 다 이스라엘 족속에게 전할지어다 하더라
겔 40:3-4
나에게 주의 법도들의 길을 깨닫게 하여 주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기이한 일들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리이다 나의 영혼이 눌림으로 말미암아 녹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세우소서
시 119:27-28
선민을 향한 공의의 심판으로서 유다의 멸망과 여호와의 명예와 무조건적인 은혜로 회복과 종말론적 선민왕국에 대한 환상을 에스겔서는 기록하고 있다. 주전 586년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난 뒤 에스겔서는 에스겔이 선지자로 소명(1:1-3:15)을 받으면서, 심판에 대한 예언(3:16-32:32), 회복에 따른 예언(33-48)으로 성경이 이루어져 있다. 이 가운데서도 회복에 따른 예언으로 여호와의 심판으로 멸망하였던 선민의 회복을 다루는 부분(33-39)과 새 성전과 새로운 제사와 새 땅에 대한 일련의 종말론적 환상을 보여주는 후반부의 내용이 전개되고 있다(40-48).
오늘은 이 환상이 주어진 시점을 밝히면서 시작한다. 이때는 2차 바벨론 포로가 이루어지고 25년이 지났다. 예루살렘이 함락된 지도 14년이 지난 주전 573년 1월 10일이었다. “우리가 사로잡힌 지 스물다섯째 해, 성이 함락된 후 열넷째 해 첫째 달 열째 날에 곧 그 날에 여호와의 권능이 내게 임하여 나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시되(40:1).” 에스겔은 환상 중에 시온 산으로 이동하여 거기서 남쪽으로 향하여 ‘성읍 같은 것’을 목격하고 이 측량을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에 의해 성읍 같은 것이 있는 곳으로 이동한 에스겔이 삼줄과 측량하는 장대를 가지고 성읍 문에 서 있는 하나님의 천사로부터 자신이 보는 것을 기록하여 이스라엘 족속에게 전달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러한 단락은 오늘 40장부터 48장까지 이어지며 계시가 담겨진다.
먼저 에스겔은 ‘매우 높은 산 위에’ 내려졌다. “하나님의 이상 중에 나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에 이르러 나를 매우 높은 산 위에 내려놓으시는데 거기에서 남으로 향하여 성읍 형상 같은 것이 있더라(2).” ‘매우 높은 산’은 1장 이하에 언급된 에루살렘의 멸망과는 대조적으로 온전한 회복 속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여들 거룩한 산 ‘시온’을 지시한다.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백향목 꼭대기에서 높은 가지를 꺾어다가 심으리라 내가 그 높은 새 가지 끝에서 연한 가지를 꺾어 높고 우뚝 솟은 산에 심되 이스라엘 높은 산에 심으리니 그 가지가 무성하고 열매를 맺어서 아름다운 백향목이 될 것이요 각종 새가 그 아래에 깃들이며 그 가지 그늘에 살리라(17:22-23).”
이는 요엘 선지자도 언급한 내용이다.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욜 2:32).” 곧 시온산은 본래 기드론과 두로베온 골짜기 사이에 솟아있는 봉우리의 명칭이었으나, 후에 예루살렘 동남쪽에 위치한 ‘다윗 성’을 지칭한다. “이에 솔로몬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다윗 성 곧 시온에서 메어 올리고자 하여 이스라엘 장로와 모든 지파의 우두머리 곧 이스라엘 자손의 족장들을 예루살렘에 있는 자기에게로 소집하니(왕상 8:1).”
후대에는 예루살렘 전체를 가리키는 포괄적인 명칭으로 바뀌었다. “그러므로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시온에 거주하는 내 백성들아 앗수르가 애굽이 한 것처럼 막대기로 너를 때리며 몽둥이를 들어 너를 칠지라도 그를 두려워하지 말라(사 10:24).” 따라서 이 ‘시온 산’은 곧 ‘새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을 지칭하는 것’이기도 하다. 예루살렘을 이처럼 탁월하게 묘사한 것은 여기서의 새 성전이 궁극적으로 온전하게 회복될 하나님 나라를 가리킨다는 점이다. 그 나라의 영광스런 위상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성경의 뒷받침이 여럿 있다.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 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들 것이라(사 2:2).” 하고 이사야는 언급하였고, 미가 선지자도 “끝날에 이르러는 여호와의 전의 산이 산들의 꼭대기에 굳게 서며 작은 산들 위에 뛰어나고 민족들이 그리로 몰려갈 것이라(미 4:1).” 하였고, 사도요한의 계시록에서도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하나님의 영광이 있어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 같이 맑더라(계 21:10-11).” 하고 기록하였다. 이는 새 성전으로 합당하다.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과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과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뿌린 피니라(히 12:22-24).”
여기에 또 오늘의 환상은 에스겔을 데려간 천사, 곧 그 사람을 ‘놋 같이 빛난 사람’이라 묘사하고 있는 것을 본다. “나를 데리시고 거기에 이르시니 모양이 놋 같이 빛난 사람 하나가 손에 삼줄과 측량하는 장대를 가지고 문에 서 있더니(겔 40:3).” 이 표현은 “그들의 다리는 곧은 다리요 그들의 발바닥은 송아지 발바닥 같고 광낸 구리 같이 빛나며(1:7)”의 말씀을 염두에 둔 것으로 천사들 가운데 하나를 가리킨다. 이 사람이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 문은 닫고 다시 열지 못할지니 아무도 그리로 들어오지 못할 것은 이스라엘 하나님 나 여호와가 그리로 들어왔음이라 그러므로 닫아 둘지니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전심으로 주목하여 내가 네게 말하는 바 여호와의 성전의 모든 규례와 모든 율례를 귀로 듣고 또 성전의 입구와 성소의 출구를 전심으로 주목하고 너는 반역하는 자 곧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의 모든 가증한 일이 족하니라(44:2, 5-6).”에서 ‘여호와’로 지칭하기도 하지만 여호와의 천사를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
‘놋’은 성경에서 항상 ‘견고함, 확실함’을 뜻한다. “내가 너로 이 백성 앞에 견고한 놋 성벽이 되게 하리니 그들이 너를 칠지라도 이기지 못할 것은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하여 건짐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15:20).” 이는 하나님의 공의와 심판을 나타내는 것으로 오늘 본문에서는 천사의 초자연적 특성을 암시하고 있다. 또한 ‘삼줄과 척량하는 장대’에 대해서는, 이것들은 모두 건축에 필요한 도구들로 먼저 ‘삼줄’은 긴 공간을 재는 도구로서 주로 땅의 길이를 잴 때 사용되었으며, ‘척량하는 장대’는 비교적 짧은 공간 곧 성벽 등의 높이를 잴 때 사용된 도구였다. 따라서 이러한 도구가 언급된 것은 앞으로 기술될 성전의 구조가 극히 세밀하게 제시될 것임을 암시한다. 이와 같이 건축의 의미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충만하심을 언급한 바도 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3:17-19).” 이는 우리로 이와 같이 측량할 수 없는 것을 깨달아 알게 하심은 그만큼 우리의 죄가 크고 높다는 데 있다. 이는 다소 관념적이라 개개인이 다르겠으나 어떠하든지 이를 다 수용하고 포용할 수 있는 주의 사랑을 상대적으로 충만하게 설명하기 위함이다.
이에 비추어 우리가 들어갈 하나님의 나라 역시 그 계측이 매우 정확한 수치로 기록되고 있으나 이 또한 그만큼 정교하고 확실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한편 이들은 이스라엘의 심판 때 사용된 파괴적 기구들, “또 그가 큰 소리로 내 귀에 외쳐 이르시되 이 성읍을 관할하는 자들이 각기 죽이는 무기를 손에 들고 나아오게 하라 하시더라(9:1)”과 극명하게 대조를 이룬다. 이때 오늘 본문에서 밝히는 ‘문’은 에스겔이 남으로 성전을 바라보았다는 말씀에 따라 최초로 다다른 ‘북문’으로 여겨진다. 천사는 그곳에서 에스겔을 ‘동문’으로 안내해 간다. “그가 동쪽을 향한 문에 이르러 층계에 올라 그 문의 통로를 측량하니 길이가 한 장대요 그 문 안쪽 통로의 길이도 한 장대며했을 것이다(40:6).”
에스겔이 포로로 2차 때 잡혀온 지 25년, 곧 예루살렘이 함락된 지 14년째인 정월 십일이다. 여기서 에스겔이 환상을 본 날이 1월 10일이었다고 나오는데, 패망의 역사를 뒤로 한 채 이방 땅에서 포로 생활을 하는 비참한 신세에 처하여 장차 하나님을 섬길 성전을 환상으로 주신 것은 무엇인가? 생각하게 한다. 비록 현재의 상황에 맞지 않는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는 죄악으로 인하여 포로가 된 비참한 현실에서도 그들의 나라,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통해 세움을 입은 백성들이 들어갈 하나님의 나라를 다시금 인식시키기 위한 것이다.
이 날은 가나안을 들어오던 날부터 기어이 예루살렘마자 함락되어 파괴되고 난 후, 오늘, 에스겔에게 보이는 이 환상의 날은 출애굽의 날이었고 가난에 입성하던 날이었음을 상기시킨다. 그렇듯 새 성전과 새 제사와 새 땅에 대한 예언이 이루어질 것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포로 생활로 무미건조하게 죄악 중에 흘러가던 백성들을 정월 십일에 출애굽 시키신 바로 그날이면서, 광야 40년 길을 지나 기어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온 바로 그 날이기도 한, ‘오늘이라 일컫는’ 날에 에스겔에게 이와 같은 환상을 주셨다. 다시금 이 날이 무슨 날인지를 되새기게 한다. 우리들로서도 같은 맥락의 오늘이다.
멸망할 세상에 동화되어 살던 삶에서, 파멸의 급류에 휩쓸려 떠내려가던 죄악 된 나의 삶에서 돌이며 나로 주의 백성인 것을 다시금 확신시키시며 모든 것을 무너뜨리시며 동시에 새로 주어진 새 사람으로의 그날이다. 오늘 매일 이루어지는 날들로 우리들로 하여금 회심과 회복과 구원의 삶을 살게 하시는 것이다. 우리들로 하여금 성도로서 ‘자기 정체성을 잊지 않게 하기 위하여’ 오늘 우리의 현실에서 보이시는 하나님의 역사, 섭리, 그 환상의 순간들은 다양이다. 가령 어제 나는 심히 우울하고 침체되었다. 결국 진통제를 맞고 파스를 붙이고 이제 예순도 안 된 나이인데, 앞으로의 남은 날을 두고 심한 압박을 느끼기도 했다. 나의 오른쪽 팔은 내가 거동하고 사는 데 있어 어느 것보다 우선하여 움직이는 신체이다. 두 다리를 잃거나 심지어 눈을 잃는 것보다 더 두려운 것으로, 이 팔이 없으면 남은 팔로 할 수 있는 게 없다. 누웠다 앉는 일부터 밥 먹고 똥 싸고 문을 열고 닫고 하는 데도 혼자 하기 어렵다….
우울한 생각은 영혼을 무겁게 가라앉힌다. 그러면서도 아직 더 사용할 수 있을 때 설교원고를 작성하고, 이처럼 묵상글을 쓰고, 교회로 오가는 모든 일에 최선일 뿐이다. 주님, 하고 부르며 나는 주가 알아서 하실 것을 다시금 믿어 확신한다. 설령 더는 못 쓰게 하신다면 그때 또 다른 길을 열어주실 것을 알지만…. 앞서 가는 마음은 끝 간 데 없이 사람을 우울하게 한다. 안정제를 먹고 빈맥을 인위적으로 잡아 가슴이 눌리는 불안을 견디며 사는 일에서도, 그러므로 나는 누구를 생각하고 어떤 이의 극단적인 마음이 이해가 되고 안타까워서 울컥, 하기도 한다. 나는 무엇보다 육신의 고통이 두렵지만 그날이 길어질까 무섭고 그로 인해 가족들에게 짊어지게 할 시간들도 두렵다. 두려워서도 주의 나라를 항상 꿈꾼다. 불순한 마음이겠으나 나는 죽은 자들을 종종 부러워한다. 우리가 들어갈 안식의 나라, 주의 백성들을 위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더는 이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난 삶을 그리워한다.
우울증으로 힘들어하고 있을 이에게 전화라도, 문자라도 할까 하고 하루에도 몇 번씩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가 내려둔다. 뭐라 이르거나 저로 말하게 하는 것이 오히려 힘들게 할까 하여… 혼자 들어앉아 고통과 수치로 힘겨워할 이를 생각하게 하는 것도, 단순히 나의 고질적인 감정이입으로 그러는 게 아니다. 실제 나의 고통이 또는 우울감이 나로 하여금 저들을 위해 기도하게 한다. 어제는 아내가 같이 가서 감기 때문에도 주사를 맞고 왔다. 다리가 예전 같지 않고 힘이 덜하여 불안해하는 것을 보다, 아흔둘의 장모는 오죽하겠나? 하고 물었다. 아내는 괜히 심통이 나서, ‘엄마는 그 나이에 그 정도면 정정한 거지!’ 하고 팽한 소릴 했다. 스스로도 공감능력이 없다, 이기적이다, 하며 자신을 늘 우선에 두는 아내이다. ‘그럼 우리도 애들한테 이 나이에 이 정도는 다 아픈 거지!’ 하도 되받듯 혼잣말로 던지고는 그만두었다.
내가 새삼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매일, 오늘은 ‘그 날이고, 그 날이 이 날이다.’ 하여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히 3:13).” 우리에게 ‘다음에’는 없다. 또는 ‘예전에’도 없다. 전부 오늘뿐이다. 이 오늘, 에스겔이 보는 장차 있을 환상의 나라는 허구가 아니다. 포로로 잡혀 있는 그에게 ‘그 날’을 보이시는 것은 그 날이 곧 ‘오늘’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면서 세상에서 육신의 고통으로부터 정신적으로 겪으며 사는 모든 일체의 측량들 그 이상의 충만하심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확장되고 건축된다. 이를 위하여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신 7:6-7).” 오늘의 내가 아무리 적고, 부족하고, 보잘것없는 날의 ‘오늘’이라 하지만….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시 100:3).
이와 같은 확신과 소망으로 오늘도 육식의 질병에서 포로 된 몸으로, 우울을 호소하며 스스로도 어쩌지 못하는 심경으로, 수술후유증이겠으나 똥오줌이 아무 감각도 없이 차고 넘치는 하루를 보내며, 오늘 가운데서도 우리는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하는 시편으로 승복한다. 내가 늘 '시편을 산다'는 것은 돼도 안 돼도, 싫어도 좋아도 우린 늘 오늘에 수긍하며 그런 가운데서 자신을 척량해야 한다. 그 마음으로 주의 충만하신 사랑을 묵상해야 한다. 아흔을 훌쩍 넘겨 몸을 가누기 어려워서 거동이 괴롭고 각종 질병으로 인해 마약성진통제로 견디며 살아야 하지만 그래서도 주를 바라며 더듬더듬 성경을 소리 내어 읽는 장모의 모습은 경이롭다. 그러다 또 괜한 트집과 고집으로 끝도 없이 했던 말을 되풀이하는 아집이 있어 아내가 지칠 정도인데…. 그러한 ‘오늘’이 여전히 우리에게는 '출애굽의 날'인지, '가나안에 들어가는 날'인지, 장차 도래할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는 날'인지…. 어쩌면 이는 순응과 복종으로 주를 바라는 마음과비례한다.
이에,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
(시 119:103).
하기까지,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내게 소망을 가지게 하셨나이다
이 말씀은 나의 고난 중의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기 때문이니이다
(49-50).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무엇으로 살겠나? 하여,
여호와는 나의 분깃이시니
나는 주의 말씀을 지키리라 하였나이다
(57).
할 때에,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주는 선하사 선을 행하시오니
주의 율례들로 나를 가르치소서
…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주의 입의 법이 내게는 천천 금은보다 좋으니이다
(67-68, 71-72).
고로 오늘이 고난과 같으나 오늘 에스겔이 보는 환상의 나라, 하나님의 성읍에서 영원히 살 것을 묵상하게 하고 확신하게 한다….
주의 법도들을 지키므로
나의 명철함이 노인보다 나으니이다
…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
(100-103).
할 때에,
주의 말씀대로 나를 붙들어 살게 하시고
내 소망이 부끄럽지 않게 하소서
나를 붙드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구원을 얻고
주의 율례들에 항상 주의하리이다
(116-117).
고로,
주의 말씀이 심히 순수하므로
주의 종이 이를 사랑하나이다
…
주의 의는 영원한 의요
주의 율법은 진리로소이다
(140, 143).
하여,
내가 날이 밝기 전에 부르짖으며
주의 말씀을 바랐사오며
주의 말씀을 조용히 읊조리려고
내가 새벽녘에 눈을 떴나이다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내 소리를 들으소서
여호와여 주의 규례들을 따라 나를 살리소서
(147-14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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