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거짓된 입술과 속이는 혀에서 내 생명을 건져 주소서

하현. 2026. 3. 8. 04:50

 

곧 나무 제단의 높이는 세 척이요 길이는 두 척이며 그 모퉁이와 옆과 면을 다 나무로 만들었더라 그가 내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의 앞의 상이라 하더라

겔 41:22

 

내가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내게 응답하셨도다 여호와여 거짓된 입술과 속이는 혀에서 내 생명을 건져 주소서

시 120:1-2

 

 

회복된 이스라엘 가운데 세워질 새 성전과 새 제사 및 새 땅에 대한 환상을 연이어 다루고 있다(40-48장). 그중에 새 성전의 바깥뜰과 안뜰에 위치한 문들과 그 부속 건물들의 식양 및 기구들에 대해 기록하였고(40:5-47), 이어서 성전 본체와 관련 된 식양에 대해 서술한다(40:48-41:26). 이러한 새 성전의 본체 식양은 대체적으로 솔로몬 성전의 식양과 일치한다. 다만 솔로몬 성전에서 일반 규빗이 사용된 반면 새 성전에서는 일반 규빗에 비하여 약 7.6cm 정도가 긴 왕실 규빗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본문은 이런 성전 본체와 관련된 식양에 대하여 보도하고 있는 가운데 현관에서부터 지성소에 이르기까지의 성전 내부 식양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 그의 권능으로 유지하시고 지키시는 교회는 무궁하고 견고하다는 것을 생각한다. 이를 두고 바울은 우리 몸을 주의 성전이라 하였다. 이에 우리는 성령의 갑주를 입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엡 6:13).”

 

이는 단순히 외형적으로 더 크고 웅장하게 세워지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당시 다윗 왕조는 바벨론에 의해 이미 멸망한 상태였다. 심지어 성전 또한 허무하게 바벨론 군대에 의해 무너지고 말았다. 성전의 두 기둥은 저들이 전리품으로 바벨론에 옮겨 갔다. 이에 “그가 나를 데리고 성전 문 현관에 이르러 그 문의 좌우 벽을 측량하니 너비는 이쪽도 다섯 척이요 저쪽도 다섯 척이며 두께는 문 이쪽도 세 척이요 문 저쪽도 세 척이며 그 현관의 너비는 스무 척이요 길이는 열한 척이며 문간으로 올라가는 층계가 있고 문 벽 곁에는 기둥이 있는데 하나는 이쪽에 있고 다른 하나는 저쪽에 있더라(40:48-49).” 하시며 새로 세워지는 성전 문 현관에서 기둥을 이처럼 상세히 측량하는 데 의미가 있다. 기둥은 건물을 지탱하는 핵심이다.

 

솔로몬 성전을 지탱하던 두 기둥 ‘야긴과 보아스’도 이와 같다. “이 두 기둥을 성전의 주랑 앞에 세우되 오른쪽 기둥을 세우고 그 이름을 야긴이라 하고 왼쪽의 기둥을 세우고 그 이름을 보아스라 하였으며… 그 두 기둥을 성전 앞에 세웠으니 왼쪽에 하나요 오른쪽에 하나라 오른쪽 것은 야긴이라 부르고 왼쪽 것은 보아스라 불렀더라(왕상 7:21, 대하 3:17).” 에스겔은 솔로몬 성전의 두 기둥 야긴과 보아스를 떠올리게 한다. 야긴과 보아스는 각각 ‘그가 세우신다.’, ‘그에게 능력이 있다.’란 의미를 지녔다. 곧 다윗 왕조의 견고함과 안정성은 성전에 있었고 그 성전의 두 기둥은 전적으로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유지되는 거였다.

 

우리의 신앙도 교회도 삶의 형태도 모두 하나님을 인정하며,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할 것을 강조한다. 성전의 두 기둥과 같이 하나님께 대한 믿음은 굳건하여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이 다윗 왕조의 붕괴에도 불구하고, 포로로 끌려간 백성들을 바벨론 땅에서도 보전하셨다. 그리고 돌아오게 하실 것과 다시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게 하실 것으로 회복을 전하신다. 곧 오늘 우리는 하나님이 세우시는 나라, 하나님이 붙드시는 교회, 그리스도의 나라로 세상 권세를 굴복하지 말아야 한다.

 

다니엘은 포로로 잡혀가 있으면서도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의 권세는 소멸되지 아니하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니라(단 7:14).” 이와 같은 중심으로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심을 받았다. 예수님은 우리 위에 교회를 세우시며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8).” 하고 말씀하셨다. 이는 베드로만을 전제한 말씀이 아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16).” 하는 우리의 고백에 대하여,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17).” 하신 것이다.

 

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의 속죄로 하늘의 지성소까지 들어갈 수 있다. 오늘 본문에서 성전 본체 곧 성소와 지성소에 대하여 다루고 있는 것을 주목하게 된다. 성전을 측량하며 성소 내부를 측량하기 위하여 성소 안으로 들어갈 때 에스겔을 데리고 들어갔다. 그러나 지성소를 측량하기 위해 지성소로 들어갈 때는 에스겔을 데리고 들어가지 않았다. 에스겔은 지성소 밖 성소 안에 머물러 있었다. 에스겔은 성전을 측량하는 자가 지성소를 측량하고 그 결과를 알려주는 것으로 지성소의 식양을 본문에 기록하고 있다. 에스겔은 제사장 출신의 선지자이다. 그러므로 그는 성전의 외소인 성소에까지는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성전의 내소인 지성소에는 들어갈 수 없었다. 지성소는 제사장이라도 출입할 수 없었고, 오직 대제사장만이 일 년에 한 차례 대속죄일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므로 오늘을 사는 우리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귀한지 모르겠다. 이에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히 10:19-20).” 곧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성소의 휘장이 반으로 갈라졌다. 이에 “주께서 이르시되 그 날 후로는 그들과 맺을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그들의 마음에 두고 그들의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또 그들의 죄와 그들의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이것들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16-18).” 곧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단번에 소멸하신 까닭이다.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벧전 3:18).”

 

하는 베드로의 설교에서 이를 증거한다. 곧 오늘도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성령을 부으시고 거룩한 성소로 삼으셨다. 이에 우리는 언제든지 주 앞에 나아와 하나님 앞에 들어갈 수 있다. 지성소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광이 머물러 계시는 곳이다. 곧 우리가 그의 전이 되어, 당시 에스겔조차 들어가지 못한 지성소에 우리는 들어가 머물 수 있다. 하나님의 임재의 처소인 성전은 더 이상 건물이 아니라 우리들 자신이 된다. 사람이 손으로 지은 성전대신 하나님에 의해 지음 받은 우리의 몸에 임재하신다.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를 믿는 우리 성도들의 심령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 성도들의 심령에 거하신다.

 

나는 예배 전에 ‘성령이여 강림하사’ 하는 찬송으로 시작한다. 이는 성령으로 우리가 감화돼야 신령과 진정한 예배가 되기 때문이다. 오늘 이처럼 구약의 성전과 그 안의 성소와 지성소가 어떻게 관리되었는가를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곧 우리 삶이 그만큼 성결하고 거룩하게 관리 되어야 할 이유다. 그중에서도 지성소는 절대적으로 거룩하게 관리되었다. 지성소가 부정하게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사람의 출입을 금지하였고, 대제사장도 일 년에 한 차례만 들어갈 수 있었다. 이와 달리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의 영이 내주하여 계시는 지성소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 몸을 어떻게 관리하여야 하는지를 묵상하게 한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전 3:16-17).”

 

당시에도 그러했고 오늘 날도 우리가 우리 몸으로 죄를 범하는 예가 얼마나 지독한지 안다. 이는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 1:21-23).” 그렇게 해서 우리 삶은 몸을 중심으로 더럽혀져서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24-25).”

 

이에 오늘 말씀은 우리 자신을 더욱 돌아보게 한다. 하여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19-20).” 고로 내가 내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서 더욱 존귀하게 여겨야 할 이유도 생긴다. 이는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2:14).” 그렇게 해서 오늘 에스겔 선지자요 제사장도 들어갈 수 없었던 지성소로 사는 영광을 얻었다.

 

그리고 뒤로 이어지는 성소 안의 방들을 읽다, 우리 성도의 개개인이 동시에 한 지체가 되어, 그 방방마다 쓰임이 다른 것을 묵상하게 된다.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롬 12:4-5).” 그러므로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지 못하리라(고전 12:20-21).” 곧 서로가 모두에게 필요하고 귀하다.

 

나이가 들면서 우리 몸이 어디가 아프고 상할 때 모든 신체가 이를 대신하는 것을 느낀다. 누구나 약한 부분이 있는데 그의 약함을 다른 지체가 보강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원리다. 그와 같이 교회도 각각의 성도가 서로에게 필요하다. 약한 자를 위하여 기도와 섬김으로 강한 자가 도움으로 더욱 강하여진다. 가령 우리가 주 앞에 드리는 헌물은 물론 봉사와 시간도 모두 같다. 손위 처남은 요즘 섬기는 교회에서 주일 1부 예배를 드리고 주차봉사를 한다고 한다. 누구는 일생을 교회 주방에서 식사를 준비했다. 누구는 남모르게 성도들을 찾아 심방하고 위로하는 데 열심이다. 이것으로 저들은 자신들이 채워지고 자라가는 것을 안다.

 

“그뿐 아니라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느니라 그런즉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그럴 필요가 없느니라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귀중함을 더하사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고전 12:22-25).”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이 놀라운 진리 앞에서 담대함을 구한다. 성소 안의 방방마다 그 규모와 쓸모가 다르듯이,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향하여 지금도 연합과 일치, 화합과 이해, 하나 됨에 힘쓸 것을 가르치고 계신다. 그렇듯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엡 4:3-4).” 이에 따른 의미를 오늘 본문의 측량과 그런 가운데 지어져가는 여러 방들과 그 구조를 생각하며 묵상한다. 그렇다면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 12:13-14).”

 

어디가 불편하고 아플 때 비로소 그 신체의 중요성을 깨닫는다. 누가 어떤 일로 어려움을 토로할 때 저의 고통과 고단함을 놓고 주의 이름을 부른다. 그러할 때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골 3:1-2).” 내가 주를 믿고 주 안에서 주와 더불어 산다는 일은 의식적이고 특별한 어떤 실천이 아니라, 일상의 소소한 생활 가운데서 항상 주를 인정하고 의지하는 삶이다.

 

하여,

 

의인은 종려나무 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성장하리로다

이는 여호와의 집에 심겼음이여

우리 하나님의 뜰 안에서 번성하리로다

(시 92:12-13).

 

하심 같이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져 그리스도의 장성하신 분량에까지 자라간다. 이때에 우리는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 “그들이 어린 양과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 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그들을 이기실 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받고 택하심을 받은 진실한 자들도 이기리로다(계 17:14).” 이에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오늘 이 주일 새벽에 주 앞에 엎드려 빈다.

 

나의 모든 상황과 그 처한 형편으로 누군가를 생각하며 저가 오늘 그 고통 가운데서 승리의 개가를 부를 수 있기를. 그리하여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롬 6:13).” 우리가 그리함은 한 지체이면서 동시에 각각의 성전이 되어 주의 영광이 거하시기 때문이다. 곧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벧전 2:5).”

 

오늘도 주의 성전이 복원되고 성도들의 삶이 회복될 것을 말씀으로 묵상하면서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 41:10).” 하시는 데서 새 힘을 얻는다. 그렇게 하심으로,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률 맺게 하시는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가기를…. 오늘은 그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로의 첫 장으로 시편을 읽는다.

 

내가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내게 응답하셨도다

여호와여 거짓된 입술과 속이는 혀에서

내 생명을 건져 주소서

(시 120:1-2).

 

환난과 고난이 우리로 거짓을 말하게도 한다. 불안과 염려가 가중되어 말에 말이 더하여져 넘치는 말 속에 거짓이 깃든다. 이에,

 

너 속이는 혀여

무엇을 네게 주며 무엇을 네게 더할꼬

장사의 날카로운 화살과

로뎀 나무 숯불이리로다

(3-4).

 

우리 영혼이 우리가 쏟아내는 말로 더럽혀지지 않기를.

 

메섹에 머물며 게달의 장막 중에

머무는 것이 내게 화로다

(5).

 

이는 우리의 거짓된 혀로 더더욱 자신을 불안정하게 하고 고통스럽게 할 뿐이다. 메섹은 전쟁과 폭력과 거짓이 난무한 삶을 뜻한다. 게달은 떠돌고 요동치며 불안정한 마음으로 그곳에 우리 영혼이 머무는 것으로, 화로다. 그러므로 세상이 그러함으로 오늘은 더욱 주의 성전으로 나의 날들이 하나님의 임재로 충만하기를.

 

내가 화평을 미워하는 자들과

함께 오래 거주하였도다

나는 화평을 원할지라도 내가 말할 때에

그들은 싸우려 하는도다

(6-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