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하현. 2026. 3. 16. 03:49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도록 환관장에게 구하니 하나님이 다니엘로 하여금 환관장에게 은혜와 긍휼을 얻게 하신지라… 하나님이 이 네 소년에게 학문을 주시고 모든 서적을 깨닫게 하시고 지혜를 주셨으니 다니엘은 또 모든 환상과 꿈을 깨달아 알더라

단 1:8-9, 17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시 128:1-2

 

 

주를 경외함이란 온전히 신뢰하고 아뢰는 일이다. 우선은 ‘뜻을 정하여’ 마음을 다할 때 주가 힘을 주신다. 이 표현은 한동안 나의 마음에 중심이 되어주었다. 속된 말로 ‘올인’한다는 생각으로 그리하였다. 주 앞에 항복을 선언하는 것이다. 본문의 이 표현은 다니엘서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이다. 신실한 신앙의 사람 다니엘의 자전적인 인물 소개가 도입부에 서술되고 있다.

 

7절까지는 당시의 역사적 정황이다. 제1차 바벨론 포로 사건을 통해 다니엘과 그 친구들이 바벨론에 거주하게 되었다. “곧 흠이 없고 용모가 아름다우며 모든 지혜를 통찰하며 지식에 통달하며 학문에 익숙하여 왕궁에 설 만한 소년을 데려오게 하였고 그들에게 갈대아 사람의 학문과 언어를 가르치게 하였고(4).”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는 일은 모두 세 차례에 걸쳐 일어났다. 2차는 주전 597년(왕하 24:10-17)에 3차는 유다 왕국이 멸망한 주전 586년(왕하 25장)에 발생했다.

 

오늘은 유다왕 여호야김의 때에 선왕 요시야의 아들로 자신의 동생 여호아하스(왕하 23:30)에 이어, 애굽의 바로느고에 의해 유다 18대 왕으로 등극한다. 여호야김 즉위 3년(605년)에 1차 바벨론 포로 사건이 있었다(왕하 24:1-2, 대하 36:6). 주전 605년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이 갈그미스 전투에서 애굽의 바로느고를 격퇴시키고 그 동맹국이던 유다까지 침공하여 여호야김을 포로로 잡은 사건이다. 이 사건 직후 느부갓네살은 선왕 나보폴라살의 뒤를 이어 바벨론의 왕으로 등극하여 주전 562년까지 43년간 통치하였다.

 

본문의 내용은 예레미야에 의해서도 기록되었다. “보라 내가 북쪽 모든 종족과 내 종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을 불러다가 이 땅과 그 주민과 사방 모든 나라를 쳐서 진멸하여 그들을 놀램과 비웃음 거리가 되게 하며 땅으로 영원한 폐허가 되게 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25:9).” 또한 “유다의 요시야 왕의 아들 여호야김 제사년에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말씀이 임하니라 이르시되, 애굽에 관한 것이라 곧 유다의 요시야 왕의 아들 여호야김 넷째 해에 유브라데 강 가 갈그미스에서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에게 패한 애굽의 왕 바로느고의 군대에 대한 말씀이라(36:1, 46:2).”

 

이 사건을 여호야김 4년으로 언급함과 동시에 이때를 느부갓네살의 즉위 원년으로 말하고 있다. 본문의 많은 부분이 바벨론의 관습과 규례를 기술하고 있다는 점에서 “유다 왕 여호야김이 다스린 지 삼 년이 되는 해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을 에워쌌더니(단 1:1).” 하는 부분의 연대가 예레미야서의 서술과 다소 차이가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본문의 부정적인 사건도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었다는 것이다. “주께서 유다 왕 여호야김과 하나님의 전 그릇 얼마를 그의 손에 넘기시매 그가 그것을 가지고 시날 땅 자기 신들의 신전에 가져다가 그 신들의 보물 창고에 두었더라(2).” 하나님의 심판의 절정은 예배 장소인 성전이 수탈당하는 부정적인 모습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경건한 백성들은 이러한 사건을 접하면서 자신들의 죄악이 얼마나 심각하고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두려운가를 알게 되었다.

 

이처럼 성전의 그릇을 탈취하는 사건은 ‘주께서 유다 왕 여호야김과 하나님의 전 그릇 얼마를 그의 손에 붙이시매’라고 묘사함으로 이러한 사건의 전개가 느부갓네살의 계획이 아니라, ‘하나님의 작정’된 계획임을 밝히고 있다. 곧 아무리 부정적인 사건이라 할지라도 근본적으로 그 일을 하나님의 작정과 계획에서 벗어날 수 없다. 출애굽 당시 바로의 마음을 여호와께서 강퍅하게 하셨다는 사실도 같은 의도이다. “내가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고 내 표징과 내 이적을 애굽 땅에서 많이 행할 것이나(출 7:3).” 그러므로 우리의 어떤 죄악도 하나님을 대적하는 수순의 정도일 수 없다. 이는 그것으로도 하나님은 하나님 되심을 나타내시기 때문이다.

 

가령 내가 주를 멀리하고 세상과 어울리며 지낼 때 그렇듯 함께 하는 이들이 내 곁에 있었다. 저들로 인하여 나는 그러한 삶이 다들 그러고 사는, 보편적이고 타당한 삶의 하나라고 여겼다. 죄를 죄로 망각하게 하는 의식으로 눈과 귀가 가려지는 것이다.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당시에 내 곁의 사람들은 이를 가벼이 여겼다. 또한 다들 그러고 사는 줄 알았다. 저들도 예수를 믿었다고 하고 나름은 각자의 신앙도 가지고 있었다. 사회에서도 의사니 교사니 기자들로 같이 어울리던 이들은 덕망 좋은 사람들이었다. 그러니 사탄도 주의 대적이 아니라, 주의 섭리 가운데서 역사한다.

 

곧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쓰임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잠 16:4).” 고로 하나님은 그 어떤 세력과 대적하여 대칭이 되는 존재가 아니시다. 사탄도 피조물일 뿐이다. 세상의 역사가 긍정적이든지 부정적이든지 하나님의 작정 속에 있음을 나타낸다. 하나님은 오직 유일한 섭리자시다. 인간의 힘으로나 지혜로는 정의할 수 없는 불가능한 범주에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신다(단 1:3-7). 곧 이스라엘이 포로로 사로잡힌 것은 그들이 스스로의 힘으로는 아무런 일도 수행할 수 없는 존재임을 알려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차질 없이 진행시키셨다. 이와 같은 사실은 당시 고대 근동의 패권을 장악하고 있던 느부갓네살 앞에서 다니엘과 세 친구를 세워 웅변적으로 증거 된다. 하나님은 세상 나라의 중심부에서 ‘남은 자’를 양육하심으로 장차 임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증거로 삼으신다. 외적으로 보면 완전히 패배한 상황처럼 보일지라도 하나님은 누구도 측량할 수 없는 방식으로 구원을 전개하신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인간의 절망적인 환경 속에서 극적으로 전개된다.

 

가령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 뒤에 애굽 군대가 뒤쫓아오고 있었다.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고 있었다. 바로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은 홍해를 가르심으로 구원의 역사를 일으키셨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출 14:13-14).” 이와 같이 우리로 끝 간 데 없이 궁지에 몰려 더는 소망이 없을 것 같을 때가 하나님이 일하시는 순간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고난에 대해 정의할 때,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우리의 이 소망은 우리 의지로 저절로 생겨나는 게 아니다. 우리가 주를 온전히 바라고 섬기는 데까지는 환난이 인내를, 인내가 연단을, 연단이 비로소 소망을 이루어서 이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5-6).” 곧 우리의 소망의 대가는 그리스도의 보혈로 값 주고 사신 것이다.

 

또한 바벨론 궁에서의 다니엘과 세 친구의 이야기가 전개되기 전(8-16), 다니엘이 등장하는 배경에 대해 빠른 템포로 묘사하고 있다. 본문은 바벨론의 동화정책에 대한 다니엘과 세 친구의 저항이 묘사되면서 저들이 신앙으로 어찌 세속적인 이방의 나라에 안착하게 되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당시 느부갓네살은 이스라엘의 왕족과 귀족 중 일부 청년들을 선별하여 바벨론으로 끌고 가서 왕궁에서 직접 교육시켰다. 바벨론의 사상과 풍습에 동화되도록 유도하기 위하여, 그렇게 해서 저들로 제국을 동요 없이 통치하게 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다니엘과 세 친구는 바벨론의 명예와 권력과 부귀를 모두 뒤로하고 오직 신앙과 율법의 규례를 따라 행하였다. 이들은 왕의 진미와 포도주를 거절하였고 대신 물과 채식만을 먹기로 결정하였다. 그것은 당시 왕의 식탁으로 차려지는 제사의식과 함께 고기는 피를 뿌려서 잡은 것이었다. 이를 성경은 금하였다. “다만 크게 삼가서 그 피는 먹지 말라 피는 그 생명인즉 네가 그 생명을 고기와 함께 먹지 못하리니 너는 그것을 먹지 말고 물 같이 땅에 쏟으라(신 12:23-24).” 또한 부정한 동물의 고기들이었다.

 

“물에서 움직이는 모든 것과 물에서 사는 모든 것 곧 강과 바다에 있는 것으로서 지느러미와 비늘 없는 모든 것은 너희에게 가증한 것이라 이들은 너희에게 가증한 것이니 너희는 그 고기를 먹지 말고 그 주검을 가증히 여기라 수중 생물에 지느러미와 비늘 없는 것은 너희가 혐오할 것이니라(레 11:10-12).” 그리고 이미 우상에게 바쳐졌던 음식이었다. “불신자 중 누가 너희를 청할 때에 너희가 가고자 하거든 너희 앞에 차려 놓은 것은 무엇이든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누가 너희에게 이것이 제물이라 말하거든 알게 한 자와 그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고전 10:27-28).”

 

그래서 다니엘과 세 친구는 율법의 규례에 따라(레 11:2-8) 이를 지키고 신앙의 순수성을 유지하기 위해 왕의 명령을 단호하게 거절한 것이다. 이는 결코 쉬운 게 아니다. 이를 표현하는 데 있어 ‘뜻을 정하여’라고 하였다. 곧 우리 삶의 원리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를 오늘 본문은 중심 문장으로 새겨두었다.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도록 환관장에게 구하니 <하나님이 다니엘로 하여금 환관장에게 은혜와 긍휼을 얻게 하신지라>(단 1:8-9).” 곧 절망적인 환경 속에서도 세상적인 삶의 원리를 따르지 않았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려고 ‘뜻을 정하였다.’ 이러한 신앙의 자세는 다니엘이 바벨론 왕이 제시하는 음식과 포도주를 먹지 않았다는 사실로 함축된다.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출 20:1-2).” 곧 가나안 정복 전쟁을 앞둔 상황에서 여호수아에게 율법을 지키도록 명령하실 때도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수 1:7-8).” 이를 시편의 시선으로는 ‘의인의 삶의 특성’으로 묘사하여 ‘묵상과 복종’을 강조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시 1:1-2).

 

우리가 오늘을 살면서 악의 꾀를 따르지 않을 수 있는 것은 묵상이다. 죄인의 길에 서지 않을 수 있는 것도 묵상으로다. 오만하지 않고 말씀으로 평안할 수 있는 것도 이를 주야로 묵상하는 것이다. 누가 내게 성경공부를 운운하여 요즘 다들 하는 ‘어, 성경’이니 무슨 ‘성경과 심리’니 하는 것들에 대해, 나는 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성경을 묵상한다는 일이란 내 이야기, 내 일상 속의 직접적인 연관으로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오늘 여기 다니엘이 뜻을 정하여 그리하였다 해서, 그리하여 그가 당대의 바벨론에서 높은 정치적 권력의 자리에까지 올랐다해서 그게 어떻다는 것인가?

 

곧 저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이야기로 오늘 나의 이야기와 동일하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성도들이라면 결국은 같다는 게 묵상이고, 성경의 의도이다. 오늘 본문도 그런 맥락이다(10-16).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물과 채소를 먹으며 성결의 삶을 추구하고 있는’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모두 다니엘과 함께 왕의 진미를 먹는 것에 대해 거절하였다. 그럼에도 다른 소년들, 결국은 타협하고 이방 식습관과 문화에 동화된 저들보다 ‘얼굴이 더욱 아름답고 살이 윤택하였다.’ “열흘 후에 그들의 얼굴이 더욱 아름답고 살이 더욱 윤택하여 왕의 음식을 먹는 다른 소년들보다 더 좋아 보인지라(15).” 여기서 ‘얼굴’이란 단지 신체의 일부분에서 말하는 얼굴 그 이상의 의미다. 이는 내적 신앙에서 비롯된 외적인 모습을 의미한다.

 

보면 믿음으로 그 신앙이 온전한 자의 표정과 말과 행함은 온화하고 덕이 있다. 어딘가 알 수 없는 인자함이 있다. 의연하고 부드러운 기색이 느껴진다. 꾸며서 나오는 거짓 인상이 아니라, 말씀대로 살아가는 사람은 존귀한 상태의 영혼으로 얼굴에 드러난다. 실제 다니엘은 포로이면서도 바벨론 사람들을 통치할 수 있는 위치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왕이 이에 다니엘을 높여 귀한 선물을 많이 주며 그를 세워 바벨론 온 지방을 다스리게 하며 또 바벨론 모든 지혜자의 어른을 삼았으며 왕이 또 다니엘의 요구대로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세워 바벨론 지방의 일을 다스리게 하였고 다니엘은 왕궁에 있었더라(2:48-49).” 곧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었던 이유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았기 때문이다(창 41:40, 41).

 

예수님도 말씀대로 성육신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심으로써 하늘과 땅의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만왕의 왕이 되셨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6-11).”

 

궁극적으로 우리가 하나님만을 바랄 때가 그러하다. 현실적으로는 그것이 어리석은 것 같다. 막연하여서 사람의 호응을 얻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확실히 하고자 하여, 서론으로 ‘뜻을 정하여’야 하는 것을 일깨운다. 내가 이 길을 가면서 더는 세상 친구들이나 어떤 유익을 구하려고 모색하지 않는 것도 하나님으로 우선하는 데 주안점을 두기 위함이다. 뜻을 정하였다. 이 또한 내 의지로 그리한 게 아니다. 신대원을 할 때도, 목사고시를 두 번째 떨어지고도 나는 물러설 곳이 없었다. 물론 회의와 갈등은 극에 달했다. 다시 옛 생활로 돌아갈 수밖에 없을 거였다. 그때 하나님은 극적으로 나를 붙드셨다. 친구 동생의 암투병과 막바지 저와의 50일간의 서로 성경묵상은 극적이었다.

 

당시 어떤 교재도 성경공부를 목적으로 한 게 아니다. 함께 에베소서를 읽고 빌립보서를 읽고, 그 한 구절 한 구절의 성경에서 서로가 어떻게 살았고, 살아오면서 얼마나 죄인인 것과 그런 가운데서도 돌아보니 하나님이 그때에도 어떻게 함께 하셨는지를… 우리 둘은 마치 수다를 떨듯이 간증하다 울었고 주께 감사하다 회개하였다. 저의 임종을 지키며,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안정제를 먹어가면서 저에게로 갔고 그 귀한 임종 예배를 인도하고 눈을 감길 때 나는 뜨거운 감동을 느꼈다. 저는 평안히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갔고 나는 남아서 이 글을 묵상글에 쓴다. 다시 목사고시에 응시하였고 ‘뜻을 정하여’ 나는 그때 면접하는 이들 앞에서 ‘한 영혼으로’ 매순간이 하나님께서 하실 것을, 그것을 목회로 하겠다고 구하였다. 나는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전율이 돋는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일은 우리로도 하나님을 바라게 하시는 일이다. 마치 사랑하는 이들이 서로를 부둥켜안듯이,

 

의인의 입은 지혜로우며

그의 혀는 정의를 말하며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법이 있으니

그의 걸음은 실족함이 없으리로다

(시 37:30-31).

 

오늘은 시간을 잘못 보고 화들짝 놀라 서둘러 왔다. 평소보다 한 시간은 족히 이른 시각이다. 이 또한 신기한 것은, 내가 어디 직장인도 아니고, 시간을 맞춰야 하는 일도 아닌데… 내 안에 그만큼 이 시간과 이 일이 중요한 자리매김을 한 것이다. 이는 나의 의지나 지혜와 지식에 의한 게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다. 오늘 본문과 같이 “하나님이 이 네 소년에게 학문을 주시고 모든 서적을 깨닫게 하시고 지혜를 주셨으니 다니엘은 또 모든 환상과 꿈을 깨달아 알더라(17).” 곧 잠언의 지식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으로(잠 1:7), 오늘 나의 삶의 의지는 하나님을 의뢰함으로다. 하여서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욥 13:15).” 하는 심정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온 이 지혜는 세상의 지혜보다 우월하다. 오늘 본문은 이를 정확히 한다. “왕이 그들과 말하여 보매 무리 중에 다니엘과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와 같은 자가 없으므로 그들을 왕 앞에 서게 하고 왕이 그들에게 모든 일을 묻는 중에 그 지혜와 총명이 온 나라 박수와 술객보다 십 배나 나은 줄을 아니라(19-20).”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문제에 봉착했을 때 정확히 응답해 주신다. 지혜는 세상적인 판단을 허용하지 않는다. 바울은 세상적인 지혜를 가리켜,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는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에서 없어질 통치자들의 지혜도 아니요 오직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서 곧 감추어졌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고전 2:6,-7).”

 

고로 오늘도 미리 정하신 이 날을 시작하면서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전 1:25).” 곧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아래,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롬 11:36).” 그러므로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시 128:1-2).

 

하는 시편의 눈으로 오늘을 본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이같이 복을 얻으리로다

(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