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부갓네살이 말하여 이르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그가 그의 천사를 보내사 자기를 의뢰하고 그들의 몸을 바쳐 왕의 명령을 거역하고 그 하나님 밖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그에게 절하지 아니한 종들을 구원하셨도다
단 3:28
여호와여 내가 깊은 곳에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 주여 내 소리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
시 130:1-2
오늘 말씀은 묵상할 때마다 새롭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주를 바란다는 게 무엇인지를 되새기게 한다. 죽을 것을 각오하고 주를 의뢰한다는 게 얼마나 두려운 일이면서도 근사한가를 생각하게 한다. 저들이 신상을 세워 그 앞에 절하게 할 때, 이에 타협하고 적당히 대처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16).” 하고 아예 그 일에 대해 상종하지 않겠다는 엄연한 태도를 보였다. 구구절절 설명이 긴 것은 미련이 남아서이다. 그러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어떠한가를 분명히 하였다.
곧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17).” 먼저는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한 것이다. 하나님이 도우실 것이란 사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18).” 우리는 믿음을 발판으로 하여 이를 적극 신뢰하는 믿음으로 그 신앙을 지킨다.
앞서 다니엘이 느부갓네살 왕의 꿈을 해석한 사건은 왕 자신에게나 당시 바벨론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주권을 드러내주는 사건이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뜨인 돌)가 궁극적으로 세상 나라를 무너뜨릴 것이라는 확신을 주었다. 느부갓네살 왕은 다니엘을 통해 전달된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처음에는 지극히 겸손한 자세를 취하였다. “이에 느부갓네살 왕이 엎드려 다니엘에게 절하고 명하여 예물과 향품을 그에게 주게 하니라 왕이 대답하여 다니엘에게 이르되 너희 하나님은 참으로 모든 신들의 신이시요 모든 왕의 주재시로다 네가 능히 이 은밀한 것을 나타내었으니 네 하나님은 또 은밀한 것을 나타내시는 이시로다(2:46-47).”
하지만 이를 신앙이나 믿음으로 이해할 수는 없다. 하나님에 대한 왕의 호의적인 태도는 신앙적 이해가 아니다. 그러므로 온전한 신앙이라 할 수 없다. 필요에 따른 잠깐의 수긍과 놀람이 결합된 감탄 같은 것이다. 이를 반영하듯 오늘 본문은 그러했던 느부갓네살 왕이 거대한 금 신상을 세우고 바벨론에 속한 관리들로 하여금 숭배하도록 명령한다. 이러한 사건은 느부갓네살 왕의 무지함을 드러낸다. 동시에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이방에 알리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그 일에 몇 사람,
“이제 몇 유다 사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왕이 세워 바벨론 지방을 다스리게 하신 자이거늘 왕이여 이 사람들이 왕을 높이지 아니하며 왕의 신들을 섬기지 아니하며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하나이다(12).”
비록 그 숫자가 미약한 것 같아도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전파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다. 분명히 하나님은 다니엘의 ‘꿈의 해석’으로 절대자로서의 면모를 알리셨다. 이어 오늘 그의 세 친구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명하기에 충분하다. 느부갓네살 왕이 바로 그 직전에 하나님을 인정하며 칭송하였으나 회개는 아니었다. 곧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사 29:13).” 어쩌면 우린 그 정도씩 믿고 의지할 따름이다.
병들고 힘에 지쳐 두려움에 떨며 주를 부를 때, 그 정도에서 그만큼의 헌신과 노력으로 스스로 구하기를 다했다고 여긴다. 누가 병들어서 평소보다 간절하게 주의 이름을 부르며 구원을 바란다. 누구는 가족 일로 또는 자신의 장래를 놓고 주의 이름을 부르며 간구한다. 이는 매우 신앙적인 것 같고 믿음에 따른 것 같다. 그러나 성경은 이르시길,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즉 그렇게 해야 살려줄 것 같고, 사업이 또는 앞날의 일이 잘 풀릴 것 같아서 빌고 바라는 샤머니즘 같은 신앙이다.
“백성이 모이는 것 같이 네게 나아오며 내 백성처럼 네 앞에 앉아서 네 말을 들으나 그대로 행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 입으로는 사랑을 나타내어도 마음으로는 이익을 따름이라(겔 33:31).”
결국 회개가 없는 기도는 무용하고 돌이켜 행함이 없는 회개는 무의미하다. 이에 오늘 말씀에서 저들은 먼저 자신들의 믿음을 나타냈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17).” 만일 여기서 그친다면 진정한 신앙이 아니다. 저들은 더하여 말하길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18).” 설령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실지라도, 결과는 죽음으로 이어지고 실패와 낙심뿐이라도 해도, 곧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변함이 없는 신앙이 필요하다.
이에 히브리서 기자는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히 11:39).” 곧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40).” 하나님은 선하시다는 것, 하나님은 어떠하든지 우리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것을 붙드는 게 믿음이다. 하여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욥 13:15).” 하는 진정한 믿음으로 산다.
또한 여기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신상’이다. 이는 1절의 신상, “느부갓네살 왕이 금으로 신상을 만들었으니 높이는 육십 규빗이요 너비는 여섯 규빗이라 그것을 바벨론 지방의 두라 평지에 세웠더라(1).” 하였는데 이는 느부갓네살 왕의 꿈에 나타난 신상과 매우 유사함을 보여준다. “왕이여 왕이 한 큰 신상을 보셨나이다 그 신상이 왕의 앞에 섰는데 크고 광채가 매우 찬란하며 그 모양이 심히 두려우니(2:31).” 곧 왕이 오늘 이 신상을 세우게 된 직접적인 동기가 자신의 꿈속에 나타난 신상과 깊은 관련이 있을 것 같다. 곧 다니엘의 ‘꿈의 해석’을 듣고 저는 어쩌면 위기감을 느꼈을 것이다. 이는 ‘뜨인 돌’ 곧 “손대지 아니한 돌이 나와서 신상의 쇠와 진흙의 발을 쳐서 부서뜨리매(34).” 하는 데서 자신의 나라가 망할 것이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결국은 그렇게 해서 자신의 꿈에 나타난 신상의 약점, “그 발가락이 얼마는 쇠요 얼마는 진흙인즉 그 나라가 얼마는 든든하고 얼마는 부서질 만할 것이며 왕께서 쇠와 진흙이 섞인 것을 보셨은즉 그들이 다른 민족과 서로 섞일 것이나 그들이 피차에 합하지 아니함이 쇠와 진흙이 합하지 않음과 같으리이다(2:42-43).” 이를 보완하기 위하여 ‘금으로’ 신상을 만들었고, 모든 백성들의 결속을 확보하기 위해 신상에 대한 숭배를 강요하였던 것이다.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언어를 말하는 자들이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듣자 곧 느부갓네살 왕이 세운 금 신상에게 엎드려 절하니라(7).”
이와 같은 점에서 세상에서 싸움의 본질은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의 대립이다. 이를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그들의 신앙적 자세로 하나님의 승리를 확실히 하였다. 특히 왕이 신상에 대한 숭배를 강요할 때 보면 저의 우호적이고 호의적인 태도란게 얼마나 가볍고 자기중심적인가를 알게 한다. 결국 자신의 분노를 표현하는 것이 “느부갓네살 왕이 노하고 분하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끌어오라 말하매 드디어 그 사람들을 왕의 앞으로 끌어온지라… 느부갓네살이 분이 가득하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향하여 얼굴빛을 바꾸고 명령하여 이르되 그 풀무불을 뜨겁게 하기를 평소보다 칠 배나 뜨겁게 하라 하고(13, 19).”
이처럼 오늘 우리는 중동전쟁에서 미국의 명분이나 그에 따른 압박이 동맹국이나 뭐니 할 것 없이 자국중심의 개인주의적인 힘의 논리라는 데서 동일한 것을 느낀다. 결국 하나님의 뜻보다 자신의 고집과 힘의 논리로는 파경뿐이다. 즉 성경은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 8:13-14).” 이를 알았고, 이에 자신을 꺾는데 있어 바울은,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이는 신앙과 동시에 우리 배면에 잠재해있는 자기 아집과 교만 때문이다.
그리하여 저마다 우상을 만든다. 자신이 옳다 여기는 것으로 마음이 기운다. 우리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하고 그때마다의 판단과 기준으로 자신의 유익을 구한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어처구니없게도 “그들이 내게 말하기를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 수 없노라 하기에(출 32:23).” 그래서 그랬다는 것인데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금 고리를 받아 부어서 조각칼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 하는지라(4).”
이렇듯 우리의 신상은 그때마다 진화한다. 그러면서 “그 중의 절반은 불에 사르고 그 절반으로는 고기를 구워 먹고 배불리며 또 몸을 덥게 하여 이르기를 아하 따뜻하다 내가 불을 보았구나 하면서 그 나머지로 신상 곧 자기의 우상을 만들고 그 앞에 엎드려 경배하며 그것에게 기도하여 이르기를 너는 나의 신이니 나를 구원하라 하는도다(사 44:16-17).” 그러면서도 우리는 주의 이름을 부르고, 설교방송을 틀어놓고, 찬송을 부르면서도 그 속셈은 알만하다. 오늘 날 우리 사회 현상이 그러해서 마치 느부갓네살 왕이 신상을 만들고 이에 절하게 하는 것 같이 직장이나 사회생활은, 자신들이 추구하는 가치와 이상적인 삶이란 게 매번 그렇다.
하여 예수님은 경고하셨다.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마 24:24).” 사도 요한도 일갈하였다. “미혹하는 자가 세상에 많이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런 자가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 너희는 스스로 삼가 우리가 일한 것을 잃지 말고 오직 온전한 상을 받으라(요이 1:8).” 오늘 날 적그리스도의 특징은 “그가 권세를 받아 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그 짐승의 우상으로 말하게 하고 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계 13:15).”
이를 요즘은 문화라 하고 다양한 콘텐츠 개발로 실용적인 가치와 사고를 종용하며 수익을 창출하는 데 열을 올린다. 주식이 요동치고 문화산업이 어떻고 하여 우리의 놀이, 얼, 맛과 전통에 얽힌 서사가 온통 샤머니즘적이다. 조선시대 그 이전부터 내려오는 온갖 문화에 깃든 정신이란 게 무형의 전통과 얼을 담아내는 현대적인 샤머니즘의 산물이다. 하여 “누가 어떻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되지 말라 먼저 배교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그 날이 이르지 아니하리니 그는 대적하는 자라 신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과 숭배함을 받는 것에 대항하여 그 위에 자기를 높이고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내세우느니라(살후 2:3-4).”
이제는 더는 온전한 신앙을 유지하기란 불가능한 시대인지도 모른다. 온갖 상품의 문양이나 심벌이 상징하는 게 우상 숭배의 일종인 것을 한사코 외면한다. 아무렇지 않게 서로 손을 모아 합장을 하고 좋은 게 좋은 것이란 논리로 ‘뭘 꼭 그렇게까지!’ 하고, 수많은 당시의 유대인들이 있었음에도 오직 이 몇 사람만이 목숨을 걸고 신앙을 지켰다. 점점 더 우리 시대는 저마다의 신상을 강요한다. 그것으로 밥벌이를 하고 돈벌이에 열을 올려 부유해지기를 바란다. 이에 “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행 20:29-30).”
그러므로
“아이들아 지금은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오리라는 말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요일 2:18).”
우리가 스스로 세우는 수단과 방법은 모두가 어리석음을 자초한다. 목적이 병 낫기를 바람이고, 만사가 형통하기를 구하는 일이라면 굳이 하나님이 아니어도 되는 것이다. 우린 얼마나 자주 하나님을 제한하고 나의 요구로만 구하고 바라는지, 오늘 여기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보면서 새삼 돌이켜야 한다. 나는 이 세 사람 중에 하나인가? 아니면 다수의 여러 사람들의 생각과 같은가? 진정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5).” 하셨는데, 이를 또 사탄은 교묘하게 돌려서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마 4:9).” 하고 우리를 부른다. 이 정도야, 다들 그러고 사는 것을, 하고 있을 때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10).”
우린 단호하고 엄연해야 한다. 애매하고 막연하면 영락없다. 그래서도 나는 가령 힘들고 어려울 때, 불안하고 힘들 때는 더욱 주께로만 시선을 둔다. 행여 마음이 흔들릴 걸 알고 평소보다 일찍 깨우신다. 서둘러 교회로 온다. 이것만큼은, 하고 절대적으로 붙들려는 게 있다. 여기까지만, 오늘까지만 하고 나를 다잡는다. 모든 사람들이 어떠하다 해도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 7:13-14).” 여기서 끝이라 해도 “나보다 먼저 있었던 총독들은 백성에게서, 양식과 포도주와 또 은 사십 세겔을 그들에게서 빼앗았고 또한 그들의 종자들도 백성을 압제하였으나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이같이 행하지 아니하고(느 5:15).”
결국 나는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세상이 그렇다 하여도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 1:23-24).” 오직 주를 바람은 ‘풀무불 속에 던져지는 경우’라도, 불 속에서도 하나님의 보호하심은 변함이 없으시다는 사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우리의 절망적인 환경 속에서 역사하신다(19-26).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평일보다 7배나 뜨거운 상황에서, 그 환경에 굴하지 않았던 것처럼 오직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
우린 늘 하나님의 심판보다 가혹하게 스스로를 심판하며 산다. 하나님은 긍휼하심으로 우리를 용서하셨는데 스스로가 자책과 죄의식에 빠져 살면서 원망하고 복수하듯 기를 쓰고 주가 함께 하심을 부정한다. 하여 더욱 어렵고 힘들 때면 우리는,
여호와여 내가 깊은 곳에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
주여 내 소리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
(시 130:1-2).
오늘 우리의 ‘깊은 곳’ 누구도 돕지 않고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주를 의뢰하고 의지할 때,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이다
나 곧 내 영혼은 여호와를 기다리며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는도다
(4-5).
이러한 간절함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
(6). 아멘.
'[묵상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이는 내가 영원히 쉴 곳이라 (0) | 2026.03.20 |
|---|---|
|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0) | 2026.03.19 |
| 하나님이 이 은밀한 일에 대하여 (0) | 2026.03.17 |
|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0) | 2026.03.16 |
| 그 성읍의 이름을 여호와 삼마라 하리라 (0) | 2026.03.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