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이는 내가 영원히 쉴 곳이라

하현. 2026. 3. 20. 04:37

 

기록된 글자는 이것이니 곧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 그 글을 해석하건대 메네는 하나님이 이미 왕의 나라의 시대를 세어서 그것을 끝나게 하셨다 함이요 데겔은 왕을 저울에 달아 보니 부족함이 보였다 함이요 베레스는 왕의 나라가 나뉘어서 메대와 바사 사람에게 준 바 되었다 함이니이다 하니

단 5:25-28

 

여호와께서 시온을 택하시고 자기 거처를 삼고자 하여 이르시기를 이는 내가 영원히 쉴 곳이라 내가 여기 거주할 것은 이를 원하였음이로다

시 132:13-14

 

 

우리가 과거의 도움을 받는다고 하나 그때마다 어리석음은 같다. 앞서 부친 느부갓네살 왕의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과 통치를 보면서도 벨사살이 이어 왕이 되고 이와 같이 어리석었다. “벨사살이 술을 마실 때에 명하여 그의 부친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탈취하여 온 금, 은 그릇을 가져오라고 명하였으니 이는 왕과 귀족들과 왕후들과 후궁들이 다 그것으로 마시려 함이었더라(2).” 그렇듯 우리도 같은 죄를 반복하고, 지난 것으로 교훈을 얻기보다 한 치 앞도 모르면서 거듭하여 다시 어리석다.

 

앞서 느부갓네살 왕을 통한 하나님의 역사를 서술한 반면 본문은 벨사살 왕이 등장하고,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들의 최후를 그려주고 있다. 느부갓네살 왕 시절에도 하나님에 대한 반감을 가진 세력들이 있었다. 난데없이 신상을 세워 왕을 획책한 후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풀무에 던져 죽이려 했다(3:25-4:3). 느부갓네살 왕 개인의 미래에 대한 꿈을 다니엘이 해석한 후(4:19-27) 일련의 사건을 통하여 여호와께서 유일하신 하나님이심이 분명히 계시하였음에도 이와 같다.

 

다시 또 반복하는 어리석음은 우리의 현실에서도 같다. 마치 새로운 왕이 등장하면서 다시 하나님께 대적하는 분위기가 궁중을 지배하였다. “이에 예루살렘 하나님의 전 성소 중에서 탈취하여 온 금 그릇을 가져오매 왕이 그 귀족들과 왕후들과 후궁들과 더불어 그것으로 마시더라(3).” 이러한 가운데 하나님은 벽에 글씨를 씀으로 하나님의 주권을 확인시키신다. 특히 느부갓네살 왕과 벨사살 왕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응답하는 내용에 있어 서로의 차이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즉 느부갓네살과 벨사살은 동일하게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했다. 하지만 느부갓네살은 하나님을 찬양했고, 벨사살은 계속해서 하나님을 거부했다.

 

이런 사실은 이방 나라 가운데 구원을 받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끝까지 하나님의 백성이 되지 못하는 경우도 있음을 극명하게 알려준다. 이를 예수님도 언급하신 바 있다.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되었나니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마 13:11-13).” 이미 구원 받을 자가 있고 그렇지 못한 자가 있다. 본문은 이를 잘 드러낸다.

 

벨사살 왕의 경거망동을 보여주고(1-4), 이에 기이하게 손가락이 나타나 글자를 쓴다(5-9). 이 사건에 대해 모두가 우왕좌왕할 때 태후의 간청으로 다니엘이 등장한다(10-13). 다니엘에게 글자에 대한 해석을 부탁하고(13-16), 다니엘이 벨사살과 거기 모인 자들 앞에서 전에 있었던 느부갓네살 왕과의 일을 상기시키며(17-21), 글자를 해석한다(22-28). 글자가 해석되고 베사살이 죽고 메대 사람 다리오가 왕이 된다(29-31). 이러한 내용을 통해 하나님을 멸시하고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은 반드시 심판이 따른다는 것을 강조한다.

 

벨사살의 부친이 느부갓네살이라고 나와 있지만, 직접적인 아버지라는 의미는 아니다. 바벨론의 영광과 권세를 대표하는 선조라는 묘사이다. 느부갓네살의 뒤를 이어 에월므로닥이 왕위에 올랐다(렘 52:31). 그 뒤 네르갈 사레셀, 라바시말둑, 나보니더스 등이 차례로 권좌에 올랐다. 그 중에 나보니더스가 주전 550년경에 중앙 아라비아의 테마로 원정가면서 벨사살을 섭정 왕으로 임명하였던 것이다. 이 벨사살 왕은 당시 메대 왕 다리오에 의해 포위되어 경제적, 정치적으로 최대 위기에 봉착해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도 귀인 일천 명을 위해 거대한 연회를 베풀었다는 사실(1절)은 왕의 착취와 도덕적 문란을 짐작케 한다.

 

곧 바벨론의 파멸이 멀지 않았음을 예고해준다. 이는 쓰여진 글자에도 잘 나타나 있다.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 하여 “메네는 하나님”이고, “이미 왕의 나라의 시대를 세어서 그것을 끝나게 하셨다 함이요, 데겔은 왕을 저울에 달아 보니 부족함이 보였다 함이요, 베레스는 왕의 나라가 나뉘어서 메대와 바사 사람에게 준 바 되었다 함이니이다.” 하고 다니엘은 글자를 풀어서 설명하였다(25-28). 오늘 본문에서도 보면 그때마다 중간에서 왕과 다니엘을 연결하는 매개가 있다. 느부갓네살 때는 아리옥이었다(2:14-25). 오늘 벨사살에게는 왕후이다(5:10-12).

 

또한 그때마다 왕이 놀라하며 서로 평가하는 게 다르다. 느부갓네살은 “왕이 대답하여 다니엘에게 이르되 너희 하나님은 참으로 모든 신들의 신이시요 모든 왕의 주재시로다 네가 능히 이 은밀한 것을 나타내었으니 네 하나님은 또 은밀한 것을 나타내시는 이시로다(2:47).” 하였다. 오늘 벨사살은 하나님께 영광을 올리지 못하였고, “이에 벨사살이 명하여 그들이 다니엘에게 자주색 옷을 입히게 하며 금 사슬을 그의 목에 걸어 주고 그를 위하여 조서를 내려 나라의 셋째 통치자로 삼으니라(5:29).” 자신의 권위로 다니엘을 높였고 자신의 궁금하고 답답하던 것은 해결하였으나 그 날 밤에 죽임을 당하였다(30).

 

또한 꿈을 통한 다니엘의 예언적 계시의 내용도 다른 듯하나 한 가지다. 곧 느부갓네살 때는 “… 하늘의 하나님이 나라와 권세와 능력과 영광을 왕에게 주셨고… 왕께서 쇠와 진흙이 섞인 것을 보셨은즉 그들이 다른 민족과 서로 섞일 것이나 그들이 피차에 합하지 아니함이 쇠와 진흙이 합하지 않음과 같으리이다(37, 43).” 하여, “손대지 아니한 돌이 산에서 나와서 쇠와 놋과 진흙과 은과 금을 부서뜨린 것을 왕께서 보신 것은 크신 하나님이 장래 일을 왕께 알게 하신 것이라 이 꿈은 참되고 이 해석은 확실하니이다 하니(45).” 궁극적으로 ‘손대지 아니한 돌’ 곧 ‘뜨인 돌’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가 영원한 것을 알게 했다.

 

오늘은 베사살 앞에 글자를 통해, “그에게 큰 권세를 주셨으므로 백성들과 나라들과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의 앞에서 떨며 두려워하였으며 그는 임의로 죽이며 임의로 살리며 임의로 높이며 임의로 낮추었더니 그가 마음이 높아지며 뜻이 완악하여 교만을 행하므로 그의 왕위가 폐한 바 되며 그의 영광을 빼앗기고(5:19-20).” 결국은 죽는데, “그 글을 해석하건대 메네는 하나님이 이미 왕의 나라의 시대를 세어서 그것을 끝나게 하셨다 함이요 데겔은 왕을 저울에 달아 보니 부족함이 보였다 함이요 베레스는 왕의 나라가 나뉘어서 메대와 바사 사람에게 준 바 되었다 함이니이다 하니(26-28).” 곧 이 땅의 멸망을 예언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계시 이후의 반응으로는 둘이 다른데, “이에 느부갓네살 왕이 엎드려 다니엘에게 절하고 명하여 예물과 향품을 그에게 주게 하니라 왕이 대답하여 다니엘에게 이르되 너희 하나님은 참으로 모든 신들의 신이시요 모든 왕의 주재시로다 네가 능히 이 은밀한 것을 나타내었으니 네 하나님은 또 은밀한 것을 나타내시는 이시로다(2:46-47).” 하고 다니엘과 세 친구를 높였다. 하지만 오늘 벨사살 왕은 “이에 벨사살이 명하여 그들이 다니엘에게 자주색 옷을 입히게 하며 금 사슬을 그의 목에 걸어 주고 그를 위하여 조서를 내려 나라의 셋째 통치자로 삼으니라(29).” 이것이 전부였다. 저는 돌이켜 회개할 기회를 잃었다. 하나님께 영광을 올릴 기회를 잃었다. 하여 “그 날 밤에 갈대아 왕 벨사살이 죽임을 당하였고(30).” 그 결국은 허무할 뿐이다.

 

이와 같이 ‘꿈과 기이한 현상’으로 하나님의 계시가 나타났다.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권위를 무시하고 성전의 거룩한 기물들로 세속적인 축제를 벌였던 바벨론의 마지막 왕 벨사살의 최후에 관한 내용이 간단하게 기록되고 있다. 하나님은 타락한 바벨론 왕이 하나님을 모독하는 축제를 열었을 때, 궁중 벽에 글씨를 쓰게 함으로 최후통첩을 보냈다. 결국 하나님의 종인 다니엘이 글자의 내용을 해석하고, 이를 듣고 돌이켜 하나님 앞에 회개할 기회는 충분했다. 다만 벨사살 왕은 차마 그럴 생각조차 못하고 그저 그 순간에도 자기 권위에 도취되어 왕권으로 글자를 해석한 다니엘을 높였을 뿐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심판 중에도 하나님의 종을 사용하셨고, 높이셨고, 이어지는 바사 왕국에서도 계속하여 다니엘을 지도자의 위치에 두셨다.

 

가장 참담한 것은 끝까지 하나님을 인정할 수 없는 자들의 최후다. 벨사살은 물론 누구도 그 날 밤에 그가 죽임을 당할 것이라 짐작이나 했을까? 그리고 왕권이 넘어갈 것을 알았을까? “그 날 밤에 갈대아 왕 벨사살이 죽임을 당하였고메대 사람 다리오가 나라를 얻었는데 그 때에 다리오는 육십이 세였더라(30-31).” 우린 이렇듯 한 치 앞도 모르면서, 몰라서 그러는 것인지… 마지막으로 회개할 수 있는 기회조차 잃는다. 이에 가장 함축적인 성경을 꼽으라면 “롯의 처를 기억하라(눅 17:32).” 하심이다. 이 말씀은 늘 나를 자극한다. 다 된 줄 알았을 때 더는 기회가 없을 수 있다. 롯의 처는 소돔과 고모라 성의 멸망 직전에 빠져나왔다. 다 된 줄 알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래서도 바울은 날마다 자신을 쳐 복종시킨다고 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이는 믿음이 없어서가 아니다. 구원의 확신이 없어서도 아니다. 두려움은 우리에게 주를 더욱 바라게 한다. 그러면서도 또한 돌아서기 무섭게 자아가 살아난다. 누가 현재 당하는 어려운 현실에서 인생의 끝을 생각하였다. 두려움으로 주께 간절해졌다. 설교를 틀어놓고 기도를 하며 어기적거리면서도 죽어라 하고 운동을 한다. 서서히 회복이 되고 조금은 살만해졌나? 느닷없이 예전의 어떤 관계, 이단 교회의 여전도사로 있는 이와의 여전한 연락을 주고받는 일에 대해 찔린다면서도 끊는 것을 주저했다. 그런 잡생각을 떨치려고 묵상을 권하는데 복잡하고 어렵다면서 듣기 싫어했다.

 

우리는 살만할 때 주의해야 한다. 적당하다는 게 축복이면서 동시에 방심하게 하는 것이다. 오늘 여기 멸망을 앞두고 바벨론의 마지막 왕이랄 수 있는 벨사살 왕의 어리석음은 여러 갈래로 묵상의 여지를 더한다. 적당하고 살만하면 영락없이 잡다한 일로 그 영혼이 번잡스러워진다. 아흔 살을 훌쩍 넘긴 장모는 그 연세의 연로함으로 몸의 통증과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것으로 고통당한다. 그러면서도 적당할 때는 예전 일을 꺼내서 어떤 사람과의 관계와 그 사이의 미련을 두고 장황한 말이 이어진다. 아주 사소한 일로 고집을 부리거나 자기주장을 하다 서러워하기도 한다. 늙는다는 일은 자기의 완고한 고집과의 싸움이다. 

 

사람이란 그러하고 세상이란 그런 것일 테지만, 여기 바벨론의 최후 왕인 벨사살의 경우 오만하고 방자하여 “벨사살이 술을 마실 때에 명하여 그의 부친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탈취하여 온 금, 은 그릇을 가져오라고 명하였으니 이는 왕과 귀족들과 왕후들과 후궁들이 다 그것으로 마시려 함이었더라(2).” 굳이 저는 왜 그랬을까? 이에 성경은 일갈한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롬 13:11).”

 

그럼에도 우리 속에는 아직은 적당한 것인지 ‘에이, 설마!’ 하고 이러한 말씀으로 마음 상한다. 당장 어떤 여자나 돈이나 지나간 인연을 두고 마음 끓일 시간이 있는지? 죽을 것처럼 힘들고 어려울 때야 ‘닥치고 주를 바란다.’ 이건 우리의 본성이다. 나 역시 그러한 것을 잘 안다. 내가 아는 나는 ‘미련덩어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람을 그렇게 찾고, 나의 고집과 아집으로 똘똘 뭉쳤다. 그걸 알면서 나름은 궁여지책으로 여느 사람과의 관계를 끊어갔다. 가까운 친구는 물론 귀하게 여기던 선생이나 존경하던 이들과의 관계도 거리를 두어, 심지어 누구의 전화는 차단까지 해두었다. 믿음으로 사는 데 저해되는 것으로, 나는 나의 미련함과 얍삽함을 잘 안다. 그래서 또 정한 게 묵상을 글로 쓰면서 10장을 기준으로 삼았다. 억지로라도 그렇게 한다. 어깨가 아프고 허리가 끊어질 것 같은 날, 오늘은 책상을 올리고 일어서서 글을 쓴다. 그러면서 오늘까지, 여기까지는 하는 마음으로, 이게 마지막이란 생각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이는,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리니 결코 피하지 못하리라(살전 5:3).”

 

그저 방심할 때,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마 24:40-41).”

 

누가 자신을 자신하며 살 수 있단 말인가? 예수님의 이와 같은 경고의 말씀과 바울이 자신을 날마다 죽여서도 사는 날들을 보면서,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이처럼 인생이란 ‘아차, 할 때 훅, 간다.’ 더는 돌이킬 수 없는 순간이 항상 우리 목전에 있다. ‘롯의 처를 기억하라!’ 왜 이 말씀을 하셨는지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 주인이 도둑이 어느 시각에 올 줄을 알았더라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마 24:42-43).”

 

이에,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살전 5:6).”

 

어제 나는 누구에게 묵상하기를 권하다 저가 듣기 싫어하는 것에 놀라서 짐짓 당황하였다. 우린 누구나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 하고 자기 말만 옳다고 해주길 바란다. 실상은 놓기 싫은 교만으로 헌금은 인색하고 자기만족을 위해 드는 비용에는 아낌이 없다. 묵상하기는 어려워하고 자기 좋을 대로 말씀을 듣고 보고 그런가 하고 그리 둔다. 그래서 나는 누가 성경공부를 운운할 때, 성경읽기와 일기쓰기를 하자 한다. 성경학자가 되면 뭐하겠나? 그날 하루 자기 일과도 돌아보지 못하는 주제라면 성경이 아무리 주옥같은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으로 아무리 훌륭하고, 다윗이 대단한들? 바울이 기가 막힐 정도로 정교하고 정확하게 예수님의 가르침을 교리로 정립하였다한들? 대체 그게 오늘의 나와 상관이 없다면, 진수성찬이 차려진들 먹을 수가 없으니, 굶어죽을밖에!

 

오늘 벨사살 왕의 죽음은 저가 돌이켜 아차, 했을 때는 이미 끝난 이야기다. 롯의 처와 같이 영혼이 떠난 소금덩어리일 뿐이다. 설마, 하고 스스로 자기 믿음을 믿음으로 여기며 사는 어리석은 자들에게 오늘 저의 죽음은 일갈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네가 모든 미운 물건과 모든 가증한 일로 내 성소를 더럽혔은즉 나도 너를 아끼지 아니하며 긍휼을 베풀지 아니하고 미약하게 하리니(겔 5:11).” 나는 나의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늘 힘들어하면서도 그래서 더 주를 바란다. 가령 나의 오른 팔은 나의 신체 그 어느 것보다 필요하다. 이걸 쓸 수 없으면 거의 나는 거동이 불가능해진다. 그래서 어깨가 아플 때는 우울하고 힘들다. 그래서도 오늘만, 이것까지, 하며 쓴다. 마치 이제 마지막인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시편으로 기도하며 바라기를,

 

내 눈으로 잠들게 하지 아니하며

내 눈꺼풀로 졸게 하지 아니하기를

여호와의 처소 곧 야곱의 전능자의 성막을

발견하기까지 하리라 하였나이다

(시 132:4-5).

 

그리하여

 

우리가 그의 계신 곳으로 들어가서

그의 발등상 앞에서 엎드려 예배하리로다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권능의 궤와 함께

평안한 곳으로 들어가소서

(7-8).

 

그러할 때,

 

주의 제사장들은 의를 옷 입고

주의 성도들은 즐거이 외칠지어다

 

여호와께서 시온을 택하시고

자기 거처를 삼고자 하여 이르시기를

이는 내가 영원히 쉴 곳이라 내가 여기

거주할 것은 이를 원하였음이로다

(9, 13-14).

 

이는,

 

내가 그의 원수에게는 수치를 옷 입히고

그에게는 왕관이 빛나게 하리라 하셨도다

(1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