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재를 덮어쓰고 주 하나님께 기도하며 간구하기를 결심하고 내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며 자복하여 이르기를 크시고 두려워할 주 하나님,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를 위하여 언약을 지키시고 그에게 인자를 베푸시는 이시여 우리는 이미 범죄하여 패역하며 행악하며 반역하여 주의 법도와 규례를 떠났사오며 우리가 또 주의 종 선지자들이 주의 이름으로 우리의 왕들과 우리의 고관과 조상들과 온 국민에게 말씀한 것을 듣지 아니하였나이다
단 9:3-6
하늘의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36:26
오늘을 돌이켜 회개하는 마음을 담고 있다. 이는 “나 다니엘이 책을 통해 여호와께서 말씀으로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알려 주신 그 연수를 깨달았나니 곧 예루살렘의 황폐함이 칠십 년만에 그치리라 하신 것이니라(2).” 말씀으로 깨달아 안 것에서 비롯한다. 곧 ‘세상 나라’와 ‘하나님 나라’의 갈등과 궁극적인 결과들을 환상의 형태로 계시한 가운데(8장), 오늘 본문은 다니엘의 기도와 ‘칠십 이레의 환상’에 대하여 묘사하고 있다. 이제까지의 환상과 그 내용은 주로 이방인들과 관련된 계시였다. 그러나 오늘은 이스라엘의 미래에 대한 것이다. 이 변화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미래에 대한 것으로 그 관계가 이 세상의 역사를 움직이는 중심적인 틀이 되기 때문이다.
이에 다니엘의 간절한 기도를 묘사함으로 이스라엘의 회복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을 실감나게 한다. 이러한 특징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본문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는 다니엘의 기도를 소개하고(1-19), 이어서 ‘칠십 이레의 환상’을 묘사한다(20-27). 먼저 하나님의 계시가 세상 역사 속에서 구체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본문에서는 환상 이전에 다니엘의 기도가 묘사되고 있는데, 주된 내용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구하는 것이다. 이 사실은 이어서 나오는 환상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미래를 계시하는 내용인 것을 암시한다.
즉 이스라엘의 미래에 대한 다니엘의 기도의 응답으로 ‘칠십 이레의 환상’이 계시되어진다. 다니엘의 기도는 포로 시대 이후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기도와 비슷하다. 에스라는 “말하기를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끄럽고 낯이 뜨거워서 감히 나의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을 들지 못하오니 이는 우리 죄악이 많아 정수리에 넘치고 우리 허물이 커서 하늘에 미침이니이다 우리 조상들의 때로부터 오늘까지 우리의 죄가 심하매 우리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우리와 우리 왕들과 우리 제사장들을 여러 나라 왕들의 손에 넘기사 칼에 죽으며 사로잡히며 노략을 당하며 얼굴을 부끄럽게 하심이 오늘날과 같으니이다(스 9:6-7).” 하는 내용이 15절까지 이어진다.
느헤미야는 “이르되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여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간구하나이다 이제 종이 주의 종들인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주야로 기도하오며 우리 이스라엘 자손이 주께 범죄한 죄들을 자복하오니 주는 귀를 기울이시며 눈을 여시사 종의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이 범죄하여 주를 향하여 크게 악을 행하여 주께서 주의 종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였나이다(느 1:5-7).” 하고 11절까지 이어진다.
다시 9장에서 “오직 주는 여호와시라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과 일월 성신과 땅과 땅 위의 만물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시고 다 보존하시오니 모든 천군이 주께 경배하나이다 주는 하나님 여호와시라 옛적에 아브람을 택하시고 갈대아 우르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을 주시고 그의 마음이 주 앞에서 충성됨을 보시고 그와 더불어 언약을 세우사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여부스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의 땅을 그의 씨에게 주리라 하시더니 그 말씀대로 이루셨사오매 주는 의로우심이로소이다(6-8).” 하고 38절까지 이어진다.
곧 우리도 같은 기도라, 이러한 사실은 포로 시대 이전이나 포로 시대 이후나, 곧 주께 돌이키기 전이나 돌이키고 난 후에나 동일하게 우리는 죄악에 빠져 있음을 알려준다. 이를 바울도 통회하여 고하기를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롬 7:9-10).” 즉 이와 같은 말씀 앞에 앉아 묵상할 때 말씀으로 나는 죄인인 것을 다시금 깨닫는다. 하여서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이로 보건대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11-12).”
곧 이 말씀으로 우리가 우리 자신을 마치 이스라엘의 포로 전후로 살피듯 돌이켜 주를 섬긴다고 하면서도 여전한 나를 돌아보게 한다. 오늘 본문도 이상과 같은 내용으로 ‘다니엘의 통회 기도’와 ‘칠십 이레의 환상’에 대해 주로 소개하고 있다. 특히 칠십 이레의 환상은 가브리엘 천사에 의해 직접 계시된 것으로 포로 귀환과 성전 중건, 그리스도의 성육신, 로마 군대에 의한 성전의 파괴, 적그리스도의 출현 등 이스라엘의 운명과 더불어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에 있을 종말론적 사건이 예언되어 있다. 즉 오늘 우리의 삶도 이에 포함된다.
이는 예레미야가 예언했던 70년 동안의 포로 생활에 대한 말씀을 깨닫고, “이 모든 땅이 폐허가 되어 놀랄 일이 될 것이며 이 민족들은 칠십 년 동안 바벨론의 왕을 섬기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칠십 년이 끝나면 내가 바벨론의 왕과 그의 나라와 갈대아인의 땅을 그 죄악으로 말미암아 벌하여 영원히 폐허가 되게 하되(렘 25:11-12).” 이에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돌보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성취하여 너희를 이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29:10).” 하신 말씀을 따라, 민족의 회복을 위해 기도하는 다니엘의 모습이 오늘 우리의 기도가 된다.
다니엘은 비록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이 없다 할지라도 민족의 죄에 대한 연대감으로 철저하게 통회하였다. 즉 주위 사람들의 죄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며 우리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위해 애통하며 간구하는 것이 중요하다. 곧 우리는 우리 개인만을 생각해서 사는 사람들이 아니다. 현재 내가 속한 가정과 사회와 교회를 위해 곤란해 하고, 시대적 죄악에 대해 같은 책임을 느끼며 중보하는 기도가 필요하다. 오늘 다니엘의 기도는 이를 토대로 한다(1-19). 이방인을 향한 하나님의 계시를 환상의 형태로 묘사하고, 이어서 이스라엘 백성의 미래에 대한 다니엘의 기도를 소개하고 있다. 이러한 다니엘의 기도는 바벨론 포로에서 자유케 될 것이라는 확신에서 오는 믿음의 반응이다.
그는 “이 모든 땅이 폐허가 되어 놀랄 일이 될 것이며 이 민족들은 칠십 년 동안 바벨론의 왕을 섬기리라(렘 25:11).” 하신 말씀을 통하여 바벨론 포로가 70년 만에 끝날 것임을 알았다. 그런데 바벨론의 포로라는 수치스러운 역사가 끝나기 위해서는 백성들의 죄악이 처리되어야 함을 알고 있었다. 이 때문에 회개의 기도를 드리게 되는 것이다. 다니엘의 기도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고백하는 내용으로(3-6), 하나님의 공의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징계를 묘사하고(7-14), 하나님의 긍휼을 호소한다(15-19). 이러한 내용을 통해 민족의 회복과 미래의 영광을 간구하는 다니엘의 삶을 보여준다. 이로써 참된 성도의 자세를 극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이처럼 ‘다니엘의 기도’는 ‘에스라의 기도’와 그 내용과 주제가 비슷하다. 에스라의 기도에서 저는 회개의 자세로 옷을 찢고 금식과 재를 무릅썼다. “내가 이 일을 듣고 속옷과 겉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으며 기가 막혀 앉으니(스 9:3).” 이는 죄의 고백으로 허물이 커서 하늘에 미침이고 “말하기를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끄럽고 낯이 뜨거워서 감히 나의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을 들지 못하오니 이는 우리 죄악이 많아 정수리에 넘치고 우리 허물이 커서 하늘에 미침이니이다(6).” 민족이 범죄하고 패역하여 행악하였으며 반역한 것을 아뢴다. “이에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떠는 자가 사로잡혔던 이 사람들의 죄 때문에 다 내게로 모여오더라 내가 저녁 제사 드릴 때까지 기가 막혀 앉았더니 저녁 제사를 드릴 때에 내가 근심 중에 일어나서 속옷과 겉옷을 찢은 채 무릎을 꿇고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향하여 손을 들고(4-5).”
이처럼 다니엘 또한 “내가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재를 덮어쓰고 주 하나님께 기도하며 간구하기를 결심하고 내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며 자복하여 이르기를 크시고 두려워할 주 하나님,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를 위하여 언약을 지키시고 그에게 인자를 베푸시는 이시여 우리는 이미 범죄하여 패역하며 행악하며 반역하여 주의 법도와 규례를 떠났사오며(단 9:3-5).” 하면서 저들의 죄와 허물을 고한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며 여호와께서 그의 종 선지자들에게 부탁하여 우리 앞에 세우신 율법을 행하지 아니하였음이니이다 온 이스라엘이 주의 율법을 범하고 치우쳐 가서 주의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저주가 우리에게 내렸으되 곧 하나님의 종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맹세대로 되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주께 범죄하였음이니이다(10-11).”
이 사실은 다니엘이 예레미야가 기록한 말씀을 읽고, “이 모든 땅이 폐허가 되어 놀랄 일이 될 것이며 이 민족들은 칠십 년 동안 바벨론의 왕을 섬기리라(렘 25:11).”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이 시대적인 소명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곧 나는 이처럼 묵상을 글로 쓰면서 한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모든 말씀은 나를 위한 것으로, 우리의 이야기와 같다. 오늘 본문의 내용이 수천 년 전 이스라엘의 역사가 아니라, 오늘도 여전하여 우리 믿는 자들의 허물과 죄악과도 동일한 것을 깨닫는다. 하여 이를 일기 쓰듯 나의 하루하루와 연관 지어 돌아보며 주를 바라게 된다.
어제도 교회를 이전할 장소에 가서 내부를 살피고, 그 좁은 공간이나 어쩌면 나의 마지막 목회현장이 될 것이라 생각하며 둘러보았다. 하나님은 나에게 많은 사람이나 여러 분주한 일을 맡기지 않으셨다. 어떤 강의나 강연, 많은 사람을 통솔하여 목양하는 일도 맡기지 않으셨다. 어제도 가만히 가구 배치를 놓고 생각하다, 한 영혼으로 그 상한 심령을 어떻게 하면 어루만지며 주께 다시 세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좁은 공간이지만 둘러앉으면 열다섯 명 이상은 되겠다. 나는 이 글을 쓰면서도 기도하는 마음으로는 누가 읽고, 나의 이 미력한 글에서 자신을 돌아보기를 바란다. 우린 그렇듯 서로의 모습에서 자신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나의 중심에는 말씀이 있다. 말씀으로가 아니면 반석 위에 세울 수 없다. 찬송도 열정적인 기도도 중요하고, 선교나 전도도 필연적이겠지만 이는 결국 말씀이 초석이 돼야 한다. 우리 교회 이름의 뜻과 같이 하나님을 나타내는 삶이란, 자신의 허물과 죄를 돌이키며 고백하는 것으로도 일조한다. 마치 나의 연약함과 그에 따른 사투가 누군가의 공감을 얻어서, 내가 의사는 아니지만 같은 환자로서 그 아픔에 위로가 되는 것과 같다. 이를 내가 차별화하는 게 있다면 글쓰기다. 나는 자주 누구에게든지 글쓰기를 권한다. 말과 글의 차이를 여기서 변론하기는 어렵지만, 말은 지극히 감정적이면 글은 한 차례 자기 안에서 정제가 이루어진다. 적절한 단어를 선택하고 하나의 문장이 되고자 할 때, 감정으로 들끓던 생각은 인격적으로 자신을 마주하게 한다.
곧 우리 자신은 죽어 마땅한 죄인이라, 감정적으로는 격정적으로 사로잡힐 수 있지만 일시적이고 그 때 뿐이다. 오늘 본문도 다니엘의 이와 같은 성찰은 예레미야가 남겨놓은 글에서 기인한 것이다. 이처럼 일기와 같이 자신의 일상은 곧 기억에서 사라질 수 있고, 감정은 식어져서 시들할 수 있지만 글로 남겨졌을 때 되새김이 가능해진다. 더욱이 나는 하루 일과 중에 수시로 나의 묵상글을 읽곤 한다. 혼자 있을 때, 하다못해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거나 병원에서 대기하고 있을 때, 나는 아침에 쓴 묵상글을 읽으며 지금 이 심정을 되새긴다. 느낌은 무뎌지고 사그라져 언제 다른 감정으로 요동칠지 모르지만 글로 남겨진 마음은 자신을 또는 남을 감화시키는 힘이 있다.
모든 역사마다 작가가 그 기록을 남겼듯이 나의 일상은 온통 하나님의 이야기로 가득하다. 순간순간 느끼는 어떤 감정이 있다. 가령 부동산 사람들 특유의 친절이겠지만 ‘네, 목사님’ 하고 나의 전화를 받고, 우리가 얻을 장소가 일개 매물이 아니라 교회인 것을 또한 그곳에서 어떤 일이 이루어질지를 저들은 은연중에 이해하고 있었다. 믿거나 아니 믿거나, 그런 그들의 태도에서 나는 문득 내가 누구인지를 되새겼다. 여기서 뭘 하려고 하는지를… 어제 느낀 이러한 감정을 글로 남겼을 때, 나는 이 글을 어디서 언제 읽을 때면 새삼 나에게 맡기신 이 막중한 사명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오늘 다니엘이 회개하며 민족의 잘못을 고할 때 예레미야의 글을 토대로 한 것처럼!
“곧 그 통치 원년에 나 다니엘이 책을 통해 여호와께서 말씀으로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알려 주신 그 연수를 깨달았나니 곧 예루살렘의 황폐함이 칠십 년만에 그치리라 하신 것이니라(2).”
성경 어디를 펴든지, 그 말씀은 오늘의 나의 이야기로 참된 회개의 기도를 요구한다(3-6). 이스라엘의 타락과 반역은 나의 일상에서도 소소하게 일어나는 일과 가운데 행해진다(렘 7:9-11). 그래서 하나님은 앗수르와 바벨론 같은 도구를 사용하여 오늘 우리로 돌이켜 회개하개 하신다(단 9:7-14).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에 우리도 거룩해야 하지만 우리가 거룩할 수 있는 길은 자신의 죄를 돌이켜 하나님의 선하심 앞에 아뢸 때 그 품에 감싸인다. 이러한 하나님의 심판이 말씀에서 근거한다.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이 모든 재앙이 이미 우리에게 내렸사오나 우리는 우리의 죄악을 떠나고 주의 진리를 깨달아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얼굴을 기쁘게 하지 아니하였나이다(13).”
곧 오늘도 하나님의 공의를 인정하는 기도로 우리가 거룩하여질 수 있다. 그렇게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기도를 드려야 한다(15-19). 소망이 없는 삶은 기도가 말랐고, 회개가 없는 삶은 하나님의 긍휼을 구할 줄 모른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누리지 못할 때 하루하루의 삶이 그저 우울하고 답답하고, 피곤하고 바쁠 따름이다. 이러한 생활은 온전한 생명을 유지하기 어렵다. 하여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눅 18:13).” 하였을 때 저는 비로소 죽었던 영혼이 살아났다. 곧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와 긍휼을 가장 잘 설명해 주는 표본이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3-24).”
하여 오늘 ‘칠십 이레의 환상’은(20-27) 회복과 함께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계시한다. 세상에 포로 되었던 우리 영혼이 비로서 소망 가운데 이 ‘칠십의 일곱들’이 지나면 완성될 것이다. 이는 70이라는 숫자보다 ‘7’이라는 숫자에 강조점을 두고 있어서, ‘7’에 대한 해석은 1차적으로 고레스 원년부터 2차 성전의 건축까지, 2차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까지, 희년의 제도와 같이 완전한 자유의 7년씩 7번을 지나 50년이 되는, ‘70이레의 마지막 해’는 모든 부채를 탕감하는 것이다. 곧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허물이 마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의 영속(永續)되는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우리 죄가 완전히 제거되는, 완성의 순간이다. 이는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한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이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히 9:26).”
하여 오늘도 주의 긍휼하심으로 주의 긍휼하심을 바라고, 주의 은혜로 주의 은혜를 말씀을 가지고 산다. 이를 위하여 예수님은 친히 제사장과 제물이 되셔서 우리 죄를 기억하지도 못하는 것은 완벽하고 영원한 제사를 드렸기 때문이다.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나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히 10:4, 11, 14).”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위에 말씀하시기를 주께서는 제사와 예물과 번제와 속죄제는 원하지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하셨고 (이는 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라)(8).” 그러므로 ‘70의 7’이 지났을 때, 메시야 시대는 영원할 것이다. 그리하여 오늘도 주 앞에서,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신들 중에 뛰어난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36:1-2).
우리로 기도가 쉬지 않게 하심은 감사로 살게 하려 하심이다. 이 모든 일을 주가 홀로 하신다. 그러므로
홀로 큰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는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지혜로 하늘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
하늘의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4-5, 2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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