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하현. 2026. 3. 27. 04:02

 

너는 가서 마지막을 기다리라 이는 네가 평안히 쉬다가 끝날에는 네 몫을 누릴 것임이라

단 12:13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시 139:14

 

 

우리는 살면서 보고도 알지 못하고 듣고도 깨닫지 못하는 게 많다. 이때 우리는 ‘내 주여!’ 하고 주 앞에 묻는다. 오늘 다니엘도 이 모든 일에 대하여 “내가 듣고도 깨닫지 못한지라 내가 이르되 내 주여 이 모든 일의 결국이 어떠하겠나이까 하니 그가 이르되 다니엘아 갈지어다 이 말은 마지막 때까지 간수하고 봉함할 것임이니라(8-9).” 하신 후에 “많은 사람이 연단을 받아 스스로 정결하게 하며 희게 할 것이나 악한 사람은 악을 행하리니 악한 자는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되 오직 지혜 있는 자는 깨달으리라(10).” 하고 이르신다.

 

우리가 사는 세상의 역사가 어떠한 흐름을 갖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내용이다. 성경은 이 일이 역사 속의 한 단면인 것을 왕국과 왕의 이름까지 거명하여 밝힌다. 이렇게 세상의 이면에 있는 영적 측면을 부각시키고, 이어 오늘은 그 전쟁의 결국에 대해 묘사한다. 이제까지 다양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계시를 묘사하고 있는 이전의 말씀(1-11장)에 대한 결론으로, 하나님의 주권적 구원 역사를 집중적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곧 모든 일의 주체가 하나님이신 것을 나타내준다. 이스라엘의 역사상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대해 가장 심각한 회의를 불러일으켰던 어두운 시대에 이처럼 하나님의 주권을 선명하게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 또한 아이러니하다.

 

이러한 본장은 마지막 때에 있을 여러 현상들을 묘사하고(1-4), 마지막 날에 있을 현상들을 구체적인 시기에 따라 질문과 응답으로 소개하고 있다(5-7). 그런 가운데 다니엘은 주께 재차 묻고 말씀은 이에 답하신다(8-13). 이러한 내용을 통해 하나님께서 종말에 어떻게 사탄의 세력을 완전히 파괴하시는지 보여준다. 세상과 사탄은 넘볼 수 없는 완전한 하나님 나라를 부각시키고 있다. 그런 점에서 본문은 종말론적인 분위기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러한 사실은 10장부터 전개되는 싸움의 흐름이 신앙의 성격을 띠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신들과 부어 만든 우상들과 은과 금의 아름다운 그릇들은 다 노략하여 애굽으로 가져갈 것이요 몇 해 동안은 그가 북방 왕을 치지 아니하리라(11:8).” 또한 “그 왕은 자기 마음대로 행하며 스스로 높여 모든 신보다 크다 하며 비상한 말로 신들의 신을 대적하며 형통하기를 분노하심이 그칠 때까지 하리니 이는 그 작정된 일을 반드시 이룰 것임이라(36).” 하여 전쟁에 대한 묘사 자체가 구체적이기 보다 암시적이며 예언적이라는 것을 알게 한다.

 

이러한 사실은 마지막 때의 모습과 유사하다. 오늘 본문의 서두에서 “그 때에 네 민족을 호위하는 큰 군주 미가엘이 일어날 것이요 또 환난이 있으리니 이는 개국 이래로 그 때까지 없던 환난일 것이며 그 때에 네 백성 중 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받을 것이라(1).” 하시면서 그때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땅의 티끌 가운데에서 자는 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깨어나 영생을 받는 자도 있겠고 수치를 당하여서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할 자도 있을 것이며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2-3).” 하고 밝힌 것과 같이,

 

“이는 그 날들이 환난의 날이 되겠음이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시초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만일 주께서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하셨더라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거늘 자기가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셨느니라(막 13:19-20).”

 

하고 말세의 때를 전한다. 그러므로 11장부터 전개되는 전쟁과 그 결과는 종말론적인 사건에 대한 예표로 볼 수 있다. 예수님이 감람 산 강화에서 이 사건을 인용하신 것도 그 때문이다. “이는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마 24:21).” 이러한 사실이 뒷받침해 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는 현 교회 시대를 마감하도록 결정지을 마지막 때 대환난과 관련하여 오늘 본문의 예언이 암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우리의 참된 소망은 오직 하나님 나라에 있음을 알게 한다.

 

그리하여 교회를 이루시고 전개하는 데 있어 하나님은 결코 그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으신다. 최소한 나는 이 교회가 어떻게 형성되고 오늘에까지 이르렀는지, 그때마다 우리는 속수무책으로 주가 이루시는 데에 맡겨질 따름이었다. 어제도 그렇게 해서 교회가 정리되면서 이곳에서의 뒷마무리가 이루어지는 계기가 있었다. 누가 갑자기 이곳에 들어오겠다며 거래가 성사되는가했고, 우리더러는 다음 주 토요일까지는 여기 모든 것을 비워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렇게 해서 부랴부랴 다시 와서 정리할 것, 치울 것을 나누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런데 가운데서 권리금이 어떻고 하면서 서로의 마무리를 어색하게 만들었다.

 

어찌 전개될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여기가 교회였고, 우리는 믿는 자들로 새로 오는 이는 물론 주인에게도 폐가 되지 않도록 해야 했다. 더욱이 주인이 냉온풍기를 달아줄 정도로 마음을 주었는데 이제 나간다고 나 몰라라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마치 누가 와서 책을 가져가는데, 너무 좋은 책이 많다면서 좋아하는 모습에서 나는 서운함보다 기쁨을 느끼는 것과 같다. 마치 어제 새삼 느끼는 것은 이미 정해진 일에 있어서, 우리가 어떻게 처신하는가를 보고자 하시는 것 같았다. 마치 오늘 말씀과 같이 “많은 사람이 연단을 받아 스스로 정결하게 하며 희게 할 것이나 악한 사람은 악을 행하리니 악한 자는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되 오직 지혜 있는 자는 깨달으리라(10).”

 

현재 우리 사정으로는 걱정뿐이다. 새로 들어가야 할 곳의 보증금도 몇 백 모자란 지경이라, 은행에서 어찌 대출을 받을 수 있으려나… 하고 궁리해야 한다. 그곳 장소도 협소하고, 이사비용 대신 새롭게 장만하자 하는 생각으로 우리가 여기서 치우고 처리해야 할 게 많아졌다. 번거로운 일이어서 다들 돈으로 해결하려 하지만 그럴 형편이 아니라, 아내는 일일이 ‘당근’에 내놓고 나눔을 하거나 단돈 1, 2만원이라도 받으려고 애쓴다. 이렇게 우린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으로 주어진 상황에 충실하면서도, 행여 주의 이름에 욕이 되지 않도록 뒤처리를 신경 쓰는 것이다. 시작보다 끝이 어려운 게 그 때문이다.

 

여하튼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에 더욱 적그리스도에 의한 환난과 핍박을 받게 된다. 그러나 이 시련을 이기고 승리하는 자에게는 영생과 축복이 허락된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의 이름을 생명책에 기록하시고 구원해 주신다. 특별히 인간의 연약함과 부패함을 헤아리시고, ‘미가엘’을 통하여 보호해 주신다. “그 때에 네 민족을 호위하는 큰 군주 미가엘이 일어날 것이요 또 환난이 있으리니 이는 개국 이래로 그 때까지 없던 환난일 것이며 그 때에 네 백성 중 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받을 것이라(1).” 하심 같이 “천사장 미가엘이 모세의 시체에 관하여 마귀와 다투어 변론할 때에 감히 비방하는 판결을 내리지 못하고 다만 말하되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 하였거늘(유 1:9).” 저가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과 더불어 싸울새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계 12:7).” 하는 것이다.

 

곧 우리는 썩어질 이 세상에 미련을 갖기보다 영광스러운 장래의 일에 소망을 두고 이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과 같다. 이를 오늘 본문은 새삼 강조하며 마지막 날에 있을 일들을 알게 하는 것이다(1-4). 이는 전 단락(11:20-45)에서 언급되었던 마지막 때의 일들은 주로 전쟁의 비참한 상황에 관한 것이었다면 본장에서 나타나는 마지막 때의 상황은 이전의 모습들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곧 일어날 부정적인 양상을 묘사하기보다 종국에 있을 긍정적인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본서의 핵심 인물이었던 다니엘에게 하나님의 계시가 종결되는 국면을 보이시고 이를 기술하게 한다.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의 계시의 방법과 구원의 방식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즉, 하나님은 인간을 중개로 하여 자신의 뜻을 온 세상에 전하는 방법을 사용하시며, 이러한 뜻에서도 우리가 어디에 들고 날 때 그 처음과 끝이 하나님의 이름을 나타내는 게 주의해야 하는 이유다. 떠나면 그만이고, 안 볼 사람이란 생각으로 일처리를 해선 안 된다. 뜻을 전하는 사람으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소유하고 저들을 주의 사랑으로 대해야 한다. 설령 부당하게 손해가 따르고 더러는 엉뚱한 오해로 서로의 관계가 더 어그러진다 해도,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으로 교회로, 성도로, 한 영혼을 살피고 마주하듯 섬겨야 옳다. 그런 점에서 어떤 이는 설레발치며 당장의 이익을 추구한다 해도 우리는 이를 알면서도 더러는 모르는 척 하며 저를 내버려둔다. 이것은 우리 삶이 언제나 종말론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지막 대환란이 닥쳐도 우리는 엄연히 구원 받은 자녀인 것을 더욱 확신한다. “이는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하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나 그러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리라(마 24:21-22).” 그럴 때 “장로 중 하나가 응답하여 나에게 이르되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냐 내가 말하기를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나에게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계 7:13-14).” 하심도 오늘을 반영하여 듣게 된다.

 

곧 모든 사람은 마지막 때에 부활하여 영생이나 영벌을 받아야 한다. 오늘 2절이 그 내용이다. “땅의 티끌 가운데에서 자는 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깨어나 영생을 받는 자도 있겠고 수치를 당하여서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할 자도 있을 것이며” 이에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 5:28-29).”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도 그 뜻이다.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살전 4:14).”

 

하시는 말씀을 묵상해야 한다. 떠나고 헤어지면 끝이 아니고, 죽음으로도 끝은 아니다. 오늘 우리가 영생을 의식하든 무의식으로 살든, 사람이 사람을 대하고 어디로 옮겨가고 하는 모든 일에서 하나님을 생각하고 그 일을 염두에 두고 소망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마 5:19).” 하심을 염두에 두고,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그들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 바 되어 그 뜻을 따르게 하실까 함이라(딤후 2:25-26).”

 

그러므로 한 생을 살아가면서 더러는 원치 않는 일에 놓이거나 반대로 예상도 못한 좋은 일이 온다 해도 이 모두는 계시의 말씀으로 듣고, 읽고, 바르게 독해해야 한다. 이에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모든 말을 너희는 지켜 행하고 그것에 가감하지 말지니라(신 12:32).” 하심을 다시 한 번 되새겨본다. 왜냐하면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 24:14).” 곧 오늘 이 하루도 우리의 생명이 연장되어 이 땅을 사는 것은 “또 보니 다른 천사가 공중에 날아가는데 땅에 거주하는 자들 곧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졌더라(계 14:6).” 그렇게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오늘 이 다니엘은 자신에게 닥친 여러 가지 어려운 역사적 형편과 개인적으로 견디기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본연의 임무를 충실하게 수행하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어릴 적에 이미 ‘뜻을 정하여(1:8).’ 다니엘이 오늘을 사는 우리 성도들에게도 귀한 신앙적 모범이 되는 삶을 살았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 하나님은 마지막 이 계시의 말씀을 다니엘에게 위임하는 것으로 끝을 맺고 있는 것이다. “다니엘아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4).” 이처럼 종말론적 분위기를 강하게 드러내면서 의도하는 것은, 마지막 날에 있을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을(1-3), 다니엘에게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맡기는 것으로(4) 오늘 우리의 사명 또한 선명하게 알게 한다.

 

그리하여 구약의 부활 사상은 뚜렷하게 여러 곳에서 증거된다. 먼저 오늘 2절에서도 “땅의 티끌 가운데에서 자는 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깨어나 영생을 받는 자도 있겠고 수치를 당하여서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할 자도 있을 것이며” 이를 이사야서에서는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그들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누운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들을 내놓으리로다(사 26:19).” 하고 부활을 선명하게 다루었다. 그 뿐인가? “마침 사람을 장사하는 자들이 그 도적 떼를 보고 그의 시체를 엘리사의 묘실에 들이던지매 시체가 엘리사의 뼈에 닿자 곧 회생하여 일어섰더라(왕하 13:21).” 하는 놀라운 사건으로도 부활을 알게 한다.

 

예수님은 물론 죽었던 나사로에게도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요 11:43-44).” 하고 죽음에 싸였다가 걸어 나오는 것을 본다. 이는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죽음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아나게 하라 하셨다 하라 이에 내가 그 명령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나서 일어나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겔 37:9-10).”

 

이와 같이 나는 나의 삶 속에서도 부활을 산다. 실의와 낙심으로 힘겨워하다가도 이 모든 ‘부활 사상’은 예수님 스스로 부활하심으로써 온전히 성취되었음을 묵상한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막 8:31).” 이를 가르치시고 실전에 임하셨던 것 같이, 오늘도 미가엘 선지자가 등장하고, 하나님 백성들의 구원이 확실해진다는 것을 본다. 이때에 오직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들로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게 범죄하면 내가 내 책에서 그를 지워 버리리라(출 32:33).” 이를 진정으로 두려워할 줄 아는 게 복이다.

 

오늘 말씀도 그것이다. “…악한 자는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되 오직 지혜 있는 자는 깨달으리라(단 12:10).” 하시고 이르시되 “너는 가서 마지막을 기다리라 이는 네가 평안히 쉬다가 끝날에는 네 몫을 누릴 것임이라(13).” 하실 때에,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시 139:1-4).

 

하여 더욱이 조심하는 것이어서, 우리가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7).

 

이를 인정함으로,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14).

 

오늘도 여기까지, 얼추 치울 게 치워지고 앉을 자리도 애매한 곳임에도 새벽에 주 앞에 올라온 것은,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

(23-2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