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하현. 2026. 3. 28. 04:16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닷가의 모래 같이 되어서 헤아릴 수도 없고 셀 수도 없을 것이며 전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할 것이라
호 1:10


 
내가 여호와께 말하기를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여호와여 나의 간구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 하였나이다
시 140:6
 

 
본문은 아모스 선지자와 함께  북이스라엘의 최고 전성기였던 주전 8세기에 활동하였던 호세아 선지자의 전언이다. 전반부(1-3장)에서는 호세아 선지자의 특이한 가정사와 관련된 하나님의 명령과 이에 수반되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경고와 예언을 전한다. 후반부(4-14장)에서는 죄의식과 위기의식이 결여된 선민을 향하여 그들의 가증스러운 전방위적 타락을 지적하고 심판을 경고하고 여호와의 용서와 선민의 회복을 약속하여 각성하고 회개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이에 아홉 편의 예언이 수록되어 있다.
 


오늘 본문은 이 글의 저자인 호세아에 대해 설명한다. 호세아의 활동 연대와 결혼과 출산 과정에 대한 총론적으로 예언이 다루어진다.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가 이어 유다 왕이 된 시대 곧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왕이 된 시대에 브에리의 아들 호세아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1).”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 호세아에게 임하였음을 분명히 한다. 이 말씀이 임한 시기는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가 이어 유다의 왕이 된 시대에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이 북이스라엘의 왕이 된 시대라고 밝힌다. 호세아가 북이스라엘에서 활동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선지자로 활동한 시기를 남유다의 왕들과 관련하여 밝힌다.

 
호세아는 자신이 선지자로 활동하던 시기의 유다 왕들을 일일이 언급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활동무대인 북이스라엘의 왕은 여로보암만 언급한다. 호세아가 유다에 대해 정통성을 부여받은 나라로 보았기 때문이며, 다른 한편으로 여로보암을 제외한 그 이후의 북이스라엘 왕들은 모두 앞선 왕들에 의해 암살하여 왕이 된, 정통성이 없는 범죄자인 것을 은연중에 밝히는 것이다. 북이스라엘 13대 왕 여로보암 2세의 통치 말기인 주전 755년경에 호세아는 선지자로 활동을 시작하여 제19대 마지막 왕 호세아가 통치한 주전 722년까지 선지자로 활동하였다. 그가 선지사로 시작할 당시 북이스라엘은 역사상 최전성기라 할 만큼 영토를 확장하였고, 경제적으로 풍요를 구가하던 시기였다.

 
당시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는 뿌리 깊이 썩었고, 고질적인 우상 승배로 피폐하여 있었다. 이를 오늘 본문에서 호세아는 자신의 결혼과 출산 과정으로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처음 호세아에게 말씀하실 때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음란함이니라 하시니(2).” 하고 이를 통해 당시의 이스라엘이 어떠했는가를 은유적으로 알리신다. 이렇듯 호세아는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가 이어 유다 왕이 된 시대”에 북이스라엘에서 정치, 종교, 도덕 등에 관련된 죄악상을 몸소 삶으로 살아서 증거가 되게 하신다.

 
당시 여로보암 2세 통치 말기부터 북왕국이 앗수르에게 멸망당한 주전 722년경까지 약 40여 년 동안 선지자로 활동하였다. 이 시기는 이스라엘의 번영과 쇠퇴가 교차하는 때이고, 정치와 종교적으로 비극적이고 암울했던 시기이다. 그러면서 상대적으로 유다 왕이 네 명이 기록된 반면 북이스라엘 왕은 여로보암 한 명밖에 언급되지 않는다. 그래서 호세아 선지자가 남쪽 유다 출신으로 북이스라엘에 파송된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다윗 왕조의 정통성을 세우시리라는 약속대로, 북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이 다윗의 하나님인 여호와께로 돌아오는 것에 있음을 알리기 위한 것이다.

 
이를 오늘 7절에서 밝힌다. “그러나 내가 유다 족속을 긍휼히 여겨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로 구원하겠고 활과 칼이나 전쟁이나 말과 마병으로 구원하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뒤이어 3장에서 “그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돌아와서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와 그들의 왕 다윗을 찾고 마지막 날에는 여호와를 경외하므로 여호와와 그의 은총으로 나아가리라(5).” 하고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전달하고 있다. 또한 북이스라엘의 정치적 불안과 혼란을 유다 왕조의 정통성과 대조하기 위해 유다의 왕들을 중첩시켜 기록하고 있다. 북이스라엘을 멸망으로 이끈 배교의 죄악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증거가 된다.

 
이때에 북이스라엘의 여섯 왕들인 스가랴, 살룸, 므나헴, 브가히야, 베가, 호세아에 대한 기록이 빠진 것이다. 그 까닭을 알 수 없지만 확실히 아는 것은 호세아가 여로보암 2세 전에 이스라엘 왕조의 쇠퇴를 예고했다는 것과 여로보암 왕만은 반역에 의하지 않고 정당하게 왕위를 계승했다는 점이다. 즉 호세아는 여로보암을 여호와께서 북왕국을 위해 세우신 마지막 왕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또 이스라엘의 이름을 천하에서 없이 하겠다고도 아니하셨으므로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의 손으로 구원하심이었더라(왕하 14:27).”
 

호세아의 부친인 부에리는 ‘샘’, 또는 ‘설명하는 자’라는 뜻이다. 이어 호세아의 뜻은 ‘구원’이란 의미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구원자이심을 그대로 반영하는 이름이겠다. 이에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였다. 이는 선지자를 통한 여호와의 교통을 암시한다. 선지자의 사역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다.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요엘 등 모든 선지자가 그러하여,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받은 바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한 말씀이라(사 2:1).” 하였고, “아몬의 아들 유다 왕 요시야가 다스린 지 십삼 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였고(렘 1:2).” 하면서 그 의미를 분명히 한다.
 

특이한 것은 호세아로 하여금 몸소 ‘음란한 아내’를 취하게 하신 것이다. “여호와께서 처음 호세아에게 말씀하실 때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음란함이니라 하시니(2).” 하실 때 호세아를 통하여 하나님의 계시가 그의 삶으로 반영되어 전달하게 하시는 것이다. 곧 음란한 아내를 취하라고 하시는 것은 말씀 그대로 결혼하라는 의미인데, 그 상대가 ‘음란한’이란 전제로 음란한 여자와 음란한 자식을 낳으라는 것이다. 여기서 음란은 음탕한 기질로 매춘부를 가리킨다. 그런데, 이 같은 명령이 하나님의 도덕성과 거룩함에 맞지 않다.
 

그래서 이를 실제 결혼이 아니라 은유적이고 가설적으로 상징하는 것이란 해석도 있다. 또한 이를 영적인 불신앙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여자의 음란을 이스라엘의 타락으로 빗대어 영적 음란으로 전달하려는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이 선지자의 내적이고 영적인 본능 속에 행하여진 것이라 이해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문자적으로 선지자는 실제 삶에서 결혼이라는 것을 통해 그 상대 여자와 결혼하고 그런 자식을 낳으라는 명령이다. 하나님은 선지자에게 직접 이와 같은 경험을 통해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알게 하신다는 것이다.
 

음란한 여인과의 결혼은 실제 음란죄를 범하라는 것이 아니라, 여인의 죄악 된 관습을 치료하여 선지자 자신의 수준으로 높이기 위한 결합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이는 하나님의 거룩한 목적을 완성하기 위한 하나의 고상한 명령이자 선지자의 의무일 뿐 결코 실제 삶에서 도덕적으로 이와 같이 죄에 결부되어 있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을 받아들일 때 음란한 여인과 결혼하라고 명령하시는 하나님의 속성이 불의하시다거나 또는 그 명령대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호세아 선지자에게 죄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다만 우리가 상식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러한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는 의문이다. 다만 그렇다 해도 순종함으로 다음 이야기의 전개가 가능해진다. 곧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는 것인데 혹자는 고멜이 결혼 시에 이미 자녀들을 데리고 왔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전체의 문맥을 고려해 볼 때, 호세아는 고멜을 통해 세 명의 음란한 자식들을 낳았다(4-9). 이 세 자녀에 대해 일일이 언급하심은 구체적이다. 무엇보다 여기서 먼저 짚고 넘어가게 되는 것은 우리의 이해나 납득과 무관한 하나님의 명령이 주어질 때도 있다.
 

가령 지금 나는 교회 물건들 대부분이 ‘당근’에다 나눔으로 정리되어 휑한 가운데 앉아 있다. 시쳇말로 일이 꼬여서 당장 이번 주말까지 비워줘야 하고, 다음 주 초에 보증금을 돌려받고 다음 주일부터는 새로 이전하는 곳에서 예배를 드릴 수 있을 거라 여겼다. 하여 이틀에 걸쳐 급히 정리하고 처분하고 이번 주일 오후에는 가져갈 책들과 몇 가지 집기만 남기고 다 정리할 거였다. 오늘 오전에 책장과 나머지 책들을 모두 ‘당근’에서 가져가기로 돼 있다. 그런데 갑자기 일이 어그러졌다. 중개인이 권리금을 얹어 받아주려던 것이 사달이 나서 결국은 주인이 들어오겠다는 업종의 일과 사람을 거부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졸지에 우리도 나가지도 못하고, 이전하기로 한 곳과는 계약이 다음 주에 날짜가 잡혔다. 난감하게 되었다.
 

누구의 잘잘못을 떠나 일이 또 그렇게도 된다. 그럼에도 나는 집기들이 대부분 빠져 덩그러니 휑한 성전에 나와서 평소처럼 말씀을 묵상하고 글을 쓴다. 그래도 아직 인터넷과 정수기는 끊어지지 않아서 다행이다. 하긴 어려서 중3 때였다. 나환자촌 교회에서 나와서 인천에 어느 개척 교회를 인수하여 들어가기로 하고 의정부 저 안쪽에서 이사를 왔는데, 이 무슨 이유 때문인지 당장 그럴 수 없는 처지에 놓였다. 그런 가운데 하나님은 옆 건물 옥상을 예비하셨고, 부친의 책꽂이들과 장롱 등으로 벽을 쌓고 비닐포를 가져다 뒤덮고, 바닥을 깔고 며칠을 그곳에서 생활하며 전학한 학교를 다녔던 기억이 난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나환자촌 교회로 들어가지 전에는 교회가 세든 건물 옥상에다 무허가 가건물로 집을 짓과 생활해 봐서 그런가? 한 번 경험이 있어서 중3 땐 또 그러려니 했다.
 

돌아보니 어릴 때 부친의 목회 현장에서 또는 오늘 나의 교회를 이루어가는 일에서도 이러한 경험은 수두룩하다. 그 지경에도 어떻게 살았나? 싶을 정도로 황당한데, 다 또 평안히 새로운 길을 열어주셨다. 인천에서 개척하여 교회를 건축하기까지, 건축을 하다 믿었던 건축회개담당 집사의 잠적으로 부도가 나면서 7, 8년을 빚더미에 앉아 시달리며 살던 시절은 지옥 같았다. 그때 아이 둘에 달랑 돈 천만 원을 들고 방 두 개짜리 월세와 아내 미술학원까지 같은 건물에 얻어서 생활하였던 때는 신기할 정도다. 모 모임 의사내외가 아무 조건없이 2천만 원을 내주어서 그리 해결되었다. 지금 우리 아이들이 그곳에서 사춘기를 났으니, 저들 기억 속에서 그 시절은 어떠했을지, 가끔은 궁금하기도 하다.
 

이처럼 어릴 때부터 나는 부친의 목회현장에서 저 지긋지긋한 가난과 잦은 이사와 전학으로 치를 떨며 목사로 서원했던 길을 끝까지 도망치다 뒤늦게 붙들린 셈이니…. 오늘 호세아의 터무니없는 순종과 하나님의 말도 안 되는 명령이 불가해하지는 않다. 문제는 그럼에도 어찌할 것인가? 순종이냐 불순종이냐? 하는 문제만 남는다. 지금 나는 의자 세 개, 보조 의자 네 개, 책상 네 줄만 남은 공간에서 평소처럼 새벽예배로 말씀을 묵상한다. 주일도 이런 상황에서 주일을 지키기로 할 것이다. 우리도 어쩔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경우라, 가정에서 예배를 드릴까 하다 아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일예배를 성전에서 드리자고 하여 그게 옳다고 여겼다. 오직 순종은 우리의 이해와 납득을 요구하지 않는다. 말씀은 우리를 설득하지 않는다. 전적으로 순종이냐, 불순종이냐, 이게 문제다.
 

이사야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도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사 55:8-9).” 그러므로 이를 인정하는 데서 순종은 가능하다. 이때 우리의 처지나 상황은 순종의 조건이 될 수 없다. 에스겔 선지자는 전하길, “인자야 내가 네 눈에 기뻐하는 것을 한 번 쳐서 빼앗으리니 너는 슬퍼하거나 울거나 눈물을 흘리거나 하지 말며(겔 24:16).” 때론 이러한 상황이 난감하고 속수무책인 것 같아도 주께서 또 새 길을 열어주신다. “내가 아침에 백성에게 말하였더니 저녁에 내 아내가 죽었으므로 아침에 내가 받은 명령대로 행하매(18).” 어떠하든지 순종뿐이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고백하기를  “내가 말할 때마다 외치며 파멸과 멸망을 선포하므로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 거리가 됨이니이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렘 20:8-9).” 정말이지 이게 너무 싫어서, 어릴 때부터 이런 불확실성 내지는 모험으로 사는 것 같은 목회의 삶이 싫어서 그처럼 목사가 되기를 거부했었다. 이곳도 이곳이지만 가계약을 걸고 새로 가려고 한 곳도 어찌 될지 모르겠다. 신앙으로 사는 삶이란 불확실성의 모호함 속으로 들어가는 모험 같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순종이냐 불순종이냐? 하고 물으시는 것 같다. 마치 여호수아에게 범람한 요단강을 사이에 두고 넘치는 물을 딛고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라 하시는 것과 같다.    
 

갑자기 누가 우울증으로 힘들어할 때, 다음 주 월요일에 이제 중학생이 된 어린 자식을 데리고 지능검사와 함께 심리검사를 하기로 한 아이엄마에게, ‘감사면 돼!’ 하고 말해주는 일이란 어렵다. 우울증으로 교수 일도, 어디 병원에서의 일도, 중단한 사회생활에서 간신히 약물에 의존하면서 일상을 살면서도 감사하는 이에게 나는 말했던 것이다. ‘감사하면 된 거야!’ 그렇듯 우리가 감사할 수 없는 처지에 감사하기란, 예수님도 그러셨던 것처럼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막 14:36).” 순종뿐이다. 흔히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산다'는 말, 이는 본문에서 호세아의 순종과 같이 우리에게도 순종만이 감사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을 알게 한다.
 

오히려 경계할 것은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롬 2:4).” 하심 같이 우리의 적당함이 안이함을 부르고, 무난함이 나태함을 조장하여서 우리의 신앙을 해이하게 하지는 않는지? 나의 생에 이제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교회 이전과 남은 십 수 년의 사역에 앞서, 하나님이 더하시는 오늘 이 시간, 마음을 단단히 동이고 주만 의지함으로 사람과 현실에서 좌지우지 않게 하시려는 것이다.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그를 바라리라 하도다 기다리는 자들에게나 구하는 영혼들에게 여호와는 선하시도다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애 3:24-26).”
 

하여 오늘도,

 
여호와여 악인에게서 나를 건지시며
포악한 자에게서 나를 보전하소서
그들이 마음속으로 악을 꾀하고
싸우기 위하여 매일 모이오며
뱀 같이 그 혀를 날카롭게 하니
그 입술 아래에는 독사의 독이 있나이다 (셀라)
(시 140:1-3).
 

나의 현실에서 나는 주를 부르며,

 
내가 여호와께 말하기를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여호와여 나의 간구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 하였나이다
내 구원의 능력이신 주 여호와여
전쟁의 날에 주께서 내 머리를 가려 주셨나이다
(6-7).
 

그러므로
 

내가 알거니와 여호와는 고난 당하는 자를 변호해 주시며
궁핍한 자에게 정의를 베푸시리이다
진실로 의인들이 주의 이름에 감사하며
정직한 자들이 주의 앞에서 살리이다
(12-1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