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

하현. 2026. 4. 1. 06:48

 

이스라엘의 교만이 그 얼굴에 드러났나니 그 죄악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과 에브라임이 넘어지고 유다도 그들과 함께 넘어지리라

호 5:5

 

여호와는 나의 사랑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요 나의 산성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방패이시니 내가 그에게 피하였고 그가 내 백성을 내게 복종하게 하셨나이다… 이러한 백성은 복이 있나니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

시 144:2, 15

 

 

이스라엘의 제사장들, 족속들, 왕족들에게 심판을 내리실 것을 선언하시며 그들에게 귀를 기울여 들으라고 하신다. “제사장들아 이를 들으라 이스라엘 족속들아 깨달으라 왕족들아 귀를 기울이라 너희에게 심판이 있나니 너희가 미스바에 대하여 올무가 되며 다볼 위에 친 그물이 됨이라(1).” ‘들으라.’, ‘깨달으라.’, ‘귀를 기울이라.’ 하시는 것은 명령이다. 주의를 기울여 ‘말씀을’ 새겨들으라는 의미다. 일련의 일을 겪으며 나는 이 모두가 말씀으로 이어지는 것을 느낀다.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 어떻게 개입하시면서 역사하시는가를 알리신다.

 

이에 ‘제사장들’은 저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준수하도록 훈계해야 하는 책임이 있는데 이를 저버린 자들이다. ‘족속들’은 이스라엘의 집이라 할 수 있는 북이스라엘의 열 지파 백성들을 가리킨다. ‘왕족들’은 왕의 집안으로 그 일가들로 혜택을 받고 사는 자들이다. 저들에게 외쳐 들으라, 깨달으라, 귀를 기울이라고 하신다. 이는 점층적으로 이어진다. 말씀을 들어야 깨달을 것이고, 깨달아야 귀를 기울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므로 예루살렘에서 이 백성을 다스리는 너희 오만한 자여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희는 귀를 기울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자세히 내 말을 들으라(사 28:14, 23).”

 

이렇듯 말씀을 듣는 게 우선이다. 나는 이번에 부친을 먼저 보내며 그 어느 때보다 말씀의 위로가 컸다. 예배의 힘이 강하게 느껴졌다. 우리는 모두 여섯 번의 예배가 드려졌는데 매형을 비롯해서 나와 형제들이 돌아가면서 한 차례씩 했고 노회 시찰회 목사님들이 오셨을 때 증경 노회장 목사님이 한 번, 그리고 어제 마지막으로 부친의 집에 들러 막내 동생이 인도하여 또 한  그렇게 드려졌다. 마침 사돈 될 이가 둘째 날에 같이 와서 예배를 드렸는데, 마치 어느 부흥회에 온 것 같았다는 표현을 했다. 찬송은 뜨거웠고 눈물과 함께 올려드려지는 말씀은 진솔하여 주의 사랑을 진하게 전하였다.

 

나의 부친은 참 복이 많은 사람이다. 조상대대로 이어져오던 불신자의 일가를 전복시킨 것이 부친이다. 학창시절 강원도 산골 작은 예배당에서 전하여진 복음의 씨앗 하나가 이와 같은 열매를 맺었다. 본인이 변화되고 그 모친이 돌이켜서 자녀들은 물론 형제들과 그 후손들에 이르기까지 온 일가의 모든 족속들이 주 앞의 은혜를 입었다. 아버지가 주의 나라로 달려가시던 날, 그야말로 황망하게 사고사로 처리되었으나 우리는 말씀을 나누고 찬송을 부르면서 깨달았다. 부친의 목회는 전투적이었는데 천국에 들어가는 것까지도 거침이 없이 단걸음에 달려가셨다. 그렇게 주의 품에 안겼을 아버지를 생각하며, 우리는 모두 축복하며 감사하였다. 슬픔의 눈물은 곧이어 감사와 찬송의 영광으로 올려졌다.

 

어제는 발인 날이지만 시신기증과 장기기증으로 다음 일정이 없었다. 그래서 부친의 생가에 들러 예배를 드리고 정리하고, 가까이 기거하는 둘째가 홀로 넘겨진 모친을 모셔갔다. 나는 빙충맞게 자꾸 울었고, 눈물은 오히려 모두에게 용기를 건넸다. “너희는 들을지어다, 귀를 기울일지어다, 교만하지 말지어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음이라(렘 13:15).” 하신 데 따른 놀라운 행사였다. 꿈같은 며칠이었다. 이는 하나님의 공의가 세워지기 위해 반드시 심판이 있을 것인데, 우리의 죽음은 동시에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되는 날이다. 부친은 낙상으로 인해 몇 시간 만에 돌아가셨고, 남겨진 가족들로서는 황망하나 곧이어 단걸음에 주의 품에 안겼을 나의 아버지를 생각하며 그야말로 부친다운 행보라고 입을 모았다.

 

이에 오늘 말씀은 ‘미스바’와 ‘다볼’ 위에서 외친다. 미스바는 요단 동편의 길르앗에 있는 미스바를 가리킨다(삿 10:17, 11:29). 이곳은 야곱과 라반이 언약을 세운 곳이다(창 31:48-49). 그리고 ‘다볼’은 요단 서편에 있는 다볼 산이다. 이 두 곳은 우상 숭배의 중심지가 되었다. 숲이 우거지고 새와 짐승들을 잡기에 적합한 장소였다. 이스라엘의 통치자들이 새를 잡는 것처럼 백성들에게 올무와 그물을 놓고 있음을 책망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미스바와 다볼 산 위에 거짓 우상을 섬기라고 부추겼다는 것을 추론할 수 있다. 설령 그렇지 않다 해도 백성들로 악한 길로 인도하였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은 분명하다.

 

그들은 백성들의 지도자이면서 부패와 우상 숭배에 빠져 멸망의 길로 백성들을 미혹했다. 이렇듯 어지러운 세상은 오늘도 여전하다. 교회로 국한지어 목사 한 사람으로 좌지우지 되는 것에 여러 심령이 상하여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문상으로 신학교 동기 사역자가 왔는데 두 내외 모두 사역을 중단하고 정신과치료를 받고 있었다. 남편 목사는 속된 말로 교회에서 쫓겨났는데 담당하는 부서의 아이를 훈계했던 일이 권세 있는 장로에 의해 담임목사가 그리 결정을 내린 것이라 했다. 아내 전도사는 무슨 일로 사역을 내려놓으며 6학년 되는 아이는 그대로 그 교회를 보냈으면 했는데, 덕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목사는 아이마저 거부했다는 것이다. 전후사정을 다 알지 못하지만 그 일로 여러 겹치는 일과 함께 심령이 상한 후 우울과 불안을 호소하며 사역을 내려놓고 있다고 했다.

 

여하튼 한 영혼을 마주하는 일이란 천하를 상대하는 일만큼 어렵고 복잡한 일이다. 이어 오늘 말씀 서두에서 “패역자가 살육죄에 깊이 빠졌으매 내가 그들을 다 벌하노라 에브라임은 내가 알고 이스라엘은 내게 숨기지 못하나니 에브라임아 이제 네가 음행하였고 이스라엘이 더러워졌느니라(2-3).” 하심을 눈여겨보게 된다. 문맥적으로 그 동기는 제사장들과 왕족들 때문이다. 이는 결국 하나님을 거부하고 이방 신을 따라간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징계를 받게 된다는 의미다. ‘패역과 살육’은 같은 의미에게 고의적이다. 고의적으로 짐승을 살육하고 희생 제물을 바친 죄악과 연관시킨다. 구덩이, 멸망과 같은 의미다. 그곳에 깊이 빠졌다. 이는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을 숭배하며 학살하고 패괴한 죄악 가운데 스스로 빠져드는 것을 뜻한다.

 

이를 징책하신다. ‘나는 저희 모두에게 징책이 되노라.’ 하심인데, 하나님께서 그들의 징계가 되신다는 의미다. 곧 어떤 이에게 하나님은 얽매임이고 부담이다. 믿음을 지키며 신앙을 이어가는 일이 고단하기만 하다. 한편으로 또 누구에게 징계는 회복을 위한 은혜의 수단이다. 곧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1:32).”

 

일련에 우리의 슬픔이 또는 고통이 달가운 일이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처음 사고 소식을 접했을 때의 놀람. 중환자실에 들러 의식을 잃고 누워 있는 모습에서의 침통함. 그러다 몇 시간 뒤 돌아가셨을 때의 황망함과 서러움. 이러한 감정들을 통과하면서 우리들은 주의 이름을 되뇌었고, 주가 주시는 위로는 단걸음에 주의 품에 안겼을 아버지의 아버지다운 모습을 회고하며 웃음 짓고 울 수 있었다. 동시에 이는 사랑이다.

 

“내 아들아 여호와의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라 그 꾸지람을 싫어하지 말라… 아비의 훈계를 업신여기는 자는 미련한 자요 경계를 받는 자는 슬기를 얻을 자니라(잠 3:11, 15:5).”

 

여기서 에브라임은 이스라엘 전체를 상징한다(4:17, 7:11). 그 백성들은 자신들의 죄를 은밀하게 행함으로 숨기려고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죄를 알고 계신다고 선언하였다. 만물이 하나님 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는 것이다.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히 4:13).”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삶은 그 어느 것도 숨길 수 없다. 죄악 된 행위는 그들 자신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길을 가로막는다. 회개하고자 하는 마음은 있지만 악행이 너무 커서 돌아올 수 없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러므로 때로는 징계가 복이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게 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롬 6:12, 16).” 게다가 음란한 영은 여호와에 대한 지식을 알지 못하게 방해한다. 여호와의 지식을 얻기 위한 마음을 음란한 정신이 사로잡는 것이다. 교만은 그렇듯 진정한 회개에 이르지 못하도록 한다.

 

이 모든 것은 오늘 우리가 사는 데 있어 걸림돌이 된다. <교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뜻은 자랑, 오만, 탁월, 권위 등과 같은 의미로 쓰인다. 곧 이스라엘의 영광이신 여호와께서 자신에 대해 무관심했던 이스라엘에 대하여 직접 증거하시는 데는 저들의 교만이 주된 원인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얼굴에 있는 교만을 증거로 삼아 그들을 애굽과 앗수르에 의해 멸망케 하셨다. “나는 네 무리가 용사 곧 모든 나라의 무서운 자들의 칼에 엎드러지게 할 것임이여 그들이 애굽의 교만을 폐하며 그 모든 무리를 멸하리로다… 내가 그들이 고난의 바다를 지나갈 때에 바다 물결을 치리니 나일의 깊은 곳이 다 마르겠고 앗수르의 교만이 낮아지겠고 애굽의 규가 없어지리라(겔 32:12, 슥 10:11).”

 

나는 일련의 상황을 겪으면서 동시에 우리의 교만과 아집도 돌아보았다. 문상을 와서 저들이 위로 받길 원하는 그 내용들이 모두 여호와께로 돌아오는 길목을 가로막는 요인이 있음을 알게 하였다. “이스라엘의 교만은 그 얼굴에 드러났나니 그들이 이 모든 일을 당하여도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지 아니하며 구하지 아니하도다(호 7:10).” 그러므로 나는 이 말씀에서 이중의 무게를 느끼며 동시에 우리가 치른 장례에서도 이 또한 교훈이 되고 하나님의 뜻을 알리는 데 귀한 방법이 되는 것을 보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약한 손을 강하게 하며 떨리는 무릎을 굳게 하며 겁내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복하시며 갚아 주실 것이라 하나님이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 하라(사 35:3-4).” 하는 사명이 우리에게 부여된 것을 안다. 우리 형제들로 하여금 다시 한 번 마음을 굳게 먹고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비판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칠 것이나 거칠 것을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하도록 주의하라(롬 14:13).” 하여 이 길을 가게 하신 것이니,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고전 8:6).”

 

하여 다시금 주 앞에 바로 서길 다짐하며,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마 18:15-16).” 하는 길을 부친의 사역 현장에서 보았고, 이를 이루어가면서 느꼈다. 그리하여 주의를 기울여서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에게 마땅한 바니라(엡 5:3).” 하여서 오늘도 시편으로 기도하면,

 

나의 반석이신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그가 내 손을 가르쳐 싸우게 하시며

손가락을 가르쳐 전쟁하게 하시는도다

(시 144:1).

 

이는 “이스라엘의 교만이 그 얼굴에 드러났나니 그 죄악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과 에브라임이 넘어지고 유다도 그들과 함께 넘어지리라(호 5:5).” 하는 오늘 이 본문의 발단으로 새삼 우리의 생을 돌아볼 때,

 

여호와는 나의 사랑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요 나의 산성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방패이시니

내가 그에게 피하였고

그가 내 백성을 내게 복종하게 하셨나이다

(2).

 

이와 같은 고백이 내 것인 데서 감사한다. 그러므로 이제 더욱,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새 노래로 노래하며

열 줄 비파로 주를 찬양하리이다

(9).

 

오늘의 슬픔이 기쁨이고 찬송인 것을 확신하며,

 

우리 아들들은

어리다가 장성한 나무들과 같으며

우리 딸들은

궁전의 양식대로 아름답게 다듬은 모퉁잇돌들과 같으며

우리의 곳간에는 백곡이 가득하며

우리의 양은 들에서 천천과 만만으로 번성하며

우리 수소는 무겁게 실었으며 또 우리를 침노하는 일이나

우리가 나아가 막는 일이 없으며

우리 거리에는 슬피 부르짖음이 없을진대

이러한 백성은 복이 있나니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

(12-1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