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히브리서 4장 / 창조할 때부터 이루어진 일

하현. 2026. 4. 2. 08:47

260405 주일

 

히브리서 4장

창조할 때부터 이루어진 일

 

 

히 4:1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는 혹 이르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히 4:2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

히 4:3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 그가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그들이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나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이 이루어졌느니라

히 4:16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들어가는 말

 

살면서 우리는 뜻하지 못한 일을 겪는다. 여전히 믿어지지 않는 일들이 우리를 고통스럽게 한다. 토요일 오후, 느닷없는 전화 한 통으로 아버지는 응급실에서 중환자실로, 중환자실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단걸음에 올리우셨다. 이를 소천(召天)이라 하여 하늘의 부르심을 받았다고 하는데, 소천의 소(召) 자는 칼도(刀)에 입구(口)자가 붙어서, 칼로 입을 막았다는 연상을 하게 한다. 곧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산 자는 말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그렇듯 일생이 끝나는 것은 가차없다. 가차없음은 사정을 고려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나의 아버지, 우리 목사님, 주의 종으로서 한 생은 칼 같이 입을 다물고 소천(召天)하셨다. 그의 목회는 칼을 물고 달리는 주의 군사와 같이 어딜 가나 전투적이었다. 자녀 넷을 둔 아버지로나 가장으로의 여러 갈등도 가차없이 건너 뛰며 목적은 하나,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고 달려가는 길이었다. 나의 유년은 그에 걸맞게 이해할 수 없는 일들로 점철돼 있다. 일일이 열거할 수 없으나 ‘가난과 이사’는 지긋지긋하고 각지의 목회현장은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를 방불케 한다. 매순간이 치열하였고 냉혹한 현장이었다. 그렇게 달려온 83년의 생은 마치 소풍 갔다 서둘러 돌아간 것처럼 단걸음에 하나님의 나라로 돌아가셨다.

 

이에 오늘 본문은 우리로 이 환상적이고 놀라운 환희를 기억하게 한다. 동시에 두려워하라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는 혹 이르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1).” 즉 우리는 그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있는 자이다. 이는 창조 때부터 그리 여겨진 것이다. 그런데 두려워할 것은 “너희 중에는 혹 이르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하심으로 그리 여길 뿐 정작 예외된 자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극단적으로 예를 들면 예수를 판 가룟인 유다이다. 저에 대하여는 예수께서 이르시길,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자기에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하시니라(막 14:21).” 그렇듯 같이 시작하였으나 세상으로 돌아가는 이들이 수두룩하다. 오늘 이 본문은 시편 95편을 인용하여 ‘광야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열조가 결국은 불순종으로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음을 상기시킨다. 저들은 결국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이가 수두룩하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칠일 되는 날에 안식하신 것처럼 우리도 이 땅에서 생을 다하고 안식에 들어갈 것이다. 나이가 든다는 일은 병마가 든다는 일과 같다. 사소한 질병에서부터 죽을 때까지 안고 살아야 할 육신의 질병이 가득하다. 이에 바울은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하였는데 이를 바로 알지 못하면 그와 같은 겉사람을 붙드느라 속사람을 등한히 여겨 당장의 세상으로 달려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두려워할지니” 하고 오늘 본문은 시작한다.

 

본문이해

 

먼저 3장 7-19절에서 안식에 들어가는 우리들에 대해 언급한 것을 오늘 본문이 부연한다(1-13). 이어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논증하고 있다(14-16). 곧 안식에 들어갈 우리와 이를 감당하시는 예수를 증거한다. 앞서 하나님의 일에 충성된 대제사장으로 예수는 먼저 하늘 성소에 들어가셨다. 그리스도는 처음 믿음을 끝까지 견고히 잡았다. 그래서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3:14).”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의 영원한 안식의 표증이다. 보증이 되시고 통로가 된다. 우리가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첫째, 불변하는 안식의 약속에 대해 밝힌다(1-13).

둘째,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가 그 통로이심을 알린다(14-16).

 

1. 영원한 안식의 약속(1-13)

 

앞서도 말한 것 같이 오늘 본문은 3장 7-19절에서 언급한 안식에 대한 권고를 완성한다. 이스라엘은 불순종과 불신앙으로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자들이 수두룩하였다. 그러므로 먼저 ‘안식에 대한 권고’를 한다. <안식의 의미>는 성경 여러 곳에서 다양하게, 그러나 동일하게 밝힌다.

 

1) 창세기 2장 2절: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2) 십계명으로: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출 20:8).”

3)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것: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시는 안식과 기업에 아직은 이르지 못하였거니와(신 12:9).”

4) 일찍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창 12:2-3).”

5) 모세에게: “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안식을 주시며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시리라 하였나니 너희는 그 말을 기억하라(수 1:13).”

6) 여호수아에게: “여호와께서 그들의 주위에 안식을 주셨으되 그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하셨으므로 그들의 모든 원수들 중에 그들과 맞선 자가 하나도 없었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의 모든 원수들을 그들의 손에 넘겨 주셨음이니라(수 21:44).”

 

이와 같이 안식은 오늘도 동일하게 우리에게 또한 증거가 된다. 그렇게 오늘 말씀은 “만일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안식을 주었더라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8-9).” 하고, 이 땅에서는 여전히 미완으로 남은 안식에 대하여 아직 그 때가 남아 있음을 증거 한다. 이는 본문의 내용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들어가는 ‘약속된 안식’을 누렸던 것으로 우리의 장차 임할 ‘영원한 안식’을 알려주고 있다.

 

이 영원한 안식은 영적 안식으로 ‘안식일의 주인 되신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이미 성취되었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마 12:8).” 그러므로 장차 일어날 예수의 재림 때 완성될 나라, 영원한 안식이 기다리고 있다.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계 14:13).”

 

이 안식의 약속은 불변하다. 이 약속은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으로 자녀 삼으신 자들에게 주어지는 불가항력적인 은혜이다. 곧 이 모든 성경의 주제로 하나님의 임재와 축복과 구원의 총체다. 이에 따른 조건반사적인 우리의 의무는 순종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하지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11-13).”

 

2.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14-16)

 

그리스도의 제사장적 우월성을 논하는 내용으로 히브리서의 대부분이 할애되었다(4:14-10:18).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셨다.’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2:17).” 주의 자비하심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완성하신 우리 죄의 속량이다.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위해,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18).” 시험을 당하셨고 죽으심으로 부활 승천하셨다.

 

곧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이는 그리스도의 직임으로 중보자가 되심이다. 중보자란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시고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제물이 되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하셨다. 중보자 되시는 예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벌을 받아, 반드시 사람으로 죽으셔야 했다.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이는 확실히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히 2:14-16).” 사람이 사람의 죄를 대신할 수 있는 중보자는 없다. 무죄한 사람은 없다. 그 이유는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0-13).”

 

그러므로 대제사장 되신 그리스도의 중보자의 사명은 다음 같다.

 

1) 선지자적인 사명이 있어야 한다: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렘 1:5).”

2) 계시를 받은 것만 전달해야 한다: “만일 어떤 선지자가 내가 전하라고 명령하지 아니한 말을 제 마음대로 내 이름으로 전하든지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말하면 그 선지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느니라(신 18:20).”

3) 하나님의 말씀을 적극적이며 자발적으로 선포해야 한다: “내가 말할 때마다 외치며 파멸과 멸망을 선포하므로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 거리가 됨이니이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렘 20:8-9).”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선지자 직분은 신적 권위(사 61:1-3)로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 아들로서(마 1:1-3), 성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수행하시고 승천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