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히브리서 5장 / 하나님께 속한 일

하현. 2026. 4. 9. 15:40

260412 주일

 

히브리서 5장

하나님께 속한 일

 

 

히 5:12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히 5:13 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히 5:14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

 

 

들어가는 말

 

전체적으로 오늘 말씀은 우리와 같은 ‘사람 예수’에 대해 설명한다. 그런 의미에서 다소 오해의 소지도 있다. 가령 “그가 무식하고 미혹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에 휩싸여 있음이라(2).” 하는 부분과 “속죄제를… 자신을 위하여도 드리는 것이 마땅하니라(3).” 하는 부분으로 “이 존귀는 아무도 스스로 취하지 못하고 오직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라야 할 것이니라(4).” 하며 예수의 신적인 권위를 지극히 인간의 시각으로 설명한다.

 

그리고 “또한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 되심도 스스로 영광을 취하심이 아니요 오직 말씀하신 이가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니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5)” 하는 대목으로 의아하다. 그런 점에서 “또한 이와 같이 다른 데서 말씀하시되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이라 하셨으니(6)” 하는 부분으로, 그리스도께서 아론 계통의 대제사장보다 더 우월하신 대제사장이심을 논증하기 위해 시편 110편 4절을 인용하여,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하지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한 말씀으로 근거를 삼았다.

 

‘멜기세덱의 반차를 서열을 따라’ 그러했다는 것은 멜기세덱 계열은 그 후손이나 후계자가 없다. 그러므로 이러한 멜기세덱과 그리스도의 유사성은 그리스도께서 아론 계통으로 임명되는 제사장들보다 우월하신 존재임을 논증하기 위한 것이다. 아론 계통의 대제사장은 오로지 제사 직무를 감당하기 위해 기름부음을 받은 존재이지만 그리스도는 ‘제사장이며, 왕으로서’ 기름부음을 받은 존재이시다. 그러면서 우리와 같이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7).” 하심으로 예수님은 성자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사람과 같은 몸으로, 제한적으로 시작과 끝이 있는 존재로 설명된다.

 

곧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9)” 하는 것으로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살면서 사람으로 하나님께 순종하고 순복하셨던 것을 드러내고자 한다. 이에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으셨느니라(10).” 이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순종하심으로 온전케 되어, 하나님으로부터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았다고 진술한다.

 

곧 그리스도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랐다는 것은 멜기세덱의 후손으로 대제사장이 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라(6), 그리스도께서 율법 하에 있는 아론 계통의 대제사장과 다른 <약속의 은혜에 따른 대제사장>이 되심을 나타낸다. 사실 이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가 듣는 것이 둔하므로 설명하기 어려우니라(11).” 하는데, 멜기세덱에 관하여 우리의 지혜로 이해가 어렵다. 곧 그리스도의 전체적인 대제사장직을 가리키는 데 있어 우리의 죄사함을 거행하는 대제사장 직분과 그에 따른 십자가의 제물이 되신 직분을 동시에 설명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이에 ‘할 말이 많으나’ 다루고 있는 주제의 중요성을 어떻게 설명하여 이해시키기가 어렵다는 의미다. ‘둔하다’는 것은 ‘듣는 것에 그만큼 무관심한 상태’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이해력이 부족하다. 다시 말해 ‘듣는 것이 둔하다’는 것은 9절에서 언급되는 ‘자기를 순종하는 그리스도께 대한 철저한 복종’이 부족한 상태를 말한다. 그러므로 이어지는 말씀에서 꾸짖는 것도 그 때문이다. 오늘 본문으로 우리가 집중하고자 하는 것이 이 부분이다.

 

본문이해

 

우리는 ‘천사나 그 어떤 선지자나 모세보다 우월하신 그리스도’를 다루었다(1:1-4:13). 이제부터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다루고자 한다(4:14-10:18). 그런 가운데 우리에게 권하시는 바, 자칫 죄악 된 세상 <탁류>에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주의 하라’는 것, “그러므로 우리는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함으로 우리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함이 마땅하니라(2:1).” 그러므로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는 것,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3:1).” 이에 더하여 혹시 ‘안식에 들어가지 못할까 주의하라는 것’,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는 혹 이르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4:1).” 하는 내용을 앞서 다루었다.

 

그런 가운데 오늘은 어찌해서 우리가 성장하지 못하는지를 다룬다. 왜 우리 신앙이 늘 그 자리에 멈추어 있는지,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5:12).” 여기서 보면 우리의 신앙을 점검하게 된다.

 

1. 신앙의 답보 상태에 대하여

 

첫째, 예수를 믿고 교회를 다닌 지 오래 되었다

둘째, 이제 선생이 되어야 마땅한데 여전히 그렇지 못하다

셋째, 오히려 ‘다시’ 하나님의 말씀에 초보가 되었다

넷째, 남을 가르치기는커녕 다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지경이다

다섯째, 이는 단단한 음식을 못 먹고 젖병을 무는 아이 같다

 

이에 대해 바울은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롬 2:2).” 하고 경고하고 있다. 베드로 사도 역시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3:15-16).”

 

2. 신앙의 문제는 선한 양심을 가져야 한다

 

첫째,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되었는가?

둘째,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해 묻는 자에게 답할 수 있는가?

셋째, 이를 위해 항상 준비하고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있는가?

넷째, 이를 위해 선한 양심을 가지라

 

우리의 선한 양심은 선한 행실로 나온다.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곧 우리의 신앙의 연조(年條)가 오래되었으나 여전히 초보적인 가르침을 받아야 하는 상태에 머물러 있음을 지적한다. 말씀의 초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둔하다’는 것인데 이는 ‘듣는 것에 그만큼 무관심한 상태’를 가리킨다. ‘듣는 것이 둔하다’는 것은 ‘자기를 순종하는 그리스도께 대한 철저한 복종’이 부족한 상태를 말한다.

 

신앙의 기초적인 진리를 바로 알지 못함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결여되어 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는커녕 자신도 늘 다시 가르침을 받아야 하는 신세를 못 면한다. 이를 본문은 ‘젖이나 먹고’ 안이하게 생활하기 때문이다. ‘젖’과 ‘단단한 식물’을 먹는 차이는 성장에 있다. 마치 어린아이가 정상적으로 자라지 못해 걷고, 움직이는 활동이 부족하면 나이가 들어서도 젖병을 물고 생활하는 것과 같다. 자연스럽게 이유식을 먹고 이어서 단단한 음식을 먹으며 활동하고 소화하는 능력이 생겨야 한다. 그만큼의 활동반경이 다른 것이다. 여전히 ‘썬데이 크리스천’으로 일요일에 하루, 한 시간, 잠시 설교를 듣는 것으로 성경을 읽는 것도 묵상하는 것도 없이 사느라 급급한 영혼은 그러하다. 여전히 ‘우유를 필요로 하는 어른아이’로 교회를 다니는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해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고전 3:1-3).”

 

3. 성도인데 신령한 자로 대할 수 없는 이유

 

첫째, 육신에 속한 자로 살기 때문이다

둘째, 시기와 분쟁이 있기 때문이다

 

오늘 히브리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것으로 설명하다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독자를 대상으로 ‘설명하기를 포기하고 나무라는 것이다.’ 이를 우리 신앙으로 비유하면 실제 어떤가?

 

4. 성경의 이해가 어려운 이유

 

첫째, 하루에 한 장도 말씀 읽기와 묵상하기가 어렵다

둘째, 기도하는 내용이 온통 다 이 땅의 필요를 구한다

셋째, 장래의 가치를 두고 여전히 세상의 복락을 갈구한다

넷째, 천국의 소망이 모호하다

 

이에 대하여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이르길,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히 5:14).”

 

5. 단단한 음식을 먹고 활동하는 성도

 

첫째, 지각을 사용하라

둘째, 연단을 받으라

셋째, 선악을 분별하라

 

지각을 사용한다는 것은 성령이 더하시는 분별력으로 우리의 소욕을 죽이는 일이다. 왜냐하면 성령과 우리의 육신은 서로가 다툰다. 그리하여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 5:17).” 이를 경험하면서 그 신앙이 더 무력해지거나 그리스도의 장성하신 분량에까지 자라거나 둘 중에 하나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선’이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다.

 

6.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선

 

첫째, 성도의 올바른 양심에 따른 삶으로의 선

둘째, 그리스도가 우리의 ‘의’가 되는 삶으로의 선

 

그러므로 “그가 무식하고 미혹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에 휩싸여 있음이라(5:2).” 왜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이렇게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는지, 곧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 2:5).” 이에 영적으로 미숙한 자들에게 ‘기독교의 교리’를 바르게 전하려 우리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성숙해가야 한다. 이에,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히 12:4-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