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 산들을 지으며 바람을 창조하며 자기 뜻을 사람에게 보이며 아침을 어둡게 하며 땅의 높은 데를 밟는 이는 그의 이름이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니라
암 4:13
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사오니 그들의 마음을 준비하시며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 고아와 압제 당하는 자를 위하여 심판하사 세상에 속한 자가 다시는 위협하지 못하게 하시리이다
시 10:17-18
우리로 하나님을 멀리하게 하는 것은 교만이다. 교만은 자신을 높이고 남을 낮춘다. 오늘 말씀은 교만한 학대자에 대하여 그가 받아야 하는 벌을 알게 한다. “사마리아의 산에 있는 바산의 암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는 힘 없는 자를 학대하며 가난한 자를 압제하며 가장에게 이르기를 술을 가져다가 우리로 마시게 하라 하는도다(1).” 여기서 ‘사마리아 산에 거하는 바산의 암소들’을 주목한다. ‘바산’은 요단 강 동편 헬몬 산과 길르앗 산지 사이에 위치한 기름진 땅이다. 목축을 하기에 매우 좋았으며 그곳의 초장은 아름답고 살진 소와 양이 생산되는 곳이다. ‘바산의 암소’는 비유적인 표현으로 사치와 방종을 일삼은 자들을 뜻한다.
저들을 향해 ‘들으라’하고 외친다. 사마리아는 북이스라엘의 수도이고 그곳에 거하는 부한 자들을 여성성으로 보고 하는 표현이다. 여성형으로 표현한 것은 사치와 향락이 그러한 감성적인 것으로 이스라엘 전체를 가리킨다. 특별히 ‘암소’를 선택한 이유도 이스라엘 백성이 단과 벧엘에 세운 금송아지를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저들은, ‘너희는 가난한 자를 학대하며 궁핍한 자를 압제하며’ 하고 진술하는데 교만이란 본래 자기 혼자의 일이 아니다. 이를 과시하기 위해서는 남을 멸시하게 되었다. 그 상대는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이다. 그렇게 ‘가장에게 이르기를 술을 가져다가 우리로 마시게 하라.’ 하는 것도 ‘가장’은 3인칭 남성 복수형으로 그녀들의 남편들이라 읽힌다. 이는 이스라엘 민족이 가난한 자를 학대하고 사치와 방종을 일삼는 형태를 아주 자연스럽게 여기고 있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압제자들이 낮춤을 받게 되며, 우상 숭배자들이 완악해지리라는 것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예언되고 있다.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으리니 주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심이 없느니라(골 3:25).”
곧 그들의 죄를 ‘바산의 암소’로 비유하고 있는 것도 그 풍요와 넉넉함이 저들을 병들게 하였다. 바산의 소는 매우 크고 억센 품종으로 목초가 풍부한 사마리아 산에서 사육되는 것이 특징이다. 선지자 아모스는 목축인이었다. 자기 직업 특유의 표현으로 이스라엘이 사치와 방종에 탐닉하고 있는 것을 꼬집은 것이다. 그렇듯 부자나 권세가들을 바산의 암소로 비유하여, 저들은 들뜨기 쉽고 다루기 어려웠던 당대의 부유층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곧 저들은 갇혀 있지 않고, 울타리를 뚫고 나가며, 담을 무너뜨리고 이웃의 땅에 침입하였다.
뿐만 아니라 제 적수가 되지 못하는 작은 소들을 습격하고 상처를 입히고, 사마리아의 산에 여름 궁을 두고 신선한 공기를 마시러 가는 자들에게 해를 끼치며, 주위 사람들에게도 피해를 입혔다. 더욱이 그들은 가난하고 궁핍한 자들을 학대하였다. 그들은 가난한 자들을 부수고, 가난한 자들에게서 무언가를 착취하기 좋아했다. 가난한 자의 빈궁과 궁핍을 보호하기는커녕 그들을 이전보다 더 가난하고 궁핍하게 만들었다. 그러기 위해 권력자들과 결탁하고 압제자들과 연합하였다. 그들은 ‘가장’에게 이르기를 ‘가져다가 우리로 마시게 하라’고 하며 가난한 자의 주인들까지 그들을 학대하며, 그들의 소유를 폭력으로 강탈하였다. ‘술을 가져와서 우리로 마시게 하라. 너희 압제의 이득으로 너희와 함께 흥겨운 잔치를 즐기게 하라. 그러면 우리가 너희를 보호할 것이며, 너희 편을 들 것이며, 너희에게 대한 가난한 자들의 소청을 기각하리라.’ 하는 것이다.
이에 하나님이 나서신다. “주 여호와께서 자기의 거룩함을 두고 맹세하시되 때가 너희에게 이를지라 사람이 갈고리로 너희를 끌어 가며 낚시로 너희의 남은 자들도 그리하리라(2).” 먼저 ‘주 여호와께서 자기의 거룩함을 가리켜 맹세하’신다. 여기서 ‘거룩함’에 해당하는 히브리어의 뜻은 세속적이거나 일상적인 것으로부터 분리된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거룩함으로 맹세하셨다는 것은 거짓말하지 않으신다는 보증이다.
내가 나의 거룩함으로 한 번 맹세하였은즉
다윗에게 거짓말을 하지 아니할 것이라
(시 89:35).
하나님은 인간의 불완전함에 제약받지 않으신다. 당신의 말씀에 신실하시고, 죄를 용납하거나 심판을 포기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맹세하실 때, 힘을 상징하는 ‘오른손’이나 ‘능력의 팔’로 하신다. “여호와께서 그 오른손, 그 능력의 팔로 맹세하시되 내가 다시는 네 곡식을 네 원수들에게 양식으로 주지 아니하겠고 네가 수고하여 얻은 포도주를 이방인이 마시지 못하게 할 것인즉(사 62:8)” 또한 당신의 크신 이름으로 하셨다. “그러므로 애굽 땅에서 사는 모든 유다 사람이여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나의 큰 이름으로 맹세하였은즉 애굽 온 땅에 사는 유다 사람들의 입에서 다시는 내 이름을 부르며 주 여호와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라 하는 자가 없으리라(렘 44:26).” 그렇듯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르고 주의 팔에 안기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한 하나님께서 ‘때가 너희에게 임할지라. 사람이 갈고리로 너희를 끌어가며 낚시로 너희의 남은 자들을 그리하리라.’ 하신다. ‘갈고리’는 ‘가시’를 뜻하여 교만한 이스라엘을 처참하게 끌려가는 모습을 연상하게 한다. 실제 앗수르인들은 이런 식으로 이스라엘을 포로로 끌고 갔다. 뿐만 아니라 “너희가 성 무너진 데로 말미암아 각기 앞으로 바로 나가서 하르몬에 던지우리라(3).” 하시는데, ‘하르몬’ 장차 이스라엘이 잡혀갈 곳을 가리킨다. 이것을 ‘로마의 산’이라 해석하기도 하였다. 북쪽 아라랏의 동남쪽 방향에 위치한 ‘민니’라고도 하고, “땅에 깃발을 세우며 나라들 가운데에 나팔을 불어서 나라들을 동원시켜 그를 치며 아라랏과 민니와 아스그나스 나라를 불러 모아 그를 치며 사무관을 세우고 그를 치되 극성스런 메뚜기 같이 그 말들을 몰아오게 하라(렘 51:27).”‘헐몬 산’이라고 하기도 했다. 어쨌든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곧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관심이 가나안에 정착한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도 끝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는 것은 그에 따른 확실한 증거다.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는 표현은 늘 문장 끝에, 말씀을 보증하기 위해 나온다. 이 표현은 ‘신음하다’, ‘탄식하다’는 의미를 내포하여, 깊은 묵상을 통해 잔잔하게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가리킨다. 우리가 흔히 주의 뜻을 알 때 여러 날 혹은 깊은 시간을 두고 마음에 되새기며 주의 말씀을 듣고자 할 때 더하시는 확신이 묵상이다. 명상과 다르다고 하는 이유는 인위적으로 자신을 비워내려는 게 명상이고, 묵상은 가만히 있어 하나님이 뜻이 채워지고 확신되길 바라는 것이다. 이를 같은 의미로 해석하여 교회에서도 무분별하게 사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묵상을 거슬러 올라가면 바로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는 데서 비롯된다. 선지자들이 계시의 말씀을 전달할 때 그 주어가 되기도 한다. 그만큼 이 표현은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예언이나 하나님으로부터 온 특별하고 직접적인 계시라는 사실을 확신한다. 오늘 저 교만한 ‘바산의 암소’ 같은 이스라엘의 교만을 향해 그들의 형벌은 어떤가? 하고 전달하는 데 있어 ‘하나님께서는 갈고리로 그들을 끌어가며, 낚시로 그들의 후손을 끌어가실 것이다.’ 하고 설명함으로 ‘그는 그들에게 앗수르 군대를 보내실 것이며, 앗수르인들은 그들을 밥으로 삼을 것이다.’ 하는 것을 암시한다. 실제 앗수르 군대는 민족 전체를 그물로 싸듯 끌고 갔고, 개개인도 낚시질을 당하듯 ‘갈고리’나 ‘낚시’로 잡히듯 포로와 죄수로 사로잡혀갔다.
이들 ‘바산의 암소’들은 리워야단처럼 갈고리와 밧줄로는 끌려나올 수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네가 낚시로 리워야단을 끌어낼 수 있겠느냐 노끈으로 그 혀를 맬 수 있겠느냐 너는 밧줄로 그 코를 꿸 수 있겠느냐 갈고리로 그 아가미를 꿸 수 있겠느냐(욥 41:1-2).”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코에 꿸 갈고리와 그들의 입에 먹일 재갈을 갖고 계신다. “네가 나를 거슬러 분노함과 네 오만함이 내 귀에 들렸으므로 내가 갈고리로 네 코를 꿰며 재갈을 네 입에 물려 너를 오던 길로 돌아가게 하리라 하셨나이다(사 37:29).” 사치와 방탕은 가난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데서 기인한다. 성경은 그리 규정하여,
악한 자가 교만하여 가련한 자를 심히 압박하오니
그들이 자기가 베푼 꾀에 빠지게 하소서
악인은 그의 마음의 욕심을 자랑하며
탐욕을 부리는 자는 여호와를 배반하여 멸시하나이다
(시 10:2-3).
하고 주께 아뢰며 기도한다.
내 마음을 주의 증거들에게 향하게 하시고
탐욕으로 향하지 말게 하소서
(119:36).
오늘 시편에서도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
악한 자가 교만하여 가련한 자를 심히 압박하오니
그들이 자기가 베푼 꾀에 빠지게 하소서
(10:1-2).
하고 주 앞에 아뢴다. 우리 성도의 심정은 모두 같아서,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나
주께서는 나를 생각하시오니
주는 나의 도움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라
나의 하나님이여 지체하지 마소서
(40:17).
하는 기도를 자주 아뢰었다(70:5, 86:1, 109:22). 이는 우리의 가난과 궁핍을 핍박하는 것으로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이라 규정하였다. “만일 남종이나 여종이 나와 더불어 쟁론할 때에 내가 그의 권리를 저버렸다면 하나님이 일어나실 때에 내가 어떻게 하겠느냐 하나님이 심판하실 때에 내가 무엇이라 대답하겠느냐(욥 31:13-14).” 그렇게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잠 19:17).” 하고 주가 책임지신다. 그러므로 행여 이러한 세태가 자연스럽게 여겨져서 계급사회보다 못한 권력의 땅을 사는 동안 주를 의뢰하고 바라며 산다는 일은 귀한 것이다. 하여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롬 13:11-12).” 이에 따른 우리의 방어는 성령으로의 무장이다. 이는 말씀 묵상으로나 가능하다. 좋은 교제나 무리와 섞여 있다고 될 게 아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벧전 4:7).”
가끔은 나의 기도가 실없고 민망할 정도이나 주께 아뢰며 마음의 위로를 구할 때가 많다. 가령 어제는 딸애의 계획에 제동을 걸고 혼자 눈물을 훔쳤다. 며칠 전부터 결혼 후 가져갈 것을 챙기는데 이상하게 허전하고 서운했다. 그런데 내일 결혼으로 오늘부터 휴가를 쓴다고 하는데, 당장 어제 저녁에 한 축 실어 나르고 오늘 내일 서둘러서 옷이며 잡동사니들을 옮기겠다는 거였다. 다들 결혼을 앞두고 서로가 바쁜데 그렇듯 서두는 것도 그렇고, 막상 부친의 갑작스런 부재로 마음이 허했는데 딸애까지 그러니까 속상하고 눈물이 핑 돌았다. 우선 신혼여행 때 챙겨야 할 것이나 당장 결혼식 끝나고 들어가 살 때 필요한 옷가지부터 차츰 그렇듯 챙겨가라고 말하다가 울컥, 했다. 뭘 그렇게 서둘러서 나가려고 하냐고 말하다가 억누르고 있던 감정이 터졌는지 눈물이 자꾸만 흘렀다. 딸애는 얼른 내 마음을 알고 그러겠다고 하며 자기들이 세웠던 계획을 취소하는 것 같았다.
얼마쯤 지나야 마음은 무뎌질까? 애써 외면하고 한사코 감사한 마음으로만 버텨보지만 막상 그렇듯 사랑하고 좋아라 했던 손녀 결혼을 앞두고 서둘러 가신 부친의 부재가 서러움으로 느껴져서 돌아누워 한참을 울다 잠들었다. 우리가 주를 사랑함이란 이 모든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일하시고 우릴 돌보신다는 데 주안점을 둔다. 꼭 그만큼 견딜 수 있는 만큼씩 주가 다루신다. 이쪽으로의 교회 이전이 딱 그 시점에 맞물려서 세무서나 교단에 주소 이전을 하는 일에서부터 가구를 새로 들여놓고 정리하는 일에까지… 슬퍼할 겨를도 없이 하나님은 또한 우리의 일상을 몰고 가시는데, “오직 하나님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을 위탁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살 전 2:4).”
생활도 그런 것이어서 주신 바, 맡기신 한 날을 살아드리는 게 사명이다. 우리가 이 말씀을 위탁 받아서 전하여야 하는 것 같이 이 땅에서의 삶이란 그런 것이어서 슬픔도, 기쁨도 모든 상황이나 여건도 주가 맡기신 것이라! 가끔씩 돌아누워 울다 기도하다 잠들기는 하지만 나는 오늘도 정해진 시간을 따라 주어진 날을 살아드림으로 충성을 다한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않고는 인생을 바산의 암소처럼 누리며 산들, 그래봐야 한 철 꼴을 먹으며 사는 바산의 소일뿐인데… 이 땅의 권세나 능력으로 누구를 억압라고 착취하여 얻어서 부를 누리며 교만하게 산다한들 그 또한 한 철 지나고 나면 모든 게 허사인 것을.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롬 2:5).”
그러므로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대하 7:14).”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다.’ 곧 있을 장래의 심판으로 연결된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이르노니 나는 이혼하는 것과 옷으로 학대를 가리는 자를 미워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러므로 너희 심령을 삼가 지켜 거짓을 행하지 말지니라 너희가 말로 여호와를 괴롭게 하고도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여호와를 괴롭혀 드렸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말하기를 모든 악을 행하는 자는 여호와의 눈에 좋게 보이며 그에게 기쁨이 된다 하며 또 말하기를 정의의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 함이니라(말 2:16-17).”
하여 오늘, “그러므로 이스라엘아 내가 이와 같이 네게 행하리라 내가 이것을 네게 행하리니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만나기를 준비하라(4:12).” 하고 선지자 아모스는 목동이었던 특유의 비유로 우리를 일깨우며 “보라 산들을 지으며 바람을 창조하며 자기 뜻을 사람에게 보이며 아침을 어둡게 하며 땅의 높은 데를 밟는 이는 그의 이름이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니라(13).” 하고 결론짓는다. 하여 바울은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 이러므로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롬 14:11-12).”
곧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 5:9-10).”
이에 오늘도 주 앞에 시편을 놓고,
여호와여 일어나옵소서
하나님이여 손을 드옵소서
가난한 자들을 잊지 마옵소서
어찌하여 악인이 하나님을 멸시하여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주는 감찰하지 아니하리라 하나이까
주께서는 보셨나이다
주는 재앙과 원한을 감찰하시고
주의 손으로 갚으려 하시오니
외로운 자가 주를 의지하나이다
주는 벌써부터 고아를 도우시는 이시니이다
(시 10:12-14).
하고 아뢰며 오늘의 나를 긍휼히 여겨주시기를,
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사오니
그들의 마음을 준비하시며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
고아와 압제 당하는 자를 위하여 심판하사
세상에 속한 자가 다시는 위협하지 못하게 하시리이다
(17-1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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