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너희는 살려면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지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말과 같이 너희와 함께 하시리라
암 5:4, 14
여호와는 의로우사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나니 정직한 자는 그의 얼굴을 뵈오리로다
시 11:7
“이 말을 들으라.” 하는 말씀으로 시작한다.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너희에게 대하여 애가로 지은 이 말을 들으라(1).” 그리고 반드시 “너희는 나를 찾으라.” 하신다. “그리하면 살리라.” 하는 것이다(4). 하나님께서 입을 열어 말씀하시는 데는 우리로 귀를 기울여 듣고 돌이켜 행하라는 것이다. 이는 우리의 의무이자 이익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너무 우둔하여 산다. 자기 안에 갇혔다. 사회에 섞여 자신을 잃었다. 자신을 찾을 수 없다. 자신이 없으니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다. 이야기를 듣다보면 남의 이야기뿐이다.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 같으나 온통 누가 어떻고, 어찌 했고… 하는 식으로 남에 대한 이야기뿐이다.
마치 서른여덟 해 동안이나 베데스다 연못 곁에 누운 환자 같다. ‘낫기를 원하느냐?’ 하고 물으시는데 자꾸 엉뚱한 이야기를 한다.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요 5:2, 4-6).” 하고 물으실 때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7).” 구구절절 사연을 늘어놓을 뿐 정작 자기 이야기가 없다. ‘네, 주님, 낫기를 원합니다.’ 하면 될 것인데, 예수님은 그런 저의 사연을 듣길 원하시는 게 아니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8).”
‘이 말을 들으라.’ 저들은 각자의 사연으로 들을 수가 없다.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하고 재차 촉구해야 할 필요성을 갖는다. 그들에게는 ‘이 말을 들으라, 여기에 귀를 기울이고 주의를 쏟아라.’고 구해야만 한다. 그래서 “내가 너희에게 대하여 ‘애가’로 지은 (바로) ‘이 말을 들으라.’” 하는 것이다(1). 이것은 확인시키며 각성시키며 주의를 일깨우는 말이다. 우리는 위로와 평강의 말씀처럼 이 말에 주의를 기울이며 경청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를 위한 말씀뿐 아니라, 우리를 향한 ‘슬픈 노래’도 들어야 한다. 이 말은 더러 공격적으로 들린다. 누구나 얼른 슬픔을 걷어내고 기쁜 날을 바라는데, 그래서 억지로라도 웃고 가면을 쓰고 사는데 어찌 거기에 ‘애가’를 들으라고 하는 것인가?
우리가 듣든지 안 듣든지 말씀은 효력을 발생한다. 이 말씀은 일점일획도 땅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것을 아모스 선지자는 강조하였다.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께서 너희에 대하여 이르시는 ‘이 말씀을 들으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리신 모든 족속에 대하여 이르시기를(3:1).” 곧 우리가 들어야 할 말씀은 ‘애가’였다. 이스라엘이 비참한 자신의 상태에 대해 지은 슬픈 묘사를 들어야 했다. 곧 우린 어쩌면 자기 이야기는 그래도 괜찮다고 여겨 남의 이야기에 열을 올린다. 말을 돌리는 것처럼 ‘~ 때문에’ 하고 끝도 없이 여러 핑계가 나온다. 그 자신에 대한 비통한 이야기는 들으려 하지 않는다. 이스라엘은 그 사정이 비참했다. 처녀 이스라엘은 엎드러졌고 이전 상태에서 추락하였다. “처녀 이스라엘이 엎드러졌음이여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로다 자기 땅에 던지움이여 일으킬 자 없으리로다(5:2).”
이전은 비록 처녀처럼 순결하거나 정숙하진 않았다고 해도 아름답고 쾌활하여 매력이 있었다. 이스라엘은 고결하였고 많은 사람들에게 구혼을 받았다. 그러나 이제 멸시와 궁핍으로 떨어져 만인에게 무시당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들의 형편은 고립무원이 되었다. 이에 ‘처녀 이스라엘은 다시 일어나지 못하며 이전의 존영을 다시는 회복하지 못하리로다.’ 하시는 말씀에 과연 귀를 기울이지 못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저들을 축소시키기 시작하셨다. “이 때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서 땅을 잘라 내기 시작하시매 하사엘이 이스라엘의 모든 영토에서 공격하되(왕하 10:32).” 그런데도 그들은 뉘우치지 않았으며 그에 따른 문제의식이 없었다. 그 탓을 남에게 돌리고 있었다. 이유는 자신의 ‘애가’를 외면하기만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를 저들에게 말해야 한다. 애가를 지어야 한다. 세상에 이를 노래해야 한다. “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이스라엘 중에서 천 명이 행군해 나가던 성읍에는 백 명만 남고 백 명이 행군해 나가던 성읍에는 열 명만 남으리라 하셨느니라(3).” 참으로 듣기 싫은 노래다. 뭔가 희망찬 소식이어야 하는데, 천 명이 백 명이 되고 백 명이 열 명이 될 것이라니! 그렇게 점점 심적으로나 영적으로 쪼그라들어 그 삶이 피폐할 것이라니! 서로들 대화의 기법에서 서로를 지지하고 응원하며 잘 될 것이라는 희망을 줘야 한다고만 한다. 정작 그런 위로가 회개할 기회마저 빼앗는다. 괜찮아, 잘 될 거야, 네 잘못이 아니야! 하는 소리가 마치 부러진 다리에 파스를 붙이고, 암덩어리에 연고를 바르는 격이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돌이켜 나를 보지 말지어다 나는 슬피 통곡하겠노라 내 딸 백성이 패망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나를 위로하려고 힘쓰지 말지니라(사 22:4).” 슬픈 노래가 진실을 담고 있다. 애써 웃음 짓고 외면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슬프고 아프다 내 마음속이 아프고 내 마음이 답답하여 잠잠할 수 없으니 이는 나의 심령이 나팔 소리와 전쟁의 경보를 들음이로다(렘 4:19).” 하고 정직하게 자신을 드러내야 한다. 내보일 때 그 심각성을 알 수 있다. 알아야 듣는다. 들어야 행한다. “너희 시체가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라 너희 중에서 이십 세 이상으로서 계수된 자 곧 나를 원망한 자 전부가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내가 맹세하여 너희에게 살게 하리라 한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민 14:29-30).”
우리의 영적 상태는 심각하고 그 심령은 구제불능이다. 그럼에도 문제의식이 없는 것은 무뎌져서 그렇다. 타성에 젖어서 늘 그래왔던 것처럼 그러려니 하는 안이함이 문제다. 당장, 지금,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이루어져야 할 일인데 나중에, 좀 더 생각해보고… 하면서 자신의 처지를 먼저 운운하는 식이다. 그러면서 또 누구에게 말할 때는 온통 남의 이야기, 누구 때문에 뭐가 어떻고 그게 그랬는데 하는 식으로 ‘서른여덟 해 동안 누워 있는 병자’ 같다. ‘낫고자 하느냐?’ 하시는 이 간단한 질문에도 답을 못한다.
‘~ 때문에’ 하는 ‘탓’ 때문이고, ‘만일 ~ 하였더라면’ 하는 자기 안의 가정법적인 사고 때문이다. 그 일 때문에, 만일 그때 어떠했더라면… 하는 식으로 온통 ‘탓’하고 ‘핑계’한다.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요 11:21, 32).” 지금 여기에 예수가 계신데도 그런 소릴 하느라 탓을 하고 핑계를 대며 원망한다. 오늘 우리도 다를 게 없이 남을 탓하고, 핑계 대는 것이 가장 익숙하다. 정작 지금 생명의 주가 되시는 예수께서 앞에 계신데도 말이다.
교회로 찾아왔다. 여러 이야기를 듣는다. 이야기의 대부분이 탓이다. 이러저러할 수밖에 없던 핑계다. 정작 지금 자신의 문제가 뭐다, 하고 말하지 못한다. 말할 수 없는 자신의 일에 대해서 들을 수가 없다. 뭐라 하면 그게 상처가 될까 하여 정작 말해줘야 하는 입장인데도 말할 수 없다. 여기서 확실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떠난 영혼은 죽은 거나 다를 게 없다. 죽느니만 못하게 살아 있을 뿐이다. 그런 우리에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4).” 하고 오늘 말씀은 거듭 강조하고 있다.
덧붙여 이르기를 “벧엘을 찾지 말며 길갈로 들어가지 말며 브엘세바로도 나아가지 말라 길갈은 반드시 사로잡히겠고 벧엘은 비참하게 될 것임이라 하셨나니(5).” ‘브엘세바’, ‘길갈’, ‘벧엘’은 허무하게 될 것임이라 하신다. 앞에서 회개를 촉구하였고, 본절에서 회개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벧엘, 길갈, 브엘세바는 모두가 당시 우상의 본거지로 유명하였다. “너희는 벧엘에 가서 범죄하며 길갈에 가서 죄를 더하며 아침마다 너희 희생을, 삼일마다 너희 십일조를 드리며 누룩 넣은 것을 불살라 수은제로 드리며 낙헌제를 소리내어 선포하려무나 이스라엘 자손들아 이것이 너희가 기뻐하는 바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4:4-5).” 여기에 ‘브엘세바’가 추가되었다.
‘브엘세바’는 벧엘이나 길갈과 마찬가지 이스라엘 백성에게 아주 의미 있는 장소였다. 그곳은 아브라함이 제단을 쌓았던 곳이며,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에셀 나무를 심고 거기서 영원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으며(창 21:33)”, 그곳에서 여호와가 이삭과 야곱에게 나타나시기도 하였다. “이삭이 거기서부터 브엘세바로 올라갔더니 그 밤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나는 네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하지 말라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이 번성하게 하리라 하신지라(26:23-24).”
또한 “이스라엘이 모든 소유를 이끌고 떠나 브엘세바에 이르러 그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께 희생제사를 드리니 그 밤에 하나님이 이상 중에 이스라엘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야곱아 야곱아 하시는지라 야곱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46:1-2).” 또한 사무엘이 자기 아들들을 사사로 삼은 곳이기도 하다(삼상 8:1-2). 이렇듯 유서 깊은 ‘브엘세바’가 타락한 이스라엘에 의해 우상을 섬기는 장소가 되었다. 이 장소들이 ‘겉으로는 하나님을 섬기는 장소’를 상징하나 실질적으로는 이스라엘 백성이 그곳에서 하나님을 대신하여 우상을 섬기는 곳이었다.
찾아와 나름 자신들의 신앙과 믿음을 확신하지만 정작 그러한 자신들의 확신이 남을 비판하고 하나님의 불공정하심을 늘어놓으며 자신들을 정당화하는 것이다. 이에 ‘길갈은 정녕 사로잡히겠고’ 하실 때, ‘길갈’이 지명이라기보다 ‘사로잡히는 운명’에 처할 것으로 지목하고 있다. 그렇게 “길갈은 반드시 사로잡히겠고, 벧엘은 비참하게 될 것임이라(5).” 이러한 결정을 누가 들으려하겠나? 그저 다들 자기 말만하고 위로 받을 희망적인 말만 원하는 것이라, 한참을 듣다 나는 어느 순간에 결정해야 한다.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하심을 분명하게 전달해야 한다.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그렇지 않으면 그가 불 같이 요셉의 집에 임하여 멸하시리니 벧엘에서 그 불들을 끌 자가 없으리라(6).”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주체이고, 아모스 곧 믿음으로 서 있는 우리는 그와 같은 말을 던져야 한다. 선포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 전에 자기 안의 불안과 원망과 염려와 여러 탓과 핑계가 삽시간에 우리 영혼을 사로잡는다. ‘염려컨대… 없을까 하노라’ 하는 것도 오늘이 기회였다. 지금 이 순간, 우리의 만남이 마지막일 수 있다. ‘롯의 처’를 생각해야 한다. 저는 ‘에이 설마’, 했다. 다 빠져나와서 됐다고 여겨 방심하고 뒤를 돌아보았을 뿐이다. 이에 “롯의 처를 기억하라(눅 17:32).” 하심을 다시 한 번 가슴에 새긴다. 마음은 언제나 변덕스럽고 말은 감정에 휘둘려서 나는 주의 하여 글로 쓴다. 적당한 언어를 고르고 함의를 생각한다. 그러는 동안 응시하고 주목한다. 고요히 주의 음성을 듣게 된다.
오늘은 딸애의 결혼이다. 어제는 일찍부터 교회 간판을 하고 현판을 달고, 웨딩홀에 가서 리허설을 하고 딸애가 살 집에 짐을 옮겨다 주고 왔다. 오후 세 시에 상담 예약이 있었는데, 세 시는 연락도 없이 오지 않았고, 네 시에 한 형제가 왔다. 그러는 동안 감정은 그때마다 변하여서, 웨딩홀에서 연습을 하다 울었다. 부친의 빈자리가 가슴 아팠다. 애 주례 설교를 직접하고 싶으셨는데 시댁에서 섬기는 교회 목사님이 하시기로 해서 부친은 마지막 순서로 축도를 하실 거였다. 첫 손녀이기도 하고, 아이 어릴 때 같이 지냈던 시간도 길어서 부친은 참 많이 좋아하고 귀히 여기셨다. 그 자리를 올려다보는데 가슴이 아팠다. 이번 결혼이나 끝나고 가시지…. 내가 울면 아이도 울어서 될 수 있으면 꾹, 참는다고 참는데 감정은 저 혼자 요동이라, 오늘도 걱정이 앞선다. 그래서 주의 이름을 부른다. 부디 강건함으로 붙들어 주시기를.
이에 오늘 말씀이 유독 울림이 깊다. “애가로 지은 이 말을 들으라…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1, 4, 6).” 하심은 “정의를 쓴 쑥으로 바꾸며 공의를 땅에 던지는 자들아 묘성과 삼성을 만드시며 사망의 그늘을 아침으로 바꾸시고 낮을 어두운 밤으로 바꾸시며 바닷물을 불러 지면에 쏟으시는 <이를 찾으라 그의 이름은 여호와시니라>(7-8).” 곧 오늘도 내가 부를 이름, 내가 찾을 그 이름,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가 모르시는 게 아니다. “너희의 허물이 많고 죄악이 무거움을 내가 아노라(12).” 그러나 “너희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성문에서 정의를 세울지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혹시 요셉의 남은 자를 불쌍히 여기시리라(15).” 하심으로 오늘도 주의 긍휼하심 앞에 엎드린다.
“모든 포도원에서도 울리니 이는 내가 너희 가운데로 지나갈 것임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17, 24).” 이는 “그의 이름이 만군의 하나님이라 불리우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27).” 하심으로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우리가 주를 아는 만큼 주의 말씀이 들린다. 듣는 만큼 안다. 들음으로 믿는다. 이는 영의 일이다.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일 5:11-12).” 고로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내가 아니다.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다. 연연할 게 아니다. 하나님이 답이다. 하나님과 나 사이의 문제다. 이런저런 세상 일이 어려운 게 아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의 막힌 담이 문제다. 문이었다 해도 닫힌 문은 담이다. 벽이 되어 돌아가야 하는 것인가?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 4:12).”
자, 그러므로 ‘날자! 우울한 영혼이여.’ “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눈을 끄는 바 가증한 것을 각기 버리고 애굽의 우상들로 말미암아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니라 하였으나(겔 20:7).” 하여 더는 ‘탓’이나 ‘핑계’ 없이 있는 그대로 주 앞에 나아오기. 이런저런 여건과 사정 따위로 나중에, 하고 미뤘던 것으로 더는 자신을 방치하지 말고, 행여 ‘저가 자기 땅에 버리움이여’ 하는 비참한 영혼으로 닻이 내려지지 않도록, 불평하는 것을 버리고, 지혜롭다는 사실을 주목하는 것은 “이 말을 들으라.” 하심에 중심을 두어야 한다.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거늘
너희가 내 영혼에게 새 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 함은 어찌함인가
…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하랴
(시 11:1, 3).
그리하여
여호와는 의로우사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나니
정직한 자는 그의 얼굴을 뵈오리로다
(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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