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말씀은 순결함이여

하현. 2026. 4. 19. 06:04

 

화 있을진저 시온에서 교만한 자와 사마리아 산에서 마음이 든든한 자 곧 백성들의 머리인 지도자들이여 이스라엘 집이 그들을 따르는도다

암 6:1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 여호와여 그들을 지키사 이 세대로부터 영원까지 보존하시리이다

시 12:6-7

 

 

이렇게 또 새로운 아침을 깨우며 주 앞에 앉았다. 어제는 딸애의 결혼식이라 여간 마음이 요동을 친 게 아니다. 전날에 리허설인가를 할 때 아버지 생각이 나서 자주 울었다. 딸애가 부탁하기를 당일에는 자중해야 자신도 견딜 수 있다고 부탁하였다. 그리고 어제 새벽, 오늘 이 아침이 올까? 하는 생각을 하며 묵상을 했다. 이 느낌을 어찌 표현해야할지 모르겠다. ‘그 날이 올까?’ 하는, 저 천국을 사모할 때면 드는 마음이 바로 그 날에도 피식, 웃으면서 감사가 저절로 나올 것을 믿는다.

 

그리고 오늘 아침도 말씀에서 위험과 경고를 듣는다. 특히 거짓된 위로와 안전에 대한 경고다. 이 말씀은 매우 이상하게 들리며 세상 사람의 헛된 느낌과는 상반된다. ‘화있을진저, 안일한 자여.’ 하고 부르는 것 같다. “화 있을진저 시온에서 교만한 자와 사마리아 산에서 마음이 든든한 자 곧 백성들의 머리인 지도자들이여 이스라엘 집이 그들을 따르는도다(1).” 이는 ‘안일한 자야, 복이 있다.’고 말하는 것 같다. 아무런 곤란도 두려움도 느끼지 않고 부드럽고 따뜻한 데서 괜찮다, 괜찮다 하고 있는데 외치는 소리 같다. 소위 ‘팔자가 좋다’는 말, 뭘 해도 잘 되고 무탈한 듯 일이 잘 풀려서 걱정이 없는 인생에게 경고하는 것이다.

 

‘화 있을진저’ 하는 것은 공격적인 저주를 나타낸다기보다 오히려 슬픔과 탄식에 가까운 감탄사로 자주 쓰인다. 특히 이사야는 자주 이를 사용하여서 “가옥에 가옥을 이으며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빈 틈이 없도록 하고 이 땅 가운데에서 홀로 거주하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사 5:8).” 부를 축적하는데 열심인 사람에 대해서나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독주를 마시며 밤이 깊도록 포도주에 취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11)” 독주에 빠져 사는 이나 “거짓으로 끈을 삼아 죄악을 끌며 수레 줄로 함 같이 죄악을 끄는 자는 화 있을진저(18)” 거짓을 일삼는 이나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며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으며 쓴 것으로 단 것을 삼으며 단 것으로 쓴 것을 삼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20)” 가짜와 거짓을 전파하는 이나 “스스로 지혜롭다 하며 스스로 명철하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21)” 자만한 이나 “포도주를 마시기에 용감하며 독주를 잘 빚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22)” 술 취하여 용감한 자들에게 애정을 가지고 전한다.

 

오늘 본문에서는 ‘시온에서 안일한 자’와 ‘이스라엘 족속이 따르는 자들이여’ 하고 지목한다. ‘안일한 자’는 ‘마음이 든든한 자’의 다른 의미다. ‘시온’과 ‘사마리아’의 지도자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자기 마음에 이끌리는 대로 아무렇게나 살아가는 자들이다. 죄악을 깨달을 만한 통찰력을 가지지 못했다. 있는 것으로 족하고 현재에 안주한다. 적당하는 게 그런 위험이 있다. 세상 부러울 것 없는 사람처럼 즐거움에 젖어 자기만족으로 덧칠하여 사는 사람들이다. 저는 사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지 상관하지 않는다. 자신은 전쟁 중에도 부를 축적하고 한 나라가 망해서 사라진다 해도 자신의 이윤으로 만족하는 사람이다. 그런 자신을 슬기롭다고 생각한다.

 

자기 몸에 좋은 것을 하며, 몸을 중하게 여기는 자는 제 자신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지 못할 게 없다. 그러나 그런 자에게 ‘화가 있으리라’고 선언한다. 안일과 화가 같이 간다. 교만과 안심이 같이 가고, 육욕과 만족이 같이 간다. 그들에게 오늘 말씀은 회개를 촉구하는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존귀를 자만한다. 자기들의 귀한 지위가 자신을 심판에서 안전히 지켜 줄 것이라 여긴다. 하나님과 사람의 진노를 다 막아 줄 것이라 생각했다. 실제 그렇게 사는 이들이 수두룩하다. 그런 가운데 ‘시온에 거하는 자들’은 그곳이 자기들에게 충분한 명예와 보호를 보장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시온에서 온갖 재앙에 대한 불안을 갖지 않아도 좋다고 여겼다.

 

시온은 천연의 요새이자 인위적으로 강화된 견고한 성이었다. 시온은 왕성이었고 거기에는 다윗가의 보좌가 자리 잡고 있었다. 시온은 유다의 수도여서 참으로 큰 성읍이었다. 시온은 거룩한 성이었다. 성전이 있고 이스라엘의 언약궤가 있다. 시온에 거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성소가 자기들의 도피처가 되고 그의 심판으로부터 자기들을 보호해 줄 것이라 믿었다. 그들은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라.’ 하고 거듭 안위하였다. 그런 그들에게 직격한 바 있다.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렘 7:4).” 왜 그렇게까지 말씀하셨을까? “보라 너희가 무익한 거짓말을 의존하는도다(8).”

 

또한 그들은 성산으로 인하여 교만한 자들이었다. “그 날에 네가 내게 범죄한 모든 행위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하지 아니할 것은 그 때에 내가 네 가운데서 교만하여 자랑하는 자들을 제거하여 네가 나의 성산에서 다시는 교만하지 않게 할 것임이라(습 3:11).” 즉 교회의 특권과 시온에서 차지하고 있는 자기들의 지위를 근거로 세상적으로 안전감에 젖어 교만할 때 죄악은 하나님을 예외로 한다. 자기 판단과 기준으로 기뻐하게 하여 어려움과 슬픔을 가볍게 취급함으로 회개의 기회를 상실하게 한다.

 

‘사마리아 산에서 거하는 자들’은 마음이 든든하였다. 사마리아의 산은 시온 같은 거룩한 산은 아니었다. 그러나 사마리아는 유력한 왕국의 수도였다. 예루살렘을 모방한 북이스라엘 종교의 총 본산지였다. 그들은 사마리아 산을 의지하였다.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세멜의 작은 산은 시온 언덕처럼 명성이 자자하게 되었다. 그들은 이 언덕들과 산에서 구원을 소망하였다. 남북으로 갈라진 이스라엘은 모두 ‘하나님과 동행하는 왕’의 후손이라 자부하였다. 그들은 그 때문에 자기들이 열국에서 우수하고 유명하다고 간주하였다. 그들은 어느 민족보다 오래되고 존귀하다고 자신하였다. 그들은 각각 자신들이 적통이라 주장했다.

 

그들은 하나님께 봉헌되어 온 수확물을 성화시키는 맏물이라고 주장했다. 이스라엘 족속은 그들을 따랐다. 즉 그들은 두 왕국으로 분열되었고 ‘시온’과 ‘사마리아’는 각기 그 중심이었다. 안일한 자들은 방백들과 치리자들이었고 큰 자들이었다. 그들은 열국 중에 우수하여 유명한 자들이었고 두 왕국의 우두머리들이었다. 그들은 시온과 사마리아에 상주했으므로 온 이스라엘의 재판을 관할하였다. 스스로 존귀하게 여겨 위대하다 하는 이들이 교만하지 않기란 어렵다. 큰 국가와 위인들은 자기를 과대평가하기 쉬우며 자기들이 이웃보다 조금 더 우위라고 생각하기 십상이다. 오늘 날 미국의 행태나 그 통치가 그런 듯하다. 각국을 내려다보고 자신들의 힘을 믿고 교만과 위선으로 스스를 정당하다고 여긴다.

 

수천 년 전의 본문이나 오늘의 행태가 다르지 않다. 이에 “너희는 갈레로 건너가 보고 거기에서 큰 하맛으로 가고 또 블레셋 사람의 가드로 내려가라 너희가 이 나라들보다 나으냐 그 영토가 너희 영토보다 넓으냐(2).” 하고 묻는다. ‘갈레’는 ‘모두 다’로 읽을 수도 있다. ‘갈레’의 위치는 분명하지 않지만 시날 땅과 관련하여 언급된 도시이다. “그의 나라는 시날 땅의 바벨과 에렉과 악갓과 갈레에서 시작되었으며 그가 그 땅에서 앗수르로 나아가 니느웨와 르호보딜과 갈라와 및 니느웨와 갈라 사이의 레센을 건설하였으니 이는 큰 성읍이라(창 10:10-12).”

 

이사야가 언급한 ‘갈로’로 “갈로는 갈그미스와 같지 아니하며 하맛은 아르밧과 같지 아니하며 사마리아는 다메섹과 같지 아니하냐(사 10:9).” 에스겔이 언급한 ‘간네’ 곧 “하란과 간네와 에덴과 스바와 앗수르와 길맛의 장사꾼들도 너의 상인들이라(겔 27:23).” 하는 지역과 동일한 지역으로 보인다. 갈레는 티그리스 강 건너편에 가까운 곳이고, ‘하맛’은 원래 가나안에 속해 있다가 “아르왓 족속과 스말 족속과 하맛 족속을 낳았더니 이 후로 가나안 자손의 족속이 흩어져 나아갔더라(창 10:18).” 이스라엘의 북쪽 경계 지역으로 할당되었다. “북쪽 경계는 이러하니 대해에서부터 호르 산까지 그어라 호르 산에서 그어 하맛 어귀에 이르러 스닷에 이르고(민 34:7-8).”

 

‘가드’는 블레셋과 유다를 경계로 하는 지역으로 르호보암은 이곳에 변방을 지키는 성읍으로 정했다. “가드와 마레사와 십과 아도라임과 라기스와 아세가와 소라와 아얄론과 헤브론이니 다 유다와 베냐민 땅에 있어 견고한 성읍들이라(대하 11:8-10).” 이 지역들은 공통적으로 변방에 떨어진 도시들로 별로 보잘 것 없는 도시들이었다. 이런 도시들로 가보라는 것은 그만큼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음을 역설적으로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곧 안심에 제동을 걸기 위해 선지자는 그들에게 그들의 지식이 방주 내에 있던 성읍들을 주목해 보라고 명한 것이다. 당시에 시온이나 사마리아 못지않게 이름을 드날리던 성이었으나 멸망을 당했던 곳이기도 하다.

 

갈레는 니므롯이 건설한 고대 도시였다. 그곳은 이제 폐허가 되었다. 수리아의 주요 도시 중 하나인 하맛은 산헤립이 하맛의 신들을 훼파시켰다고 자랑하던 곳이다. 마찬가지로 가드도 하사엘에게 파멸을 당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요아스 왕이 대제사장 여호야다와 제사장들을 불러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성전의 파손한 데를 수리하지 아니하였느냐 이제부터는 너희가 아는 사람에게서 은을 받지 말고 그들이 성전의 파손한 데를 위하여 드리게 하라(왕하 12:17).”

 

결론은 저들의 안일함과 교만이 가져올 그 끝을 말함이다. 나는 자주 나의 약함으로 느끼지만 이것이 복이 되었다고 확신한다. 바울 사도의 증거와 같이 나의 약한 데서 강함이 나온다는 것이 어제 그대로 실감이 났다. 나의 약함은 먼저 기도에 기도를 더하게 한다. 자주 눈을 감고 주를 부른다. 남들의 사소하고 대수롭지 않은 일상이 나에게는 큰 용기와 감사를 구하게 한다. 어릴 적 함께 자랐던 아이가 왔다. 이젠 저는 오십 대를 넘기는 나이에 아이 셋을 둔 엄마였다. 부친이 가시는 길에도 와서 위로가 되더니, 어제는 신부입장을 앞두고 슬픔과 두려움과 떨림으로 신부대기실 문 앞에 서서 기다리는데 누가 내 등을 쓸어주고 팔짱을 끼고 힘을 더하였다. 보니 저 아이였는데 이심전심이라, 저이도 올해 초 부친을 보내드리고 마음이 어려웠고 나의 처지를 알고 연락도 안 했던 것인데 이렇듯 조용히 와서 용기를 주고 있었다. 신랑이 입장하고 그 짧고 긴 순간에 초조할 법도 한데, 가만히 등을 쓸어주며 위로가 되는 손길에서 하나님의 세심하신 관여가 느껴졌다.

 

그런 식으로 나의 일상은 아주 작은 것에서도 감사가 나오게 한다. 나의 약함으로 내가 예민하여 힘들 때 누구의 말 한 마디, 어디서 불어오는 바람 한 점, 이 고요한 숨결이 나로 주께 감사하게 한다. 새삼 앞서 가신 아버지의 빈 자리가 너무 크게 다가와서 눈물이 흐르다가도 주와 함께 이 광경을 보며 중보하실 것을 생각하면 더 큰 위로가 된다. 딸애는 내가 계속 마음에 걸렸는지 두 번 세 번 전화로 괜찮은가 물었고, 나는 씻고 눕기 무섭게 곤한 잠이 들었다. 모든 게 무난하였고 감사하였고 분에 넘치게 평안하였다.

 

하나님은 자기 섭리로 우리의 애곡과 애통을 촉구하시기도 한다. 이는 위로를 더하시기 위함이다. “그 날에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명령하사 통곡하며 애곡하며 머리 털을 뜯으며 굵은 베를 띠라 하셨거늘 너희가 기뻐하며 즐거워하여 소를 죽이고 양을 잡아 고기를 먹고 포도주를 마시면서 내일 죽으리니 먹고 마시자 하는도다(사 22:12-13).” 이와 같은 교만과 안일한 세상에서 심판은 반드시 찾아올 것이고 이를 두려워하는 게 온전히 주를 의지하며 위로를 얻는 길이다. 오늘 아모스 선지자는 이를 밝힌다(8-14). 하나님이 ‘지우시는 짐’은 우리를 괴롭게 하려는 게 아니다. 우리의 약함으로 우리가 약하게 살아 고생하게 하려는 게 아니다. 광야 40년의 훈련은 그리하여 가나안의 영적 전투에서 승리하게 하려 하심이었다. 이 짐은 무거운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하시면서 주님은 이르시길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29-30).”

 

하여 오늘도 주 앞에 비옵는 것은,

 

여호와여 도우소서

경건한 자가 끊어지며 충실한 자들이

인생 중에 없어지나이다

그들이 이웃에게 각기 거짓을 말함이여

아첨하는 입술과 두 마음으로 말하는도다

(시 12:1-2).

 

신앙을 이어가지 어려운 시절이 분명한데, 이는 안일과 교만 때문이라 자신이 그 적이다. 그리하여 주께 바라기를,

 

여호와께서 모든 아첨하는 입술과

자랑하는 혀를 끊으시리니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의 혀가 이기리라

우리 입술은 우리 것이니

우리를 주관할 자 누구리요 함이로다

여호와의 말씀에 가련한 자들의

눌림과 궁핍한 자들의 탄식으로 말미암아

내가 이제 일어나 그를 그가 원하는

안전한 지대에 두리라 하시도다

(3-5).

 

이와 같은 말씀은,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

(6).

 

그러므로

 

여호와여 그들을 지키사

이 세대로부터 영원까지 보존하시리이다

비열함이 인생 중에 높임을 받는 때에

악인들이 곳곳에서 날뛰는도다

(7-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