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모스가 아마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선지자가 아니며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라 나는 목자요 뽕나무를 재배하는 자로서 양 떼를 따를 때에 여호와께서 나를 데려다가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기를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라 하셨나니
암 7:14-15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시 13:5
우린 누구를 위해 도고한다. 도고와 간구는 차이가 있다. 간구는 자신을 위해 구하는 기도이면 도고는 남을 위해 구하는 기도이다. 오늘 아모스 선지자는 이스라엘을 위해 도고한다(1-9).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이 매우 오래도록 참으시지만 패역한 백성에 대해 언제나 참지는 않으신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하나님은 자신의 이런 양면을 선지자에게 보여 주신다. 먼저 “주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신 것이 이러하니라(1)” 하고 밝히면서 “왕이 풀을 벤 후 풀이 다시 움돋기 시작할 때에 주께서 메뚜기를 지으시매… 주 여호와께서 또 내게 보이신 것이 이러하니라 주 여호와께서 명령하여 불로 징벌하게 하시니 불이 큰 바다를 삼키고 육지까지 먹으려 하는지라(1, 4).” 하고 알리고, “또 내게 보이신 것이 이러하니라 다림줄을 가지고 쌓은 담 곁에 주께서 손에 다림줄을 잡고 서셨더니(7).” 한다.
하나님은 선지자에게 현재의 일을 보이시고 장차 올 일도 미리 보이셨다. 그가 행하신 일과 행하려하신 일을 다 알려 주셨다. 왜냐하면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자기 종 선지자들에게는 비밀이 없이 다 보이시기 때문이다.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3:7).” 여기에는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사례가 나온다. 하나님은 심판 도중에 긍휼을 기억하신다. 그것은 살리시기 위한 자비이다. 이 자비의 서술은 하나님이 죄 많은 민족을 치러오실 때, 먼저 심판을 내리시고, 다음에 이 의미를 알게 하신다.
기근의 심판을 먼저 내리셨다. 선지자는 환상을 보았다. 선지자 아모스는 하나님께서 메뚜기를 지으시고, 그것을 땅에 올라오게 하셨다고 밝힌다. 메뚜기는 그 땅의 아름다움을 벗겨 버리며, 그 땅 거민을 아사시키기 직전까지 몰고 간다(1). 하나님이 황충을 만드신 것은 그의 진노의 도구로 사용하시기 위함이다. 그렇듯 ‘재앙을 지으신다.’ “그러므로 이제 너는 유다 사람들과 예루살렘 주민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보라 내가 너희에게 재앙을 내리며 계책을 세워 너희를 치려 하노니 너희는 각기 악한 길에서 돌이키며 너희의 길과 행위를 아름답게 하라 하셨다 하라(렘 18:11).”
하나님은 그 땅의 풀을 먹어 치우도록 하시고 황충은 왕이 풀을 벤 뒤 풀이 다시 움돋기 시작할 무렵에도 보냄을 받았다. 여기서 심판이 선행하는 자비로 얼마나 경감되는지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봄철에 풀이 처음 자랄 무렵 풀이 가장 필요하고, 가장 무성하며 좋을 때는 이들 곤충을 보내서 먹어 치우게 하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는 처음 풀은 자라게 하시고, 거두어들이게 하셨던 것이다. 왕이 벤 풀은 안전하게 보관되었다. 이는 왕도 밭의 소산을 먹기 때문이다. “땅의 소산물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있나니 왕도 밭의 소산을 받느니라(전 5:9).”
당시 유다 왕이었던 웃시야는 농사를 좋아했다. “또 광야에 망대를 세우고 물 웅덩이를 많이 파고 고원과 평지에 가축을 많이 길렀으며 또 여러 산과 좋은 밭에 농부와 포도원을 다스리는 자들을 두었으니 농사를 좋아함이었더라(대하 26:10).” 황충은 풀을 벤 후에 돋아난 풀 즉 나중에 자라난 풀만 먹으라고 명령을 받았다, 이 풀은 ‘그루갈이 풀’이다. 그 와중에도 하나님의 자비는 심판에 우선하심을 볼 수 있다. 나중에 돋아난 풀은 처음에 돋는 풀에 비해 거의 가치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시는 자비를 멈추지는 않으시는 것이다. 우리에게 내리시는 자비는 심판보다 강하고 우선하신다.
오늘 본문 1-3절에서 메뚜기 떼 환상과 아모스의 중보 곧 도고에 의한 여호와의 심판이 집행이 미뤄지는 것을 본다. 이어 4-6절에서는 불의 환상과 아모스의 중보에 의해 여호와의 심판이 집행 되지 않음을 본다. 이어 7-9절에서 다림줄 환상을 통해 용서가 없을 것 같은 심판 집행이 우상 숭배에 의해 파괴되고 여로보암의 집이 멸절할 것을 예고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시긴 했지만, 사람이 알 수 없는 신중한 고려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때때로 뜻을 돌이키시기도 하는데, 반드시 일어나기로 예언된 일조차 ‘신실한 사람의 중보, 도고 기도나 회개’로 심판이 보류되거나 철회되기도 여러 번이었다.
가령 “모세가 여호와께로 다시 나아가 여짜오되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 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출 32:31-32).” 하는 모세의 기도가 이스라엘을 살렸다.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멸하러 천사를 보내셨더니 천사가 멸하려 할 때에 여호와께서 보시고 이 재앙 내림을 뉘우치사 멸하는 천사에게 이르시되 족하다 이제는 네 손을 거두라 하시니 그 때에 여호와의 천사가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 마당 곁에 선지라(대상 21:15).” 이는 다윗의 기도로 인한 것이다.
“만일 내가 말한 그 민족이 그의 악에서 돌이키면 내가 그에게 내리기로 생각하였던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겠고 내가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건설하거나 심으려 할 때에 만일 그들이 나 보기에 악한 것을 행하여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면 내가 그에게 유익하게 하리라고 한 복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리라(렘 18:8-10).” 이는 예레미야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나타낸다. 오늘의 내가 주 앞에 여전한 것은 나의 어머니를 비롯하여 내 주변의 많은 사람들의 기도 덕분인 것을 잘 안다. 하나님을 멀리하고 지낼 때는 물론 이번에 딸아이 결혼 때에도 원래는 긴장하고 떨다 기진하여 쓰러져도 이상할 게 없었는데 생각보다 무난하였고 담담하였다. 누군가의 기도 덕이다.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주께서 혹시 마음과 뜻을 돌이키시고 그 뒤에 복을 내리사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소제와 전제를 드리게 하지 아니하실는지 누가 알겠느냐(욜 2:12-14).”
혼자 가만히 누구를 생각하며 주 앞에 아뢸 때, 나의 이런저런 일을 두고 되뇌며 주 앞에서 생각할 때, 우리 주님은 결코 외면하시거나 무시하지 않으시는 것을 안다. 가령 누가 우울증으로 힘들어한다. 그럴 리 없는 상대적인 여건인데도 저이의 우울증은 스스로도 이해가 안 되는 일이어서 힘들다. 물론 나는 생각하면서 그의 처지를 두고 주의 이름을 부른다. 그러면서 동시에 주가 그에게 두고 계시는 뜻이 무엇인가를 알게 하시기를 빈다. 누구는 여전히 신랑의 의처증으로 힘들어하는지, 아이 일로 그만큼 고단하고 어려운 것인지, 며칠 전에 다녀간 청년은 다시 오지 않을 것인지……. 나는 여러 생각이 들락거리는 마음으로 기도한다.
기도할 때에 “하나님이 그들이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욘 3:10).” 오늘 이 아침, 도고와 회개의 간극에서 주의 뜻이 돌이켜져 바로 설 수 있음을 확신한다. 아픈 아이를 이끌고 주 앞에 엎드려 사는 부부는 자신들 집에 고장 난 TV조차 그대로 두면서도 섬김을 다한다. 저들의 마음씀이 더러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사람이 자기가 힘든 것을 먼저 처리하는 게 인지상정이라, 자신들도 곤란한 처지에서 교회를 섬기고 주의 종을 향하는 마음으로는 늘 그 앞에서 본을 보는 것 같다.
오늘 여기 아모스의 중보 기도가 타락한 북이스라엘에 재앙을 보내시는 데 있어 그 집행을 취소하게 하신다는 사실에서 다시금 기도의 힘을 느낀다. 이는 죄인들을 향한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계획이 서로 타협하는 것을 보게 된다. 도고로 인하여 하나님의 심판이 유보되거나 취소되기도 한다는 사실에, 설령 그들이 악의 구렁텅이 같은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였다 해도 말이다. 하나님은 오늘 아모스의 기도를 들으시고 ‘메뚜기와 불’로 북이스라엘을 심판하려 하셨던 계획을 취소하기는 하셨으나, 당신의 거듭된 긍휼에도 불구하고 결국 회개하지 않는 북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이 확정되는 것을 세 번째 환상인 다림줄 환상으로 알게 한다.
아모스는 다림줄 환상을 본 후 더 이상 북이스라엘을 위해 중보 기도를 하지 않았다. 이는 그가 북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의지가 얼마나 확고하며 필연적인지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곧 ‘범사에 다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다는 말씀이 그대로 응함이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전 3:1).” 이는 회개에 대해서도 동일하여 여러 번의 기회가 있을 때 이를 끝까지 거절하고 거역하면 별 수 없다. 나의 경우 아찔하기도 한 것이 내 인생에 여러 번 회개의 기회를 주셨다는 것를 잘 안다. 그때마다 하나님의 놀라운 손길도 동시에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다시 또 죄로 물들면서 빠져나갔다. 그러자 끝내 나를 치시듯 파산과 공황과 아이와의 이별과 극심한 불안을 조성하셨다.
그때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내가 끌려간 것이 복이었다. 나는 울면서 신대원을 다녔고 늘 불안에 떨면서 약에 취한 듯 학업을 쫓아갔다. 목사고시를 두 번씩이나 떨어지면서도 나는 더 이상 도망칠 기력이 없었다. 완전한 승복에서 완전한 긍휼하심이 선명해졌다. 학부 때도 그랬지만 신대원 때도 그렇고, 교회를 이뤄갈 때도 그렇지만 나의 사소함으로 힘에 겨울 때도 선명하였다.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마 13:15).” 나는 정말 그러고 살았다. 그런 뒤 보인다. 누가 왔다. 이런저런 이유로 교회를 떠나게 됐다면서 탓을 한다. 저이에게 예배를 권하고 같이 말씀을 묵상하자고 하나 저는 대답을 미루고 갔다. 늘 그런 식이다.
아이가 장애진단을 받게 됐다. 아이엄마는 예전에 믿었던 것을 내세워 자신의 신앙은 과거형으로 둔다. 나름 지금도 믿고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교회와 예배는 거절한다. 다른 수를 찾느라 여러 곳을 배회하듯 아이 일만으로 전전긍긍하다. 그러면서도 자신만은 한사코 괜찮단다.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가 본 것을 다 증언하였느니라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계 1:2-3).” 말씀으로가 아니면 나는 다른 길을 알지 못한다.
“그들이 내게 이르되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자들이 그 지방 거기에서 큰 환난을 당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탔다 하는지라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이르되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여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간구하나이다(느 1:3-5).”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 도고이다. 중보로 살아온 사람이라 그에 따른 사랑에 빚진 자이다. “여호와께서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으시고 백성을 고치셨더라(대하 30:20).”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뿐이라, 나는 며칠 전 다녀간 친구의 이름을 부르며 주를 찾는다. 누가 기도를 부탁할 때 나는 그 내용을 적어두며, 생각하고 또 생각하기를 오가는 길에서나 앉아서나 생각날 때마다 나의 사소한 생각함으로 주께 구한다. 이는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요일 3:22).”
곧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빌 2:15-16).”
그러므로 오늘 메뚜기와 불을 놓고 심판을 미루게 하였던 중보가 결국은 다림줄에서 더는 소용이 없어, 저들은 회개하지 못하는 백성인 것을 인정하게 된다. 오늘 본문 1-9절에서 벧엘의 제사장 아마샤의 아모스 핍박과 아마샤를 향한 아모스의 변론과 심판의 예언을 보면서, 아마샤의 아모스 핍박에 대해 이상하게 생각할 게 없다. 도고는 또 다른 공격의 빌미가 되기도 한다. 즉 벧엘의 제사장 아마샤는 벧엘을 거점으로 한 북이스라엘의 금송아지 우상 승배를 관장하고 있었다! 그는 아모스가 환상을 통해 여호와께서 여로보암의 집을 멸절시킬 것이라고 선포한 것과 관련하여 당시 북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여로보암 2세에게 그가 왕에 대하여 모반을 획책하고 있다고 모함하는 것은 당연하다. 자신의 자리 다툼 때문이다. 아모스에 대하여는 직접적으로 그가 떡을 위하여 거짓 예언을 선포하는 거짓 선지자라 호도하며 더 이상 벧엘에서 예언하지 말고, 유다 땅으로 도망하여 거기서나 예언할 것을 요구하는 것도 그것이다.
그러니 사람과 사람 사이의 암투가 얼마나 어리석은지… 아마샤는 여기서 남유다 출신 아모스가 북이스라엘에 대하여 악의적으로 감정과 편견에 부당한 예언을 하는 것은 당연하기도 하다. 이는 그로 대표되는 북이스라엘 백성들의 대다수가 갖고 있던 생각이기도 하였다. 북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모스의 경고를 듣지 아니한 데는 이러한 배경이 있다. 하여 14-17절에서 자신을 핍박한 아마샤를 향한 아모스의 변론과 여호와의 심판이 선포된다. 여기서 아모스는 먼저 아마샤가 자신의 예언이 ‘떡을 위한 거짓 예언’이라고 하는 데 대해 자신은 본래 충분히 생계를 유지할 수 있음을 밝히면서까지 알리는데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모스가 아마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선지자가 아니며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라 나는 목자요 뽕나무를 재배하는 자로서 양 떼를 따를 때에 여호와께서 나를 데려다가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기를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라 하셨나니 …네 땅은 측량하여 나누어질 것이며 너는 더러운 땅에서 죽을 것이요 이스라엘은 반드시 사로잡혀 그의 땅에서 떠나리라 하셨느니라(14-17).”
결국은 그런 것인가? 다만 나는 기도할 뿐이라,
나의 영혼이 번민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치며 자랑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
(시 13:2).
할 때에,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두렵건대 나의 원수가 이르기를
내가 그를 이겼다 할까 하오며
내가 흔들릴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하나이다
(3-4).
이렇게 나는,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주께서 내게 은덕을 베푸심이로다
(5-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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