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 주 여호와의 눈이 범죄한 나라를 주목하노니 내가 그것을 지면에서 멸하리라 그러나 야곱의 집은 온전히 멸하지는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그들을 그들의 땅에 심으리니 그들이 내가 준 땅에서 다시 뽑히지 아니하리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암 9:8, 15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
시 15:1
여호와의 선민으로 사는 일은 특별하면서도 조심스럽다. 보는 눈이 많고 듣는 귀가 항상 곁에 있다. 오늘 본문은 이에 따른 심판으로 그 심판의 확실성과 그 집행의 준엄함을 강도 높게 더해간다. 점층적으로 보여주는 다섯 가지 환상 가운데 ‘메뚜기 떼’, ‘불’, ‘다림줄’, ‘여름 과실’ 등의 환상으로 재앙을 알리었다. 이에 끝으로 여름 실과 환상과 악한 지배층을 향한 심판의 날이 도래한 사실을 그 참상과 함께 기록하고(8:1-14), 이어 ‘성전 파괴’와 ‘대살육의 환상’으로 선민을 향한 심판의 최종 예언을 마무리한다.
“내가 보니 주께서 제단 곁에 서서 이르시되 기둥 머리를 쳐서 문지방이 움직이게 하며 그것으로 부서져서 무리의 머리에 떨어지게 하라 내가 그 남은 자를 칼로 죽이리니 그 중에서 한 사람도 도망하지 못하며 그 중에서 한 사람도 피하지 못하리라(1).”
이를 상술하면 1-4절에서 성전 파괴와 살육을 선언하고 이 환상을 통해 선민 전체를 향한 살육의 심판 경고하고, 7장 이후 지금까지 아모스 선지자의 심판에 대한 경고의 대상이 북이스라엘이었음을 알게 한다. 하지만 본 단락은 이 심판이 남유다로도 확장되어 있다. 이는 아모스가 현재 남유다 출신으로 북이스라엘에서 이스라엘을 일차 대상으로 예언하며 심판을 경고하였지만 그것은 북이스라엘에 대한 편견과 악의적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에서 비롯된 것임을 말씀으로 증거하였다. 즉 선민 이스라엘이 두 나라로 나뉘어 북이스라엘이 더욱 타락하여 먼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할 것이지만 그들과 마찬가지로 극심하게 타락할 남유다 역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남북 이스라엘에 모두 하나님의 근원적인 사랑의 대상에서 벗어나 ‘여호와 신앙’을 떠남으로 야기된 것이다. 이에 5-10절에서는 다섯 번째 환상에 이어지는 심판의 주 여호와의 징벌과 선별의 측면을 강조한다. 곧 모두를 심판하시나 ‘남은 자’를 두시고, 죽일 자는 죽이시고 살릴 자는 살리신다. 이를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출애굽과 가나안 정착을 통해 모두를 멸하심으로 그의 분노를 만족하시기보다 ‘남은 자’를 두어오셨다. 출애굽 후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갈 때는 여호수아와 갈렙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는 우리 성도가 성도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입는 대상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킴으로, 믿음으로만이 승리할 수 있다. 모두가 가나안을 보고 두려워 떨며 하나님의 약속에 회의적일 때 여호수아와 갈렙만은 믿음으로 이를 준행할 것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그렇듯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우리의 거룩한 정체성은 믿음으로 말마임아 유지된다. 이스라엘의 오늘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잃고, 다른 민족과 구별되지 않음으로 하나님의 놀라우신 권능에서 벗어났다. 이는 스스로 자초한 일이다. 출애굽 때부터 하나님은 저들을 특별히 자기 백성으로 삼으셨다. 가나안에 정착하게 된 사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때마다 믿음이 요구되었고, 어떤 분리한 상황에서도 누구는 믿음으로 승리하였고, 누구는 주변국으로부터 전해져오는 우상과 온갖 풍습을 따랐다. 이는 역사적으로나 구속사적으로 참으로 의미 있는 사건이다. 오늘도 이는 같다.
그런 가운데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지킨 소수의 신실한 자들에게는, 그들 중 단 하나도 잃지 않을 것임을 선언하신다. “보라 주 여호와의 눈이 범죄한 나라를 주목하노니 내가 그것을 지면에서 멸하리라 그러나 야곱의 집은 온전히 멸하지는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내가 명령하여 이스라엘 족속을 만국 중에서 체질하기를 체로 체질함 같이 하려니와 그 한 알갱이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8-9).” 이런 가운데 우리의 소망은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이 사로잡힌 것을 돌이키리니 그들이 황폐한 성읍을 건축하여 거주하며 포도원들을 가꾸고 그 포도주를 마시며 과원들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리라 내가 그들을 그들의 땅에 심으리니 그들이 내가 준 땅에서 다시 뽑히지 아니하리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14-15).”
그럼에도 “내 백성 중에서 말하기를 화가 우리에게 미치지 아니하며 이르지 아니하리라 하는 모든 죄인은 칼에 죽으리라(10).” 하는 자들이 허다한 것은 우리가 다수의 힘에 밀리기 때문이다. 다들 그러고 살아! 하는 자기 안위에 스스로 기댄다. 다 그래, 하는 말 속에 모든 것을 허용하고 싶은 욕구가 있다. 뭐라 이를 때 ‘너도 그래!’ 하는 것은 귀를 닫는 것이다. 안 듣겠다는 것이다. 성경 그 누가 하나님 앞에 완전했던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 다윗도 모두는 그때마다 그들도 그랬다! 의인은 하나도 없다는 말씀이 이를 이르심이다.
그러면서 저마다 건물을 본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8).” 하심은 거대하고 화려한 교회 건물이 아니다. 많은 사람이 오가는 예루살렘 성전도 아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이르시길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 2:19).” 곧 오늘 본문의 시작에서도 교회 성전이 중심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내가 보니 주께서 제단 곁에 서서 이르시되 기둥 머리를 쳐서 문지방이 움직이게 하며 그것으로 부서져서 무리의 머리에 떨어지게 하라(1b).”
이는 교회, 그 자체로는 의미 없고 심지어는 얼마든지 버려지고 무너질 수도 있다.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계 2:5).” 이와 같은 경고나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3:16).” 이와 같은 말씀으로도 알게 된다. 교회는 그 안의 한 영혼, 주를 사랑하고 의지하는 ‘남은 자’의 것이지 다수의 힘 많은 사람들의 소유가 아니다. 교회는 그저 건물이 아니다.
두려운 것은 우리가 오늘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허상일 수 있다. 그토록 아끼고 사랑하는 것이 거짓일 수 있다. “보라 내가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성에서부터 재앙 내리기를 시작하였은즉 너희가 어찌 능히 형벌을 면할 수 있느냐 면하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칼을 불러 세상의 모든 주민을 칠 것임이라 하셨다 하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25:29).” 다들 괜찮다, 아니라, 하는 데서 형벌을 받을 수도 있다. 결국 ‘남은 자’란 성전에 모여 있다가 성전이 무너져 내릴 때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자들이다.
이어지는 2-4절에서는 이스라엘에 대한 철저한 심판을 스올과 하늘이 대조를 이루며 설명된다. “그들이 파고 스올로 들어갈지라도 내 손이 거기에서 붙잡아 낼 것이요 하늘로 올라갈지라도 내가 거기에서 붙잡아 내릴 것이며, 갈멜 산 꼭대기에 숨을지라도 내가 거기에서 찾아낼 것이요, 내 눈을 피하여 바다 밑에 숨을지라도 내가 거기에서 뱀을 명령하여 물게 할 것이요, 그 원수 앞에 사로잡혀 갈지라도 내가 거기에서 칼을 명령하여 죽이게 할 것이라 내가 그들에게 주목하여 화를 내리고 복을 내리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곧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는 곳은 없다. 오직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하시는 말씀뿐이다. ‘음부’를 말하는 ‘스올’은 죽은 자들이 사후(死後)에 가는 지하 세계로 여겨졌다. 히브리인들은 우주가 세 부분으로 되었는데 하늘과 땅과 지하로 구성되었다고 생각하였다. 이중 죽은 자들이 가는 지하 세계가 바로 음부, 스올이다. “주는 나를 스올에 감추시며 주의 진노를 돌이키실 때까지 나를 숨기시고 나를 위하여 규례를 정하시고 나를 기억하옵소서(욥 14:13).” 하는 욥의 기도가 역설적이다.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아주 깊은 곳’이라는 뜻을 함축하는 게 스올이다. 상대적으로 하늘은 우리의 손길을 초월하는 ‘아주 높은 곳’을 의미한다. 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혹은 누가 무저갱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롬 10:6-7).” 고로 우리는 오늘을 살면서 우리가 가 닿을 영혼의 닻이 내려질 하늘을 소망한다. “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 가나니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 가셨느니라(히 6:19-20).”
그런 거 보면 이 땅에서의 설왕설래, 누가 더 옳고 그름은 의미없다. 말에도 품격이 있고, 듣는 귀에도 품격이 있다. 말의 품격은 인격에서 나오고 귀의 품격은 인자함에서 생긴다. 예수께서 ‘들을 귀 있는 자’를 향해 말씀하신 까닭도 같은 말이라도 해도 이와 같은 격이 다른 경우 그 가치를 모르면 값어치도 의미가 없는 것이다. ‘소귀에 경 읽기’란 말처럼 백날 좋은 말로 뭐라 한들 들을 귀 없는 자에게는 허사라. 저들의 특징이 ‘너도 그래!’ 하는 식으로, ‘다 그래!’ 하고 귀를 닫는 것이다. 닫힌 귀에 열린 입은 술 취한 자의 손에 들린 가시나무 같다. 저는 흥에 겨워 휘둘러 노래한다지만 곁에 섰다 가시에 찔리기 일쑤다. 마찬가지로 들을 귀가 없는 자는 저 좋은 말에 도취되어 산다.
여기서 오늘 ‘갈멜 산 꼭대기’는 과원, 정원이란 뜻이다. 이 산은 팔레스틴 지중해 연안 중앙부에 돌출한 반도에 위치한 산이다. 이 산은 그리 높지 않으나 잡목과 가시덤불 등이 많은 곳이다. 역사적으로 많은 피난자들의 은신처 역할을 했다.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멸할 때에 오바댜가 선지자 백 명을 가지고 오십 명씩 굴에 숨기고 떡과 물을 먹였더라(왕상 18:4).” 그때 그곳이 여기다. 엘리야가 거짓 선지자들과 맞서 이세벨을 상대한 곳도 여기다. “그런즉 사람을 보내 온 이스라엘과 이세벨의 상에서 먹는 바알의 선지자 사백오십 명과 아세라의 선지자 사백 명을 갈멜 산으로 모아 내게로 나아오게 하소서(19).” 도피자들의 은신처라 할 수 있는 ‘갈멜산 꼭대기’는 피할 수 있는 곳을 의미한다.
하나 하나님의 심판은 인간이 피할 수 없음을 밝힌 후, 본문은 이스라엘을 멸망시키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드러내고 있다. “주 만군의 여호와는 땅을 만져 녹게 하사 거기 거주하는 자가 애통하게 하시며 그 온 땅이 강의 넘침 같이 솟아 오르며 애굽 강 같이 낮아지게 하시는 이요(5).” 여기서 ‘주 만군의 여호와’ 곧 하나님은 온 우주를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다스리시고, 지배하시는 분임을 알려준다. “보라 산들을 지으며 바람을 창조하며 자기 뜻을 사람에게 보이며 아침을 어둡게 하며 땅의 높은 데를 밟는 이는 그의 이름이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니라(4:13).” 그가 “땅을 만져 녹게 하사” 견고하게 하신 땅을 허물어뜨릴 수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곧,
와서 여호와의 행적을 볼지어다
그가 땅을 황무지로 만드셨도다
…
땅의 기둥은 내가 세웠거니와
땅과 그 모든 주민이 소멸되리라 하시도다 (셀라)
(시 46:8, 75:3).
아울러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신 심판의 주로 “그 온 땅으로, 솟아오르며” 이스라엘에 큰 홍수를 내려 지표면을 덮게 하리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심판의 표현으로 홍수가 사용된 것은 노아의 홍수 시대가 대표적이다.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창 6:7).” 그러므로 “애굽 강같이 낮아지게” 하실 때 홍수로 범람한 사실을 기초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전달한다. 하나님은 땅이 홍수로 침몰되어 삶의 근거지를 송두리째 빼앗기도록 하시는 분이다. “이로 말미암아 땅이 떨지 않겠으며 그 가운데 모든 주민이 애통하지 않겠느냐 온 땅이 강의 넘침 같이 솟아오르며 애굽 강 같이 뛰놀다가 낮아지리라(암 8:8).”
그야말로 못하실 게 없는 하나님께서 모든 백성과 자연을 다스리는 능력자임을 보여 주며, ‘그 궁창의 기초를’ 곧 하늘 아래의 물과 하늘 위의 물을 나누어 하나님은 타락한 백성들에게 다시 한 번 이스라엘의 독특함을 설명하신다. 이스라엘은 열방과 달리 인류 구원을 위해 선택된 선민으로, 멸망을 받을지라도 궁극적으로는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자손들아 너희는 내게 구스 족속 같지 아니하냐 … 보라 주 여호와의 눈이 범죄한 나라를 주목하노니 내가 그것을 지면에서 멸하리라 그러나 야곱의 집은 온전히 멸하지는 아니하리라 … 이스라엘 족속을 만국 중에서 체질하기를 체로 체질함 같이 하려니와 그 한 알갱이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9:7-9).” 그런 가운데 허상을 좇듯 거짓에 기대어 스스로 위로를 받으려는 자는 죽는다. “내 백성 중에서 말하기를 화가 우리에게 미치지 아니하며 이르지 아니하리라 하는 모든 죄인은 칼에 죽으리라(10).”
곧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 가운데 신실한 자들을 심판에서 면케 하시고 죽음의 형벌에서 보존하심으로써 은혜를 나타내신다. “너희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성문에서 정의를 세울지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혹시 요셉의 남은 자를 불쌍히 여기시리라(5:15).” 하심에 대하여 이사야도 전하길, “그 날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야곱 족속의 피난한 자들이 다시는 자기를 친 자를 의지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여호와를 진실하게 의지하리니 남은 자 곧 야곱의 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 이스라엘이여 네 백성이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돌아오리니 넘치는 공의로 파멸이 작정되었음이라(사 10:20-22).”
예레미야도 이르시기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는 여러 민족의 앞에 서서 야곱을 위하여 기뻐 외치라 너희는 전파하며 찬양하며 말하라 여호와여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구원하소서 하라(렘 31:7).” 고로 온 성경이 오늘 우리에 외치시는 바, 다섯 가지 그 이상의 심판의 환상과 실상 가운데서도 남을 자는 남길 것이고, 이는 주의 긍휼하심이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내 모든 선한 것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선포하리라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출 33:19).”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바울 사도의 설교에서도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롬 9:15-16).” 하여 이를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 것이고, 들을 귀 없으면… 망한다. 그러므로 오늘도 주 앞에 엎드려,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실천하며
그의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그의 혀로 남을 허물하지 아니하고
그의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웃을 비방하지 아니하며
그의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들을 존대하며
그의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하지 아니하며
이자를 받으려고 돈을 꾸어 주지 아니하며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하지 아니하는 자이니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이다
(시 15:1-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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