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하현. 2026. 4. 24. 06:01

 

그가 대답하되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 때문인 줄을 내가 아노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요나가 밤낮 삼 일을 물고기 뱃속에 있으니라

욘 1:12, 17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뵈오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시 17:15

 

 

요나서는 볼 때마다 내 이야기 같다. 어쩌면 우리 성도의 공통된 모습일지도 모른다. 그런 가운데서 우린 또 남다른 게 그런 사실을 인정한다. 하여 “그가 대답하되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 때문인 줄을 내가 아노라 하니라(12).” 이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신 것을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죽이시든지 살리시든지 주의 손에 달린 것도 안다. 우리가 주의 것이라는 걸, 그러므로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하는 고백으로 나아간다.

 

그때에 오늘 요나의 처리는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요나가 밤낮 삼 일을 물고기 뱃속에 있으니라(17).” 그 끝이 정해져 있었다. 하나님의 손길은 거기까지 닿아 있었다. 또한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이방에 대한 구원의 의지를 보여준다. 요나를 향해 니느웨의 심판을 경고하라고 명령하셨다. 그 길에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가 요나를 인도하셨고 여호와의 섭리 가운데 결국 죄악의 니느웨성은 회개하여 심판을 면하였다.

 

가령 나는 글방을 할 때 ‘이상한 아이들’과 그 가정을 많이 만났다. 글쓰기란 다른 과목과 달리 그 소재가 특수하게도 저의 가정이 드러나게 되어 있다. 단지 국어나 역사 논술과 달리 자신의 이야기를 소재로 글을 써야 하는 일기부터 수기, 수필 등은 어쩔 수 없이 그 대상이 ‘나’다. 어떤 아이는 ‘왕따’였고, 거식증에 시달렸고, 뚱뚱하여 남을 의식했고, 유난히 공부를 잘해서 이기적이었고, 병적으로 내성적이었다. 그런 가운데 각각의 가정으로 비춰보면 부모들이 범상치 않았다. 열 명 남짓 변호사를 두고 있는 로펌의 대표로 있는 아빠 때문에 아이는 늘 모든 일에 의식한다. 엄마가 유난히 하소연을 많이 하거나 상대적으로 난 척을 잘한다. 또는 이상한 종교에 빠져 조모가 늘 말썽이던 가정도 있다. 그런 내용의 글은 아이의 인성과 연결되었고, 그때마다 상한 심령의 아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때 나는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다시스로 가던 배 위였다. 저들 영혼의 아우성을 외면하였고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한참 아이들이 꽉 차서 더는 빈 시간표가 날 때마다 기다려야 할 정도로 아이들이 많을 때는 ‘그런 아이들’을 돌려보내고 내가 상관하려 하지 않았다. 오늘에 이르러는 그때도 참 많이 힘들어하는 영혼들이 있었다는 것을 안다. 알아달라는 신호였고 나는 한사코 외면하며 깊은 잠에 들었었다. 본서는 이러한 나를 마주하게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데 있어, 그 대상을 우리가 선별할 수 없다. 오늘 본문은 이 일이 단지 요나 개인에게 발생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운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의지로 이루어가시며 관철시키는 측면에 주안점을 둔다.

 

이를 또 요나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부정하지 않았고 자신을 성난 파도에 던지라고 하였다. 이는 역설적이게도 하나님이 다음을 준비하셨다는 믿음이 있어서이다. 결국 두 손 들고 주 앞에 무릎을 꿇을 때 나의 심정도 그러했다. 그때 나의 아이들은 고1, 중2였다. 한참 예민했고 뭐라 단속이 어려운 때에 나는 아이들 앞에서 보기 좋게 넘어졌다. 주를 인정함이란 승복하는 것으로 두 손을 드는 일이다. 이에 하나님은 다음을 책임이셨다. 오늘에 두 아이가 신앙 안에서 잘 자라 준 것은 순전히 내가 신앙적으로 키우거나 말씀으로 잘 양육하여서가 아니다. 아이들도 안다. 기고만장하던 내가 주 앞에 두 손 들 때 본인들도 이를 보았다.

 

가령 뜬금없이 딸애가 신학을 가겠다고 한 일도, 아들이 필리핀 동생에게로 가서는 죽어라 공부하여 심리학을 한 것도, 중간에 난데없이 해병대를 자원하여 간 것도… 어느 것 하나 내가 원하고 그리 요구한 게 아니다. 그러는 동안 아이들도 아이들의 ‘요나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독특한 면모를 비춰보면 본문의 스펙트럼은 무궁하다. 이를 통하여 보면 사람의 본질과 하나님의 강권하심은 강대강의 대립이 아니라, 순종과 순복의 과정이다. 하나님의 마음을 한사코 외면하는 요나를 돌이켜서 기어이 주의 길에 세우시는 과정은 놀랍다. 그런 차원에서 나는 내가 승복하고 난 뒤로 아이들의 일에 또는 누구의 삶에 왈가왈부 하지 않는다. 어떻게 되든지 주가 원하시는 길로 인도하실 것을 알면서이다.

 

먼저 1-3절은 여호와께서 요나를 향하여 니느웨에 가서 회개를 선포하라고 명령하셨다. 그나 요나는 이스라엘의 대적인 니느웨가 회개하여 멸망에서 벗어날 것을 싫어하여 니느웨로 가지 않고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여 다시스로 가는 배를 올랐다. 여기서도 보면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그들과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배삯을 주고 배에 올랐더라(3).” ‘마침’이 문제다. ‘하필’, ‘마침’, ‘그때’ 어쩌면 우린 이와 같은 우연으로 핑계를 삼는다. 나 역시 불순종할 때도 ‘마침’ 그때마다 그럴 수 있는 여건과 사람과 이유를 만났다. 그것으로 스스로를 정당화할 수 있었다. 어쩌면 요나의 심정으로 니느웨는 아니라는 데서 자신의 명분을 찾았을 것이다.

 

4-10절은 그리하여 주어진 소명을 저버리고 도망치는 요나를 향해 하나님의 일차적인 대응이 다루어진다. 하나님께서는 여기서 폭풍을 만나게 하시고, 제비를 뽑아 일에 책임 소재가 요나에게 있음을 드러내신다. 그리고 11-13절에서는 그에 따른 책임을 통감한 요나가 재앙을 인정하고 자신을 바다에 던지라고 한다. 그래도 사공들은 하는 데까지 최선의 노력을 하려했으나 역부족이라 결국은 허사였다. 그렇게 14-16절에서 결국 요나를 폭풍이 이는 바다에 던졌고, 이로써 바다는 조용해졌고, 모두가 놀라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을 인정하며 서원하여 예물을 드렸다. 그 사이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요나가 밤낮 삼 일을 물고기 뱃속에 있으니라(17).”

 

성경은 늘 이렇게 전개된다. 노아에게 장차 임할 홍수 심판에 대비하여 방주를 짓도록 명하실 때도 이 느닷없고 뜬금없는 120년의 방주 짓는 시간을 노아는 노아대로 이를 지켜보는 사람들은 그들대로 갈등과 회의와 방관과 조소가 뒤엉켜 하나님의 뜻은 서서히 무르익었을 것이다(창 6:13-21). 또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 그가 지시하신 곳으로 가라하실 때도(12:1-3), 이 일이 그리 간단하였겠나? 심지어 광야에서 양을 치며 은둔 생활에 젖어 사는 모세에게 난데없이 애굽으로 돌아가서 고통 받는 동족을 구출하라니(출 3:7-10). 디셉 사람 엘리야에게 아합에게 가서 아합 집의 불경함과 북이스라엘의 죄악을 지적하고 그 죄에 따른 심판을 선언하라하실 때는 또 어떻고?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로 궁지에 몰아놓듯 명령하신다. 오늘 우리 현실이 이 일을 감당할 수 있나 없나 하는 고려는 전혀 안 하시는 것 같다. 그러니 말 좋아하는 사람이 곁에 있으면 이런 상황을 두고 여러 말로 사람을 피곤하게 한다. 가령 내가 돌이켜 신학을 하고 신대원에 가고 목사가 되겠다고 할 때 나의 가장 가까운, 사랑하고 존경하는 선생이 극구 반대였다. 여러 날을 같은 말로 나를 설득하여 못하게 하려 했고, ‘하필’ 친구 분 가운데 나와 처지가 거의 같은 이가 있어 먼저 뒤늦게 신학을 하고 목사가 되어 하나님을 찾다가 혼자 어디 사찰을 짓고 ‘신을 찾는 늑대’가 되었다. 그이가 선생 부탁으로 내게 전활 해서 거의 밤새 통화를 하고 설득하여 부질없음을 강요했다.

 

그런 식이다. 아직 어리고 유약한 예레미야에게 패역을 끝내 고집하는 유다 백성을 향해 심판을 선포하라고 명하신 것도 그러하다.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내가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하니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아이라 말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령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렘 1:4-7).” 그럴 때 좀 더 힘 있고 쓸만한 자를 세우시면 좋을 걸, 꼭 그렇듯… 나는 지금도 가끔 왜 하필 나 같은 자를 세우셔서 이 고생인가? 싶은 하소연을 주 앞에 한다.

 

어제도 누구의 결별(?) 문자에 마음이 우울하고 후회가 밀려왔다. 말하지 말 걸, 뭐라 하지 말 걸, 그냥 그러든가 말든가 내버려둘 걸, 하고 혼자서 여러 번 후회도 했다. 그럴 때면 또 내가 다 망친 것 같아서 한심하고 후회가 된다. 그냥 뒀으면 좋은 사이로나마 지냈을 텐데… 점점 우리 사이는 ‘친절한 타인’을 바라고, 행여 저의 영적인 문제나 그 삶에 들어가고자 하면 이처럼 바로 쳐낸다. 그 심정이 이해는 간다. 나 같아도 누가 내 일에 그렇듯 감 놔라 배 놔라 하면 기분 상할 것이다. 그러니 한동안 그걸 두고 망설이다 작심을 하고 조금은 진지하게 말했더니만, 영락없이 그리 되었다. 그러니 누가 듣는다고, 니느웨야 더더욱 어쩔 수 없는 것 아닐까? 요나의 심정이 자주 내 심정이다.

 

아모스에게 북이스라엘의 신앙적, 사회적 범죄와 불의를 선포하라고 지시하실 때도 “아모스가 아마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선지자가 아니며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라 나는 목자요 뽕나무를 재배하는 자로서 양 떼를 따를 때에 여호와께서 나를 데려다가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기를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라 하셨나니(암 7:14-15)” 그렇듯 배타적인 선민의식이 우리 신앙을 역으로 옭아매고 있는 게 사실이다. 베드로에게 이방인 고넬료의 집으로 가서 그곳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실 때도, “베드로가 불러 들여 유숙하게 하니라 이튿날 일어나 그들과 함께 갈새 욥바에서 온 어떤 형제들도 함께 가니라(행 10:23).”

 

우리의 선택지는 순종과 불순종 둘 뿐이다. 중간이 없다. 합일점이 요구되는 게 아니다. 바울에게 유럽으로 향하게 하신 것도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행 16:9-10).” 더러는 이게 아닌데, 싶다가도 우리는 은연중에 안다.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때론 억지스럽고, 귀찮고, 성가신 일일지라도, 마땅히 가야 할 길에서 우리가 주저하면 하나님은 가차 없으시다. 그러나 그때마다 “그는 너희보다 먼저 그 길을 가시며 장막 칠 곳을 찾으시고 밤에는 불로, 낮에는 구름으로 너희가 갈 길을 지시하신 자이시니라(신 1:33).” 이를 이제는 인정한다.

 

부친의 부재와 딸애의 결혼과 교회의 이전에 같은 달에 후다닥 이루어지고 난 뒤에 나는 더욱 알았다. 그때도 하나님은 나 혼자 두지 않으셨다. 그때마다 하나님은 먼저 움직이시고 예비하셨다. 뒤늦게 연락이 오는 경우마다 아이의 결혼이 감동적이었다고 한다. 부친의 장례가 은혜로웠다고 한다. 새로운 교회에 대한 비전을 같이 응원하여 기도한다고 한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나를 가르쳐 주의 뜻을 행하게 하소서

주의 영은 선하시니

나를 공평한 땅에 인도하소서

(시 143:10).

 

그러므로 오늘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로 요나를 보내시는 장면은 주를 구주로 영접하고 사는 우리 모든 성도들의 발길에 대한 표징이다. 비록 니느웨는 교만하며, “그의 말에 나는 내 손의 힘과 내 지혜로 이 일을 행하였나니 나는 총명한 자라 열국의 경계선을 걷어치웠고 그들의 재물을 약탈하였으며 또 용감한 자처럼 위에 거주한 자들을 낮추었으며(사 10:13)”, 잔인하며, “화 있을진저 피의 성이여 그 안에는 거짓이 가득하고 포악이 가득하며 탈취가 떠나지 아니하는도다… 그가 포로가 되어 사로잡혀 갔고 그의 어린 아이들은 길 모퉁이 모퉁이에 메어침을 당하여 부서졌으며 그의 존귀한 자들은 제비 뽑혀 나뉘었고 그의 모든 권세자들은 사슬에 결박되었나니… 네 상처는 고칠 수 없고 네 부상은 중하도다 네 소식을 듣는 자가 다 너를 보고 손뼉을 치나니 이는 그들이 항상 네게 행패를 당하였음이 아니더냐 하시니라(나 3:1, 10, 19).” 그래서 폭력적인 앗수르의 수도라, 오늘도 우리를 여기에 보내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호와여 의의 호소를 들으소서

나의 울부짖음에 주의하소서

거짓 되지 아니한 입술에서 나오는

나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소서

(시 17:1).

 

우린 더욱 더 주께 간구한다.

 

주께서 나를 판단하시며

주의 눈으로 공평함을 살피소서

주께서 내 마음을 시험하시고

밤에 내게 오시어서 나를 감찰하셨으나

흠을 찾지 못하셨사오니 내가 결심하고

입으로 범죄하지 아니하리이다

(2-3).

 

하여,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뵈오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1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