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하현. 2026. 4. 23. 06:02

 

너의 마음의 교만이 너를 속였도다 바위 틈에 거주하며 높은 곳에 사는 자여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누가 능히 나를 땅에 끌어내리겠느냐 하니 네가 독수리처럼 높이 오르며 별 사이에 깃들일지라도 내가 거기에서 너를 끌어내리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옵 1:3-4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시 16:2, 8

 

 

한 장으로 된 성경이다. 오바댜서는 짧고 굵은 내용을 담고 있다. 첫 구절에서 이 선지서가 시작되는 권위가 여호와께 있음을 나타낸다. “오바댜의 묵시라 주 여호와께서 에돔에 대하여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말미암아 소식을 들었나니 곧 사자가 나라들 가운데에 보내심을 받고 이르기를 너희는 일어날지어다 우리가 일어나서 그와 싸우자 하는 것이니라(1).” 오바댜의 묵시다. 묵시란 감추어진 계시다. 이를 밝힘은 여호와로 말미암음이다. 곧 에돔이 열국과의 전쟁에서 패배할 것을 보여준다(2-9).

 

‘오바댜의 묵시라.’ 저의 이름의 뜻은 ‘하나님의 종’이라는 의미다. 오바댜란 이름은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도 여러 번 나타난다. “아합이 왕궁 맡은 자 오바댜를 불렀으니 이 오바댜는 여호와를 지극히 경외하는 자라(왕상 18:3).” 하는 내용을 시작으로 대상 3:21, 7:3, 8:39, 9:16, 12:9, 대하 34:12, 스 8:9, 느 10:5, 12:25 등. 그렇지만 다른 선지서들과는 달리 그의 가문이라든가 출신이 소개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여러 곳의 인물과 어떤 연계성이 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오늘 본문의 첫 음성은 ‘오바댜의 묵시’라는 것이다.

 

묵시의 정확한 뜻은 히브리어로 ‘역동적인 하나님의 계시’를 나타낸다. 곧 특정한 역사적인 사건을 의미할 때 선지자가 이에 가지는 관점을 말하는 데 주로 사용된다. 포괄적인 의미는 하나님의 계시가 숨겨져 있었다. 이를 밝히는 것이다. 하여 “주 여호와께서 에돔에 대하여 이같이 말씀하시니라.” 하고 증언한다.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 하는 것은 오바댜의 묵시가 단지 오바댜의 생각에서 나온 게 아니라는 사실을 엄연히 한다. 곧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특별한 계시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에돔은 야곱의 형제 에서의 별칭이다(창 25:25-26, 36:1, 18, 43). 그의 후손을 가리켜 통칭 에돔이라 한다(창 36:1-19, 31, 43). 그들이 거주하는 지역의 명칭이기도 하다(민 20:23, 21:4, 34:3). 그들은 이스라엘 족속과 혈연관계에 있음에도 줄곧 이스라엘과 적대관계였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에돔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가 칼로 그의 형제를 쫓아가며 긍휼을 버리며 항상 맹렬히 화를 내며 분을 끝없이 품었음이라(암 1:11).”

 

이와 같이 에돔에 대한 심판은 다른 선지자들에 의해서도 선포되었다. 이사야 선지자도 이르길, “여호와의 칼이 하늘에서 족하게 마셨은즉 보라 이것이 에돔 위에 내리며 진멸하시기로 한 백성 위에 내려 그를 심판할 것이라(사 34:5).” 또한 예레미야도 “에돔에 대한 말씀이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데만에 다시는 지혜가 없게 되었느냐 명철한 자에게 책략이 끊어졌느냐 그들의 지혜가 없어졌느냐(렘 49:7).” 또한 에스겔도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에돔이 유다 족속을 쳐서 원수를 갚았고 원수를 갚음으로 심히 범죄하였도다(겔 25:12).” 뿐만 아니라 아모스도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에돔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가 칼로 그의 형제를 쫓아가며 긍휼을 버리며 항상 맹렬히 화를 내며 분을 끝없이 품었음이라(암 1:11).”

 

이와 같이 오늘 오바댜도 “우리가 여호와께로 말미암아… 곧 사자가… 일어날지어다.” 하며 ‘우리’는 예언자 집단을 의미하지만, 넓게는 이 계시가 전달되어야 할 신앙 공동체 전체를 포함한다. 여기서 ‘사자’에 해당하는 것은 ‘하나님께 지시를 받아 싸움을 수행하는 용사들’을 말한다. “내가 여호와에게서부터 오는 소식을 들었노라 사절을 여러 나라 가운데 보내어 이르시되 너희는 모여와서 그를 치며 일어나서 싸우라(렘 49:14).” 이와 같이 오늘 본문은 구약 성경 가운데 가장 작은 분량으로 이루어진 것이지만 앗수르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한 나훔서와 함께 이스라엘 민족이 아닌 이방인을 대상으로 예언하여 에돔을 대상으로 한다.

 

에돔은 바벨론의 남유다 정복과 약탈에 동참했다. 오늘 본문 1-14절에서 하나님의 선민을 정복하고, 약탈하는 바벨론에 동참한 에돔에 대한 심판을 예언한다. 곧 에돔 정벌을 명하는 여호와의 사자를 소개한다. 2-9절에서 에돔을 향하신 여호와 심판의 주요 양상을 밝힌다. 여기서 다른 예언서의 경우와 달리 그 심판의 대상자를 향하여 회개를 촉구하는 내용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오로지 준엄한 여호와의 심판만이 선언되고 있다. 교만한 에돔을 무참하게 몰락시키려는 여호와의 분노와 의지가 표출된다(2-4). 에돔이 당해야 할 무자비하고 철저한 수탈이 예언된다(5-6). 동맹군들의 배신으로 어리석게 당할 에돔인들의 살육을 경고한다(7-9).

 

이에 여호와께서 왜 이처럼 철저하게 에돔을 심판하시는지 그 근거를 제시한다(10-14). 이런 가운데 보통은 예언의 목적이 회개를 촉구하는데 일체 그런 내용이 없다는 것이다. 즉 에돔이 심판을 당한 것은 이방 나라가 선민을 침략할 때 형제 국가로서 도움을 주기는커녕 오히려 적극적으로 동조하는 패악하고 가증한 행위를 일삼은 것에 대해, 공의에 따라 하나님께서 그에 상응하는 형벌을 내리신다는 것을 밝힐 뿐이다. 즉 에돔의 참혹한 멸망에 대한 극적인 상황이 예언된 내용을 통하여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히는 자를 하나님이 대적하심을 분명히 한다.

 

이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바와 같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창 12:3).” 하여 우리가 믿음으로 살면서 믿는 자로서 당하는 수치나 어떤 어려움에 대하여 하나님은 결코 보고만 계시지 않을 것임을 알게 된다. 물론 당시 선민들이 죄로 인하여 크게 징계를 받았고, 그로 인하여 실의와 낙담에 빠져 있었다 해도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을 치리하고 다스리시는 것과 상대적으로 이방인이 그렇다고 하나님의 선민을 임의로 괴롭히는 것과는 다르다. 이는 우리의 본능이기도 하다.

 

가끔 상담을 하다 누가 자신의 자식이나 부모를 부정적으로 말할 때 듣기만 해야지 동조하거나 같이 욕하면 오히려 내담자는 적개심을 갖는다. 어쩌면 이는 인지상정이라 하나님의 마음도 다르지 않으시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을 벌하시고 멸망하게 하셨다. 그렇다고 에돔이 대적하여 유다를 공격하는 이방국 바벨론을 돕는다는 것을 용납하실 수 없다. 여전히 하나님의 진심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해 있으시다. 하나님의 관심은 나다. 우리다. 믿는 자들이다. 주를 경외하는 주의 자녀들이다. 설령 우리가 악하고 그릇행하여 벌을 받아야 한다 해도 하나님이 하실 일이지 임의로 저들이 그러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적대적으로 공격하는 이방국보다 형제국가라 할 에돔이 그런 게 더 나쁘다. 그래서 일체 저들에게는 회개의 메시지도 주어지지 않았다.

 

‘묵시’란 ‘말씀하시니라.’는 표현이다. 묵시는 어떤 대상을 유심히 보거나 영적 현상을 영안으로 바라보는 것을 지칭하는 어원에서 유래한 단어이다. 아울러 ‘말씀하시니라.’는 표현이 나오는데서 하나님께서 그 대상에게만 직접, 당신의 계시의 말씀을 베푸셨고 그렇기에 오바댜가 이를 들었음을 나타낸 것이다. 이를 먼저 밝히는 것은 철저하게 자기가 전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이 보여주시고 말씀해 주신 것에 따른 것임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본문의 말씀은 선지자가 무엇을 말하고 전하는 자인지, 또 그와 관련해 하나님의 사람들이 마땅히 사람들에게 나타내고 전해야 할 바가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깊이 돌아보게 한다.

 

오늘 이 묵상도, 이를 글로 쓰는 일도, 설교 원고를 일주일 내내 다듬으며 고치는 일도 궁극적으로는 ‘분명하게 일깨워주시는 의미’를 알고자 하는 것이다. 내가 임의로 해석하거나 어떤 감정으로 치우쳐 지식을 전달하는 목적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도 교회가 정치나 진영에 그 복음의 논리를 두는 것은 금물이다. 이 땅에서나 이 사회에서 좌나 우, 보편과 상식이 어떻고 하는 것이지 우리가 전하고 듣는 말씀으로는 한 가지 사실, 하나님의 뜻만이 전달돼야 한다. 가령 나는 이해하길 전쟁 중에 혹은 1, 2차 대전 당시 각각의 적군으로 만난 성도들이 있었다고 치자. 저들은 나라의 소명을 받고 군인들로서 전투에 가담했다가 서로를 쏴서 죽이게 되었다 하자. 훗날 저들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만나 서로에게 총구를 겨누고 그럴 수밖에 없었음을 이해하고 주 안에서 찬미할 것이다.

 

한데 교회가 그 담임목사의 정치 성향이나 개인적인 견해를 성경으로 설명하고 덧씌워서 정당화하며 어느 진영을 또는 논리를 따라 좌고우면한다는 것은 옳지 않다. 오늘 본문에서 에돔을 겨냥하여 이 한 장의 말씀은그런 차원에서 여러 예언서와 같은 무게로 다가오지 않고 오늘 우리, 나 자신을 겨냥하여 돌아보게 한다. 즉 자기의 말을 첨가하거나 자기의 생각, 자기의 주장을 삽입하여 ‘여호와의 말씀이라.’ 하고 전한다면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훼손하는 자이다. 하나님의 뜻을 자의적으로 왜곡시킬 여지가 충분하다. 그래서 더 조심할 것은 말씀은 말씀으로만 읽고 풀어 말씀으로 알아야 한다. 그에 따른 적응은 전적으로 성령의 감동으로다.

 

곧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행 4:20).” 다른 이유가 본질일 수 없다. 이에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모든 말을 너희는 지켜 행하고 그것에 가감하지 말지니라(신 12:32).” 그래서도 교회의 현실 참여에 대해 신중해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현실의 부조리와 불합리한 제도를 계선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심지어 성경을 대적하는 자들과 맞서 싸워 무찔러야 하는 사명을 가진 게 아니다. 그럴 거였다면 예수님은 그렇게 무기력하게 끌려가시면 안 되었다. 유다의 열망이었고 많은 제자들이 기대하였던 로마의 압제로부터 속국으로 있는 민족의 해방 전선에서 선봉이 되셨어야 한다.

 

결국 예수님의 사명은 그게 아니다. 바울도 마찬가지로 자신을 부당하게 치고 함부로 취급하는 자들에게 적개심으로 싸운 게 아니다. 오히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 3:10-12).” 이 놀라운, 그러나 이상적인 소망을 붙들었다.

 

하여,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모든 말을 너희는 지켜 행하고 그것에 가감하지 말지니라(신 12:32).”

 

우리는 다만 말씀으로 고요한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겔 3:17).” 하신 데 따른 한 영혼, 그 한 영혼의 회복과 회심을 돕는 길이 오늘 나의 사명이었다. 저마다의 방식과 역할이 각각이겠으나 나는 그렇게 말씀과 기도로 나를 놓아두려 애쓴다. 누가 오고 안 오고, 호응이 있고 없고, 이는 성령께 맡기고 나는 다만 ‘이 시간,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의 사명에 충실하고자 한다. 그러면서 두려운 것은 오늘 에돔이 어쩌다 저리 되었는지를 주목한다.

 

“너의 마음의 교만이 너를 속였도다 바위 틈에 거주하며 높은 곳에 사는 자여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누가 능히 나를 땅에 끌어내리겠느냐 하니 네가 독수리처럼 높이 오르며 별 사이에 깃들일지라도 내가 거기에서 너를 끌어내리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3-4).”

 

곧 자신에게 자신이 속는, 자신을 속이는 자신을 경계한다. 에돔 족속들이 거주한 곳은 사해 남동쪽 바위가 많은 산악 지대였다. 이것은 천혜의 난공불락 요새와 같았다. 그 주민들은 자연적인 동굴이나 인공적으로 바위를 깨어 만든 집에 거주하였다. 이런 조건은 외부로부터 보호해 줄 뿐 아니라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한 안식처가 돼 주었다. 더욱이 수도인 베트라는 약 3Km에 걸쳐 펼쳐지는 좁은 암반 계곡으로 연결되어 있다. 아무리 많은 적이라도 그 사이를 지나와야 하는데, 얼마든지 적은 수의 군사력으로도 방어할 수 있었다. 에돔은 이런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이 도리어 교만을 불러일으켰다. 자신을 속일 정도로 말이다. ‘너의 중심의 교만이 너를 속였도다.’ 하실 때 교만은 ‘끓는다’는 의미로 끓고 있는 음식이나 물을 가리킬 때 쓰는 히브리어 단어인데, 사람의 심성으로는 자만하여 스스로 끓듯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경우다. 이는 마치 물이 끓듯 스스로 뭐라도 할 수 있고, 된 줄 알고, 할 수 있을 것 같고, 그러므로 스스로의 판단이나 처신이 옳다고 여기는 마음이 들끓는 것이다. 이런 자들은 결코 남의 말을 듣지 않는다. 속된 말로 피하는 게 상책이다. 저들에게는 옳고 그름이 없다. 그 어떤 경우에도 복종하지 않는다. 결국 자신을 속이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도 그러한 확신이 강해서이다.

 

이에 에돔 족속이 아무리 견고한 상태에 있더라도 하나님께서 그들의 요새를 파괴시키기로 작정하신 이상 그것이 반드시 훼파될 것임을 보여준다. 물론 저들은 이러한 말씀에 귀 기울일 리 없다. “내가 거기서 너를 끌어내리리라.” 하실 때도 저들은 회개할 기회조차 필요로 할 이유가 없다. 그러한 게 교만이다. 하다못해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도 잠시나마 회개하여 요나의 심판에 대한 예언에 반응하여 회개하였다. 회개할 기회도 복인데, “하나님이 그들이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욘 3:10).”

 

오늘도 보면 어느 집단이든지 개인이든지, 회개할 기회를 스스로 박차고 거절하는 것을 자주 본다. 저들에겐 반성도 후회도 없다. 사과할 용기가 없는 게 아니라 할 줄 모르는, 교만한 자들이다. 이에 오늘 말씀은 교만이 우리를 속이는 것에 대해 에돔을 두고 알게 하신다. 이에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 내가 내 자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내가 자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사명을 받았노라(고전 9:16).” 고로 오늘도 주 앞에 엎드려 나의 사명을 되새기며 묵시를 살피다,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 주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시 16:1-2).

 

하고 주의 이름을 부른다. 이는,

 

땅에 있는 성도들은 존귀한 자들이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그들에게 있도다

(4).

 

하여,

 

나를 훈계하신 여호와를 송축할지라

밤마다 내 양심이 나를 교훈하도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이러므로 나의 마음이 기쁘고 나의 영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살리니

(6-9).

 

이는,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1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