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

하현. 2026. 4. 25. 06:01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더니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 하니라

욘 2:4, 7, 9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시 18:1-2

 

 

우리는 슬픔 가운데 온전히 주를 바란다. 요나는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려다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다. 삶의 깊은 슬픔 가운데서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4).” 하는 고백은 고난의 명사 욥의 것과 같다.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욥 13:15).” 우리의 슬픔은 마치 하나님이 나를 죽이시려는 것 같다. 주의 앞에서 쫓겨난 듯 암울하다. 그러한데도 내가 주의 성전을 바라고, 주 앞에 아뢰겠다는 것은 비록 나의 허물이 주홍 같을지라도 주의 사랑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이번에 아이의 결혼과 아버지의 죽음이 맞물려서 기쁨이 슬픔이 되고 슬픔이 기쁨이 되는 경험을 하였다. 기쁨 속의 슬픔이란 그런 것일까? 모두가 나의 모습에서 부친의 모습을 보았다며 놀라워하였다. 나 역시 가끔은 거울 속에서 아버지의 모습을 본다. 그런데 가운데 말씀이 있고, 우리에게 유산으로 남긴 신앙이 있다. 슬픔 속의 기쁨이란 주를 바라는 것으로 증거 된다. 그래서 요나는 아뢰기를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더니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7).” 하고 고백하고 있다. 여기는 물고기 뱃속이다. 우리 인생의 깊은 곳은 저마다의 고통이 함께 한다. 그런 가운데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하는 것을 경험한다.

 

교회를 옮겨 오고 사람들의 왕래가 잦아졌다. 어제는 한 청년이 찾아와서 믿음으로 시작하는 개인연습실을 홍보하다 자기 이야기를 하였다. 미자립교회들을 찾아다니며 혹시 합동 연주실이나 개인 악기 연습실이 필요한 분께 평균보다 더 저렴한 가격으로 연습실을 대여한다고 온 것이다. 이제 서른 남짓, 아직 앳된 얼굴에서 주를 의지하려는 것이 보였다. 그 안에 어떤 세파를 품고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우울증’을 앓다 시작한 일로 두 번째 체인점 같은 것이라 했다. 며칠 전에 다녀간 청년이 오버랩 됐다. 모친의 자살과 남은 가족들과의 의절 후 혼자 생활하며 겪는… 저마다의 깊은 슬픔을 우린 다 헤아릴 수 없다. 그런 가운데 주를 바라고 찾기란 기적 같은 일이다. 은혜란 이런 것이다.

 

이는 오늘 요나의 신앙 고백과 같이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 하니라(9).” 하는 것이 어찌 아무나의 것이겠나? 저는 지금 물고기 뱃속에 있다. 풍랑이 이는 바다에 던져졌다.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없었고 이를 저버리고 그의 얼굴을 피해 도망치던 길이었다. 그 배에 함께 있던 사람들이 고생이다. 그렇듯 우리 믿는 자의 삶이란 결코 한 사람의 것이 아니다. 나 하나로 온 가족이 주를 바랄 수도 등지고 멀리할 수도 있다.

 

오후께 나는 즐거운 전화를 받았다. 아이들 어릴 때, 내가 집사로 다니면서 어슬렁거리듯 섬기던 교회의 목사님이다. 서로의 안부와 그간의 일을 말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은퇴를 하고 두 곳의 보육원을 섬기며 말씀 전하는 일로 노후의 사역을 이어가고 있었다. 서로의 자녀들은 어찌 자랐는지, 교회는 어떠한지, 건강은, 생활은… 이어지는 말들 가운데 위로가 있었고 축복이 있었다. 우리의 서로의 사소함 같이 슬픔을 또는 기쁨을 이야기 했다. 이는 모두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 오갈 수 있는 대화였다. 어떤 이야기에서든지 우리는 서로 아멘, 할 수 있었다. 그 상황이 어떠하든지, 오늘 다윗의 시편도 그러하다.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시 18:1-2).

 

나는 이를 하나하나 가슴에 새기듯이 묵상한다. 진정 나의 힘이 되시는 여호와를 사랑한다. 나 먼저 나 하나 건사하지 못하는 심령으로 주를 바람은, 그리하여 상한 영혼들을 마주한다. 신내림을 받았다는 주변인들의 말처럼 저는 아프고 늘 고통스러웠다. 이를 받지 않으면 죽을 것이란 두려움도 있었다. 그런 가운데 저는 교회 집사였다. 어째서 저의 곁에 믿음으로 붙들어줄 이가 없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결국 저는 아파트 난간을 붙들고 섰다 뛰어내렸다. 이로 인해 신학을 하고 사회복지사로 활동하던 이는 모든 생활을 중지하고 깊은 슬픔에 갇혔다. 두어 시간 남짓 저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주의 이름을 수도 없이 불렀다. 그런 가운데 우리 교회가 검색됐고 자신의 집과 가까웠고 그래서 무작정 찾아온 것인데….

 

오랜만에 목사님은 이런저런 안부와 사연을 말하다 서로가 감당하는 사역이 주가 맡기신 것임을 재차 확인하였다.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자신의 내적 상태를 마주했다. 그 마음을 있는 그대로 하나님께 드러내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있다. 우리의 기도란 어떤 조건에 따른 게 아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그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는 것은 ‘경험한 고통’에 대해 기도다. 우리는 날 때부터 슬픔을 경험하듯 기도를 경험한다. 그 대상이 서로 다를 수 있으나 슬픔과 기도는 모든 인간의 공통분모다. 하여 해당하는 슬픔이나 기쁨을 가지고 누군가에게 빈다. 기도는 동사로 미완료형이다. 그래서 저마다의 믿음으로 지속적이다.

 

요나는 물고기 뱃속을 ‘스올의 뱃속’이라 하였다. “이르되 내가 받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2).” 그만큼 절망과 고통으로 가득한 ‘물고기 뱃속’에서 우리는 저마다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서 산다. 산다고 사느라 우울증도 오고 불안과 망상도 겪는다. 결국 청년은 사회복지사로 일하던 곳을 그만두고 무위도식하며 모친의 사망보험금으로 살아가고 있다. 저는 신학교를 나왔고 복지사도 자격증을 가지고 일하던 청년이다. 심한 우울과 개인기피를 가지고 혼자 떠돌듯 가족들로부터도 분리했다. 곧 나이가 마흔이다. 무얼 해야 할지, 어찌 살아야 할지, 나는 저에게 주께 돌아오기를. 계속적으로 기도하기를. 오늘 요나의 경우도 그러한 것처럼 그럼에도 주를 바라기를. 권하였고 저는 돌아갔고, 아직까지 소식은 없다.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삽더니 주께서 나의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하는 저마다의 신앙적인 체험이 있어야 산다. ‘스올의 뱃속에서’에서 우린 스스로의 영혼을 망가뜨릴 수도 있고 복원하여 더욱 단단하여질 수도 있다. 이는 살면서도 ‘무덤의 깊은 곳에서’ 사는 것처럼 사는 이들이 우리 곁에 늘어간다. 저마다 살기 좋은 세상이라고 노래하지만 실은 죽은 거나 다름없이 살고 있는 이들도 허다하다. 누구와 이야기를 하다 나 역시 내 코가 석 자인 사람이라, 자기 앞가림도 못하는 주제인데 심정으로 곪아 병든 이들을 상대하는 일이라니! 어제 모처럼 통화한 목사님의 우려도 그런 요지였다. 나 역시 인정하는 부분이다. 그래서 사랑하는 말씀은,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이를 나는 내 것으로 붙들었다. 나로 그런 가운데서 주의 일을 감당하게 하심이다. 이는 잘난 사람들의 잘난 일과는 비교가 안 된다. 주 앞에 이 일은 상대적인 게 아니라 절대적이다. 나는 그 예로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에서 확신한다. 누구에게 권했다. 남이 불쌍히 여기는 불쌍히 여김을 받아내는 게 너의 사명이다. 누군가 혀를 끌끌 차며 주의 이름을 부르게 하는 것이 너의 일이다. 그게 자존심 상하고 그래서 교회를 다녀도 뒷자리에서 투명인간처럼 남들의 무관심 속에 있고 싶다면 이는 불순종이다. 나사로의 일은 부자의 집 앞에서 헌데를 앓고 버려지는 음식으로 연명하며 부자의 오만과 교만을 드러나게 하는 일이었다. 부자는 그런 거지 나사로가 자신의 문 앞에서 걸식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색옷을 입고 날마다 호의호식하였다. 나사로의 사명은 저로 할 말이 없게 하는 것이다.

 

나사로는 한 게 없는 것 같으나 온 몸으로 살아냈다. 저가 복음을 전하거나 예수를 나타낸 바 없는 것 같지만 이미 맡기신 사역을 다 감당했다. 이는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실 때 모든 비유가 익명이었으나 딱 한 번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라.’ 하심으로 그 이름을 밝히셨다. “그런데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눅 16:20-21).” 왜 그 많은 예화나 비유는 익명으로 하셨는데 여기서는 저의 이름을 먼저 부르신 것일까? ‘나사로’는 히브리어로 ‘엘리에셀’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곧 ‘하나님이 도우시는 자’라는 뜻이다. 예수의 비유 속에 이름을 붙인 경우는 이곳 뿐인 이유가 여기 있다.

 

나사로는 한 게 없는 것 같고, 그저 거지로 버려져 헌데를 앓고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나 먹는 ‘죽지 못해 사는’ 인생 같았으나 ‘가난’은 성경에서 경건한 삶과 연관이 있다. 지금은 고통 중에 있으나 더 좋은 것을 바라는 소망의 예표다. 죽은 후에 우리의 삶이 비로소 시작인 것을 알 때 이 땅에서의 처우나 어떤 형편이 능사가 아니다. ‘엘리에셀’은 아브라함의 종의 이름과 일치한다. “아브람이 이르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창 15:2).” 하는 대목으로는 상당히 불순종하는 모습으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는 것 같으나 실은 그 속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고 믿는 의지가 담겨있다. 그 이름이 신약에 와서 나사로라 하는 이름으로 불리웠다.

 

누구의 어떤 절망, 심한 장애로 어려서 고아처럼 버려져 보육원을 전전긍긍하며 자라 스스로 삶을 개척하듯 살았던 인물이다. 그런 그가 누구의 동정과 무시에 예민할 수 있다. 교회를 다니면서도 남들과 동등했으면 하지만 그의 걸음과 외모와 삶의 모습으로 동정과 불쌍히 여김을 담은 시선은 피할 수가 없다. 그것이 싫어서도 교회 등록과 서로의 교제를 미루는 것에 백 번 이해는 하지만 그만하면 됐다. 그것으로 충분하여 거지같은, 헌데를 앓는 병자로, 버려져 하루 종일 무의미한 것 같은 삶으로 살다 죽는 것 같아도 그것이 주가 맡기신 사역이고 사명이었다. 이를 알려주고 싶은 것인데 저는 강한 반발과 인정할 수 없는 모멸감을 호소하였다. 그러니 어쩔 것인가? 스스로 일어나 뭔가 대단한 것을 하려는가? 이미 충분한데 뭘 더 하려는가?

 

나는 이를 인정하면서 ‘여기가 물고기 뱃속’이라 해도 그 안에서 성전을 바라고 주께 아뢴다. 요나는 자신이 죽은 거나 다름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리 고백하였다. 요나의 ‘심각한 역경’은 우리의 삶에서도 저마다는 공통되다. 조현을 앓는 아이의 백혈구수치가 떨어져서 걱정이다. 혹시 약을 바꾸거나 줄여야 한다. 아이엄마는 어느덧 늙어 자신도 언제 어떻게 아이를 두고 떠나게 될지 두려워하며 걱정이 많다. 이제 중1 되는 아이는 또 지적장애판정은 물론 조현일 것이라 추측하고 대비한다. 그 형이 은둔형으로 살고 있으면서 멋대로라, 통제불능상태로 서른이 다 돼 간다. 아이엄마는 이제 자신도 힘에 부쳐 하루하루가 다른 것을 느끼며 두려움이 가중되어 우울증 약을 먹고 산다. 그러나 설상가상 어려움 위에 슬픔이 겹친다.

 

그런 가운데 오늘 요나의 기도는 도전을 준다. 자신에게 주어진 이 역경을 허락하신 주체가 바로 그의 기도의 대상인 주님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욥도 그러했듯이 요나는 주께서 자기에게 고난을 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 기도하고 있다. 요나의 신앙이 우리의 신앙으로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쳤나이다! 곧 이 파도, 큰 물결이 주의 것이다. ‘주의 파도’에 해당하는 히브리어의 뜻은 ‘파괴자들’의 의미다. 요나는 자기에게 닥친 하나님의 징계가 대단한 파괴력을 지니고 있음을 실감한다. 이와 같은 표현은 고라의 시편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주의 폭포 소리에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

주의 모든 파도와 물결이 나를 휩쓸었나이다

(시 42:7).

 

주의 폭포와 주의 파도로 죽을 지경이다. 그런 가운데 주께 아뢰고 토로한다? 요나는 자신이 처한 암울한 상태를 ‘주의 언약’과 관련하여 이해한다.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는 것도 비록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하나님께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다 해도, 하나님께 기도하려는 의지는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요나는 자신의 의지를 따라 하나님의 명을 거역하였다. 그런데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다’고 표현한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돌보심과 보호하심으로부터 격리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할 때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그럴 수 없을 때, 그러기 싫을 때,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은혜로우심을 의지하는 태도가 신앙이다. 고라 자손의 시편은 그런 내용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오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감사의 소리를 내며

그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42:2-5).

 

곧 우리는 아무리 죽음과 고통 중에 거하는 것 같이 깊은 슬픔에 빠졌다 해도, 하나님을 소망하는 것이 참된 힘이다. 그리하여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사 40:31).” 이에 오늘도,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18:1-2).

 

이는,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3).

 

세상이 아무리 어떠하다 해도, 오늘 나의 슬픔의 깊이가 스올 같다 해도, 그리하여

 

사망의 줄이 나를 얽고

불의의 창수가 나를 두렵게 하였으며

스올의 줄이 나를 두르고

사망의 올무가 내게 이르렀도다

(4-5).

 

할지라도,

 

내가 환난 중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그가 그의 성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그의 앞에서 나의 부르짖음이

그의 귀에 들렸도다

(6).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

 

주께서 나의 등불을 켜심이여

여호와 내 하나님이 내 흑암을 밝히시리이다

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군을 향해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을 뛰어넘나이다

(28-29).

 

이는,

 

하나님의 도는 완전하고 여호와의 말씀은 순수하니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모든 자의 방패시로다

여호와 외에 누가 하나님이며 우리 하나님 외에 누가 반석이냐

이 하나님이 힘으로 내게 띠 띠우시며 내 길을 완전하게 하시며

나의 발을 암사슴 발 같게 하시며 나를 나의 높은 곳에 세우시며

내 손을 가르쳐 싸우게 하시니 내 팔이 놋 활을 당기도다

(30-34).

 

그러므로

 

여호와는 살아 계시니 나의 반석을 찬송하며

내 구원의 하나님을 높일지로다

(4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