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가 그 성읍에 들어가서 하루 동안 다니며 외쳐 이르되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높고 낮은 자를 막론하고 굵은 베 옷을 입은지라
욘 3:4-5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시 19:1
우리의 대화는 수다가 아니다. 소비되어 사라지는 말이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자기 이야기를 하나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이야기가 나온다. 하나님이 어찌 나와 함께 하셨는지, 나를 도우시고 그때마다 어찌 보호하셨는지를 알게 한다. 이때는 말하는 이나 듣는 이나 하나가 되어 주를 찬송한다. 이를 위하여 우리를 창세전에 예정하시고 택정하셨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4-6).”
살아온 날들이 더러는 험하여서 오늘의 몰골이 처량할지라도 그리하여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자는 복이 있다. 십 수 년 전 우리가 이렇게 만나 서로를 위로할 줄 알았을까? 저마다 ‘잘 될 거야!’를 외치며 사는 세상에서, 누가 이혼을 두 번 하고 두 아이를 각각의 아버지 성을 가지고 살게 할 줄 알았나? 그럼에도 오늘에 이르러 주의 이름을 부르지 못하는 것에 더욱 슬픈 일이다. 각각 서로는 재혼을 하여 늦둥이를 보았는데 아이가 지능이 떨어지고 불안장애를 가지고 살 줄 알았을까? 예전에는 교회를 다녔어요, 하는 말에 나는 안타까움이 더한다.
오늘 우리가 주를 선포해야 하는 이유다. 우리의 대화가 궁극적으로는 그리하여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인정하는 데로 나아가야 한다. 서로는 각자의 살아온 날을 이야기 하지만 공통의 주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어찌 함께 하셨는가를 찬송하는 내용이다. 여기 오늘 요나가 있다. 사흘 길이나 되는 도시를 하루만 돌았을 뿐이고, 외쳐 이르기를 “요나가 그 성읍에 들어가서 하루 동안 다니며 외쳐 이르되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을 뿐인데, “하였더니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높고 낮은 자를 막론하고 굵은 베 옷을 입은지라(4-5).” 이런 역사가 일어나기도 한다. 이를 아셨고, 이를 위하여 요나를 꺼꾸러뜨려 니느웨에 전하게 하셨다. 니느웨는 악명 높은 앗수르의 도시다.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내용은 동일한 내용으로 요나에게 임무를 부여하신 것이다.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 하시니라(1:2).” 하심 같이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하신지라(3:2).” 곧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이를 우리 삶에서 어찌 이해해야 할까? 서로는 작은 교회를 싫어하고 자기 이야기로 남들이 쑥덕거리는 것을 꺼려한다. 누구라도 그럴 것이 자기 이야기가 남의 입에 오르내리는 게 싫은 것이다. 그러나 그럴 기회를 제공하는 것 역시 사명이라는 사실에서 우린 자주 교만해진다. 곧 자기 이야기를 자기 것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이를 피하려니 남이 쑥덕거리게 하는 것이다. 그게 싫으면 자신이 전하면 된다.
그런 이유가 모두는 작은 교회를 피해서 큰 교회로 간다. 많은 무리 속에 숨어서 저 멀리 뒤쯤에서 끌려가는 예수를 따르던 베드로 같이 말이다. 아닌 척, 괜찮은 척, ‘친절한 타인’으로 성도라는 관계를 허울 좋게 꾸미려는 것이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의 ‘좋은 사이’, 서로의 실상을 알고 싶지 않고 알려지는 게 싫은 사이. 그저 좋은 모습만, 그럴듯 하게 보여주며 각자의 속사정은 감추고 서로가 지체라고 우긴다. 마치 당뇨로 썩어지는 발이 덧신을 신고 손과 머리에 숨기려는 꼴이다. 팔이 부러져 뼈가 드러났는데도 다리가 모르면 될 일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그러면서 서로는 친절하고, 실제 아무 것도 모른다! 한 몸이, 그 한 지체가, 썩어문드러지고 뼈가 너덜거리는데도 서로가 몰랐다면 그 몸이 정상인가? 저마다 그런 꼴로 교회를 형성하여 겉치레로 반갑다. 좋은 말로 오가는 인사 뒤에 불편함을 감추면서 돌아선다.
그러다 보니 희귀한 현상은 간증 집회이다. 어디 누구, 유명한 아무개의 특이한 경험과 남다른 체험으로 하나님을 찬송한다. 그걸 들으면서 서로가 또 아멘, 한다. 무슨 ‘약 장사’ 같다. 심하게 말하면 저는 ‘남의 다리’다. 자다 봉창 두드린다고, 자다가 남의 다리 긁는 격이다. 그렇게 간증하고 돌아다니는 일도 이상하고, 그런 사람을 초대하여 강단을 내주는 일도 이상하다. 그 정도면 자기 교회, 자기 지체들 가운데서도 수두룩할 텐데… 우리가 나이가 든다는 것은 어디가 아픈 게 늘어나는 숫자와 비례하는 것인데, 하물며 역사와 전통을 자랑한다는 교회에서 서로는 그저 친절한 타인으로 지내면서 어디 같이 꽃놀이나 다니고, 구역예배로 모여 다과나 나누면서 사랑방 놀음이나 한다면….
누구와의 대화에서 나는 그런 슬픔을 느꼈다. 저가 큰 교회를 선호하는 이유에서 말이다. 그리곤 찾아와 이런저런 말을 하다 서러움에 울면서도 심지어 자신이 다니는 교회 목사님이 알면 안 된다! 행여 소문이라도 날까 두려워, 세 번씩이나 부인하며 모르는 일이라고 하는 베드로와 같다. ‘내가 네게 명한 바’는 그게 아니다! 오늘 말씀은 단호하게 이를 알린다. 니느웨의 악독에 대해 외쳐야 한다. 여기에 사용된 ‘선포하라’는 전파하라는 것인데, 말을 해서 알게 하라는 뜻이다. 공식적으로는 공표하라는 의미다. 더 강하게는 ‘쳐서 외치라.’는 표현이다. 정신 차리게 한 대 때려서라도 말하라는 것이다.
정작 그러면 열에 아홉은 등지고 원수 아닌 원수가 된다. 순간 더는 친구가 아니라 상종 못할 위인이 된다. 그러니 그저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저의 말이나 그 마음에 맞장구쳐주어야 한다. 그렇게 부러진 다리에 연고를 바르고, 썩어 들어가는 몸에 외투를 입혀준다고 한들. 우리는 오늘 요나의 외침에서 우리의 침묵을, 묵인을, 무관심을, 외면을 회개해야 한다. 본문은 요나의 선포행위를 강조하기보다 ‘하나님께서 명하신 내용’을 강조한다. 요나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분의 말씀만을 전할 뿐이다. 그래야 한다. 설령 돌을 맞고 쫓겨날지라도 그래야 한다.
요나는 여호와를 피하여 달아났었다. 그런 그가 물고기 뱃속에서 회개하고 돌이켜 여호와의 말씀대로 전한다. 니느웨는 큰 성읍으로 삼 일 길이다. 실제 니느웨 성읍은 그 둘레가 약 96Km에 달하였고, 1500개의 탑이 있었으며, 성벽은 높고 그 위로 3대의 마차가 나란히 달릴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게다가 인구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들’만 12만 명이었다고 하니, 장정들과 모두를 합치면 최소한 60만의 인구는 되었을 것이다. 이 정도 규모는 당시 도시로서 엄청난 규모다. 곧 숱한 사람들이 오늘도 아무런 죄의식 없이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우리 사회나 내 주변의 사람들을 연상하게 한다. 늘 우리를 헷갈리게 하는 ‘다, 그래! 남들 다 그러고 살아!’ 하는 변명처럼 말이다.
오늘 요나는 이전과 달리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였다. 급기야 니느웨를 돌며 선포하였다. 요나가 그 성에 들어가며 하룻길을 행하여 외쳤을 뿐이다. 발 없는 말이 천 리 간다고 요나의 말(言)보다 삽시간에 퍼져,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는 말이 왕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높고 낮은 자를 막론하고 굵은 베 옷을 입은지라 그 일이 니느웨 왕에게 들리매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왕복을 벗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재 위에 앉으니라(5-6).” 요나는 다만 선포하였을 뿐이다. 그 내용은 지극히 단순한 것이다. 성경에서 ‘40’이라는 숫자는 주로 시험과 관련하여 사용된다. 일정 기간 심판을 유예하였음을 알 수 있다.
40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의 뜻은 상황의 급박성을 나타낸다. 여유부릴 때가 아니다. 그렇듯 요나가 회개를 촉구하자, 니느웨 사람들은 순식간에 이를 받아들였고, 삶의 변화가 일어났다. 전혀 그럴 것 같지 않은 사람이 돌아선다. 누구의 어떤 말에 그이에 대해 전하라 할 때 헛웃음이 날 정도로 ‘그럴 사람이 아니에요!’ 하는데, 하나님이 하실 일은 아무도 모른다. 강원도 두메산골에 작은 예배당에서 부흥회가 열렸고 그곳에 놀러가듯 친구 따라 갔던 나의 부친은 변하였다. 그 작은 복음의 씨앗이 한 세대를 지나 온 형제와 그 가족들과 자녀들을 변화시켰다. 자그마치 목사가 넷이요, 장로가 둘이고, 안수집사가 서넛이 나왔다. 앞으로 더욱 더 확장될 하나님의 나라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니느웨 백성이 하나님을 믿고’ 재 위에 앉았다. 울부짖으며 회개가 일어났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런 걸 남의 이야기로나 들으면서 놀라워하고 정작 자신에게는 그럴 리 없다고 믿는다. 함께 예배드립시다, 다시 교회 다니세요, 하고 말하면 풋, 하고 웃으며 롯의 사위들 같이 농담으로나 듣는다. 결국 그 성이 무너지고 불벼락이 쏟아져야 알 것인가? 오늘 본문은 그와 달리 ‘그 소문이 니느웨 왕에게 들리매’ 왕이 베옷을 입고 재 위에 앉았다.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조복을 벗고 굵은 베를 입고 재에 앉았다’는 것은 통상 죽은 사람을 애도하기 위해 취하는 행동으로, 재를 뒤집어쓴다는 것은 극도의 슬픔을 상징한다. 곧 요나의 선포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하나님의 지엄함을 인정하였다는 것이다.
왕의 운명은 성읍의 운명과 불가분의 관계였고, 백성들의 여론은 왕을 움직였다. 한 집안에서 왕으로 군림하는 위인들이 있다. 둘 가운데 하나는 왕노릇하려 한다. 판을 깨지 않는 이상 저를 굴복시킬 수 없다. 사는 동안 더욱이 결혼이 갖는 복된 의미가 그러하다. 십 수 년이 지났을 뿐인데, 잘 사는 줄 알았던 이가 두 번을 이혼하고 혼자 산다. 이번에 만나게 된 이는 아이들도 뿔뿔이 흩어져서 서로가 안 보고 산다. 어쩌다 그런 일이 있었는지 묻지 않았다. 요는 그 집에 왕노릇하던 이의 횡포로 그와 같이 풍비박산 난 것이다. 그러니 참 뭐라 할 소린 아니지만 아이들이 고스란히 노출된다. 한 아이가 온 몸에 문신을 했다. 건들거리며 그 눈빛이 공격적이다. 어릴 적에 귀엽고 애교가 많던 아이만 생각하다 놀랐다. 왕노릇하던 이는 아예 서로 외면하고 산다.
여기서 왕이 돌이켜 회개의 입장에 선 것이 의외다. 왕이 그 대신으로 더불어 조서를 내렸다. 왕이 대신들과 함께 조서를 내렸다는 것은 백성들이 하나님을 믿는 것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사람이나 짐승이나 모두 물도 마시지 말 것이라며 회개에 전념하게 하였다. 니느웨 왕이 내린 조서 내용은 백성들의 태도보다 더 급진적이다. 금식의 대상에 있어 사람뿐 아니라 짐승까지 확대한 것이다. 짐승에게까지 확대한 것은 짐승들을 용서받아야 할 인격체로 인정했다는 것이 아니고, 그 짐승들에게도 음식을 주지 않음으로 그것을 소유한 자들과 이웃들로 회개와 슬픔에 더 열중하게 하려는 것이다. 종종 우리의 회개를 저해하는 요소가 아주 사소한 일상의 소소한 일 때문이다.
보면 오늘은 말고 다음에, 이번에 말고 나중에… 하고 회개를 미루는 사람들의 경우 아직 할 일이 남았다고 한다. 새로 산 밭도 갈아야 하고, 소도 길들여야 하고, 장가도 가야 하고… 우선 해야 할 일이 따로 있어서 나중에, 다음에… 하고 미루는 것이다. 당장에 머리통이 깨지고 다리가 부러졌다면 모를까, 결국 저들은 말씀으로 권하는 것에 시들한 것이다. 그리 다급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실제 우리가 신앙으로 산다면서도 이렇듯 사소한 데 정신이 팔려 예배도, 말씀도 다음으로 미루는 경우가 얼마나 허다한지 모른다. 그 애가 오늘밖에 기회가 없다면? 당신이 더는 돌이킬 수 있는 상황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그래서 나는 어제도 두려운 마음으로 이 말씀을 되뇌었다.
“롯의 처를 기억하라(눅 17:32).”
오늘, 지금 이 순간이 아니면 다시는 기회가 없을 수도 있다. 에이, 설마! 하고 방심할 일이 아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많은 다수의 대중들에게 하신 게 아니다. 늘 곁을 따르는 소수의 제자들에게 하셨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실족하게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그렇게 하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눅 17:1).” 하시면서 “그 날에 만일 사람이 지붕 위에 있고 그의 세간이 그 집 안에 있으면 그것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 것이요 밭에 있는 자도 그와 같이 뒤로 돌이키지 말 것이니라(31).” 곧 오늘의 이 급박한 현실을 알지 못할 때 외치신 것이다. “롯의 처를 기억하라(32).”
나는 이번에 나의 부친이 그렇듯 갑작스럽게 주의 부르심을 받는 것을 보고 새삼 다시 정신이 번쩍, 들었다. 누군들 알았나? 본인인들 아셨을까? 그러므로 이르시되 “무릇 자기 목숨을 보전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33).” 그저 오늘을 어찌 살아보겠다고 아등바등, 지금은 그럴 시간이 안 되고 나중에, 다음에, 언제 기회가 되면… 하고 미루다가 영영 더는 기회도 없이 그 혼이 떠날 수 있다! ‘롯의 처를 기억하라!’ 저는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다. 한 번 더 기회는 없다. 끝! 그것으로 끝이다.
이에,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시 19:12).
아무도 스스로는 돌이켜서 깨달을 수 없다. 숱하게 기회가 있었다. 남의 이야기에서 뿐 아니라 자기 이야기 속에서도 셀 수 없이 많이 기회가 있었다. 오늘 여기 하다못해 앗수르의 수도에서 그때의 왕이 짐승에게까지 밥을 주지 말 것을 선포하면서까지 다급하게 재 위에 앉았다. 회개에 동참했다. 이로써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시고 그 진노를 그치사 우리가 멸망하지 않게 하시리라 그렇지 않을 줄을 누가 알겠느냐 한지라 하나님이 그들이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9-10).” 하나님의 목적은 사멸이 아니라 구원이다. 설령 저들이 악할지라도 회개의 기회를 주고 또 주어 기다리시며, 오늘 다시 새 날을 허락하시는 것이다. 이를 알고 우리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14).
하고 엎드린다. 그렇듯 오늘도,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시 19:1-4).
오늘이 그저 사사로운 여러 날 가운데 하나로, 아직 여러 날의 기회가 있을 줄 아는 우리에게,
해는 그의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고
그의 길을 달리기 기뻐하는 장사 같아서
하늘 이 끝에서 나와서 하늘 저 끝까지 운행함이여
그의 열기에서 피할 자가 없도다
(5-6).
자연이 더 급박하게 돌아가며 이러한 소식을 전파한다. 그러므로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또 주의 종에게 고의로 죄를 짓지 말게 하사
그 죄가 나를 주장하지 못하게 하소서
그리하면 내가 정직하여 큰 죄과에서 벗어나겠나이다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12-1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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