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욘 4:1-2
어떤 사람은 병거,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시 20:7
요나는 자신의 신앙으로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보며 ‘심히 싫어하고 노하였다.’ 저들로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도, 저들이 회개한 것도, 저들을 용서하시는 것도 요나는 불합리하다고 여겼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니느웨를 멸망시키지 않고 용서해주신다는 것인가? 요나는 니느웨가 이스라엘의 적대국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멸망의 이유가 충분하다고 여겼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무시한 것이다. 그러면 안 되었다. 자신의 판단으로는 공의의 하나님이 그러시면 안 되는 거였다.
그러다보니 결국 자신이 전파하여 구원 받은 니느웨 성의 구원의 기쁨에는 참여할 수 없었다. 요나는 ‘심히’ 화가 났다. 이 성질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대한 것이다. 여기서 ‘심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의 뜻은 ‘큰 악’을 뜻한다. 이는 ‘지나치게’를 의미하는 것으로 앞에서는 이 단어가 니느웨 사람들의 특성을 나타내는 용어로 쓰였다. 곧 이 단어의 의미를 유추하면 선이든, 악이든 ‘심히’ 또는 ‘지나치게’ 하는 것에 대하여,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하게 하겠느냐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우매한 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기한 전에 죽으려고 하느냐(전 7:16-17).”
하실 때 이 문맥을 그대로 읽으면 왠지 애매하고 미지근한 회색지대를 연상하게 한다. 적당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하는 듯하다. 그러나 우선 앞의 내용을 붙여서 다시 보면, “내 허무한 날을 사는 동안 내가 그 모든 일을 살펴 보았더니 자기의 의로움에도 불구하고 멸망하는 의인이 있고 자기의 악행에도 불구하고 장수하는 악인이 있으니(15).” 이는 세상 그 자체가 불합리하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의 윤리나 도덕이나 상식이나 합리적인 사고라는 게 모두 ‘허무한 날을 사는 동안’의 일이라, 실제 자신들이 그렇게 정의랍시고 부르짖던 것이 이럴 땐 옳고 저럴 땐 틀리다. 그러한 자기 판단으로 ‘심히’ 혹은 ‘지나치게’ 행하려는 선이나 의는 모두 악하다. 인간은 그 자체로 악하기 때문에 모두가 선할 수 없다. 그러므로 악하다.
하여 우리의 기본자세로는, “너는 이것도 잡으며 저것에서도 네 손을 놓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18).” 하는 전도자의 말이 결국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그렇듯 스스로의 애씀과 수고로 ‘지나치게’ 혹은 ‘심히’ 성취하려하거나 무시하려 하는 것을 피할 수 있다. 어쩌면 여기서 요나를 다시 보게 된다. 저는 게으르거나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회피하려던 자가 아니다. 누구보다 ‘심히’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던 자였다. 그런 그로서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회개할 기회를 주신다는 데서 저는 동의하지 못한 것이다.
내가 요나였던 것도 그래서이다. 나는 어려서 아버지의 사역에 그렇듯 불만이 있었다. 차라리 그럴 거면 자식들 없이 혼자서 성직자의 길을 걷던가, 가족들을 줄줄이 이끌고 무책임하게 그 모진 가난 속으로 들어갔으니… 부친의 사역이 어린 내게는 부당하였고 하나님의 명령은 자연히 온당하다고 할 수 없었다. 물론 그때마다 주의 도우심과 함께 하심을 인정하기까지는 참으로 긴 시간을 더하고 난 뒤의 일이다. 그래서도 나는 심히 화가 났고 그런 가운데 죽어도 나는 목회의 길을 가지 않겠다고 내뺐다. 그때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가 있었듯이 내 곁의 선생과 가까운 이들이 모두 합리적이었고 상식적이었으며 선하였다. 돌아보면 그들 역시 그때에 나를 보호하시기 위한 귀인들로 곁에 붙이신 이들이었다.
전에도 언급했듯이 요나서는 그 내용이나 전개가 모두 내 이야기만 같아서 때론 면구스럽다. 나 역시 목사가 되고도 심히 화가 나곤 했다. 더러는 지금도 골난 사람처럼 하나님 앞에 툴툴거린다. 이럴 거였으면 왜 이처럼 무리하게 이 길을 가게 하신 것일까? 하는 마음에서부터 가령 어떤 사람에 대해 특유의 감정이입이 가중되어 나는 울면서 기도하고 안타까움으로 몸부림쳤는데 저는 어느 순간 아무렇지 않게 연락을 끊는다거나 나를 부당하고 욕하고 떠난다. 때로는 몇 시간씩, 기진하여 쓰러지기 직전까지 저의 말을 듣고 말해주고, 그 일로 내가 더 힘들어하며 성심으로(지나치게) 다가가고 위로하고 어찌 해결하려 모색했는데 보기 좋게 외면을 당했을 때… 누가 그래달라고 했냐는 식으로 되레 욕을 먹고 끝났을 때… 지금 딱 요나의 심정이었다.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4:1).” 아니, 요나가 이상한 것일까? “하나님이 그들이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3:10).” 어차피 이럴 거였으면서 뭘 그렇게까지 죽기 살기로 자신을 붙들어다 그것도 하룻길에 선포하였을 뿐인데, 회개하고 이를 또 용서하신단 말인가? 요나의 주장에는 일리가 있다.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4:2).”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왠지 그럴 것 같았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러실 거였으면서 굳이 뭘 또 자신을 그렇게까지!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하니(3).” 요나의 이 심정은 좀 과하다 싶을지 모르지만 ‘심히’와 ‘지나치게’의 경계를 걸어온 사람이면 안다. 나의 우울감 기저에는 죽고 싶은 마음이 깔려있다. 아주 어릴 때부터 어린 게 뭘 안다고 그처럼 사는 게 고단하였다. 내 기억이 닿는 아주 깊은 수면의 바닥에 있는 한 장면은 작은 유치원 마당이다. 당시에 유치원은 조금 사는 집 아이들이나 다닐 수 있는 그야말로 고급 교육이었다.
당시 나의 부친은 아직 사업가였고 나는 그 집안의 장남이었다. 어린이집인지 유치원인지 당시 기억이 생생한 게 꼭 저들은 ‘밀과 보리가 자라네, 밀과 보리가 자라네, 한 사람만 나오세요, 나와 함께 춤춰요,’ 하며 당시 마룻바닥을 빙글빙글 돌면서 아이들과 춤을 추고 깔깔거리며 하루를 시작하고 점심을 먹고 오후에 헤어졌다. 그때마다 나는 저들과 함께 춤을 출 수 없으니까 한쪽에 따로 앉았거나 어느 선생이 손을 잡고 혼자 시늉을 하듯 웃어보였다. 그것도 한두 번이지, 나는 그때마다 안 다니겠다고 떼를 썼고 부모는 속도 모르고 다니면 좋을 것 같았는지 등 떠밀었고, 그때 혼자 앉아 문 밖의 눈이 시리게 하얗던 볕을 쏘아보거나, 슬그머니 그네 아래에 나가서 어린 게 땅바닥만 쓱쓱 밀고 앉았던 게 기억난다. 결국 그때 졸업장이 있는 걸 보면 끝까지 다니긴 다닌 모양이다.
생은 늘 부당하였고 저마다의 인생이 어떠할지는 가히 짐작은 간다. 수 십 년 후에 우리가 만났을 때 우리가 어찌 살았는지를 듣다보면 우선은 억울하고 불합리한 상황이 귀에 들어오고, 나중에 이르러는 하나님의 섭리가 느껴진다. 곧 오늘 요나의 특성이 이상한 게 아니라, 우린 저마다 똑같다. 요나는 하나님의 결정에 불만을 토로하고 분노를 나타냈던 것인데, 실제 우리 안에는 그런 원망과 불만이 가득하다. 이를 대놓고 욕하고 부인하여 멀리 떠난 이도 있고, 믿으면서도 그의 기저에는 그 이상, 더는 용납하기 싫은 하나님의 사랑하심도 있다. 그래서 오늘 날 교회들이 적당함으로 부요하다. 강하게 요구하거나 강요하지 않고 그러면서도 적당히는 같이할 수 있는 시설이나 서로의 교제를 허용하면서 ‘유한마담’으로 서로의 친교는 ‘친절한 타인’의 관계로 족하다.
친밀해진다는 것은 책임이 따른다. 여기서 요나의 신앙도 딱 거기까지였다. 하나님은 이러하시고, 그러니 더는 관여하고 싶지 않은 그 정도 선에서 거절하고 니느웨가 아닌 다시스로 갔던 거였다. 그런 걸 그렇게 불러다 결국 선포하게 하시고는… ‘내 이럴 줄 알았았다!’ 요나는 자신이 분노하는 이유를 여호와께 기도로 고한다. 그의 기도는 마치 물고기 뱃속에서 했던 기도와 같은 방식이다. 그러나 내용에 있어서는 전혀 그 결이 다르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무시하고 자신의 생각대로 원망을 토로한다.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저는 그런 하나님을 알고 있었다. 자기 민족을 향한 인자와 인애로도 말이다.
요나는 니느웨가 심판받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것은 원수를 미워하는 인간의 일반적인 성향이기도 하고 자신이 요구하는 하나님의 정의이기도 하다. 종종 누가 말할 때 교회를 힐문한다. 요즘 교회들이, 하고 시작하는 것에서 보면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기준점이 있다. 그런데 저들 교회가 이에 미치지 못하고 심지어 몇몇 정치적인 목사들이 나와서 불합리하게 사람을 지지하고 정당을 비난하는 것을 이유로 교회를 싸잡아 욕하기도 한다. 당시 니느웨는 이스라엘의 위협적인 나라였다. 실제 이스라엘을 침공했던 적도 있다. ‘다시스’는 지중해 연안에 많이 있었다. 하나님께서 가라고 명한 니느웨는 동쪽이었고, 다시스는 그와 반대인 서쪽에 있었다. 요나로서는 반대쪽으로 달린 것이다. 왜냐하면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말이다.
요나가 도망간 궁극적 이유는 여호와의 명을 거역하고 달아나려는 것이었다. 요나가 이처럼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려 했던 것은 하나님의 권능의 손에서 벗어나려 했던 것이 아니라, 자기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나름은 애국의 마음으로 앗수르가 하나님의 경고를 받아들이고 심판을 면하는 것에 동의할 수 없었다. 그에 대한 영향은 곧바로 이스라엘에게 미칠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 이스라엘은 몇 차례 앗수르에게 위협을 받았고, 예후가 통치하던 주전 841년에는 앗수르에게 조공을 바쳤다. 요나는 니느웨에 가서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할 당시만 해도 니느웨의 멸망을 기대했다!
그러나 결국, 아니나 다를까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 요나는 알고 있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돌판을 주시면서 계시하신 내용이기도 하다.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그러나 벌을 면제하지는 아니하고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출 34:6-7).”
요엘 선지자에 의해 선포되었던 내용이기도 하다.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주께서 혹시 마음과 뜻을 돌이키시고 그 뒤에 복을 내리사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소제와 전제를 드리게 하지 아니하실는지 누가 알겠느냐(욜 2:13-14).” 여기서 요엘은 자신이 하나님께 불순종했었음에도 불구하고 용서받았던 사실을 경험했던 까닭에, 하나님이 죄인들에게 자비를 가지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요나 역시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물고기 뱃속에서 구원받은 것은 엊그제 일이다. 즉 하나님의 은혜로우심을 체험하였던 사람들이 유난히 더 악에 대해, ‘지나치게’ 득의양양 하는 것을 본다. 가령 아무개 목사가 교회에서 여성도와 불미스런 일로 구설수에 오르고 심지어 성추행으로 고소당해 한바탕 논란이 있었다. 세간에 집중을 모은 것은 그럼에도 유난히 청년들이 많이 모이는 교회로 유명하였다. 그때 한 이가 목사 지망생으로 같이 신대원을 다닐 때였는데, 저도 무슨 사업을 하다 망하고 뒤늦게 부르심을 받아 공부하던 이었다. 삼삼오오 그 주제로 이야기를 하는데 유독 저이는 그에 대한 비난과 비판이 강하였다. 듣기로는 자신의 사업이 잘될 때 하룻밤에 몇 백씩의 술자리를 어쩌고 하던 것을 보면, 누구보다 은혜를 입은 것인데…. 우리의 ‘지나치게’는 유독 우리의 약함을 반증한다.
요나의 의중에도 이런 고백이 이방인에게 해당되지 않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누구보다 용서와 자비하심으로 사역을 감당하던 것이면서 요나가 자신의 생명을 거두어 달라고 호소한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도전이라기보다 지극히 이기적인 생각에서 우러나온 감정이다. 사람이 좀 그런 면이 있다. 마치 엘리야가 이세벨을 피하여 광야로 가서 하나님께 드렸던 기도도 그런 면이 있다.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왕상 19:4).” 저는 앞서 거짓 선지자 수백 명을 상대하며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던 자이다.
그런데 고작 “이세벨이 사신을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반드시 네 생명을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과 같게 하리라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한지라(2).” 왕후의 통보에 도망쳐서 이처럼 죽기를 바랄 정도이니, 참으로 초라하기까지 하다. 마치 우리 속 마음이 들리는 것 같다. ‘저는 하나님의 종이 되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려고 애썼습니다. 그런데 제가 체험한 하나님과 이 세상의 불합리한 여정은 괴리가 큽니다. 하나님을 이렇게 섬기느니 저의 인생을 거두어가주세요. 이렇게 더 살아서 무엇하겠습까?’ 그만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고자 하나, 정작 주어지는 당장의 결과나 현실을 목도하면서 그런 현실에서 오는 괴리감을 이길 수 없다. 그런 심정이 종종 나를 괴롭게도 한다.
이때 ‘박넝쿨의 예’는 참으로 그 교훈이 크다. 이 또한 하나님이 예비하셨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넝쿨을 예비하사 요나를 가리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 하며 그의 괴로움을 면하게 하려 하심이었더라 요나가 박넝쿨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였더니(6).” 이 잠깐의 것으로 기뻐하면서, 요나는 이미 초막을 지어서 그늘을 만들어 두었기 때문에, 박넝쿨 그늘이 주는 시원함으로 인해 기쁨을 맛보았다기보다 녹색 식물을 감상하며 그로 인해 기뻐한 것이다. 여기서 ‘준비하사’는 정하다, 제공하다의 뜻이다. 이미 하나님은 요나를 위해 ‘물고기’를 예비하셨고(1:17), 이번에는 박넝쿨을 예비하셨다가 ‘벌레’도 ‘바람’도 하셨다. “하나님이 벌레를 예비하사 이튿날 새벽에 그 박넝쿨을 갉아먹게 하시매 시드니라(4:7).” 그러니 우리의 얄팍한 신앙이란 얼마나 초라할 뿐인지,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쪼이매 요나가 혼미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이르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하니라(8).” 하나님의 주권과 결정을 강조하며 하나님의 목적을, 당신의 뜻대로 이끌어 가시는 사실을 오늘 본문은 보여준다. 마치 내가, 우리가 어떻게 수고하여 하나님의 일을 하는 줄 알지만, 요나로 하여금 니느웨를 심판에 처하지 않고 용서해준 당신의 뜻을 ‘박넝쿨 정도의 기쁨’에도 일희일비하는 우리의 속성을 깨닫게 하신다.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 하시니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 하니라(9).” 그러니 과연 저는 여기서 진정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참여하였을까?
마치 동생 탕자의 즐거운 잔치에 그의 형은 아버지의 손을 잡고 들어갔을까? 하고 의문이 남는 것처럼. 오늘도 이와 같이 ‘요나 같은 나’를 인정하면서 주 앞에 엎드린다.
환난 날에 여호와께서 네게 응답하시고
야곱의 하나님의 이름이 너를 높이 드시며
성소에서 너를 도와 주시고 시온에서 너를 붙드시며
네 모든 소제를 기억하시며
네 번제를 받아 주시기를 원하노라 (셀라)
(시 20:1-3).
그리하여 나는 이제,
어떤 사람은 병거,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그들은 비틀거리며 엎드러지고
우리는 일어나 바로 서도다
(7-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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