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서 그의 처소에서 나오시고 강림하사 땅의 높은 곳을 밟으실 것이라
미 1:3
여호와여 주의 능력으로 높임을 받으소서 우리가 주의 권능을 노래하고 찬송하게 하소서
시 21:13
예언은 여호와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계시이다. 성경에 쓰인 모든 글은 예언의 말씀이다.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다. 노아나 아브라함의 이야기로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전개한다. 우리가 판단할 수 있는 멸망할 인간의 말로 쓰여진 게 아니다. 우리가 판단을 받아야 할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쓰였다. 그러한 여호와의 말씀이 이번에는 미가에게 임하였다. 때는 “유다의 왕들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모레셋 사람 미가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 곧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에 관한 묵시라(1).”
유다의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미가가 받은 예언의 말씀인 것을 밝힌다. 세 왕의 재위 기간을 합치면 대략 63년이다(주전 750-687). 그렇다고 미가가 63년에 걸쳐 예언하여 말씀을 전하였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다만 위의 세 왕의 시대를 걸쳐 예언한 것은 분명하다. 2-7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사마리아의 멸망에 대한 예언은 그 시기가 주전 722년으로 이전의 예언이 포함된 것을 알 수 있다. 히스기야 왕 때 미가가 신탁을 받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유다의 왕 히스기야 시대에 모레셋 사람 미가가 유다의 모든 백성에게 예언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느니라(렘 26:18).” 이에 따르면 히스기야 왕 시대에 미가가 예언을 받아 전한 것으로, 오늘 이 말씀은 ‘미가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다.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에 대한 묵시는 여호와의 말씀으로 여호와의 권위를 내포하고 있다. 그것을 전한 미가는 하나님의 사자로서 말씀을 선포하는 권위를 갖고 있다. 그 예언은 임했고, 명백하고, 힘 있고, 강하게 이끄시는 방식이다. 미가는 그것을 보았다. 즉 말씀이 그에게 나타내 준 환상을 보았고, 마치 이미 이루어진 것처럼 명백하고 확실하게 예언했다.
그의 예언은 유다의 세 왕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의 통치기간 중이었다. 아하스는 유다의 왕 중에서 악한 축에 끼며, 히스기야는 선한 축에 낀다. 이렇듯 변화가 있는 시대에 하나님의 선지자로 자신을 적응시키며 숱한 유혹에서도 말씀으로 무장하였을 것을 알 수 있다. 이 책에는 약속과 경고가 섞여있다. 따라서 미가는 사악한 통치 중에도 평안을 선포했고, 의인들에게는 사태가 순조로울 것이라고 말했다. 경건한 왕의 통치 중에는 회개를 선포하며, 악한 자들에게는 사태가 불길할 것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곧 아무리 시대가 어떠하든지 말씀은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전하는 자는 흔들리지 말아야 하고 듣는 자는 말씀으로 단단히 서야 한다. 그래서도 바울은 우리에게 성령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하였다.
이는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엡 6:11).”는 것으로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13-17).” 곧 오늘 우리도 의의, 진리, 복음, 믿음, 구원, 성령, 말씀과 같은 검과 투구와 신을 신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왕이나 그렇지 않고 악한 왕이나 이는 우리의 장애물이 될 수 없다. 그리하여 시대가 어떠하든지 우리로서는 더욱 더 말씀에 붙들려서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더욱이 대통령제 5년 임기의 시절을 살면서 그때마다 보수니 진보니 하여 진영논리에 편승하고, 저가 믿는 자인지 어떤 자인지를 기준으로 하여 일희일비하기 마련이다. 교회가 그러면 교인들은 요동친다. 목회자가 말씀으로 중심을 잡지 못하면 어느 한쪽을 지지하느라 다른 쪽을 악마화한다. 그럴 때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곧 이 땅에 권세 잡은 자의 쓰임은 하나님께 있음으로 우리는 주를 바라는 것이지 세상의 권세 잡은 자가 아니다. 모세도 종이었고 바로도 종이었다. 그 쓰임에 다른 것을, 미가는 세 명의 왕을 거치면서 그 중심은 하나였다.
“백성들아 너희는 다 들을지어다 땅과 거기에 있는 모든 것들아 자세히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대하여 증언하시되 곧 주께서 성전에서 그리하실 것이니라(2).” 때는 요담이든지 아하스든지 히스기야든지 주의 성전은 여전하시다. 이 예언은 열방의 영향 아래 있는 이스라엘과 유다 두 왕국의 수도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에 관한 것이다. 열 지파는 다윗과 아론의 집을 버렸지만, 하나님은 그들에게도 기꺼이 예언의 말씀을 전하셨다. ‘백성들아, 너희는 다 들을지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에 들을 귀를 가지고 있는 것이 복이다.
우리는 말씀되어진 것과 관계되어 살아간다. ‘들을지어다.’ 하는 것은 모든 세상 사람들을 향한 것 같으나 실은 들을 귀 있는 우리들을 향한 것이다. ‘지금 들을 수 있는 너희 모두와 간접적으로 전해 듣는 다른 모든 사람에게 대해’ 이 비상한 어법은 들을 수 있는 기회를 던진다. 미가가 그의 예언을 시작할 때 쓴 이 말씀은 미가야가 열왕기상 22장 28절에서 그의 말을 끝낼 때 쓴 말과 원문으로도 똑같다. “미가야가 이르되 왕이 참으로 평안히 돌아오시게 될진대 여호와께서 나를 통하여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이다 또 이르되 너희 백성들아 다 들을지어다 하니라.” 미가는 미가야의 약칭이다.
“백성들아 너희는 다 들을지어다.”
“땅과 거기에 있는 모든 것들아 자세히 들을지어다.”
땅은 장차 올 심판의 도래와 그 중압 때문에 떨게 될 것이다. 땅은 이 미련하고 지각없는 백성보다 더 속히 들을 것이다. 그리고 땅이 호소하면 하나님은 들을 것이다. 교회와 그 속의 사람들은 듣지 않더라도, 땅과 그 속에 있는 것들은 들을 것이다. 이 사실이 그들을 부끄럽게 할 것이다. 가령 오늘 날의 전쟁과 자연재해와 여러 뒤틀린 자연현상이 먼저 곡하듯 알린다. 이를 듣는 환경운동가나 실제 피부로 느끼는 이들이 듣는다. 하루가 다르게 공기며 물이며 땅의 모든 것들이 뒤틀리고 있음을 알아채고 있다. 봄철에 황사가 오고 미세먼지가 위협적이다. 생각지도 못할 곳에 기후의 변화가 이상기온을 나타내고 동식물들이 변이하고 이동하여 사라지거나 새로운 종이 환산하고 있다.
이는 하나님 자신이 송사하시는 것이다. 그의 전능하심과 권세와 정의가 이 백성에 대해 불리하게 증거가 되어 나타난다. ‘주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대하여 증거하신다.’ 하는 의미가 이러한 자연현상을 비롯하여 자연과 피조물들로 먼저 알게 한다. 우리 몸의 변화에서도 느낄 수 있다. 이것은 정당한 경고를 받음으로 우리로 알게 하시는 하나님의 송사다. 예언자들은 파수꾼처럼 이를 충실하게 알리는 의무를 다했다. 미가 때는 물론 오늘의 현실도 그러하다. 정치화되고 권력을 쫓는 이들에 대해서는 논할 의미를 모르겠고, 묵묵히 주신 바 목회와 말씀에 전념하는 종에게 그 육신을 돌보는 게 일이라! 가끔은 속상하고 너무하고 안타까워서 주의 이름을 부른다. 늘 연약한 폐로 객담을 뱉어내며 그런 몸을 돌보는 게 사명처럼 여겨졌다. 이는 수행이고 연마다.
그러한 약한 데서 주의 강함이 나타나심을 안다. 알지만 더러는 힘들다. 언제부턴가 피부에 오돌토돌 무엇을 난다 했고, 그러다 사그라져 홍점인가 했던 것이 피부암의 일종일 수 있다는 진단을 받아 좀 더 지켜본 뒤 치료를 하자고 했다니…. 그럴 때면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그러니 이 자체로 수행이고 연마고 단련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으로 더욱 다른 데 정신 팔지 못하게 하시는 것은 알겠다. 그러나 동시에 어렵고 불안한 것도 사실이다.
가끔은 나 역시 내가 어쩔 수 없는 나의 연약한 육신으로 붙들렸다. 그러므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으로 아침에 일찍 깨워 교회로 오고, 아직은 걸을 수 있을 때 한 걸음 한 걸음 더하여서 내 몸을 움직인다. 이렇듯 묵상을 하고 글을 쓰는 일도 수행이다. 이 시간을 위하여 저녁을 포기하고 산다. 누구와 따로 시간을 정하지 않은지 오래되었다. ‘새벽을 깨우리라’는 다짐으로 이것만큼은 유지하려 기를 쓴다. 나는 오늘 본문에서 여러 경고의 말씀을 차치하고 우선은 미가가 여러 왕을 거쳤다는 것과 그 격랑의 시대에 악할 때의 왕 때도 선할 때의 왕 때도 이 예언의 말씀을 굳게 잡고 중심을 잃지 않았을 것을 생각한다. 저는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의 말씀은 어떤 것도 땅에 떨어지지 않을 것임을 붙들고 있었다. 말은 안했지, 그러한 격동의 시대에 한결같다는 것은 단련된 믿음으로만이 가능하다.
또한 동시에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에 임할, 얼마 후 이스라엘에서 성취되고 마침내 유다에서도 성취될 ‘파괴적 심판’에 대한 무서운 예언을 전한다는 일은 목숨을 건 싸움과 같다. 곧 하나님 자신이 그들을 치러 일어나실 것이다. “여호와께서 그의 처소에서 나오시고 강림하사 땅의 높은 곳을 밟으실 것이라(3).” 당시 저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자부했다. 그 관계가 그들을 보호해 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보라, 여호와께서 그 처소에서 나오신다.’ 하고 선포함은 하나님을 그 곳, 속죄소(자비의 자리)에 붙박아둔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음을 알게 한다. 보면 오늘도 흔한 신앙이다. 모두가 마치 하나님은 우릴 위해 존재하는 ‘사랑의 하나님’으로 간주한다. 우리의 필요와 그 쓸모 있는 신앙의 대상으로 구원도 당연하게 여긴다.
정작 그 하나님을 위해 우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다. ‘~ 때문에’ 하나님을 잘 믿고, 이제는 신앙생활을 해야지! 하고 결심하는 사람들을 볼 때면 가상하다. 우리의 어떤 필요를 위해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 신앙은 모두 우상숭배이다. 그러다 보니 자칫 자기 생각에 맞지 않으면 ‘어떻게 그럴 수 있어?’ 하는 심정으로,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마 7:22).” 나름은 참 열심히도 믿었다! 그러니 정작 억울하기도 하겠으나 오늘 본문은,
“여호와께서 그의 처소에서 나오시고 강림하사 땅의 높은 곳을 밟으실 것이라(3).”
이 어찌 된 일인가? ‘그의 처소에서 나오시고 강림하실 것이다.’ 그는 마치 되는 일과 무관한 듯 물러선 것으로 보였으나, 이제 자신을 나타내시고 ‘다들 생각지도 않았던 일’을 행하시려 한다. 이전에 그러셨던 것처럼 놀라운 긍휼에서 아니라 놀라운 심판을 위해서 하늘을 쪼개고 강림하시리라! “원하건대 주는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시고 주 앞에서 산들이 진동하기를… 보라 여호와께서 그의 처소에서 나오사 땅의 거민의 죄악을 벌하실 것이라 땅이 그 위에 잦았던 피를 드러내고 그 살해 당한 자를 다시는 덮지 아니하리라(사 64:1, 26:21).” 다들 예상하지 못했던, 나름은 자신들의 열심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그럭저럭 괜찮은 줄 알았는데, 자신이 옳다 여기던 것으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아뿔싸! 좋은 게 좋은 줄 알았는데 “이는 다 야곱의 허물로 말미암음이요 이스라엘 족속의 죄로 말미암음이라 야곱의 허물이 무엇이냐 사마리아가 아니냐 유다의 산당이 무엇이냐 예루살렘이 아니냐…” 그렇게 믿고 따랐고 의지하며 우르르 몰려다니듯 믿는다는 소릴 들으며 그리 확신하여 자신들의 필요를 구하느라 열심을 다해 믿었는데, “그 새긴 우상들은 다 부서지고 그 음행의 값은 다 불살라지며 내가 그 목상들을 다 깨뜨리리니 그가 기생의 값으로 모았은즉 그것이 기생의 값으로 돌아가리라.” 이는 곧 자신들을 위해 하나님을 필요로 하여 구하고 바랐던 것들로 정작 그 목적을 위해서면 다른 여느 종파나 무속적이었어도 상관없던, 샤머니즘 같은 기독교 신앙을 돌아보게 한다(5, 7).
길거리에 나와 정치구호를 외치며 찬송하고 예배하던 일이나, 나이 들면서 점점 어울릴 사람이 없어서 교회를 간다는 친구의 말이 씁쓸하게 들리는 것도 실상은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을 빙자하는 저마다의 필요와 충족을 위한 게 아니었던가? 설마 자기만족의 하나로 신앙은 아니었을까? 나는 특히 아플 때, 내 의지와 상관없이 불안과 우울이 나를 엄습했을 때 때로는 더욱 감사한다. 아내는 물론 가까운 사람일수록 미안해서도 아프단 소릴 하지 못하고 있을 때, 이를 다 아시는 하나님 앞에서야 이것으로밖에 주의 이름을 부르고 의지할 수 없으니… 고통이 복이라는 말이 그런 의미로 작용한다. 나의 외로움으로 주가 더욱 간절하다.
“이러므로 내가 애통하며 애곡하고 벌거벗은 몸으로 행하며 들개 같이 애곡하고 타조 같이 애통하리니 이는 그 상처는 고칠 수 없고 그것이 유다까지도 이르고 내 백성의 성문 곧 예루살렘에도 미쳤음이니라(8-9).” 오늘 미가의 심정도 그와 같다. 이를 ‘벌거벗은 몸으로 행하며’라 하여 표현하는 것은 미가가 사마리아와 예루살렘 앞에 놓인 운명을 바라보고 애통해 하는 모습을 묘사하는 것이다. 당시 죄인이나 노예는 허리에 동여매는 옷만을 입었을 뿐 신발은 신지 못했다. 미가는 벌거벗은 몸으로 상징적인 행동을 취하여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이 앞으로 당할 운명, 곧 앗수르의 포로생활을 전위예술 같이 표현하고 있다.
또한 ‘이는 그 상처는 고칠 수 없고 예루살렘에도 미쳤음이니라.’ 할 때 자신이 애곡하며 애통해 했던 이유를 알린다.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하는 사마리아의 죄가 더 이상 치유될 가능성조차 없는 상태에 이르러 하나님의 심판을 당할 수밖에 없게 되었을 때, 그것이 사마리아로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유다, 곧 예루살렘에게까지 미치게 되었다! 가끔 나는 나의 오늘의 고통- 연약한 육신의 아픈 곳들이나 심리적으로 내 의지와 상관없이 당하듯 느껴야 하는 불안과 우울을 겪을 때면 이것으로 내 곁의 한 영혼을 생각한다. 저이가 알지 못하는 그 영혼의 고통을 내가 당함으로 더욱 간절하게 저를 두고 주께 구하게 하시려는 것 같다. 그저 대수롭지 않은 듯, 좀 더 있다 갈게요, 다음에 다닐게요, 하는 식의 반응으로 나는 내가 불안해하고 어디가 아픈 것을 느낀다.
이를 가드에 알리지 말라는 것은 다윗이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을 애도하는 장면과 블레셋 성읍인 가드 사람들이 사울 왕과 요나단의 죽음을 알아서 기뻐하지 않도록 했던 것을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미가의 문학기법이겠다(삼하 1:20). 즉 다윗이 사랑하는 자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처럼 미가도 패망을 슬퍼하고, ‘베들레아브라에서 티끌에 굴지어다.’ 하는데 ‘베들레아브라’의 뜻은 ‘먼지의 집’이다. ‘티끌에 굴지어다’는 애곡과 슬픔의 표시다. 자신들의 성읍 이름의 뜻과 같이 먼지 속에서 구르게 될 것을 표현한다. 또한 ‘사빌 거민아 너는 벗은 몸에 수치를 무릅쓰고 나갈지어다.’ 하는데 ‘사빌’은 ‘아름다운’ 혹은 ‘순결한’이란 의미다. 그러나 그들의 운명은 정반대이다. 그곳 거민들은 재난을 당해 벗은 몸이 되어 모욕과 수치를 당하게 될 것이다.
‘사아난’은 유다 아래 지역에 위치한 성읍으로 그 의미는 전쟁을 하기 위해 ‘밖으로 나가다’란 뜻이다. 성읍 이름의 뜻과 같이 용감한 사나난 거민들은 적들이 침략할 때 겁에 질려 성읍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성문을 굳게 닫고 성읍 안에서 갇혀 살게 될 것이었다. 그렇게 ‘벧에셀이 애곡하여 너희로 의지할 곳이 없게 하리라.’ 즉 ‘벧에셀’은 예루살렘 근처에 위치한 ‘근처의 집’이란 뜻으로 도피처를 가리키는 말이다. 거기 벧에셀 거민들이 의지할 수 있는 성읍이 주변에 없을 정도로 앗수르의 침략으로 황폐해지며 결국 벧에셀도 파멸될 것을 알리고 있는 것이다.
미가의 예언의 말씀을 읽으며 나는 새삼 주어진 상황에서 나의 어려움이나 남모를 고통이 이를 귀 기울여 듣게 하는 것에 감사한다. 하여 오늘도 주의 이름을 부를 때,
그의 마음의 소원을 들어 주셨으며
그의 입술의 요구를 거절하지 아니하셨나이다 (셀라)
…
그가 생명을 구하매 주께서 그에게 주셨으니
곧 영원한 장수로소이다
(시 21:2, 4).
그러므로
여호와여 주의 능력으로 높임을 받으소서
우리가 주의 권능을 노래하고 찬송하게 하소서
(1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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