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곱아 내가 반드시 너희 무리를 다 모으며 내가 반드시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모으고 그들을 한 처소에 두기를 보스라의 양 떼 같이 하며 초장의 양 떼 같이 하리니 사람들이 크게 떠들 것이며 길을 여는 자가 그들 앞에 올라가고 그들은 길을 열어 성문에 이르러서는 그리로 나갈 것이며 그들의 왕이 앞서 가며 여호와께서는 선두로 가시리라
미 2:12-13
그는 곤고한 자의 곤고를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아니하시며 그의 얼굴을 그에게서 숨기지 아니하시고 그가 울부짖을 때에 들으셨도다 큰 회중 가운데에서 나의 찬송은 주께로부터 온 것이니 주를 경외하는 자 앞에서 나의 서원을 갚으리이다
시 22:24-25
하나님 앞에 공짜는 없다. 하나님은 갚으시는 이시다. “그들의 행위대로 갚으시되(사 59:18).” 하나님이 누구신가, 하는 것을 “주는 은혜를 천만인에게 베푸시며 아버지의 죄악을 그 후손의 품에 갚으시오니 크고 능력 있으신 하나님이시요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시니이다(렘 32:18).” 알게 하려 하심이다. 하여 예수님은 이르시되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 6:4, 6).” 하심을 분명히 하셨다.
이를 이번에도 보이셨다. 교회가 이곳으로 이전을 마치기까지 아들이 다 했다. 처음 같이 와서 둘러보며 위치를 살필 때부터였다. 그날은 어떻게 같이 나왔다. 기억나는 게 집 앞 허름한 부동산 하던 자리를 보고 실망하고 있을 때였다. 근처 어디서 커피를 한 잔 하며 어쩔까 하고 있을 때 아들이 아파트로 가서 차를 가져왔다. 그리고 이곳으로 왔다. 나는 다 좋은데 특유의 성격으로 주저하여, 임대료나 관리비를 염두에 두고 자신없어하고 있었다. 중개인은 창가 쪽으로, 부동산 사무소로 쓰던 것이라 당일 내놓은 것으로, 내부가 다 처리돼 있어 그날 중에 결정하고 연락을 달라고 했다. 당장 가계약을 걸 정도도 아니어서 마음을 접고 집으로 갔다.
곧이어 아들이 방으로 와서 자신의 청약을 깨서 우선 가계약을 걸고, 자신이 교회 간판이나 썬팅, 현판을 할 수 있도록 헌금을 하겠다고 용기를 내라는 것이다. 평소 그러는 애가 아니라 나는 순간 하나님이 하시려는가? 하고 가만히 맡겨두었다. 그러자 아들이 직접 중개인과 통화를 하고 가계약금 백만 원을 보냈다. 그렇게 해서 저쪽을 내놓고 얼마간의 시간을 두었다고 생각했는데, 이렇듯 일사천리로 일이 된 것이다. 그리고 어제 자신이 원하던 회사에 서류접수를 해두었던 세무회계사무소에 면접을 갔고, 5월이 가장 바쁜 계절이라 바로 오후부터 근무를 시작하였다. 이곳을 같이 알아보고 결단하고, 가계약을 걸고, 꼭 한 달 만에 이 모든 일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는 동안 간판이며 교회 집기 등을 자신이 직접 문의하고 주문하고 조립하고 두 번째 주일예배를 드리고 난 뒤이다.
나는 요즘 아내와 걸어오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어제는 문득 그렇게 말한 것이다. 하나님 앞에 공짜는 없다. 하나님은 반드시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로 갚으신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 하여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곧 말씀을 듣고 받아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의 결실을 하는 자니라(막 4:20).” 곧 그날, 평소는 같이 산책을 안 하던 아이가 같이 나와서 집 앞 부동산 하던 허름한 자리를 보고, 교회로는 너무 좁고 외진 곳이라 아닌 것 같아 서로 돌아설 때 무슨 마음이었던 것일까? 그리고는 자신이 생각하던 곳에 문의를 하고 빈자리가 있는지 묻고, 만나기로 약속을 하고 와서 이렇듯 결정을 하기까지… 정작은 아이가 그런 것 같지만 하나님이 하신 일임을 안다.
우리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면? “환난을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자기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가운데에 나타나실 때에(살후 1:7).” 비로소 우리는 안다. 오늘 본문에서 이를 역설적으로 돌아보아 은혜에서 뿐 아니라 우리의 죄에 대해서도 그러하심을 본다. 곧 “그들이 침상에서 죄를 꾀하며 악을 꾸미고 날이 밝으면 그 손에 힘이 있으므로 그것을 행하는 자는 화 있을진저 밭들을 탐하여 빼앗고 집들을 탐하여 차지하니 그들이 남자와 그의 집과 사람과 그의 산업을 강탈하도다(미 2:1-2).” 악한 죄를 꾀하는 우리의 불의를 하나님께서는 또한 갚으신다.
하나님께서 왜 그들과 싸워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그 이유는 열방과 여러 사람의 파멸을 재촉하는 죄, 학대하는 죄에 대해, 먼저는 그들의 소유가 아닌 것을 알게 하신다. 이것은 ‘고통의 뿌리’가 되고 모든 악의 뿌리이기도 하다(2). 그들은 ‘밭들과 집들을 탐하기를’ 곧 아합이 나봇의 포도원을 탐하듯 하였다. 그러한 꾀를 부려 자기들의 탐욕을 달성할 수단을 짜는 데 있어, “그 때에 너희를 조롱하는 시를 지으며 슬픈 노래를 불러 이르기를 우리가 온전히 망하게 되었도다 그가 내 백성의 산업을 옮겨 내게서 떠나게 하시며 우리 밭을 나누어 패역자에게 주시는도다 하리니(4).” 결국 스스로들 자초한 일인 것을 깨닫게 된다.
우리가 무엇을 꾀하고 꾸미는 것은 주로 악에 대하여는 은밀하고 선에 대하여는 드러난다. 선은 환한 데서 이뤄지고 죄악은 어두운 곳에서 이뤄진다. 악을 행하는 데 있어서 자기들의 온 힘을 기울여 애쓴다. ‘그 손에 힘이 있기 때문이다.’ 그럴 수 있는 자기들의 부와 권세로 일을 꾸밀 수 있다. 더러는 그들을 통제하지 못하는데 스스로도 주체가 안 될 때가 있다. 가령 나는 우리가 겪은 계엄의 날에 어째서 그런 결정을 했는지부터 어떻게 그렇듯 무리하고 허술하게 시행했을까? 할 정도로 의아하다. 가끔 저들 법정을 보다보면 애들도 그런 식으로는 거짓을 꾸미지 않을 것 같은 말로 변명을 일삼는 게 희한할 정도이다.
악의 해명이란 이와 같이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인정해 주며 지지한다고 생각할 때 무서운 파괴력을 가진다. 그런데 또 보면 꼭 이상할 정도로 열렬한 지지자들이 그 주변에 있다. 그들로 에워싸여 모두가 그러는 줄 안다. 그렇듯 허락된 권력이란 무모하고 근시안적이다. 할 수 있다고 해서 자신이 해도 좋다고 생각하는 것이 그 반증이다. 자기들이 짜낸 불법을 성취하는 데 나름은 부지런하였다. 그들은 침상 속에서 일을 결정하고 ‘날이 밝으면’ 지체 없이 행하였다. 그들은 일찍 일어나 간사를 경영하며, ‘온 힘을 다해’ 그들 손에 잡힌 악한 일을 행하였다. 궤사를 꾸미는 데 있어서 아무 것도 구애받지 않았다. 그들은 ‘탐하는’ 것을 할 수 있다고 여겼다.
그들은 잘못을 신경 쓰지 않는다. 일단 탐욕이 마음을 지배하면 대개 모든 동정심이 사라져 버린다. ‘누구든 이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나 그의 이웃에 대한 사랑이 그 사람 안에 거하지 않는다.’ 이는 성경의 원리다. 하나님은 그들이 매우 교만하고 당당해하는 것을 아신다. “여호와께서 또 말씀하시되 시온의 딸들이 교만하여 늘인 목, 정을 통하는 눈으로 다니며 아기작거려 걸으며 발로는 쟁쟁한 소리를 낸다 하시도다(사 3:16).” 그리하여 하나님은 그들이 매우 쾌활하고 명랑한 것을 보시고, 그들의 웃음을 통곡으로, 기쁨을 슬픔으로 바꾸신다. “그 때에 너희를 조롱하는 시를 지으며 슬픈 노래를 불러 이르기를 우리가 온전히 망하게 되었도다 그가 내 백성의 산업을 옮겨 내게서 떠나게 하시며 우리 밭을 나누어 패역자에게 주시는도다 하리니(미 2:4).”
이는 결국 앞서 성경에 다 기록되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는 자신의 이야기로 들어야 한다. 예언을 거역하는 죄에 대하여 오늘 본문은 명시한다(6-11). 이에 심판은 하나님의 예언자를 박해하고 하나님의 가난한 자를 학대한 죄로 정리된다. 먼저 하나님의 예언자를 박해하고 억압하고 침묵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을 매우 분노하게 하시는 죄이다. 가령 누구에게 주의 뜻을 전할 때 할 말이 없게 만드는 사람이 있다. 속된 말로 ‘너나 잘하라’는 식인데, 유난히 나는 이런 인상과 대우를 자주 느낀다. 그것은 내가 그만큼 부족하고 스스로도 가누기 어려운(?) 모습이어서 그럴까? 심지어는 굳이 다닐 거면 왜 그런 델 가냐며 제대로 된 교회(?)를 운운하던 이도 있다. 또 누구는 다만 좋은 사람, 특이하여 경험이 많은 사람으로는 좋은데 목사나 말씀 전하는 자로는 미심쩍은 모양인지 대놓고 거절하기도 했다.
그럴 때면 백 번 양보해서 이해한다. 그러니 당시에 고작 어부였던 이들을 누가 사도로 따르겠나? 세리나 창녀였던 이들이 따르고 믿는 이를 누가 신뢰하겠나? 그래서도 다들 스펙을 운운하여 목사를 뽑을 때도 요즘은 세상 기준으로 대기업 이상의 학력과 외모와 경력을 본다. 하긴 수천 명이 모이고 수만 명이 운집하는 교회이면 더더욱 그렇기는 하겠다. 이에 오늘 본문은 이 백성이 하나님의 예언자에게 무슨 방해와 반대를 했던가? 돌아보게 한다. 먼저는 ‘예언하지 말라.’고 했다. “그들이 선견자들에게 이르기를 선견하지 말라 선지자들에게 이르기를 우리에게 바른 것을 보이지 말라 우리에게 부드러운 말을 하라 거짓된 것을 보이라(사 30:10).”
그렇게 해서 신실한 자의 전함을 막으려 했다. “때에 벧엘의 제사장 아마샤가 이스라엘의 왕 여로보암에게 보내어 이르되 이스라엘 족속 중에 아모스가 왕을 모반하나니 그 모든 말을 이 땅이 견딜 수 없나이다(암 7:10).” 듣기 싫은 말이나 권고를 멀리하려는 것은 당연하다. “이 두 선지자가 땅에 사는 자들을 괴롭게 한 고로 땅에 사는 자들이 그들의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여 서로 예물을 보내리라 하더라(계 11:10).” 그야말로 목사가 신뢰 받던 시절은 없다. 늘 꺼려하고 서로 평가한다. 나 역시 누구에게 말하려 할 때 내 안의 자책이 나를 정죄하는 것을 느낀다. 우린 다 죄의 결과로 죄의식을 여러 형태로 발산한다. 그중 하나가 그럴듯한 죄책 곧 자책하는 일이다.
누구에게 권하고 말할 때 내가 자주 겪는 일이다. 나도 부족하여 그러느니 말하지 말자, 하고 입을 다물게 하는 것은 나 자신일 때가 많다. 가령 누가 대놓고 거부할 때 ‘나 같아도, 나 같은 자의 말을 듣지는 않겠다!’ 하는 생각으로 의기소침해진다. 이는 늘 사탄이 노리는 자격지심이다. ‘나로는 예언하지 말고, 이들로 예언하게 하라.’ 하는 식으로 더 나은 곳으로 보내듯 회피하려 든다. 이에 “사람이 만일 허망하게 행하며 거짓말로 이르기를 내가 포도주와 독주에 대하여 네게 예언하리라 할 것 같으면 그 사람이 이 백성의 선지자가 되리로다(11).” 즉 참 예언자에게는 눈살을 찌푸리고, 침묵시키면서, 아첨하는 자를 장려하고 격려하려 드는 속성이 있다. 하나님의 신실한 예언자란 자기 스스로에게도 늘 대적을 당한다. 왜냐하면 하나님도 그렇다고 믿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네가 이 일을 행하여도 내가 잠잠하였더니
네가 나를 너와 같은 줄로 생각하였도다
그러나 내가 너를 책망하여 네 죄를 네 눈 앞에
낱낱이 드러내리라 하시는도다
(시 50:21).
하여 두 가지 양태의 마음이 늘 존립한다. 하나는 뭐라도 할까? 하는 심정으로 누구처럼 ‘유튜브 목사’를 생각해보기도 했다. 채널을 하나 열고 내가 할 수 있는 콘텐츠, 가령 우리의 기도 묵상은 물론 자신의 일상을 글로 쓰는 것을 같이 하며 복음을 전하면 어떻까? 하고. 또 하나는 누가 그런 책도 냈던데, AI에게 묻고 성령이 답한다나? 요즘은 설교도 AI가 작성하는 시대로 목사가 연구하고 자료를 찾아 연대를 알아보는 그 이상의 작업을 순간에 AI가 방대한 자료로 성경을, 하나님을 정의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 작업이 얼마나 위험하고 사람을 나태하게 하는지 잘 안다.
가령 글방을 운영하며 아이들과 글쓰기를 할 때, 나는 절대 참고서나 요약본을 못 보게 했다. 물론 아이들이 너무 바쁘고 학업이 한둘이 아닌 상태에서 작품을 읽는다는 게 불가능할 정도로 시간이 없다는 걸 안다. 그래서 모든 논술학원이나 글쓰기 지도가 어떤 교재나 학습지를 준비하여 논제를 주거나 어떤 지문을 간추려서 정리해준다. 그것으로 내용을 파악하고 자신의 견해만 서술하면 된다. 그렇게 아이들은 조선실록을 안 보고도 조선왕조 500년의 역사를 안다. 심청전이니 홍길동전이니 하는 작품을 직접 읽지 않고도 그 내용을 ‘다 안다.’ 그러다 보니 문학이란 머리를 식힐 때 읽는 가십거리 정도의 짧고 명징한 시나, 짤막한 단편 소설 정도면 되었다. 그러니 점점 책을 읽는 사람은 사라지고, 심지어 글을 쓴다고 하면 혀를 내두른다. 그런 세상에서 묵상을 글로 쓰시라, 오늘의 기도와 그 심정을 글로 써보시자 하면 모두가 거절이다.
그렇듯 우린 성경을 이제 요약본으로 본다. 역사와 연대로 쭉 훑으면서 어느 시대 어느 사사나 선지자의 활동 정도로 족하다. 그 안의 숨은 공간의 여백에 대해서는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묵상이란 것도 남이 적어주고 도와주는 소책자의 짧은 요약과 유익한(?) 예화 정도를 간추린 읽을거리 정도면 족한 시대가 되었다. 이처럼 구구절절 긴 글을 읽는 멍청이는 없다. 이건 게으른 자들이나 하는 짓이 되었다. 가만히 주의 이름을 부르고 앉아 기다린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럴 시간에 어느 목사의 유튜브 방송 설교를 듣거나 요약하여 간추려 준 성경을 후루룩 읽는 게 더 유익한 듯하다. 그런 시절에 살고 있다. 여기서 본문은 묻는다. ‘그들은 이 일에 대해 어떤 훈계를 받는가? “너희 야곱의 족속아 어찌 이르기를 여호와의 영이 성급하시다 하겠느냐 그의 행위가 이러하시다 하겠느냐 나의 말이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유익하지 아니하냐(7).
가령 우리가 ‘유대인이라 칭함을 받았다.’ 하는 이 문장 앞에서 우린 과연 멈추어서 어떤 은혜의 묵상을 할까? “유대인이라 불리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분간하며 맹인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둠에 있는 자의 빛이요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모본을 가진 자로서 어리석은 자의 교사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롬 2:17-20).” 이런 내용을 앞에 두고 나는 과연 심각해질 수 있나? 심각하게 나를 돌아보게 될까? 아브라함도 이렇게 하지 않았다.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이 행한 일들을 할 것이거늘 지금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요 8:39-40).”
오늘 말씀으로 하나님의 행하심을 다시 눈여겨본다. 그리고 우리의 오늘을 살핀다. 아들의 경우 하나님이 그리 인도하심에는 앞서 그와 같은 행함을 우선 기다리셨음을 알았다. 저녁을 먹으며 어떤가? 하고 묻자 대충의 상황을 설명하고 일정을 말하다, 5월 한두 달은 너무 바빠서 토요일, 일요일도 없다는데 주일 오전에 예배드리고 자신을 출근하겠다고 하였고 이를 우선하여 서로 계약서를 썼다고 했다. 나는 속으로 뿌듯하였고 겉으로 감사하였다. 그런 와중에 예배를 기본 전제로 하였다는 데서 하나님이 그 속에 함께 하심을 확신할 수 있었다.
우리는 신실함을 빼앗기지 말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나는 처음 출근한 아이에게 ‘언제든 아니다 싶으면 그만 둬!’ 하고 지나가는 말처럼 전했다. 죽고 못 살 정도로 살아야 할 가치가 이 땅에는 없어서이다. 유혹은 난무하고 사람들은 점점 공허한 신앙으로 AI까지 운운하고 의존하는 시대가 되었다.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있으리니 이는 그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받지 못함이라(살후 2:10).” 그럼 우린 그렇지 말아야 하고, “이러므로 하나님이 미혹의 역사를 그들에게 보내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들로 하여금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11-12).” 이와 같은 하나님의 의도를 알아야 한다.
이 땅에서 우리 존재란,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 거리요 백성의 조롱 거리니이다
나를 보는 자는 다 나를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그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
(시 22:6-8).
할 때에 우리는 오히려 확신하길,
오직 주께서 나를 모태에서 나오게 하시고
내 어머니의 젖을 먹을 때에 의지하게 하셨나이다
내가 날 때부터 주께 맡긴 바 되었고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주는 나의 하나님이 되셨나이다
나를 멀리 하지 마옵소서
환난이 가까우나 도울 자 없나이다
(9-11).
그리하여,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너희여 그를 찬송할지어다
야곱의 모든 자손이여 그에게 영광을 돌릴지어다
너희 이스라엘 모든 자손이여 그를 경외할지어다
(23).
그리할 때,
겸손한 자는 먹고 배부를 것이며
여호와를 찾는 자는 그를 찬송할 것이라
너희 마음은 영원히 살지어다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며
모든 나라의 모든 족속이 주의 앞에 예배하리니
나라는 여호와의 것이요
여호와는 모든 나라의 주재심이로다
(26-2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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