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하현. 2026. 4. 30. 05:52

 

오직 나는 여호와의 영으로 말미암아 능력과 정의와 용기로 충만해져서 야곱의 허물과 이스라엘의 죄를 그들에게 보이리라

미 3:8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시 23:4

 

 

어른이나 높은 자리의 사람들은 누구보다 신실하여야 한다. 은연중에 아이가 보고 따라하고, 직원들은 상사들의 일을 보고 답습한다. 맡은 바 그 책임을 다할 때 그에 따른 더 높은 영광을 받는 것도 그 때문이다. 신의를 버리고 반대되게 행할 때, 아이도 어른의 저의를 안다. 다른 사람의 허물은 확대경으로 보는 것 같고 자신의 허물은 축소하는 법이다. 오늘 본문은 이에 “내가 또 이르노니 야곱의 우두머리들과 이스라엘 족속의 통치자들아 들으라 정의를 아는 것이 너희의 본분이 아니냐(1).” 하는 질문을 던지며 시작하는 이유다.

 

하나님의 말씀은 큰 자부터 책망하신다. 책임이 있는 자는 그만한 권리도 누리며 살았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은 이를 묻는 것이다. ‘정의를 아는 것이 본분이 아닌가?’ 즉 어른이 되고 아이를 맡아야 하는 입장이라면 더더욱 이에 따른 의무가 있다. 자식을 기업의 열매라 하신 것도 공정히 공의를 행함이 네 할 일이 아닌가? 하고 마땅히 그 책임을 물으시는 의미가 담겼다. 아이 하나가 자라는 데 온 마을이 함께 한다는 말처럼 어떤 책임이 우리에게는 나이와 함께 주어진다.

 

여기 본문에서는 재판관 혹은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덕목 중의 하나는 정의를 꼽았다. 공의, 정의는 곧 백성을 치리하고 백성의 억울함을 판결하는 데 있어 공정하고 공평하게 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알 것이 아니냐? 하고 이 글을 보는 우리에게 묻는 것은 ‘두령’ 곧 치리자들이 공의로운 책임을 지기보다 자기 편리와 만족을 위해 고의적으로 굽게 만들었음을 지적하려는 설의법이다. 여기서 ‘알 것’은 지도자들이 갖추어야 할 덕목이 생활 속에서 직접 행할 수 있는 실천적인 지식이어야 하는 것을 확인하게 한다. 마땅히, 의당, 두령들과 치리자들은 분명히 공의를 알고 있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 공의를 버리고 악을 행하기를 즐거워하였다는 것을 역설한다.

 

하여, “너희가 선을 미워하고 악을 기뻐하여 내 백성의 가죽을 벗기고 그 뼈에서 살을 뜯어 그들의 살을 먹으며 그 가죽을 벗기며 그 뼈를 꺾어 다지기를 냄비와 솥 가운데에 담을 고기처럼 하는도다(2-3).” 하는 표현으로 다소 미개하고 짐승 같은, 본능적인 존재로 지적하고 있다. 즉 야곱의 두령들과 이스라엘 족속의 치리자들이 정의를 버리고 행한 죄악에 대한 묘사가 그만큼 끔찍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직무가 백성들을 공의로 다스리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위해 백성들의 고혈을 짜는 일을 서슴지 않았다고 지적하는 것이다. 곧 미가 선지자는 지도자들의 행위를 사람들이 고기로 음식처럼 만들 때 행하는 방식을 빌어 표현하고 있다. 고기의 가죽을 벗기고 살을 다지며 뼈를 발라내듯이 지도자들은 백성들을 무자비하게 다루었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들의 이러한 행위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세에서 비롯된 것이다. 선을 미워하고 악을 좋아하는 완악한 마음에서 기인한 것이다.

 

고로,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불의로 치부하는 자는 자고새가 낳지 아니한 알을 품음 같아서 그의 중년에 그것이 떠나겠고 마침내 어리석은 자가 되리라(렘 17:9-11).” 이를 나는 치리자나 심판자로 놓고 읽기보다 어른 또는 부모로 놓고 이해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일련의 내란재판을 보면서도 느끼지만 한 가정의 아이들이 이런저런 사연으로 그 영혼들이 병들어가는 것에 주목한다. 본의 아니게 ‘그런 사람들’이 곁에 있고 나로 하여금 저들을 두고 기도하며 저들의 사연을 같이 나누게 하신다.

 

오늘 본문은 그에 따른 하나님의 명징한 태도를 알려준다. “그 때에 그들이 여호와께 부르짖을지라도 응답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의 행위가 악했던 만큼 그들 앞에 얼굴을 가리시리라(4).” 이와 같은 말씀에 두려워할 줄 아는 자가 복이다. 내가 은연중에 좋아하고 막연하지만 귀하다고 여기는 집사님 내외가 있다. 저들은 교회 안에서 교제를 이루어 결혼을 하였다. 아이를 임신하고 일정부분 태아에서 자라서 생명을 갖추었을 때, 아이에게 선천적으로 기형인 것을 알았다. 낙태수술을 하기에는 아이의 생명이 이미 형성되었고 저들은 믿음으로 낳았다. 아니나 다를까 아이는 날 때부터 지금까지 스스로 운신을 못한다. 몸은 뒤틀려서 목에 관을 끼우고 옆구리에 호수를 달아 음식을 제공하고 숨을 고르게 한다. 이를 위해 저들 부부는 평생을 기여하고 있다.

 

우리들 판단으로는 미련한 것 같으나 그로 인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는 부부의 사명에 감명한다. 이런저런 자기 의견이 있어 이들 사연을 듣고 판단들 하겠으나 모친은 간호사이고 부친은 사관학교 출신으로 자신들 나름의 지식과 판단으로 앞날을 살아갈 거였다. 이미 알면서도 저들은 그 또한 하나님이 주신, 맡기신 사명임을 받아들였고 아이를 낳아 오늘에 이르기까지 십 수 년을 책임지고 있다. 그로 인해 눈물짓고 매일 교회로 올라와 기도한다. 아이는 수시로 응급실에 달려가고 그때마다 부모의 마음은 억장이 무너진다. 그리하여 저들 삶은 송두리째 멈춰선 것 같고 심지어는 그들 부모형제들 역시 아이의 존재를 쉬쉬하며 외면하며 살아왔다. 그런 가운데 나는 저들이 출산 직전에 알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을 인정하는 마음으로 이를 받아들였다는 데서 놀랐다. 여태 몰랐던 사실로 그간 그저 안타까웠던 마음이 존경과 경외감이 동시에 새로워졌다. 나는 그러지 못했을 것이다!

 

다윗이 한낱 시므이 따위의 조롱과 욕설에도 하나님을 인정하였던 대목을 기억한다. “다윗과 그의 추종자들이 길을 갈 때에 시므이는 산비탈로 따라가면서 저주하고 그를 향하여 돌을 던지며 먼지를 날리더라(삼하 16:13).” 아무리 아들 압살롬에게 쫓겨 도망가는 신세이나 듣도 보도 못한 잡놈 같은 이의 조롱에 대항할 힘도 없는 게 아니었다. 당연히 다윗의 심복들이 나서서 저를 죽이자고 할 때 “왕이 이르되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그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 하고(10).”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그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 곧 이는 여호와를 인정하는 절정이다.

 

우린 저마다 두 집사의 출산 전 판단에 대해 ‘스루야의 아들들’ 같이 뭐라 자기 의견이나 생각이 있을 것이다. 그 말이 옳다. 그 생각이 합리적이다. 오히려 마땅한 일이다. 나는 얼마 전에 그런 사실을 알고는 저들의 결정에 존경과 경의의 마음이 들었다. 나 같았으면? 하고 생각하면 그리 못할 일이다. 그리고 아이가 어느새 중학교 2학년의 나이가 되기까지, 십 수 년을 어떻게 살아왔는지 곁에서 보았다. 우리 가족들과 같이 명절을 쇠고 때마다 같이 했던 것은 그들 부모들 역시 아이의 존재로 인해 외면하고 부정하였기 때문이었다. 나는 오늘 본문에서 치리자나 재판장은 이와 같은 자세여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까지 확대하는 것이다. 단순히 자기 개인의 양심과 법리에 따라 판단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경외하는 마음으로가 우선이다. 그런 그들이 오히려 굴림하고 자기만족으로 치리하고 재판한다면, ‘그 때에 그들 앞에 얼굴을 가리우시리라.’ 하시는 주의 결의가 두렵다.

 

나로 두렵게 하는 구절의 말씀이다.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3).” 더는 기회가 없다. 회개도 용서도 용납될 수 없는 시점이 온다. 하루 전만이라도, 죽기 직전에라도 기회는 있었다. 모든 산 자의 숭고함은 아직 회개하고 돌이켜 주를 구주로 영접할 수 있는 기회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 말씀도 ‘주의 얼굴을 가리우시리라.’ 하는, ‘응답지 아니하시고’와 병행하는 이 표현은 하나님께서 ‘저런 지도자들의 간구’를 외면하실 것을 뜻한다. 하나님의 외면과 무응답이 두려움으로 서늘하게 느껴지는 게 신앙이다.

 

그저 농담으로나 들리면, 남의 이야기로나 들리면 희망이 없다. 한 아이의 미래를 놓고 생각할 때 그 엄마는 종종 자신도 곧 나이 들어 운신이 어려운 노인이 되거나 심지어는 죽을 텐데… 하면서 오늘의 자식이 제 구실을 못하는 것에 걱정이 많다. 그러니 형제에게 그 책임을 맡길 것인가, 나라의 어떤 시설에 아이의 장래를 두고 갈 것인가? 그런 가운데도 여전히 ‘나 홀로 신앙’으로 자기 마음에 내키는 대로 ‘믿는 자’라 여기며 사는 것에 더러는 화가 또한 불안이 나를 억누르지 못하게 한다. 같이 와서 함께 주의 이름을 부르며, 주신 이가 여호와시면 모든 걸 책임지실 이도 여호와 하나님이신 것을 인정하는 신앙으로 살기를. 이를 놓고 십 년 가까이 기도하는데도 요지부동이다. 차라리 안 믿는 자였으면 더욱 소망이 있겠다!

 

보면 다들 자기 판단과 자기 기준이 있어서, 신앙의 오해가 그 어떤 죄악보다 무섭다는 생각을 한다. 모두는 자기 판단과 기준으로 사는 것이겠으나 앞서 주를 경외함이란 ‘아는 것’이다. 말씀은 이에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그러므로 인생을 놓고 볼 때 누가 먼저 살아서 이를 알았겠나? 저마다 각자 자신의 날을 처음 사는 것이라, 나이마다 생전 처음이다보니 “(우리는 어제부터 있었을 뿐이라 우리는 아는 것이 없으며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와 같으니라)(욥 8:9).” 그러니 그저 남들 산 날을 보고 그런가보다 할 뿐인데, 그걸 마치 확신하고 자신은 살아본 자처럼 앞날을 확신하는 일이란 얼마나 어리석은가?

 

그러므로 지혜는 이르기를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슬기로운 자의 지혜는 자기의 길을 아는 것이라도 미련한 자의 어리석음은 속이는 것이니라(잠 9:10, 14:8).” 저마다 한 생을 살면서 누가 알았겠나? 그리하여 오늘 우리에게 말씀이 있는 것이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9:24).” 오늘도 이처럼 말씀 앞에 앉아 주를 더욱 알기를,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 6:6).” 하신 데 따른 이 믿음의 자세로 살게 하시기를.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하나니 이는 그들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눅 8:10).”

 

오늘 우리가 저들보다 복에 복을 받으며 사는 것은 ‘아는 데’ 있다. 우리가 예수를 알고, 힘써 더욱 예수를 알고자 하는 데서 참된 삶은 채워진다.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히 3:1).” 하여 ‘공의의 법규’ 곧 하나님의 뜻을 알면서도 이를 저버리고 사는 일보다 두려운 게 또 있을까? 세상은 본래 ‘선을 미워하고, 악을 좋아한다.’ 그래야 잘 산다. 자신의 이익을 먼저 구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마음을 뒤로 하고 세상을 먼저 사랑하면서 사는 일은 ‘악을 좋아한다.’ 그들은 자신을 위해 즐거워하며, 그러한 만족을 위해 어떤 원칙도 무시한다. 기꺼이 잔인하며, 자기들의 권력 아래 있는 자에게 가혹하게 굴 수 있다.

 

있는 것들이 더 무섭다는 말, 저들은 공감할 수 없는 무덤덤함이 저들로 용감하게 한다. 긍휼을 기대하는 자를 멀리한다. 얼마든지 야만스럽게 약탈하고, 삯군 목자처럼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면 기꺼이 양 무리를 버린다. 먹이는 대신 잡아먹는다! “인자야 너는 이스라엘 목자들에게 예언하라 그들 곧 목자들에게 예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자기만 먹는 이스라엘 목자들은 화 있을진저 목자들이 양 떼를 먹이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냐(겔 34:2).” 에이, 설마! 하면서도 우린 저마다 그러고 산다. 은연중에 갑질이고 자신도 모르는 때에 불의의 일에 동조한다. 가령 일련의 재판을 보면서 ‘기억나지 않는다.’는 저들의 공통된 대답이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된다. 그야말로 기억에 남을 정도도 아닌 ‘정의’에 대해 저들에게 그 의미를 물은들? 저들에게 ‘공의’란 자신들의 유익이 전부인 것을? 그렇게 오늘 본문은 한탄하듯 외친다.

 

“그들의 우두머리들은 뇌물을 위하여 재판하며 그들의 제사장은 삯을 위하여 교훈하며 그들의 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점을 치면서도 여호와를 의뢰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시지 아니하냐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는도다(미 3:11).” 그 결과는 고스란히 백성들의 몫으로 남겨진다. “이러므로 너희로 말미암아 시온은 갈아엎은 밭이 되고 예루살렘은 무더기가 되고 성전의 산은 수풀의 높은 곳이 되리라(12).” 하긴 오늘의 개혁이란 어제의 부패가 남겨준 공훈이기도 하겠다.

 

엄연히 성경은 이르시길,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리를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리를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다 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에서 섬기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고전 9:12-14).” 어느 집사 내외의 결단과 그 인생의 고단한 현실과 자식의 인내로 온 교회가 기도한다. 하나가 되어 서로를 위한다. 주의 종을 섬기며 교회를 우선하여 말씀으로 선다. 일정 부분 저 교회의 구심점이 되었다. 나는 요즘 나의 연약한 데서 주의 강함이 나온다는 말씀을 새로운 시각으로 자주 묵상하곤 한다. 이로써 더욱 읊조리며 주께 아뢰는 기도이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시 23:1-3).

 

이를 인정할 때,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4).

 

그리하여,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5-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