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하현. 2026. 5. 1. 05:55

 

곧 많은 이방 사람들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올라가서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의 도를 가지고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니라 우리가 그의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라

미 4:2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만군의 여호와께서 곧 영광의 왕이시로다 (셀라)

시 24:9-10

 

 

때가 이르면 서로가 만난다. 자신들의 밀린 이야기 속에서 잊고 지내오던 하나님의 역사를 회상한다. 이를 부정하거나 인정해야 할 때가 온다. 더불어 하나님을 모르던 자들이 돌아온다. 곁에서 보고 듣던 이들이 주를 찬양하는데 예전에 알던 이들은 외면한다. 무시하면서 자신들이 살아왔던 생활의 반동으로 돌아가려 한다. 그때에 “만민이 각각 자기의 신의 이름을 의지하여 행하되 오직 우리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영원히 행하리로다(5).” 그렇듯 선택해야 할 때가 이르렀다. 더는 물러설 곳이 없는 지점에서나 부르짖을 것인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그 날에는 내가 저는 자를 모으며 쫓겨난 자와 내가 환난 받게 한 자를 모아 발을 저는 자는 남은 백성이 되게 하며 멀리 쫓겨났던 자들이 강한 나라가 되게 하고 나 여호와가 시온 산에서 이제부터 영원까지 그들을 다스리리라 하셨나니 너 양 떼의 망대요 딸 시온의 산이여 이전 권능 곧 딸 예루살렘의 나라가 네게로 돌아오리라(6-8).”

 

그리하여 오늘 우리의 어려움, 어떤 슬픔으로 인하여 주를 바라고 기억하는 것이 복이었다. 저마다의 인생 말일에 이르러서는 ‘여호와의 전의 산이 산들의 꼭대기에 굳게 서’ 있는 것을 볼 것이다. “끝날에 이르러는 여호와의 전의 산이 산들의 꼭대기에 굳게 서며 작은 산들 위에 뛰어나고 민족들이 그리로 몰려갈 것이라(1).” 이는 한정이 없는 먼 미래 같으나 ‘여호와의 날’은 다다를 것이고, 그 ‘마지막 날들에는’ 볼 것이다. “이 모든 일이 네게 임하여 환난을 당하다가 끝날에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그의 말씀을 청종하리니 네 하나님 여호와는 자비하신 하나님이심이라 그가 너를 버리지 아니하시며 너를 멸하지 아니하시며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잊지 아니하시리라(신 4:30-31).”

 

부디 그날에 잊고 있다 외면하지 않기를. 누가 말하길 앞으로 더 큰 일, 살아오면서 겪었던 그 어떤 일보다 강한 날이 찾아올 것이라 짐작한다고 했다. 나는 그것이 다른 사람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비로소 스스로의 일로 고통당하는 때가 이를 것이라고 했다. 누구는 조금씩 기억을 잃어가며 왜곡한다. 누구는 생식기의 문제로 수치심을 호소한다. 누구는 사지육신이 부자연스러워지면서 느낀다. 모든 생은 저마다 그 끝에 이르러서, “구름이 땅을 덮음 같이 내 백성 이스라엘을 치러 오리라 곡아 끝 날에 내가 너를 이끌어다가 내 땅을 치게 하리니 이는 내가 너로 말미암아 이방 사람의 눈 앞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어 그들이 다 나를 알게 하려 함이라(겔 38:16).” 자신의 의지대로 할 수 없는 곳에서 알게 될 것이다.

 

이를 보면서 우리는 예전에 잊고 지냈던 저마다의 신앙을 더듬어 찾을 것이다. 누구의 사연에서 혹은 자신의 비현실적인 문제 가운데서, “그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돌아와서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와 그들의 왕 다윗을 찾고 마지막 날에는 여호와를 경외하므로 여호와와 그의 은총으로 나아가리라(호 3:5).” 이는 단순히 당대의 배경인 앗수르의 포로 상태에서의 귀환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부르던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질 하나님의 구원에 대하여 회상할 것이다. 곧 ‘여호와의 전의 산’이 있던 바로 그 시절, 그 기억의 지점에서 시온을 발견한다.

 

“밭들을 탐하여 빼앗고 집들을 탐하여 차지하니 그들이 남자와 그의 집과 사람과 그의 산업을 강탈하도다(미 2:2).” 곧 우리가 잊고 사는 동안 잃어버린 영혼의 자락이 놓였다. “너희 야곱의 족속아 어찌 이르기를 여호와의 영이 성급하시다 하겠느냐 그의 행위가 이러하시다 하겠느냐 나의 말이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유익하지 아니하냐(7).” 저마다 그때에는 아직 나이가 어떠한데… 할 일이 많이 남았는데… 하면서 두고 온 시간들을 서러워할 것이다. 그러나 ‘이곳’은 여호와께서 임재하시며 현존하시는 산이다. 바로 오늘,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피차’ 앞서 자신의 ‘성전이 파괴되었음을 선언했던 것’을 후회하게 될 것이다.

 

그렇듯 우리는 자신들이 두고 온 시온, 작은 산들의 꼭대기에 서서 후회하게 된다. 우리에게 임하셨던 말씀이 시온에서 나올 것이란 사실을,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이란 사실을 그때서야 기억하게 된다. 여기서 우리의 ‘시온’은 ‘여호와의 전이 있던, 여호와의 산’이다. 누구는 죽을 뻔하였던 그때이고, 누구는 홀로 버려진 듯 외로움에 치를 떨던 그때이다. 기억은 잔인하게 스스로를 보호하려 망각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러므로 다시 오늘,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의 날에 산 자의 입에서 주를 인정하게 된다. 그렇게 우리의 ‘시온’은 곧 여호와의 임재와 현존을 뜻한다. 어떤 계기로든지 오늘 우리가 다시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을 때가 남은 기회이다.

 

곧 오리라,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함이니라(합 2:14).” 그런 가운데 자신은 동떨어져 여전히 외면하고 섰을 때, 열국들은 시온에서 흘러나오는 여호와의 말씀을 간절히 사모하고 있는 것에 놀랄 것이다. 열국은 그때에 여호와의 말씀으로 인해 완전히 변화될 것인데, 자신들은 어리둥절하여 여전히 주저한다. 그들은 오직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 살게 될 것이며 죄와 사망의 길을 걷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도를 따른 여호와의 길을 걷게 될 것이란 사실을 두고 망설인다. 나중에, 아직은, 에이 설마… 하면서들 ‘농담으로나 듣는다.’ 당장은 때가 아니라는 생각으로 저마다의 고집으로 완고하다.

 

그리하여 ‘말일’에 모든 열국이 모여 ‘시온’은 세상의 이치와 원리로 통하는 곳이 아니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마치 우연처럼 여겨져 어쩌다 그리 된 줄 아는 그때에 하나님의 손길은 여러 의미로 가까웠다.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사람과 또는 상황으로 나를 보호하시고 지켜주시고 계셨다. 이를 인정하기 위해 더 큰 세파가 오기를 기다려야 하는 인생은 불행하다. 기어이 장자를 잃고 애곡하는 바로와 애굽인들의 찢어지는 가슴이 그러했을까? 결국은 자식들이 눈앞에서 죽임을 당하고, 이를 보고 난 뒤 눈이 뽑혀 포로로 끌려갔던 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의 심정이 그러했을까?

 

여호와는 시온에서 온 우주의 주권자가 누구인지 비로소 알게 될 때가 온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치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가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사 11:6-10).” 결국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더는 모르겠다, 몰랐다, 나중에… 하면서 외면하지 못할 것이다.

 

그때에는 “그러므로 보라 내가 그를 타일러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하고 거기서 비로소 그의 포도원을 그에게 주고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니 그가 거기서 응대하기를 어렸을 때와 애굽 땅에서 올라오던 날과 같이 하리라(호 2:14-15).” 하실 것인데 그럼에도 ‘혹시나’ 하고 다른 길을 찾고 있는 데 대하여 말씀은 외쳐 부른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그 때에 파종하는 자가 곡식 추수하는 자의 뒤를 이으며 포도를 밟는 자가 씨 뿌리는 자의 뒤를 이으며 산들은 단 포도주를 흘리며 작은 산들은 녹으리라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이 사로잡힌 것을 돌이키리니 그들이 황폐한 성읍을 건축하여 거주하며 포도원들을 가꾸고 그 포도주를 마시며 과원들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리라 내가 그들을 그들의 땅에 심으리니 그들이 내가 준 땅에서 다시 뽑히지 아니하리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암 9:13-15).”

 

나는 이를 알고부터 자처하여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로도 족하였다. 세례요한의 심정으로 외쳐, 전하였으나 공허하게 흩어져 허공으로 사라지는 말일지라도 나는 권하여야 했다. 같이 가자, 하고 손을 내밀어야 했다. 무색하게 외면당하고 내민 손이 허공을 휘저을 뿐이라 해도… 어쩌면 그때의 심정도 그러했을까? 목사고시를 두 번 떨어졌는데 그 이유가 인성검사에서 부적합한 자로 나오자 상담전공의 면접관 목사님이 그래도 다시 하실 것인가? 하고 물었을 때 대답하였다. ‘저에게 이젠 남은 길이 없습니다. 돌아갈 곳이 없습니다. 또 떨어지고 다시 떨어져야 한데도 괜찮습니다. 다시 그렇게 또 하면 됩니다.’ 내가 한 이 말이 기억에 남는 것은 그때 그 목사님의 눈빛 때문이다. 애처로움 같은 아니 경이로움 같은, 내 안에 그와 같은 심경으로 내주하신 성령을 마주한듯한 눈빛이었다. 나는 다만 단순했고 무식했다.

 

이후에 거듭되는 오늘까지의 사역이란 게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 같이 지나가고 스쳐가는 사람들에게 흩어져서 사라지는 것이라 해도… 어제도 그러한 심정으로 누구와 깊은 대화를 나누었다. ‘깊은 대화’는 깊은 기억 속에 숨겨져 있던 자신의 시온, 그때의 하나님의 산에 서게 하였다. 어느 지점에서 울컥, 눈물이 그렁그렁 맺힐 때에 그것이 단지 그리움이었는지 그때는 느꼈을 벅찬 감사와 감격이었는지 나는 모른다. 다만 분명히 알 것은 오늘, 오늘이라 일컫는 바로 이 날의 만남으로 우리의 대화이고, 권함과 주저함의 사이에 있는 막역함일지도 모른다. 주께 향한 마음으로 어디쯤에서 흘리고 온 것일까? 문득 저 뒤 또는 앞에서 누군가 해주었을 법한 목소리,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너희가 각각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로 서로 초대하리라 하셨느니라(슥 3:10).”

 

오늘 여기 미가 선지자가 전하고 있는, “각 사람이 자기 포도나무 아래와 자기 무화과나무 아래에 앉을 것이라 그들을 두렵게 할 자가 없으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의 입이 이같이 말씀하셨음이라(미 4:4).” 하신 데서 우린 잊고 살았던 주를 기억할 것이다. 아직은 그럴 수 있을 때가 복이다. 나의 ‘87학번’ 후에 찾아왔던 ‘97학번’과 ‘09학번’의 사이에서 ‘~했더라면’ 하는 후회가 또 미련이 밀려들 때면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는다. 나는 복이 참 많은 사람이다. 이렇듯 나의 날들이 오늘은 주를 바랄 수 있어서 말이다. 오늘, 이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의 날에 나는 그것이 후회로든지 미련으로든지 약속이 변치 않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인정하며 서있다. 그러므로 “내가 그들로 나 여호와를 의지하여 견고하게 하리니 그들이 내 이름으로 행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슥 10:12).” 하심을 붙들고 안도한다.

 

하여,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하는 말씀에서 더는 미련도 슬픔도 내려놓곤 하는 것이다. 내가 결국 주의 것이어서 다행이다. 참 다행이다. “딸 시온이여 해산하는 여인처럼 힘들여 낳을지어다 이제 네가 성읍에서 나가서 들에 거주하며 또 바벨론까지 이르러 거기서 구원을 얻으리니 여호와께서 거기서 너를 네 원수들의 손에서 속량하여 내시리라(미 4:10).” 더는 나의 고단한 인생으로 가쁜 숨을 몰아쉬지 않아도 된다. 오늘 미가는 그리 전하고 있다. “이제 많은 이방 사람들이 모여서 너를 치며 이르기를 시온이 더럽게 되며 그것을 우리 눈으로 바라보기를 원하노라 하거니와 그들이 여호와의 뜻을 알지 못하며 그의 계획을 깨닫지 못한 것이라.” 당장은 아직 남은 일이 있는 듯하여 저는 또 나중으로 미루려하나, “여호와께서 곡식 단을 타작 마당에 모음 같이 그들을 모으셨나니 딸 시온이여 일어나서 칠지어다 내가 네 뿔을 무쇠 같게 하며 네 굽을 놋 같게 하리니 네가 여러 백성을 쳐서 깨뜨릴 것이라 네가 그들의 탈취물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며 그들의 재물을 온 땅의 주께 돌리리라(11-13).”

 

이와 같은 말씀에서 새 힘을 얻는다. 새 언약으로 선다. 주를 바란다. 남들은 이 작은 교회를 일반적인 교회라 여겨주지 않는다 해도, 그래서 모두가 흩어지는 바람처럼 스쳐갈 뿐이라 해도, 나는 다시금 주께 묻기를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눅 7:19-20).” 하는 심정으로 회의와 갈등이 나를 쓰러뜨리려 할 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먹은 사람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22).”

 

더러는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그 심령이 병들고 아파 지쳐 있는 자들이 온다. 길게는 서너 달, 짧게는 한 번의 만남으로 스쳐가듯 자신들의 사연을 쏟아내고 간다. 저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나면 나는 대체 무얼 하고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으로, ‘이 길이 맞나?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고 묻고 싶은 심정으로 주 앞에 엎드릴 때, “그들이 놀라며 괴로움과 슬픔에 사로잡혀 해산이 임박한 여자 같이 고통하며 서로 보고 놀라며 얼굴이 불꽃 같으리로다(사 13:8).” 이는, “만민이 각각 자기의 신의 이름을 의지하여 행하되 오직 우리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영원히 행하리로다(미 4:5).”

 

그때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그 날에는 내가 저는 자를 모으며 쫓겨난 자와 내가 환난 받게 한 자를 모아 발을 저는 자는 남은 백성이 되게 하며 멀리 쫓겨났던 자들이 강한 나라가 되게 하고 나 여호와가 시온 산에서 이제부터 영원까지 그들을 다스리리라 하셨나니 너 양 떼의 망대요 딸 시온의 산이여 이전 권능 곧 딸 예루살렘의 나라가 네게로 돌아오리라(6-8).” 하심을 두고 오늘도 다시 주 앞에 앉아 새 힘을 얻는다. 그러할 때,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시 24:1).

 

그러므로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만군의 여호와께서 곧 영광의 왕이시로다 (셀라)

(7-10).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