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여호와의 친밀하심이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있음이여

하현. 2026. 5. 2. 05:40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미 5:2

 

여호와의 친밀하심이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있음이여 그의 언약을 그들에게 보이시리로다

시 25:14

 

 

저마다의 사연을 가슴 깊은 곳에 숨기고 산다. 거짓은 이를 덮기 위해 여러 장의 거짓을 덧입힌다. 죄는 그렇듯 우리 영혼을 탁하게 한다. 그런 가운데 우리의 의지로는 이와 같은 죄를 감당할 수 없어서 메시야가 오셨다. 오늘 미가 선지자는 이를 은유적으로 예언하고 있다(1-6). 이에 따른 근거로는 시온의 굴욕과 슬픔이 상달되었다. “딸 군대여 너는 떼를 모을지어다 그들이 우리를 에워쌌으니 막대기로 이스라엘 재판자의 뺨을 치리로다(1).” 유대는 포로 이전부터 치욕스럽게 살았다. 이를 두고 “딸 군대여!” 하고 수치를 극대화한다. “너는 떼를 모을지어다!” 이 말은 이제 군대를 동원하고 “딸”에게 죄악을 행하라고 하는 시온의 원수들에 맞설 것을 명령한다.

 

“딸 군대여” 하는 것은 예루살렘이 실제 전쟁을 치르고 있는 도시임을 나타낸다. ‘그들이 막대기로 이스라엘 재판자의 뺨을 치리로다.’ 하는 다음 내용으로 그 수치와 치욕을 어찌 상상할 수 있게 하였다. 재판자는 사법적인 기능을 표현한다. 미가는 ‘재판자’라 표현하는 이유는 ‘막대기’와 연결지어 그 치욕을 한층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곧 왕이 뺨을 맞는데 가축을 다루듯 막대기로 그 뺨을 맞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때에 ‘군대를 거느린 시온의 친구들’이 와서 ‘딸’에게 최선을 다해 보호할 것을 상징하는 부름으로 시작한다. 그들로 ‘떼지어 모이게’ 하라는 것은 역설적으로 아무 소용없을 것을 암시한다. 왜냐하면 예언자가 예루살렘의 거주민의 이름으로 ‘그가 우리를 에워쌌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앗수르의 왕이 그랬고, 바벨론의 왕이 그랬다. 그런 가운데 유다는 저들 스스로를 더는 어찌 수비할 수 있을지를 모른다. 그리하여 원수들은 득세하여 ‘이스라엘의 재판자’를 치되 ‘막대기로 뺨을 쳐서’ 그들을 멸시하고 그들의 위엄을 무시하게 할 것이다.

 

사실 앞서 이스라엘의 재판자들은 타락하여 뇌물을 받아먹는다. “그들의 우두머리들은 뇌물을 위하여 재판하며 그들의 제사장은 삯을 위하여 교훈하며 그들의 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점을 치면서도 여호와를 의뢰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시지 아니하냐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는도다(3:11).” 곧 이 오늘의 치욕이 예견되어 있던 일인 것을 알게 한다. 권세를 남용하였고, 점을 치면서 여호와를 의뢰하지 않은 결과이다. 아니 스스로 이르길 “점을 치면서도 여호와를 의뢰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시지 아니하냐?” 하고 자부하였다.

 

더러 안 믿는 자들보다 믿는다고 하면서 자기 방식으로 믿고 신념으로 굳어진 자들이 완고한 것을 느낀다. 엊그제 다녀간 이는 자신의 믿음을 강조하면서도 주일성수에 얽매이고 말씀의 가르침에 순종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여행을 꿈꾸고 어디 순례자의 길을 더 나이 들기 전에 걸을 것을 바라였다. 뭐라 대꾸하고 반박할 여지가 없는 것은 그리 믿고 그리 하겠다고 하는 자기 신념으로 완고하여서이다. 어떤 이는 화상이나 영상으로 ‘보는 예배’를 선호한다. 굳이 교회에서 성도의 관계를 거부한다. 누군 또 헌금에 부정적이다. 그의 주장으로 큰 교회의 방만한 운영을 탓한다.

 

그런 식으로 자기 나름의 “점을 치면서도” 한다는 소리가 자신은 “여호와를 의뢰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시지 아니하냐?” 하고 확신하였다. 여기 뺨을 맞는 재판자도 같다. 그럼에도 그들의 재판자들이 이처럼 굴욕을 당함은 큰 환난이다. 어떤 이는 이것이 군대가(즉 로마 군대) 예루살렘을 에워 쌀 이유가 된다고 생각했다. 유대인은 ‘이스라엘의 재판자의 뺨을 칠’ 것이요, 즉 그들이 ‘우리에게 선지자 노릇을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며 예수께 물었던 것과 같다. “이르되 그리스도야 우리에게 선지자 노릇을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더라(마 26:68).”

 

뺨을 때려 이스라엘의 재판자 메시야에게 모욕을 끼칠 것을 동시에 암시하고 있는 오늘의 첫 구절이다. 로마인에 의해서가 아니라 갈대아인에 의해 예루살렘이 포위될 것이다. 시드기야 왕과 다윗 족속의 방백들에게 행해진 모욕에서 우선 이 말씀은 이루어졌다. 다윗의 족속이 낮아지며 그 강한 족속의 방패가 손쉽게 빼앗겨서, 기름 부음 받은 일이 없는 자들처럼 되었다. 그래서 다윗과 그의 족속과 맺은 하나님의 계약이 폐기되었다는 생각과 유혹을 받는 백성에게 용기를 더하기 위해 그 계약은 다시 세워지고, 그 족속의 영예가 회복되고 증진되어 메시야와 그의 왕국에 대한 찬란한 예언을 덧붙이고 있다.

 

그러나 주께서

주의 기름 부음 받은 자에게 노하사

물리치셔서 버리셨으며

주의 종의 언약을 미워하사

그의 관을 땅에 던져 욕되게 하셨으며

그의 모든 울타리를 파괴하시며

그 요새를 무너뜨리셨으므로

길로 지나가는 자들에게 다 탈취를 당하며

그의 이웃에게 욕을 당하나이다

(시 89:38-41).

 

이처럼 시편은 의기소침하게 주를 향해 아뢰었다. 그와 같은 때에 오늘 본문은 새로운 사실을 알린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미 5:2).” 이는 이스라엘의 왕, 재판자가 침략자로부터 수치를 당하는 것과 달리 더 이상 패배도 수치도 당하지 않게 할 것을 약속한다. 이스라엘을 온전하게 다스릴 자이신 참된 왕, 메시야의 탄생을 예고한다. 이를 신약은 그대로 인용하여 말씀이 이루어지셨음을 알게 하였다.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마 2:6).” 이와 같이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하고 부를 때, ‘에브라다’는 ‘떡집’을 뜻하는 ‘베들레헴’의 옛 이름이다. ‘열매를 많이 맺음’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특별히 미가 선지자는 베들레헴의 옛 이름 ‘에브라다’를 첨가한 것은 베들레헴이 스불론의 베들레헴과 다른 지명인 것을 우선 명시하고자 하였다(수 19:15). 이는 ‘다윗의 집’을 가리키는 것임을 시사하기 위함이다. 미가는 베들레헴의 옛 이름을 통해 다윗의 집에서 나온 ‘메시야 왕’을 암시하고 있다. 하고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에서 ‘작을지라도’는 크기가 작은 것을 의미하기보다 ‘천하고 보잘것없는 상태’를 나타낸다.

 

거기에는 그들을 주관하는

작은 베냐민과 유다의 고관과 그들의 무리와

스불론의 고관과 납달리의 고관이 있도다

(시 68:27).

 

곧 메시야가 이처럼 천한 곳에서 태어난다는 사실은 메시야이신 예수께서 비천한 자들을 높이신다는 것을 동시에 함축하기 위한 것이다.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 손으로 보내셨도다(눅 1:52-53).” 이에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하는 표현으로 화자(話者)는 여호와 하나님이신 것을 미가는 문학적으로 잘 표현하고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 곧 메시야가 천한 베들레헴에서 ‘자신에게로 나온다’고 말씀하심으로 하나님과 메시야의 밀접한 관계를 암시한다. 그렇게 해서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 하고 단정적으로 근본을 밝힌다. ‘그의 근본’은 문자적으로 ‘그의 나옴’은 하는 것으로, 메시야의 기원을 나타낸다. 여기서 또 ‘상고’와 ‘태초’는 영원성을 내포하면서 이스라엘의 초기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것을 알리기 위함이다.

 

곧 메시야는 그의 근본이 상고에, 태초에 있는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로 ‘그분’이시니, ‘영원의 날’로부터이다. 이는 하나님과 같이 영원부터 계셨던 현존하시는 분이다. ‘그의 나오심’은 태양으로부터 빛이 나오는 것처럼 상고에 태초에부터 있었고 있어 왔다는 것을 알게 한다. 곧 그리스도의 영원한 출생을 우리의 언어와 상식으로 이해하고 서술하기 어렵다. 이 모든 세계 이전에부터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그 하나님의 아들로 나오심이라, 이 예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속해야 한다. 다른 사람에게는 해당될 수 없다. 지금은 과거가 된, 예언자가 말했고 이제 우리가 읽는 이 본문에서 ‘그의 나오심’이 읽혀질 수 있는 것은 여전하고 실제적인 현실로 오늘도 같다는 것이다.

 

이에,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시 90:2).

 

이를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하는 표현과 같이 또한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는 예수님의 진술과도 연결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요 8:58).” 곧 이 ‘나오심’은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이심을 동시에 또한 문학적으로 연관시킨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 8:3).” 이를 바탕으로 요한 사도는 아름답게 서술하였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 1:1-3).” 그리고 오늘도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14).” 하는 데서 우리는 이와 같이 말씀으로 날마다 매순간 메시야를 맞이한다.

 

저는 중보자로서 그의 직능을 알리신다. 교회의 왕,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로 예정되었다. 그는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 노릇 하실 것’이다.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눅 1:32-33).” 이는 유대인들은 주 예수께서 전혀 이스라엘의 통치자가 아니시므로 오히려 이스라엘이 그를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하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메시야’가 되실 수 없다고 반대한다. 그래서 그를 죽음에 넘겨주었다. 자신들을 다스리시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요 18:36).” 곧 오늘 우리가 믿는 주의 나라는 이 땅의 대한민국도 미국도 아니다. 그가 다스릴 나라는 영적 이스라엘, ‘신앙의 아브라함’과 ‘기도의 야곱’의 뒤를 좇는 모든 자, 곧 우리들과 같이 ‘약속의 자녀들’이다. 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그는 성령과 은혜로 다스리신다. 이 사람들의 모임에서 그는 말씀과 계시로써 다스리신다. 그러므로 교회는 단지 사람들의 모임 그 이상의 존재 가치가 있다. “성경에 이르기를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로 또 다윗이 살던 마을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며(요 7:42).” 오늘 이 말씀은 이루어졌다. 이는 ‘때가 찰 때 그는 한 여인으로부터 태어날 것이다.’ 하는 말씀으로다. “그러므로 여인이 해산하기까지 그들을 붙여 두시겠고 그 후에는 그의 형제 가운데에 남은 자가 이스라엘 자손에게로 돌아오리니(미 5:3).”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슬픔과 괴로움에 맡겨 두고, 오랫동안 약속되고 기대됐던 구원을 ‘임신한 여인이 해산하기까지’ 즉 메시야의 어머니가 되실 축복된 동정녀가 지정된 장소인 베들레헴에서 그를 해산할 때까지 이 역사는 되새겨졌다. 이는 “그가 여호와의 능력과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의 위엄을 의지하고 서서 목축하니 그들이 거주할 것이라 이제 그가 창대하여 땅 끝까지 미치리라(4).” 하신 말씀이 강화한다. 곧 우리가 결국 주 앞에 굴복하기까지, ‘해산해야 할 여인이 해산할 때까지’ 기다려야 했던 이 긴 굴종의 시간은 우리 죄의 무게 같다. 스스로들 완고하였던 시절이다. 그러는 동안 ‘그는 그들을 불러 두시리라.’ 곧 하나님의 구속은 그들을 낳도록 지정된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듣다 보면 아직 멀었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때가 있다. 부모가 일생을 고난으로 시달리며 살았고 오늘도 뜻하지 않은 채무에 시달리며 살았던 것을 다 알면서, 자신에게 주어졌던 그 시련의 시간을 파란만장하였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주를 바라는 데 있어서는 낭만을 꿈꾸듯 ‘점치며 여호와가 함께 하신다’고 스스로들 자부한다. 굴종의 시간이 더해져 수치와 모멸의 시간을 살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하는 데야 어쩌겠나? 기다려야한다. 이는 ‘여인이 해산할 때까지’ 저마다의 삶의 질고와 고난은 스스로들 그렇게 길게 끌어가는 것이다. 애가 더는 일반학교에서 생활할 수 없는 지경으로 특수학교를 가야 할 판인데도, 어떤 이유로 장애판정을 받고 스스로의 생활이 어렵게 되었는데도, 아직은 때가 아닌가? 괴로움으로 몸부림치면서도 ‘예전에 믿었던 기억’으로 그 정도에서 족하다고 한다.

 

오늘 말씀은 이에 ‘돌아오리라.’ 하시며 소망을 더한다. “그러므로 여인이 해산하기까지 그들을 붙여 두시겠고 그 후에는 그의 형제 가운데에 남은 자가 이스라엘 자손에게로 돌아오리니(3).” 그리하여 결국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날에 이르러는 내가 네 군마를 네 가운데에서 멸절하며 네 병거를 부수며 네 땅의 성읍들을 멸하며 네 모든 견고한 성을 무너뜨릴 것이며 내가 또 복술을 네 손에서 끊으리니 네게 다시는 점쟁이가 없게 될 것이며 내가 네가 새긴 우상과 주상을 너희 가운데에서 멸절하리니 네가 네 손으로 만든 것을 다시는 섬기지 아니하리라(10-13).”

 

곧 오늘 우리가 의지하고 살고 있는 군마와 병거를 부수고, 의탁하는 성읍과 성을 무너뜨리고, 주의 이름 대신 주절거리는 ‘복술’과 ‘점쟁이’가 없게 할 것이다. 자신이 배운 학식 혹은 기술이나 이를 기반으로 얻은 재물 또는 자산으로 여전히 하나님을 대신하고 있는 ‘우상과 주상’을 멸절하실 것이다. 그리하여 유대 민족의 ‘남은 자’가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인 이스라엘의 참 자손의 마음으로 돌아오기까지…

 

이는,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말 4:6).”

 

하여 오늘 말씀은 메시야에 대한 소망의 말씀이면서 동시에 심판의 경고이다.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하셨으며…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히 2:11-12, 17).”

 

오늘도 시편으로 아뢰어 기도하기를,

 

여호와여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나이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의지하였사오니

나를 부끄럽지 않게 하시고

나의 원수들이 나를 이겨 개가를 부르지 못하게 하소서

주를 바라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려니와

까닭 없이 속이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리이다

(시 25:1-3).

 

그러므로 오늘도,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보이시고

주의 길을 내게 가르치소서

주의 진리로 나를 지도하시고 교훈하소서

주는 내 구원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종일 주를 기다리나이다

(4-5).

 

할 때에,

 

여호와여 내 젊은 시절의 죄와 허물을

기억하지 마시고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주께서 나를 기억하시되 주의 선하심으로 하옵소서

여호와는 선하시고 정직하시니 그러므로

그의 도로 죄인들을 교훈하시리로다

(7-8).

 

이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 누구냐

그가 택할 길을 그에게 가르치시리로다

그의 영혼은 평안히 살고

그의 자손은 땅을 상속하리로다

여호와의 친밀하심이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있음이여

그의 언약을 그들에게 보이시리로다

(12-1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