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

하현. 2026. 5. 3. 05:5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미 6:8

 

여호와여 내가 주께서 계신 집과 주의 영광이 머무는 곳을 사랑하오니 내 영혼을 죄인과 함께, 내 생명을 살인자와 함께 거두지 마소서

시 26:8-9

 

 

오늘 말씀은 우리의 타락과 부당함을 두고 하나님이 변론하기를 제안하신다. 이는 인격적인 관계로의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대화-변론을 요구하시는 것이다. 이에 말씀에 경청하기를 촉구하신다.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의 역사를 회고하며 그럼에도 우리의 타락이 어떤 이유인지 물으신다. 그러면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소원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은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8).” 하고 물으신다.

 

이러한 말씀 앞에서 우리는 양심의 가책을 느껴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 삶에 이루신 일, “내가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내어 종 노릇 하는 집에서 속량하였고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을 네 앞에 보냈느니라(4).” 살면서 사는 동안에 주가 함께 하셨던 것을 찾아내게 한다. 이를 돌아보며 오늘의 자신을 살피라고 하신다. 그럼에도 당시의 악한 행실들, 우상을 숭배하는 것은 물론 인신 제사로 자식들을 불에 던진 것을 상기시키신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6-7).”

 

이렇듯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있어 이방의 제사로 물든 우리의 일상을 돌아보게 한다. 예수를 바로 알자. 우리가 믿는 이 믿음의 본질과 특성을 바로 알자. 요즘은 그런 생각을 자주한다. 몇몇과 상담할 때 저들의 공통점은 자신들이 선을 찾는 것이다. 나름은 수고하여서 성실하게 살았음을 강조하거나 그것을 기반으로 자신들이 바라보는 교회와 하나님을 힐문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오늘도 자신들이 교회를 피하고 주를 멀리하는 이유를 정당화한다. 이러한 생각은 그만큼 세상 문화와 인식에 잠식당한 것이다. 그러다 다소 호의적인 대화로 조금 더 나이 들면 그때, 이제는 무얼 위해서라도, 어떤 일 때문에… 하는 조건을 들어 다시 다녀볼까? 열심히 믿어볼까? 하는 식이다.

 

그러면서 정작 우리의 의식이 얼마나 우상 숭배 문화에 깊이 물들어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 본문도 그런 의미로 저들 역시 이방의 우상 숭배처럼 하나님을 섬긴다고 섬겼다. 미가 선지자는 이러한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를 조목조목 제시한다. 곧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을 말이다(8). 우리의 신앙으로 3대 강령이라 할 수 있는 것은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는 것으로,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6-18).” 하는 바울 사도의 설교를 되새긴다.

 

기쁨의 조건을 요구하는 세상에서 기쁠 이유가 없는데도 ‘항상’ 기뻐해야 하고, 심지어는 기쁠 수 없는 데도 기쁨을 나타내야 한다. 우리의 신앙이란 이를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우리 삶에 주의 임재를 인정한다. 이를 위하여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게 필수다. 쉬지 말고는 마치 호흡을 멈추지 않는 것 같이 자나 깨나, 걸을 때나 앉을 때나, 누구의 말을 듣거나 자신이 말할 때도 모두 포함한다. 그렇듯 ‘쉬지 말고’ 곧 자신의 의지에 의해 필수적으로 기도할 때 ‘항상’이 가능해져 기뻐할 수 있고, 이러한 기쁨으로 감사가 나온다. 이 또한 ‘범사에’ 감사한 것으로 감사할 수 있어서 감사하는 조건적인 게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감사다.

 

일가족을 잃고도 ‘내 영혼 평안해’ 하고 찬송할 수 있었던 것도 그것이다. 늘 불안으로 자살충동에 시달릴 정도인데도 ‘샘물과 같은 보혈의 은혜’를 찬송하였다. 이는 우리의 ‘항상’과 ‘쉬지 말고’와 ‘범사에’에 따른 기쁨과 기도와 감사의 결실이다. 때로는 인위적으로라도 의식하고 그리하는 게 신앙이고 믿음으로의 승리이겠다. 당시 선민 이스라엘은 율법에는 불순종할지라도 하나님께 제사만은 드려야 한다는 미신적인 사고방식으로 제물을 바치는 데 있어 자식까지 불에 던지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이라 생각하였다. 이방의 신을 섬기는 미개한 신앙의 우상 숭배를 따라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참 신앙의 인격적인 관계란 ‘쉬지 말고’ 기도하는 대화에서 우선한다.

 

사실 이방의 우상 숭배자들은 보편적으로 잘 지키고, 따르고, 형식적으로라도 제사를 지내야 한다는 의식이 팽배했다. 지금도 이것은 여러 갈래로 파생되어 ‘순례의 길’을 떠난다거나 나름의 ‘고행’을 자처하듯 선행을 구사하기도 한다. 예배와 형식에 철저하여 매우 의식적이고 제례적인 행사로 주일을 성수하려 하기도 한다. 일상에서도 ‘~해야 ~해주실 것’이라는 사고는 팽배하다. 그러니 저들의 하나님은 너무 조건적이고 자기만족적인 이기적인 존재가 된다. 어느 순간 그러한 행위가 부담스럽다. 드려지는 헌금이 계산적으로 의식되고, 교회에서 하는 봉사와 헌신이 서로를 의식하며 하나님의 요구로 여겨져서 기쁘지가 않다. 누구의 슬픔을 나누거나 자신의 처지를 서로 나누는 일에는 거부감이 강하다.

 

이에 사무엘 선지자는 엄연히 강조하신 바,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삼상 15:22.23).” 이는 오늘날에도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는 불순종하면서 주일날에 예배만은 참석해야 할 것 같고, 헌금만은 적당히 하면서 서로의 친절한 교제로 타인의 관계를 유지하기만 해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이라 여긴다. 그러나 자연이 하나님의 섭리에 순복하듯 우리들도 하나님께 순복해야 한다.

 

순복이란 순순히 복종하는 것으로 이는 마치 주인의 생각을 아는 개와 같다. 앉아, 일어서, 기다려! 할 때 훈련된 개는 자신의 의지를 포기한다. 멋대로 굴던 욕구를 억제한다. 침을 질질 흘리면서도 고깃덩이를 앞에 두고도 기다려! 하는 주인의 손짓에 헉헉거리면서도 참는다. 이를 인격적인 관계라 할 수 없지만 우리의 의지란 그만큼 사랑을 갈구하고 주의 뜻에 복종하는 것이다. 이를 대단히 거부감을 가지고 비판하기도 하는데, 사실 우린 돈을 벌어 먹고 사는 문제에서는 더하다. 누군가를 사랑하면 더욱 심하다. 그러면서도 그러는 자신으로 기뻐한다. 사랑하는 이의 즐거움으로 나는 감사하다. 하다못해 내 뜻을 전혀 몰라주는 아이라 해도 아이가 기뻐하며 좋아할 때 우린 덩달아서 해맑게 기뻐한다.

 

그런 우리에게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대화 요청이다. “너희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는 일어나서 산을 향하여 변론하여 작은 산들이 네 목소리를 듣게 하라 하셨나니(1).” 여기서 산은 우리가 의지하고 등 비비며 사는 터전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대화하시기 전에 그 변론의 증인으로 ‘산과 땅 곧 자연’을 호명하심은 자연도 심지어 산과 땅 무생물까지도 자신들을 지으신 이를 알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자연을 증인으로 호출하신 것은 그들에게 실제 하나님의 변론을 듣도록 하기 위한 게 아니라, 저 자연의 순종을 통해서라도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인 우리들이 좀 알라는 것이다. 우리의 불순종과 하나님의 은혜에 있어 우리의 부당한 행실에 대하여 자연은 이성적인 게 아니지만 철저하게 순복하는 것을 근거로 삼으신다.

 

그리하여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시 19:1-4).

 

곧 이 모든 자연의 이치가 저절로, 어쩌다 그리 된 게 아닌 것을 안 믿는 과학자들도 다 안다. 어떤 힘, 우리 인간의 한계 그 이상의 어떤 원리가 작용하여 온 우주가 질서를 유지하고 삼라만상이 서로 공존하는 것을 인정한다. 이는 막연하게 우리가 알 수 없는 어떤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개입이다. 임재와 섭리 가운데 이루어지고 있는 현상이다. 이에 오늘 본문은 앞서 저들을 증인으로 세우시는 것이다. “너희 산들과 땅의 견고한 지대들아 너희는 여호와의 변론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과 변론하시며 이스라엘과 변론하실 것이라(2).” 이를 놀라워하며 “그러므로 너는 네 허리를 동이고 일어나 내가 네게 명령한 바를 다 그들에게 말하라 그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그들 앞에서 두려움을 당하지 않게 하리라(렘 1:17).” 하시는 주의 음성을 듣는다.

 

곧 “사로잡힌 네 민족에게로 가서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겔 3:11).” 하여 나는 때로 이러한 심정으로 권하고 또 바란다. 싫어하고 부담스러워할 것도 안다. 그러나 우리의 만남은 그저 한낱 어쩌다 마주친 관계가 아니다. 이를 주도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다. 설령 우리의 실수가 또는 죄악으로 주의 뜻을 저버리게 한다 해도 하나님은 이를 선으로 바꾸어서 찾아오신다. 즉 우리가 선을 찾아나서는 게 아니다. 심지어는 주께서 부활하신 후에도 먼저 아셨다.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마 26:32).”

 

그럼에도 오늘을 살면서 우리의 생각은 늘 ‘여기’에 머물러, ‘지금’으로 우선하려 한다. 그러나 성경의 영웅들은 이내 알았다. 하여 소망을 고난 위에 두었다. 하여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이로써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히 11:40).” 당장, 지금, 여기에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기 전에는 여전히 순종이 어렵다. 가장 쉬운 게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인데 이걸 그렇게 힘들어하는 것은 싫은 것이다. 더 좋고 귀한 게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저마다 그 이유로 미루거나 거절한다.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권하면 오지 않는다.

 

다들 자기 이야기만 들어달란 것처럼 호응해주고 지지해주기만을 요구한다. 주의 뜻을 바란다고 하면서도 자신들이 원하는 바, 이방의 문화에서 습득한 것으로 하나님을 섬기려한다. 제사를 미신적으로 먼저 할 때 사울 왕과 같이 선지자를 기다리지 못하고 자신이 나서서 제사를 드리려 한다. 당장이 급한 것이다. 그러니 어찌 행해야 할까 하고 여호와의 뜻을 알고자 하는 데 있어서도 영매를 찾아가 죽은 사무엘이라도 불러올려 들어야겠다는 것이다. 그렇게 부자는 ‘나사로라 이름하는 거지’를 보내서라도 아직 살아서 기회가 있는 남은 가족들에게 지옥의 실상을 알리려 했다. 이미 저들 곁에는 전할 자들이 있다. 그럼에도 안 듣는 이들에게 죽은 귀신이 찾아간다고 해서 들을 리 없다.

 

마찬가지로 권함을 싫어하면서 스스로는 순례의 길을 떠나는 상상을 한다. 고행으로 선을 찾으려는 인간의 무지다. 예수를 앞에 모시고도 주를 찾고, 변명을 늘어놓고, 가정법으로 일관하며 자신들의 요구에 도취된다. 아,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사 1:4).” 이것이 오늘 우리의 실상이다. 이에 오늘 선지자는 주의 뜻을 외친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 6:8).” 하심은 “여호와께서 성읍을 향하여 외쳐 부르시나니 지혜는 주의 이름을 경외함이니라 너희는 매가 예비되었나니 그것을 정하신 이가 누구인지 들을지니라(9).”

 

곧 우리가 주를 경외함으로 모든 허물과 실수는 의미 없어진다. 그러할 때 우리에게 새롭게 부여된 놀라운 사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롬 8:15).” 이 놀라운 은총을 받았음에도 여전히 우리 스스로 뭔가 단단히 해야 할 줄 알고 기를 쓰고 산다고 살면서 바친다고 바치는 삶을 다하는데… “네가 먹어도 배부르지 못하고 항상 속이 빌 것이며 네가 감추어도 보존되지 못하겠고 보존된 것은 내가 칼에 붙일 것이며 네가 씨를 뿌려도 추수하지 못할 것이며 감람 열매를 밟아도 기름을 네 몸에 바르지 못할 것이며 포도를 밟아도 술을 마시지 못하리라(미 6:14-15).”

 

오늘 우리의 덧없음과 공허의 원인은 간단하다. 기억하라는 것이다. “너는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속량하셨음을 기억하라 그것으로 말미암아 내가 오늘 이같이 네게 명령하노라(신 15:15).” 하심을 다시 한 번 되새기며,

 

내가 나의 완전함에 행하였사오며

흔들리지 아니하고 여호와를 의지하였사오니

여호와여 나를 판단하소서

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내 양심을 단련하소서

(시 26:1-2).

 

주가 더하시는 이 한 날에,

 

주의 인자하심이 내 목전에 있나이다

내가 주의 진리 중에 행하여

허망한 사람과 같이 앉지 아니하였사오니

간사한 자와 동행하지도 아니하리이다

(3-4).

 

그리하여,

 

여호와여 내가 주께서 계신 집과

주의 영광이 머무는 곳을 사랑하오니

내 영혼을 죄인과 함께,

내 생명을 살인자와 함께 거두지 마소서

(8-9).

 

하여,

 

나는 나의 완전함에 행하오리니

나를 속량하시고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 발이 평탄한 데에 섰사오니 무리 가운데에서

여호와를 송축하리이다

(11-1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