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하현. 2026. 5. 4. 05:53

 

오직 나는 여호와를 우러러보며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나니 나의 하나님이 나에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

미 7:7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시 27:4

 

 

우리는 저마다의 죄악 중에 산다는 것을 오늘 본문 가운데서 새삼 느끼게 된다. 곧 “너희는 이웃을 믿지 말며 친구를 의지하지 말며 네 품에 누운 여인에게라도 네 입의 문을 지킬지어다 아들이 아버지를 멸시하며 딸이 어머니를 대적하며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대적하리니 사람의 원수가 곧 자기의 집안 사람이리로다(5-6).” 흔히 사랑의 관계로 가족을 우선하지만 때로는 남만 못할 때도 있다. 더하여 이웃이나 친구라 하면 이 또한 우리 의지의 대상일 텐데 결국은 이로 인하여 실패하기 십상이다.

 

미가는 때로 히스기야 왕의 시대에 활동했던 선지자로 보기 어렵다. 이후 악정을 행하였던 므낫세의 통치 기간 중에 이루어진 예언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것이 아하스의 통치 때, 또는 히스기야를 통하여 이루어진 개혁 이전에 히스기야가 통치하기 시작할 때 전하였던 말씀으로 여겨진다. 어쩌면 히스기야 왕의 전성 시대, 즉 부패를 일소하고 최선을 다해 주를 바라며 개혁을 이루갈 때 말이다. 추측하면 그런 시대에도 악이 많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가운데 오늘 본문의 외침이 절박하게 들린다.

 

“재앙이로다 나여 나는 여름 과일을 딴 후와 포도를 거둔 후 같아서 먹을 포도송이가 없으며 내 마음에 사모하는 처음 익은 무화과가 없도다(1).”

 

‘재앙이로다.’ 하는 것은 탄식하는 말로 “내가 악하면 화가 있을 것이오며 내가 의로울지라도 머리를 들지 못하는 것은 내 속에 부끄러움이 가득하고 내 환난을 내 눈이 보기 때문이니이다(욥 10:15).” 하는 욥의 탄식으로도 느껴진다. 오늘 본문은 분명히 타락하고 부패한 이스라엘에게 임할 재앙에 대한 탄식이다. 그렇게 ‘내 마음에 사모하는’ 것이 없다. 선이 세상에서 끊어졌고 정직한 자가 사라진 것 같다. 그때의 ‘마음’은 이러한 절망을 느끼는 우리 영혼을 가리킨다. 상한 영혼이란 그런 것이다. 미가 선지자가 간절히 사모하고 찾던 것은 ‘무화과 열매’ 곧 ‘당시의 의로운 자들’이었다.

 

“경건한 자가 세상에서 끊어졌고 정직한 자가 사람들 가운데 없도다 무리가 다 피를 흘리려고 매복하며 각기 그물로 형제를 잡으려 하고(2).” 하는 이와 같은 현상으로 미가는 소돔과 고모라의 현상을 상상하였는지도 모른다. 멸망 직전에 의인을 찾던 아브라함의 심정도 그러하지 않았을까? 또한 예레미야 선지자의 탄식과 같이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렘 5:1).” 하실 때에 우리는 조급하게 주의 백성을 찾는다. 그러나 “내가 말하기를 이 무리는 비천하고 어리석은 것뿐이라 여호와의 길, 자기 하나님의 법을 알지 못하니 내가 지도자들에게 가서 그들에게 말하리라 그들은 여호와의 길, 자기 하나님의 법을 안다 하였더니 그들도 일제히 멍에를 꺾고 결박을 끊은지라(4-5).”

 

더러는 힘에 겨워 그 힘든 마음-상한 심령을 안고 찾아온다. 그간의 사정을 듣다가 같이 운다. 감정에 겨워 여러 말이 벅차다. 그럼에도 돌이켜 주를 바라자, 예수를 깊이 생각하자, 하고 권하면 서먹해진다. 신기할 정도로 다들 나중으로 미룬다. 그것은 당장의 문제에 함몰되어서이다. 문제는 문제에 빠진 채 영혼의 문제는 나중으로 치부하는 것이다. 이에 에스겔 선지자 또한 “이 땅을 위하여 성을 쌓으며 성 무너진 데를 막아 서서 나로 하여금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내가 그 가운데에서 찾다가 찾지 못하였으므로 내가 내 분노를 그들 위에 쏟으며 내 진노의 불로 멸하여 그들 행위대로 그들 머리에 보응하였느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겔 22:30-31).”

 

시쳇말로 갈 데까지 가야 하는 것일까? 당장에 늙으신 부모가 수억 원의 빚이 있다. 늙으신 부모의 기력으로는 하는 장사가 잘 된다 해도 더는 갚을 여력이 없다. 그 사연이야 여러 차례 가족들로부터 사기를 당하고 뜯기고 버려져서 생겨난 부채라 할 수 있어도 어찌 원수처럼 달려들기도 어렵다. 다들 이제 일흔을 훌쩍 넘긴 연세인데도 장사판을 놓지 못하는 것이라, 사는 게 지옥이라. 찾아와 이런 사연을 말하다 어찌 감당이 안 되는 현실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그런 가운데 자신의 잃어버린 신앙에 대하여는 배부른 소리 같아서 들으려 하지 않는다. 그저 다들 사느라 급급하여 당장의 일로 눈에 안 보이는 하나님보다 현실적인 문제로 끙끙거린다.

 

이러한 때에 ‘재앙이로다, 나여!’ 하고 자신에게 외치듯 포문을 연다. 미가 선지자는 자신이 현재 그토록 타락한 시대에 살게 된 운명을 애통해한다. 선한 사람이 어쩔 수 없이 당하게 되는 파멸을 탓한다. 이와 같은 마음은 누구라도 들 수 있다. 다윗도 ‘내가 메섹에 거했던 것이 재앙이로다!’ 하고 부르짖은 바 있다. 그렇듯 세상은 억울하고 더러는 원망스럽다. “내게 재앙이로다 나의 어머니여 어머니께서 나를 온 세계에 다투는 자와 싸우는 자를 만날 자로 낳으셨도다 내가 꾸어 주지도 아니하였고 사람이 내게 꾸이지도 아니하였건마는 다 나를 저주하는도다(렘 15:10).”

 

이는 엄연한 재앙이다.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재앙이로다, 비상한 재앙이로다 볼지어다 그것이 왔도다(겔 7:5).” 하는 말씀으로 연관 지어 오늘의 탄식을 다시 들어보면, “재앙이로다 나여 나는 여름 과일을 딴 후와 포도를 거둔 후 같아서 먹을 포도송이가 없으며 내 마음에 사모하는 처음 익은 무화과가 없도다(미 7:1).” 그만큼 선한 사람을 찾기가 힘들다. 여기서 선이란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며 우선하는 자들이다. 분명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하셨으나 그럴 수 없다.

 

장사하는 이로서 주일을 포기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이번에 아들이 직장에 들어가면서 특히 세무사들의 5월은 가장 바쁜 달이라 이 회사는 아예 백만 원의 인센티브를 더 주고 5월을 시작하였다. 그런 가운데 아들은 그럼에도 주일 오전에 예배를 드리고 올 것이라고 통보하였고, 신입이 그러는 것에 어찌 받아들였는지 협상이 이루어져 계약서를 썼다고 했다. 사실 요즘은 주일에 교회 가는 게 그리 대수로운 일이 아닌 듯하다. 누구는 어디로 이동하면서 ‘줌’으로 영상을 통해 드리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거리가 좀 멀어서, 어색해서, 다른 일정이 있어서 등등 각각의 처지가 있겠으나 우리의 ‘먼저와 나중’은 혼재된 지 오래다. 예수님은 엄연히 먼저! 하고 그 전제를 분명히 하셨으나 현실에 따라 우리는 이를 여러 형태로 달리 적용한다. 또한 그래도 되는 인식이 서로를 허용한다.

 

누구와의 대화에서 ‘그 정도라도’ 같이 하자 권하면서도 나는 마음이 좀 어렵다. 그러저러한 저의 사정으로 내가 이러는 게 맞아? 하는 회의가 들면서도 단호할 수 없는 게 현실이라! 주변에 하나님을 온전하게 구하고 찾고 섬기는 이가 드물다. 이것이 같은 신앙 안에서 치욕으로 느껴져야 옳다. ‘선인이 세상에서 끊겼다.’ 우리가 사는 현실은 점점 더 살기 좋은 여건을 갖추는데 바로 그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선을 찾을 수 없다. 그것은 ‘선한 땅’ 이며, ‘정직한 땅’이었다. 곧 저가 어릴 때 또는 젊을 때는 주를 사모하며 교회에서 생활 가운데서 주를 찬송하는 자이었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현실은 어쩌면 당연하다.

 

“악인은 은총을 입을지라도 의를 배우지 아니하며 정직한 자의 땅에서 불의를 행하고 여호와의 위엄을 돌아보지 아니하는도다(사 26:10).”

 

어쩌다 그리 된 것일까? 이를 베드로는 롯을 통하여 당대의 악인들 사이에서 저가 어쩌다 피폐한 영혼으로 살았는지를 밝힌 적이 있다. “무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로 말미암아 고통 당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이는 이 의인이 그들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이 상함이라)(벧후 2:7-8).” 곧 우리가 섞여 사는 세상에서 저들처럼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여기서 롯을 의인이라 표현하지 않았다면 성경 어디에서도 롯을 의인으로, 선한 사람이었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 없다. 아브라함의 조카로 롯은 말씀을 따라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는 삼촌 아브라함의 동행이 되었다. 이후 그는 분란의 씨로 그의 종들과 아브람의 종들이 다투었다. 서로 나뉘는데 있어 저는 먼저 보기에 좋은 소돔과 고모라 멸망의 성에 가까운 곳을 선택했다.

 

여하튼 이로 인하여 “(이는 이 의인이 그들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이 상함이라)” 하는 베드로 사도의 진술이 없었다면 롯을 의인이라 상상도 하기 어려울 거였다. 어쩌다 저는 의인이었으나 자신의 의를 나타내지 못하고 살았던 것일까? 오늘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받은 의인으로 주변의 가족이나 이웃은 물론 남들 앞에서 하나님을 나타내지 못하고 사는 이유가 드러난다. 곧 이는 “그들 중에 거하여” 곧 멸망의 성, 악의가 가득한 사람들로 인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살았다. 우리는 어쩔 수 없는 사회적 동물과 같아서 어울리는 이들로 자신도 변해간다. 이에 “그 의로운 심령이 상함이라.” 하는 데서 알 수 있다.

 

누구와 상담을 할 때 저의 사연들 가운데 악의와 불의가 곁에 있음을 느낀다. 본의 아니게,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고들 하나 우리에게는 언제나 하나님이 함께 하셨다. 이를 인정하면 어떤 경우에도 변명의 여지가 없다. 누구는 중2 때 아이들과 축구를 하다가 얼굴에 강한 공을 맞으면서 두 눈의 시력을 잃었다. 그런 가운데서 저는 훗날 UN에서 세계인권위원으로 일했고, 미국의 부시 대통령 당시에는 미합중국 대통령의 자문역할로 보좌했다. 숱한 고비가 왜 없었겠나만 저에게는 하나님을 우선하여 찾는 마음이 더 강하였다.

 

또 어느 선교사의 아내로 세 아이를 이끌고 동남아 오지 마을로 들어갔던 여인은 그곳에 정착하고 첫 아이를 풍토병으로 잃었다. 10여 년을 생활하는 동안 두 아이도 무질서한 교통사고로 죽었다. 그때마다의 심정이나 상황은 가히 잔인하였을 것을 안다. 이내 선교사인 남편마저 폐렴으로 죽었다. 본국의 교단에서는 귀국을 권하였으나 저이는 홀로 남아 주가 맡기신 사명을 이어갔다. 그렇게 중년의 나이가 되고 어느 날 낯선 불량배들에게 끌려다니며 몇 날 며칠을 강간과 폭력을 당하고 구사일생으로 풀려났다. 그야말로 그의 인생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다시 몸을 추스르고 남은 사역을 감당하며 자서전을 썼다. 그 글에서 그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찬송하였다. 자신의 비참한 현실이 자신으로 하여금 더욱 더 주를 의지하게 하였다고 적었다.

 

아주 특별하고 기이할 정도의 신앙인 것 같으나, 우리는 저마다의 악의 구렁텅이에서 산다. 그래서 누구는 주를 떠나 상한 심령으로 살고, 그래서도 누구는 주를 더욱 의지하며 산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누구는 이러하고 누구는 저러한데 이를 염두에 두고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 “오직 나는 여호와를 우러러보며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나니 나의 하나님이 나에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미 7:7).” 하는 의지는 내가 가까이하는 이보다, 심지어는 가족들보다 주를 먼저 사랑하고 구하는 일이었다. “너희는 이웃을 믿지 말며 친구를 의지하지 말며 네 품에 누운 여인에게라도 네 입의 문을 지킬지어다 아들이 아버지를 멸시하며 딸이 어머니를 대적하며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대적하리니 사람의 원수가 곧 자기의 집안 사람이리로다(5-6).” 성경이 다소 거친 듯하나,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가 굳센 데서 떨어질까 삼가라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벧후 3:17-18).”

 

설령 그것이 지금으로서는 우선이라 여기는 가족이거나 사랑하는 자녀라 해도, 사람과 사람 사이 그렇게 선하고 의롭지만은 않다. 누가 안 믿는 가족들을 두고 자신만 천국가면 과연 무엇으로 행복하겠는가? 하고 자신도 교회를 떠나고 신앙을 저버리고 살았는데… 채 십 수 년이나 됐을까? 저는 이혼을 하였고 두 자식은 성인이 되어 각자의 삶으로 등한히 산다. 그러니 우리 생의 속절없음에 대하여 결국은 살아보고 판단할 일이라고 하면 오늘 말씀이 가히 너무하다 싶다. 하나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마 10:36).” 하신 덴 다 이유가 있었다. 선인으로 사는 일이란 경건한 자로 사는 것인데, 이는 하나님께 대해 경건하고, 사람에게 동정하며, 모두를 긍휼히 여기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다. 그런데 이들이 끊겼다. 찾아보기 드물다.

 

오늘 본문의 한탄이 우리 현실이지 않은가?

 

여호와여 도우소서

경건한 자가 끊어지며 충실한 자들이

인생 중에 없어지나이다

(시 12:1).

 

점점 이제 누가 책으로도 썼듯이 ‘AI에게 묻고, 성령으로 답한다’는 얼토당토않은 시절을 맞이하고 있다. 가족이 붕괴된 지 오래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격적인 관계는 낭만이 된 것도 오래다. ‘아담의 부재’가 ‘하와의 타락’을 가져왔고, ‘아버지의 부재’가 가족의 와해로 나타나고 있다. 더는 아버지의 권위가 사라진 지 오래다. 존경과 경외는 찾기 어렵고 ‘친구 같은’ 부자지간의 관계라는 게 말이 좋지 가까운 남을 뜻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우린 서로를 탓하고 원망하다, 사람 대신 짐승을 가까이 하여 서로가 변형된 인격체로 공존한다. 개를 애처럼 유모차에 태우고 다니는 모습은 이제 흔하다. 더하여 로봇이 그나마 또 생명체로의 관계를 위협한다. 그런 가운데 미가의 기도가 절실하게 울린다.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 주께서는 죄악과 그 기업에 남은 자의 허물을 사유하시며 인애를 기뻐하시므로 진노를 오래 품지 아니하시나이다 다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18-19).”

 

하여서,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시 27:1).

 

다시 오늘도 주 앞에 나를 세우며,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4).

 

할 때에,

 

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의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의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높은 바위 위에 두시리로다

(5).

 

비록 생의 배면에서,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

(10).

 

그리하여,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가르치시고

내 원수를 생각하셔서 평탄한 길로 나를 인도하소서

 

너는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11, 1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