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자들을 아시느니라

하현. 2026. 5. 5. 05:54

 

여호와는 선하시며 환난 날에 산성이시라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자들을 아시느니라

나훔 1:7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오니 나의 반석이여 내게 귀를 막지 마소서 주께서 내게 잠잠하시면 내가 무덤에 내려가는 자와 같을까 하나이다

시 28:1

 

 

결국은 주의 백성이다. 모든 말씀은 주의 자녀들을 위한 것이다. 하나님의 관심은 오로지 선민에게 있다. 이에 “볼지어다 아름다운 소식을 알리고 화평을 전하는 자의 발이 산 위에 있도다 유다야 네 절기를 지키고 네 서원을 갚을지어다 악인이 진멸되었으니 그가 다시는 네 가운데로 통행하지 아니하리로다 하시니라(15).” 오늘 이 본문의 말씀이 니느웨를 겨냥한 것 같으나 실은 유다를 향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로써 말씀의 의도는 선명해진다. 이 말씀으로 시작한다.

 

곧 ‘원수’가 멸망했다는 ‘좋은 소식’을 가지고 있다. ‘볼지어다.’ 하고 주의를 환기시킨다. 구원 소식을 전하기 위해 우리로 주목하게 하신다.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하지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게 이르기를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 하라(사 40:9).”

 

누가 전화를 걸어 신앙상담을 원했다. 두 가지로 축약되는데 하나는 성령 충만을 어떻게 받느냐는 것이고, 하나는 방언을 꼭 해야 하냐는 것이었다. 무슨 일인가 하고 살폈더니 먼저는 누구를 전도하였는데, 저가 오래 되었는데도 전혀 그의 신앙에 변화가 없어 어떻게 하면 성령 충만을 받을 수 있는지를 물었다. 이는 우리의 구함이고 그로 인하여 기도하게 하시는 것으로 저의 여부와 상관없이 본인이 이미 그와 같은 줄로 안다고 대답하였다.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추상적으로 구하는 그런 내용이 아님을 강조했다. 일련의 그러한 마음이 성령이 더하시는 마음인 줄 안다고 말한 것이다.

 

방언에 대하여는 더하시는 이의 것으로 우리의 더 깊은 기도의 교제를 위한 것이다. 자신을 과시하거나 어떤 증표로 받게 되는 훈장이 아니라 ‘깊은 골방’과 같아서 하나님과의 내밀한 기도의 자리라고 설명하였다. 이를 구하는 이유가 무엇이든지 전적으로 개인적인 하나님과의 만남을 위한 것으로 주시는 이의 은사라 주실 수도 있고 안 주실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으로 더하고 덜할 것은 없어서 그 중심에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고자 하는 마음으로의 간구에 따른 것이겠다. 곧 방언 자체로는 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고 말하였다.

 

곧 우리의 사명은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로 사는 일이다. 우리 곁에 안 믿는 가족들이나 주변인들에게 이 복음을 전하는 일이란, 삶이다. 그 자체로 일상이다. 그러므로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하실 때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그 이상의 것으로 우리를 이끌어 올리신다. 그러므로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할 수 있다면 주가 맡기시는 이 사명으로 사는 것인데, ‘두려워하지 말고, 소리를 높여’ 뜻을 굽히지 않음으로 주의 백성들에게 이르기를,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 하라.’ 그리하여 아직 주 앞에 서지 못한 주의 자녀들로 돌아오게 할 수 있다. 이때의 우리 삶은 알리는 것이다. 조선시대의 봉화 같다.

 

이 “아름다운 소식을 알리고” 하는 것은 히브리어에서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를 의미한다. “말할 때에 제사장 아비아달의 아들 요나단이 오는지라 아도니야가 이르되 들어오라 너는 용사라 아름다운 소식을 가져오는도다(왕상 1:42).” 곧 우리의 일상은 사는 그 자체로 알리는 것으로, 우리의 존재가 곧 증거다. 그리 되어 누구와 있든, 어디에 있든, 일개 아무개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그 이상의 어떤 의미가 된다. 김춘수의 <꽃>과 같이 주의 이름을 부름으로 우린 그 자체로 어떤 의미가 되었다. ‘좋은 소식’ 뿐 아니라 ‘나쁜 소식’을 가지고 있는 자가 되기도 하나, 오늘 본문으로는 ‘약탈자를 전멸시키겠다.’는 소식으로 유다를 위한 좋은 소식이다.

 

하여 “화평을 전하는 자의 발이 산 위에 있도다.” 할 때 이 ‘화평’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하나님의 구속의 약속을 담고 있다.’ 이사야는 유독 이를 강조한 바 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사 9:6-7).” 저는 우리의 메시야 예수이심을 안다.

 

그의 “공의의 열매는 화평이요 공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라(32:17).” 전하고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53:5).” 하는 결정적인 말씀으로 화평을 정의한다. 또한 “산들이 떠나며 언덕들은 옮겨질지라도 나의 자비는 네게서 떠나지 아니하며 나의 화평의 언약은 흔들리지 아니하리라 너를 긍휼히 여기시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54:10).” 하신 약속의 말씀을 붙들게 하고,

 

“너희는 기쁨으로 나아가며 평안히 인도함을 받을 것이요 산들과 언덕들이 너희 앞에서 노래를 발하고 들의 모든 나무가 손뼉을 칠 것이며 잣나무는 가시나무를 대신하여 나며 화석류는 찔레를 대신하여 날 것이라 이것이 여호와의 기념이 되며 영영한 표징이 되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55:12-13).”

 

하신 데 따른 ‘놀라운 화평’을 전하였고, 이것으로 우리의 “입술의 열매를 창조하는 자 여호와가 말하노라 먼 데 있는 자에게든지 가까운 데 있는 자에게든지 평강이 있을지어다 평강이 있을지어다 내가 그를 고치리라 하셨느니라(57:19).” 하신 이 말씀으로 굳건하게 한다. 결국 이 한 구절(나 1:15)의 의미는 유다가 자유롭게 절기를 지킬 수 있고, 고난 받을 동안에 서원한 것을 지킬 수 있게 되리라는 소망과 기쁨을 준다. 이 말씀의 선포하는 대상이 큰 성읍, ‘니느웨’에 대한 중한 경고이다. 저들의 목에 달린 맷돌처럼 치명적이고 무거운 예언이다. 니느웨는 앗수르 나라의 수도이다. 요나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에 앞서 약 100년 전에 이 큰 성읍의 임박한 몰락을 예언했다. 그때는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를 했기 때문에 보류되었던 멸망이다.

 

니느웨 사람들은 악에서 돌이키는 것이 얼마나 자신들에게 큰 유익한가를 똑똑히 알았다. 그것이 그들의 성읍을 구했다. 그러나 다시 시간이 흘러 얼마 후에 그들은 더 악해졌다. ‘피의 성읍’이 되었다. ‘거짓과 도적으로 가득한 성읍’이 되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회개를 후회했다. 새삼 그때 그랬던 게 바보 같았을지 모른다. 이는 마치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과 같다.’ 다시 돌이켜 과거 그 어느 때보다 악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요나와 같은 선지자를 보내 하나님의 용서와 긍휼하심을 보였는데…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는 혹 이르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히 4:1).” 이와 같은 말씀으로 우리가 긴장해야 한다.

 

성령을 훼방하는 죄란 “누구든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가 되느니라 하시니(막 3:29).” 이미 요나를 보내 저들로 멸망을 유보하여 피할 수 있게 하셨는데 저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더욱 죄악 된 도시가 되었다. 이는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행 7:51).” 하심과 같이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이는 우리가 곧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 5:16-17).” 어쩌면 우리 안의 갈등과 회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런 가운데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6:8).” 그러므로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엡 4:30).” 하여 우리로 구별되게 하심이다. 그러므로 이를 아는 것 역시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요일 4:13).”

 

그렇게 이 예언을 보내, 이제 돌이킬 수 없는 그들의 재앙을 선고하게 되었다. 즉 우리가 살면서 사는 동안에 회개가 계속되지 않는다면 멸망의 유예도 계속되지 않을 것이다. 이를 전하는 나훔은 니느웨에 대한 중한 경고를 예견했다. 이는 ‘묵시의 책’이다. “니느웨에 대한 경고 곧 엘고스 사람 나훔의 묵시의 글이라(나 1:1).” 니느웨에 대한 것으로 ‘엘고스 사람 나훔’의 ‘묵시의 글’이라고 소개한다. ‘중한 경고’는 ‘목소리를 높이다.’ 하는 의미다.

 

“그 날에 그가 소리를 높여 이르기를 나는 고치는 자가 되지 아니하겠노라 내 집에는 양식도 없고 의복도 없으니 너희는 나를 백성의 통치자로 삼지 말라 하리라(사 3:7).” 하는 것 같이 예언자의 신탁을 소개할 때 쓰는 표현이다. “선지자 하박국이 묵시로 받은 경고라(합 1:1).” 하는 것과 “여호와의 말씀이 하드락 땅에 내리며 다메섹에 머물리니 사람들과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눈이 여호와를 우러러봄이니라(슥 9:1).” 할 때의 표현과도 같다.

 

나훔은 선지자로 ‘엘고스 사람’이라는 사실 외에 알려진 게 없다. 다만 나훔의 고향이 갈릴리의 어느 곳으로 추측했는데, 이에 대한 증거도 불분명하다. 그러나 이 예언의 말씀이 ‘엘고스 사람’ 나훔의 묵시의 글로 이미 앞서 니느웨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멸망을 면한 도시인데 “여호와는 질투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진노하시되 자기를 거스르는 자에게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자기를 대적하는 자에게 진노를 품으시며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권능이 크시며 벌 받을 자를 결코 내버려두지 아니하시느니라 여호와의 길은 회오리바람과 광풍에 있고 구름은 그의 발의 티끌이로다(나 1:2-3).” 하심으로 오늘의 이 모든 결과가 저들로 인한 것임을 분명히 한다.

 

곧 ‘여호와는 질투와 보복의 하나님이시다.’ 이 용어는 시내 산에서 계시하시던 하나님이 처음으로 사용하셨다.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출 20:5).” 하심으로 질투와 보복의 정당함을 알리셨다. 즉 “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임이니라(34:14).” 곧 이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의 언약 관계를 얼마나 우선하시는지를 알게 한다. 이를 전제하여 이스라엘에게 불신앙이나 외부의 위협이 있을 때 이 언약의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한 조치로 ‘하나님의 질투’의 속성이 발동한다.

 

이 질투의 속성은 가차 없음으로,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태울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히 10:27).” 하심으로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자기를 대적하는 자에게 진노를 품으시며’ 하고 주의 보복과 노하심의 정당함을 알게 한다. 흔히 우리가 아는 사랑과 인자와 긍휼과 자비와 온유의 하나님으로 대비를 이루는 ‘보복’은 회개하지 않는 자들에 대한 엄연한 심판의 결과를 뜻한다. 곧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언약 백성이기 때문에 여호와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서는 니느웨를 멸망시키는 것이 타당하다. 이를 오늘 본문은 가감 없다. “이제 네게 지운 그의 멍에를 내가 깨뜨리고 네 결박을 끊으리라(13).”

 

하여 다음 장으로 넘어가면서, “파괴하는 자가 너를 치러 올라왔나니 너는 산성을 지키며 길을 파수하며 네 허리를 견고히 묶고 네 힘을 크게 굳게 할지어다(2:1).” 하고 주의 백성들로 경계하게 한다. 곧 오늘 이 니느웨를 향한 ‘묵시의 글’은 우리 믿는 자들로 듣고 깨달아 알게 하려 하심이다. 주를 바라는 마음은 결코 막연한 게 아니어서, 우리로 이를 알게 하시기 위함이다. 어쩌면 그에 따른 니느웨는 교훈이다. 비유와 같다. 정작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가 저들의 멸망이 아니다. 바로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권능이 크시며 벌 받을 자를 결코 내버려두지 아니하시느니라 여호와의 길은 회오리바람과 광풍에 있고 구름은 그의 발의 티끌이로다(1:3).” 즉 상대적으로 드러난 하나님의 인자하심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뜻은 주의 자녀들로 향한다. 모든 관심이 그러하다. 이에 우리의 신앙 고백은 시내산에서 출발하여,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출 34:6).” 광야를 지나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인자가 많아 죄악과 허물을 사하시나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사하지 아니하시고 아버지의 죄악을 자식에게 갚아 삼사대까지 이르게 하리라 하셨나이다(민 14:18).” 이스라엘의 역사를 관통한다.

 

“거역하며 주께서 그들 가운데에서 행하신 기사를 기억하지 아니하고 목을 굳게 하며 패역하여 스스로 한 우두머리를 세우고 종 되었던 땅으로 돌아가고자 하였나이다 그러나 주께서는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시라 은혜로우시며 긍휼히 여기시며 더디 노하시며 인자가 풍부하시므로 그들을 버리지 아니하셨나이다(느 9:17).”

 

그러기를 오늘에 이르기까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주여 주는 긍휼히 여기시며

은혜를 베푸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와 진실이 풍성하신 하나님이시오니

 

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긍휼이 많으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크시도다

 

우리 주는 위대하시며 능력이 많으시며

그의 지혜가 무궁하시도다

(시 86:15, 103:8, 145:8, 147:5).

 

하여 오늘도 나는 산다. 살아서 주의 이름을 부르고 전한다.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주께서 혹시 마음과 뜻을 돌이키시고 그 뒤에 복을 내리사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소제와 전제를 드리게 하지 아니하실는지 누가 알겠느냐(욜 2:13-14).”

 

이에 본문은 “누가 능히 그의 분노 앞에 서며 누가 능히 그의 진노를 감당하랴 그의 진노가 불처럼 쏟아지니 그로 말미암아 바위들이 깨지는도다(나 1:6).” 하고 전하면서도 “여호와는 선하시며 환난 날에 산성이시라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자들을 아시느니라(7).” 하고 또한 소망도 더한다. 오늘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를 때, “이제 네게 지운 그의 멍에를 내가 깨뜨리고 네 결박을 끊으리라(13).” 하고 약속하신다. 이에 한 영혼을 돌이킬 수 있다면…. “볼지어다 아름다운 소식을 알리고 화평을 전하는 자의 발이 산 위에 있도다 유다야 네 절기를 지키고 네 서원을 갚을지어다 악인이 진멸되었으니 그가 다시는 네 가운데로 통행하지 아니하리로다 하시니라(15).”

 

하여 주께 구하기를,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오니

나의 반석이여 내게 귀를 막지 마소서

주께서 내게 잠잠하시면

내가 무덤에 내려가는 자와 같을까 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이시니

내 마음이 그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크게 기뻐하며

내 노래로 그를 찬송하리로다

(시 28:1, 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