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괴하는 자가 너를 치러 올라왔나니 너는 산성을 지키며 길을 파수하며 네 허리를 견고히 묶고 네 힘을 크게 굳게 할지어다
나훔 2:1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
시 29:11
작은 감사가 낙심을 막아낸다. 누가 어려운 중에도 감사할 것을 찾았다. 극심한 장애로 허리며 신장, 심장 등이 좋지 않아 차례로 수술을 하는데 있어 그 몸이 고달프다. 허리디스크 수술로 비뇨기과신경이 잘못되었다. 병원에서는 좀 더 지켜보자는데 가뜩이나 몸을 가누기 힘든 상황에서 기저귀를 차고 생활해야 하는 수치심으로 힘들다. 그 힘든 심경을 털어놓을 곳이 없어 전화를 했다. 누구에게 말하기도 민망하다며 두려움을 호소하였다. 이제 쉰 살인데 남은 날을 생각하다 울먹하였다. 그런 그에게 어떤 말로 위로하여야 할지, 그저 듣기만하다 작은 감사를 찾아간다. 하여,
진실로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시리이다
(시 76:10).
우리 안에 이는 어떤 노여움 또는 서러움이 우리로 힘들 게 할 때 우리 안에서 작은 감사를 찾는다면 주를 찬송하게 된다. 오늘 본문은 이에 따른 ‘니느웨에 대한 경고’다. 저들 니느웨에게 보내진 전쟁에 대한 경고가 들린다. “파괴하는 자가 너를 치러 올라왔나니 너는 산성을 지키며 길을 파수하며 네 허리를 견고히 묶고 네 힘을 크게 굳게 할지어다(1).” 이를 풀어보면 ‘네 주위를 돌아보라. 그리고 파괴하는 자가 너를 치러 올라온 것을 주목하라. 악명 높은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나라들을 쳐서 파하고, 이제 너를 쳐서 흩으리라.’ 하는 것이다. 바벨론은 ‘온 세상의 망치’로 쓰여 불리울 것이다.
“그 땅에 싸움의 소리와 큰 파멸이 있으리라 온 세계의 망치가 어찌 그리 꺾여 부서졌는고 바벨론이 어찌 그리 나라들 가운데에 황무지가 되었는고 바벨론아 내가 너를 잡으려고 올무를 놓았더니 네가 깨닫지 못하여 걸렸고 네가 여호와와 싸웠으므로 발각되어 잡혔도다(렘 50:22-24).”
니느웨에 대한 느부갓네살의 공격은 만민이 아는 대담하고 용맹스러운 것이었다. 훗날 저들 역시 그리 당할 것을 누가 알았을까? 이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주를 바라는 것이다. 이를 어찌 설명하여야 할까? 며칠 전 날씨가 좋지 않은 날, 어김없이 어디가 아팠고, 아픈 몸으로는 감사가 쉽지 않다. 아들은 어제 휴일인데도 출근을 했다가 어두운 표정으로 퇴근했다. 뭔가 불만족스런 표정이다. 딸애가 와 무심히 같이 TV를 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갔다. 소소한 일상 가운데 각자의 생각은 서로 다른 것을 바라고 사는지도 모른다. 이때 죄악 된 니느웨를 향한 경고문이 의아하다.
“파괴하는 자가 너를 치러 올라왔나니 너는 산성을 지키며 길을 파수하며 네 허리를 견고히 묶고 네 힘을 크게 굳게 할지어다.” 있는 그대로 읽어도 우리에게 유용하다. 우리의 파괴자가 수시로 올라온다. 자기 안에서 또는 외부에서 여러 요인이 작동한다. 이에 저들이 악할지라도, ‘너는 산성을 지키며 길을 파수하라.’ 하는 경고는 유용하다. 이를 위해 ‘네 허리를 견고히 묶고 네 힘을 크게 굳게 할지어다.’ 하심이 우리에게 향한다. 정작 니느웨는 이를 듣지 않을 것이다. 세계의 망치로 쓰인 바벨론도 자신들을 자부하느라 이런 경고는 귀에 들어올 리 없다.
여기서 ‘파괴하는 자’는 히브리어로 풀이하면 ‘승리의 왕’을 상징한다. 우리의 아집과 교만을 꺾는 일이면서 동시에 온전한 신앙을 흔들기도 할 것이다. 파괴자는 선과 악을 가리지 않고 밤과 낮을 구분하지 않는다. 이에 “보라 여호와께서 땅을 공허하게 하시며 황폐하게 하시며 지면을 뒤집어엎으시고 그 주민을 흩으시리니 백성과 제사장이 같을 것이며 종과 상전이 같을 것이며 여종과 여주인이 같을 것이며 사는 자와 파는 자가 같을 것이며 빌려 주는 자와 빌리는 자가 같을 것이며 이자를 받는 자와 이자를 내는 자가 같을 것이라(사 24:1-2).” 하심으로 이 모든 일이 어찌 됨인가, 하는 것을 우리는 짐작한다.
하나님이 일어나시니 원수들은 흩어지며
주를 미워하는 자들은 주 앞에서 도망하리이다
(시 68:1).
궁극적으로 승리자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시다. 우리를 파괴하는 것은 교만일 때 노엽고, 연단일 때 소망을 가져온다. 나의 아버지가 사랑하였고 이제는 내가 되뇌며 사랑하는 말씀으로,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하실 때 비로소 알 수 있다. 아프니까 아파서 우리는 주를 찾는다. 고달프고 어려워서 주의 이름을 부른다. 나는 누구와의 전화에서 할 수 있는 말이 없을 때 기도한다. 더러는 통화 가운데 같이 기도해도 되는지 묻고 전화기를 귀에 대고 눈을 감는다. 주의 이름을 부를 때,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5-6).”
하는 바울 사도의 설교가 생생하게 들리는 것 같다. 그의 죽음이 헛되지 않을 것은 우리로 ‘성령이 부은 바 된 마음’으로 살게 하기 때문이다. 하여 “또 주께서 이르시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것이니 내 법을 그들의 생각에 두고 그들의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게 백성이 되리라(히 8:10).” 나는 요즘 히브리서를 준비하고 설교하며 이와 같이 나의 마음에 기록하신 것, “나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게 백성이 되리라.” 하신 데 따른 예수 그리스도의 우월하심과 놀라운 사랑을 감격하곤 한다. 어려운 데 쉽고, 힘든데 견딜만한 것은 이 또한 내가 감당하게 두지 않으신다.
나는 이를 살면서 사는 동안에 자주 보았었다. 그때는 미처 알지 못하고 인정하지 않았더라도 지금은 점점 더 선명해진다. 자주 언급하였던 나의 ‘97학번으로의 편입’과 ‘09학번으로의 신대원’ 사이에는 나를 파괴하는 자가 기승을 부렸다. 부정적으로는 저가 나를 괴롭히는 자 같았으나 지금에서 생각하면 나를 살리고자 하는 시기였다. 모세로 도망쳐 미다안 광야에서 운둔하게 하신 시기 같이 그리하여 비로소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가운데로부터 나오는 불꽃 안에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그 떨기나무가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출 3:2).” 하심 같이 나의 생은 이와 같은 순간이 강렬하였다. 저마다 각자의 생에서 이와 같은 만남이 더러는 ‘파괴하는 자’ 같이 밀고 올라오는 것 같을지라도,
“주께서 이르시되 그 날 후로는 그들과 맺을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그들의 마음에 두고 그들의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또 그들의 죄와 그들의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이것들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히 10:16-18).”
이는 전적으로 행하신 그리스도의 은혜라 오늘도 우리는 담대히 찢긴 휘장 사이로 주 앞에 나아갈 수 있다. 앞서 놓였던 ‘성소와 지성소 사이’의 기물들을 살펴보았다. 처음 장막 안에는 “등잔대와 상과 진설병이 있”다(히 9:2). 먼저는 ‘등잔대’인데 이 등대에는 언제나 불이 붙어 있어 성소를 밝혀야 했다. 곧 우리로 ‘빛과 소금’이 되라 하실 때,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마 5:14).” 하는 데서 오늘 우리의 사명은 거기가 어디든지, 어떤 상황에서든지 내가 속한 곳에서 환히 밝혀야 한다.
다음은 ‘상과 진설병’이 있었는데, 상은 등대 바로 맞은편에 놓여 있었다.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로부터 나오는 빛에 의지하여 그리스도와 다른 사람과의 사귐을 가지게 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 상위에는 열두 개의 빵이 놓여 있었고, 이는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의미하는 것이지만, 이 빵은 안식일에 바쳐진 후 일주일간 그 자리에 놓였다가 그 다음 안식일에 새 것으로 교체하였다. 곧 이 빵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생명의 떡’이라 하심 같이 우리가 나누어 먹고 우리 영혼의 힘을 얻어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곧 아버지의 집에 이와 같이 먹고 남을 만큼 충분한 떡이 준비되어 있다고 하셨음을 되새기게 한다.
이어지는 둘째 장막의 기물들이 있다. “또 둘째 휘장 뒤에 있는 장막을 지성소라 일컫나니 금 향로와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언약의 돌판들이 있고 그 위에 속죄소를 덮는 영광의 그룹들이 있으니 이것들에 관하여는 이제 낱낱이 말할 수 없노라(3-5).” 먼저는 ‘휘장’으로 그 뒤가 ‘지성소’였다.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지어 놓는 이 휘장은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한다. 곧 그의 죽으심으로 이 몸은 찢겨 우리는 누구라도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하셨다. 더 나아가 지성소는 하나님의 나라다. 우리가 이를 믿음으로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
다음은 ‘금향로’인데 금향로는 향을 담은 그릇으로 향을 태우도록 만들어진 금 제단이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하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오늘도 중보하시는 것을 상기시킨다. 또한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모든 의를 완성하신 사실로 우리를 대신하여 율법에 완전히 복종하심으로 죽으셨고, 비로소 ‘율법의 완성’이 되심이다. 이와 같은 주의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롬 13:10).” 이를 상기시켜 주를 더욱 바라게 하심으로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를 그 안에 두셨다. 만나는 광야에서 우리를 먹이신 ‘하나님의 음식’ 곧 은총의 총체이다. 평소 우리가 알든 모르든 받고 있는 은혜를 뜻한다. 그렇게 오늘도 만나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얻게 되는 ‘생명의 떡’이다.
또한 ‘아론의 싹난 지팡이’가 있었다. 아론을 레위 족속 가운데서 택하시고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하나님 앞에 섬기게 하셨다. 백성들의 불평을 그치게 하시고, 제사장의 직책을 침해하지 못하도록 하시는 데 있어 기적의 증표로 그 마른 막대기에 싹이 나게 하셨다. “모세가 그 지팡이들을 증거의 장막 안 여호와 앞에 두었더라 이튿날 모세가 증거의 장막에 들어가 본즉 레위 집을 위하여 낸 아론의 지팡이에 움이 돋고 순이 나고 꽃이 피어서 살구 열매가 열렸더라(민 17:7-8).” 곧 이 지팡이는 또한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으로, ‘새싹이라 이름하는 사람’으로 예언되었다. “말하여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싹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자기 곳에서 돋아나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라(슥 6:12).” 곧 우리 영혼의 의지가 되는 것은 그리스도시다.
다음의 ‘언약이 돌판들’이 있었다. 여기에는 우리가 사는 동안 필요한 도덕적인 율법이 기록되었다. 언약궤 안에 이 돌판을 보존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이 이 거룩한 율법을 중요하게 여기심같이 우리의 믿음도 단지 막연하고 추상적인 게 아닌, 우리의 미숙하고 부족한 행함으로나마 복종을 배우게 하신다.
이러한 말씀으로 묵상하고 마주하다 오늘 본문의 ‘파괴하는 자’는 곧 ‘흩는 자’라 한 것을 생각한다. “갈대아 군대가 그 왕을 뒤쫓아 가서 여리고 평지에서 시드기야를 따라 잡으매 왕의 모든 군대가 그를 떠나 흩어진지라(렘 52:8).” 이 예언은 바벨론과 메대와 연합한 군대가 ‘니느웨’를 파괴할 것을 알린다. 곧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이와 같은 ‘패역한 니느웨’ 같은 죄성을 파괴하는 자이시다. 곧 오늘 이 본문은 ‘니느웨에 대한 전쟁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가 싸우고 날마다 부대끼지 ‘나와의 다툼 이야기’다. 그러는 까닭은 궁극적으로 여호와께서 ‘야곱의 영광’ 곧 우리의 마음에 기록하고 새기신 언약을 회복하시기 위함인 것을 알게 된다.
나의 ‘97과 09사이’의 시간이 그러했다. 앞전에 겪은 유년의 고달픈 학창시절까지도 돌아보면 ‘아, 그래서였구나!’ 하는 어떤 확신이 있다. 고로 나를 ‘회복하시되’ 하는 데서 임박한 ‘미래의 행동’을 대비하시기 위한 거였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의 나로 알게 하려 하는 의도가 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 3:16-17).” 오늘 나로 이 선한 일, 말씀 앞에 앉아 주의 뜻을 바라며 구하게 하기까지… 그 사이 니느웨는 멸망하였다.
“여호와께서 야곱의 영광을 회복하시되 이스라엘의 영광 같게 하시나니 이는 약탈자들이 약탈하였고 또 그들의 포도나무 가지를 없이 하였음이라(나 2:2).”
그리하여 나의 교만을 꺾으시고 포로 되었던 삶에서 놓여났다. 여전히 붙들려 사는 땅에서도 ‘야곱의 교만을 꺾으시려고’ 오늘도 우리의 이런저런 어려움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게 하신다. ‘그의 용사들의 방패는 붉다.’ 아무도 살려두지 않고 거침이 없다. ‘그의 무사들의 옷도 붉다.’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암시한다. ‘그 항오를 벌이는 날에 병거의 철이 번쩍이리라.’ 모든 어려움이 더러는 미친 듯이 몰아친다. 그때에 ‘전나무가 요동할 것이다.’ ‘그 병거는 거리에서 미친 듯이 달릴 것이다.’ ‘이리저리 빨리 갈 것이다.’ 그것은 ‘횃불 같을 것이다.’ ‘빠르기가 번개 같다.’ 그리하여 “니느웨가 공허하였고 황폐하였도다 주민이 낙담하여 그 무릎이 서로 부딪히며 모든 허리가 아프게 되며 모든 낯이 빛을 잃도다(10).”
우리 안의 니느웨는 훼파돼야 할 것이다. 그때에 ‘슬피 우는 것’이 당연하고 ‘유명한 골짜기의 비둘기’ 같이 ‘가슴을 치리니’ 이는 참으로 힘에 겨운 일 같으나 “도망하는 자는 산 위로 피하여 다 각기 자기 죄악 때문에 골짜기의 비둘기들처럼 슬피 울 것이며… 나는 제비 같이, 학 같이 지저귀며 비둘기 같이 슬피 울며 내 눈이 쇠하도록 앙망하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압제를 받사오니 나의 중보가 되옵소서(겔 7:16, 사 38:14).” 하고 주 앞에 승복을 고할 것이다. 나름은 옳았고, 자기주장에 도취되어 여전한 아집으로 주의 뜻을 저버릴 때도,
너희 권능 있는 자들아 영광과 능력을
여호와께 돌리고 돌릴지어다
여호와께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예배할지어다
(시 29:1-2).
나의 이 모든 게 주의 손길 위에 이루어진 것을, 이어지는 ‘여호와의 소리’가 들려준다.
여호와의 소리가 물 위에 있도다
영광의 하나님이 우렛소리를 내시니
여호와는 많은 물 위에 계시도다
여호와의 소리가 힘 있음이여
여호와의 소리가 위엄차도다
(3-4).
이에,
여호와의 소리가 백향목을 꺾으심이여
…
여호와의 소리가 화염을 가르시도다
여호와의 소리가 광야를 진동하심이여
여호와께서 가데스 광야를 진동시키시도다
(5, 7-8).
그리하여,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
(1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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