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의 공의로 나를 건지소서

하현. 2026. 5. 8. 06:01

 

선지자가 이르되 여호와 나의 하나님, 나의 거룩한 이시여 주께서는 만세 전부터 계시지 아니하시니이까 우리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리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심판하기 위하여 그들을 두셨나이다 반석이시여 주께서 경계하기 위하여 그들을 세우셨나이다

합 1:12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를 영원히 부끄럽게 하지 마시고 주의 공의로 나를 건지소서

시 31:1

 

 

이 말씀은 묵시로 받은 경고이다. 이루어진 일을 보는 듯이 그것의 사실을 확신하고 있다. 하박국 선지자는 신앙과 의의로 비통한 중에 부패로 인하여 슬픔에 젖어있다. 당대의 죄악을 통탄한다. 그가 여기서 하나님께 아뢰는 말은 우울한 불평이다.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로 말미암아 외쳐도 주께서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어찌하여 내게 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눈으로 보게 하시나이까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2-3).” 하는 내용으로 주 앞에 고한다. 고난 가운데 욥의 고백이 생각난다.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욥 13:15).”

 

우리는 무엇도 자신의 것이라 외칠 수 없다. 어느 것도 나의 소유가 없다. 자신의 몸은 물론 생명까지도 언제든지 주의 것임을 안다. 이를 거부하고 자신의 것인 줄 알 때, ‘강포로 가득하다.’ 할 수 있다. “그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포악함이 땅에 가득한지라(창 6:11).” 이와 같이 오늘 본문도 ‘강포를 인하여 외쳤고’ 하여 주 앞에 고한다(2). 그것의 결과는 간악과 패역과 겁탈과 강포를 인한 것이다.

 

선지자 하박국에 대해서는 알려진 게 없다. 그의 이름도 전형적인 히브리어가 아니다. 특히 자신을 가리켜 직접적으로 선지자라 하는 경우는 하박국을 포함하여 “선지자 하박국이 묵시로 받은 경고라(1).” 학개와 “다리오 왕 제이년 여섯째 달 곧 그 달 초하루에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로 말미암아 스알디엘의 아들 유다 총독 스룹바벨과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학 1:1).” 스가랴뿐이었다. “다리오 왕 제이년 여덟째 달에 여호와의 말씀이 잇도의 손자 베레갸의 아들 선지자 스가랴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슥 1:1).”

 

이런 점에서 보면 하박국은 직업적인 선지자였을 것이다. 그가 사용하는 용어는 남달리 엄중한 예언을 선포하고 있다. 첫 구절에서 ‘묵시로 받은 경고’라 할 때, 묵시는 히브리어로 ‘짐’, ‘예언’, ‘신탁’을 의미하는 엄중한 표현이다. 그리고 단도직입적으로 주께 한탄 섞인 목소리로 아뢴다.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이때도 ‘어느 때까지리이까?’ 하고 묻는 것은 애가의 전형적인 형식으로,

 

나의 영혼도 매우 떨리나이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

(시 6:3, 13:1).

 

하는 것 같이 “언제까지 이 땅이 슬퍼하며 온 지방의 채소가 마르리이까 짐승과 새들도 멸절하게 되었사오니 이는 이 땅 주민이 악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그가 우리의 나중 일을 보지 못하리라 함이니이다(렘 12:4).” 하고 주께 아뢰며 물을 때, 그 속에 한탄과 원통함이 깃들어 있다. “여호와의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여 여호와께서 언제까지 예루살렘과 유다 성읍들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시려 하나이까 이를 노하신 지 칠십 년이 되었나이다 하매(슥 1:12).”

 

그것은 앞의 동사 ‘내가 부르짖어도’에 대한 응답이 없음을 비통히 여길 때이다. 주 앞에 아뢰고 간절히 요청하는 위기 상황을 짐작하게 한다. 그럼에도 “내가 강포로 말미암아 외쳐도 주께서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하는데서 우리는 공감한다. 우리가 주를 섬길 때, 가장 어려운 때는 늦은 응답의 시기이다. 또는 이런 줄 알았는데 아니고, 그래서 저런가? 하고 주 앞에 물어도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때이다. 그때는 우리가 숨도 못 쉴 것 같이 답답함을 느낀다. 여기서 ‘강포’는 가까운 친지나 동료마저 우리를 해치려고 할 정도로 극심히 파괴된 심령의 상태를 가리킨다. 노아의 때가 그러하여서 “그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포악함이 땅에 가득한지라.” 이는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부패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부패함이었더라(창 6:11, 12).”

 

오늘 본문에서도 통치자들이 불의의 편에 서고, 백성들을 무자비하게 압제하는 당시의 암울한 현실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 즉 유다 왕 여호야김의 폭정을 가리킨다. 하박국은 백성의 고통을 아파하며, 끊임없이 하나님께 간구하였다. 하박국이 원하는 만큼 하나님의 응답이 없었다. 이에 첫 장 전체의 내용이 ‘응답받지 못하는 기도’에 대한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다. 이러한 긴장은 2장에 이르러 하나님에 의해 부분적으로 옹호되고, 3장에 가서 보다 충분하게 확증되면서 하박국의 믿음 또한 입증된다. 즉 우리는 항상 당장의 일에 근시안적으로 대처한다. 욱, 하고 저마다 이는 감정은 대부분이 그렇듯이 말이다.

 

이를 사람에게 풀어내면 죄악이고 하나님께 직고하면 기도가 된다. 오늘 본문은 우선 이를 잘 나타낸다. ‘어찌하여 나로 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목도하게 하시나이까?’ 하고 주께 고한다. 살면서 우린 이런저런 예상치 못한 일을 겪는다. 그럴 때면 당장 그 분야의 전문가나 힘 있는 자를 찾아 의뢰하려 한다. 그게 마땅한 일이겠으나 한 발 앞서 우리에게는 주 앞에 고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이는 주가 부여하신 권한이다. 주 앞에 담대히 아뢸 수 있는 권세를 가졌다. 오늘 본문에서도 ‘어찌하여’ 하는 부사어 활용형이 쓰였다. ‘어떤 이유로, 무슨 까닭으로’ 하는 의문형이면서 그 주체를 향한 표현이다. 히브리어로는 애가의 전형적인 표현으로,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

 

주여 깨소서 어찌하여 주무시나이까

일어나시고 우리를 영원히 버리지 마소서

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가리시고

우리의 고난과 압제를 잊으시나이까

(시 10:1, 44:23-24).

 

하는 표현으로 아뢰어진다. 오늘 하박국 선지자는 이렇게 묻는 이유가 “어찌하여 내게 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눈으로 보게 하시나이까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3).” 이런 지경까지 이르게 하셨는가? 하고 주께 묻는다. 이러한 죄악과 불화로 공의가 왜곡되고 사회적인 억압이 팽배한 상황을 묘사하는 데 있어 이처럼 간곡한 어조로 서두를 시작한다. 이는 그만큼 어려운 현실을 반영한다. 예레미야 선지자도 “샘이 그 물을 솟구쳐냄 같이 그가 그 악을 드러내니 폭력과 탈취가 거기에서 들리며 질병과 살상이 내 앞에 계속하느니라(렘 6:7).” 하여 당시의 상황이 어떠한지, “내가 말할 때마다 외치며 파멸과 멸망을 선포하므로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 거리가 됨이니이다(20:8).” 이를 애곡하는 것이다.

 

그만큼 선지자들, 곧 주를 경외하는 자들로 우리들은 죄악의 실상 앞에서 비통함으로 호소한다.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이스라엘의 통치자들아 너희에게 만족하니라 너희는 포악과 겁탈을 제거하여 버리고 정의와 공의를 행하여 내 백성에게 속여 빼앗는 것을 그칠지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겔 45:9).” 하고 저들 앞에 고할 때, “자기 궁궐에서 포학과 겁탈을 쌓는 자들이 바른 일 행할 줄을 모르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암 3:10).” 이는 동시에 주께 아룀이고, 선포이고, 의뢰다. 본 구절에서도 특별히 하나님께 의인이 고난 받고 악인이 번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방관하시는 듯한 사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당시 여호야김 왕의 통치 기간(주전 609-598)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지 않았고, 이방신을 섬겼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내버려 두신 역사적인 사실에 근거한다. 같은 사실로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정의와 공의를 행하여 탈취 당한 자를 압박하는 자의 손에서 건지고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거나 학대하지 말며 이 곳에서 무죄한 피를 흘리지 말라(렘 22:3).” 하심을 증거하게 한다. 이는 “불의로 그 집을 세우며 부정하게 그 다락방을 지으며 자기의 이웃을 고용하고 그의 품삯을 주지 아니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그러나 네 두 눈과 마음은 탐욕과 무죄한 피를 흘림과 압박과 포악을 행하려 할 뿐이니라(13-17).” 이는 오늘 우리의 실상이기도 하다.

 

이때에 ‘변론과 분쟁’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하다. 별 것 아닌 일에도 ‘변론과 분쟁’은 평행어처럼 ‘분노와 알력’으로 인해 다툼을 일삼게 한다. 일련의 지방선거를 앞두고 각 당의 잡음이 끊이지 않고 서로의 변론과 분쟁으로 분노와 알력이 퍼져가는 것을 보면서 더욱 확실하게 와 닿은다. 이는 어쩌면 당연한 결과여서 지혜자는 우리에게 이른다. “분을 쉽게 내는 자는 다툼을 일으켜도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시비를 그치게 하느니라(잠 15:18).” 살면서 어떤 일에 우선 드러나는 게 화이고 보면, 분노는 사람의 죄성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깔려있는 기저인 것 같다. 곧 이를 우리의 본성으로 인정하면서, “내게 재앙이로다 나의 어머니여 어머니께서 나를 온 세계에 다투는 자와 싸우는 자를 만날 자로 낳으셨도다 내가 꾸어 주지도 아니하였고 사람이 내게 꾸이지도 아니하였건마는 다 나를 저주하는도다(렘 15:10).”

 

서로가 좋을 때, 믿고 의지할 때도 다를 게 없다. 누가 말하길 그래서 자신은 사람을 믿지 않는다고 하는데 저가 겪으면 살아온 날들이 다들 그만그만한 것이어서 누가 쉽게 뭐라 하기가 어렵다. 이는 이스라엘이 서로가 민족지간에도 일어났던 분쟁을 가리키는 것으로 당시의 심각한 사회상을 묘사한다. 동시에 오늘 우리 사회도 다를 게 없다는 데서 선지자의 비통함이 우리 믿는 자들의 마음과 다르지 않을 것이라 알 수 있다. 가족과 친척들, 이웃과 친구들, 상업과 법정에서 모든 것이 횡포로 이루어지는 것을 본다. 하루도 변함없이 뉴스는 우릴 경악시킨다. 아이엄마가 아이를 리모컨으로 때려 숨지게 하였다. 길 가는 학생을 이유도 없이 일면식도 없는 자가 공격하여 죽음에 이르게 했다.

 

우리 앞에 이처럼 난데없는 일들이 우리를 당혹스럽게 하지만 동시에 수천 년 전의 본문이 어쩜 그렇듯 오늘 우리의 실상과 다르지 않은 것인지 놀랍다. 모두가 그 이웃에게 악을 행하는 데 망설이지 않는다. 오직 자신의 이익을 위해 행할 뿐이다. 선지자 자신에게 큰 침해가 행하여진 것 같지는 않으나, 다른 사람들이 악을 행하는 것을 보는 것도 침통하다. 무해한 사람에게 악을 행하는 것은 그 자체가 죄이듯이 ‘죄악으로 인하여 우리가 한숨짓고 부르짖는 대상’은 하나님이다. 마치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다.’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정의가 굽게 행하여짐이니이다(4).” 이러한 표현이 오늘 우리 사회의 실상이어서 더 놀라운 것이다.

 

끊임없이 서로가 물어뜯고 먹어치우는 당파와 도당으로, 각각 진영논리에 원수만 못한 사이가 된다. 이는 ‘평화의 아들들’에게 비탄이 되었다.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그런 우리는 주 앞에 고한다(3). 분열을 선동하고, 분파를 확대시키고, 서로 격분하게 하여 형제들 중에 증오의 씨를 뿌리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중에 교회가 또는 어느 목사가 연단에 서는 것으로 끔찍하고 두렵기도 하다. 그들은 이미 지난 일을 다시 들추고, 잠들어 잊혀지기 시작한 변론과 분쟁을 들쑤셔서 열심히 다시 분란을 조성한다. 마치 서로가 용서하고 화합하는 것을 볼 수 없다는 태세다.

 

이 모든 것은 공개적이며 공공연하다. 파렴치하게 공언된다. 예언자는 자기가 이런 간악을 목도하였다고 주께 아뢴다. 그의 눈을 돌리는 곳마다 그것을 보았다. 그것으로부터 눈을 돌릴 수가 없었다고 아뢴다.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도다. 한 나라의 넘치는 사악은 선한 사람에게 매우 슬프고 비통한 일이다. 만일 그들이 그것을 보지 않았다면 그처럼 악하다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가령 솔로몬은 가끔 자기가 ‘해 아래서 보았던’ 것을 탄식하며 놀라워했다.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하고 반문하며(전 1:3), “내가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보았노라 보라 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구부러진 것도 곧게 할 수 없고 모자란 것도 셀 수 없도다(14-15).” 하고 우리의 악함과 약함을 새삼 놀라워한다.

 

그리고 예언자는 그에 따라 은자가 되어 그것을 보지 않으려 할 때도 있다. “내가 광야에서 나그네가 머무를 곳을 얻는다면 내 백성을 떠나가리니 그들은 다 간음하는 자요 반역한 자의 무리가 됨이로다(렘 9:2).” 그러니 이런 기세라면 세상을 등지고 선을 바라는 자들은 은둔하여 사는 게 낫다. 오늘 하박국은 하나님께 이러한 실상을 불평하듯 아뢰며, 그 패역의 치료책을 얻을 수 없었다. 그는 말하기를 ‘여호와여, 어찌하여 나로 간악을 보게 하시나이까? 왜 주는 간악을 볼 수밖에 없는 시대와 장소에 나를 처하게 하셨나이까? 나는 왜 끊임없이 메섹과 게달에 거하게 되나이까? 나는 주께 이 강포에 대해 부르짖나이다. 내가 크게 외치고, 오래 외쳤나이다.’ 하는 심정이 느껴진다.

 

더러는 주어진 현실과 그 육신의 고단함으로도 그렇고 실제의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겪는 괴리감으로도 그렇고… 아들은 비록 박봉으로 시작하지만 늦은 사회생활에 기대가 컸다. 5월은 종합소득세의 달이라 가장 바쁠 때 입사를 해서 각오를 단단히 했다. 그런데 정작 그 회사는 영업에 문제가 생겨 2천 명 가까운 개인사업자들의 신고가 즐비할 것이라 여겼는데 채 몇 십 명도 의뢰가 없던 모양이다. 순간 태세를 전환해서 새로 뽑은 수습 기간의 아들에게 이달까지만 일하는 것으로 통보하였다. 사회란 그런 것이려니, 인정을 하면서도 열흘 남짓 마음고생이 많았을 아들로 인해 마음이 어려웠다. 이제 다 큰 아들 일에 끼어들 문제도 아니고, 대충 설명을 듣고 그래서 스스로 그만두려한다는 말에 잘했다고 했다.

 

누가 말하길 사회는 냉혹하여 정글 같다는데, 나야 늘 그런 경쟁구도를 피해서 살았던 것인지 말로만 듣는 그러한 현실에 어리둥절하다. 업무 특성상 같이 나누어 할 수 있는 일도 아니어서, 며칠이지만 그 안에서 난감하였을 아들을 생각하면 좋은 경험이겠다 싶으면서도 안쓰럽다. 사회는 점점 악의가 득의하고 선의가 호구잡히는 꼴이다. 서로가 돕자고 시작한 일인데 작은 꼬투리에도 사달이 나고, 오히려 철저하게 이익을 추구하는 개인주의적인 자들만이 성공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것이 다 이 세대에 돌아가리라(마 23:36).” 그렇게 자식이 부모를 고소하여 촉법소년법으로 법정에 세워지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어딜 어떻게 봐야 하는 것인지!

 

“선지자가 이르되 여호와 나의 하나님, 나의 거룩한 이시여 주께서는 만세 전부터 계시지 아니하시니이까 우리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리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심판하기 위하여 그들을 두셨나이다 반석이시여 주께서 경계하기 위하여 그들을 세우셨나이다(합 1:12).”

 

곧 세상이 아무리 어떠하고, 우리 자신 또한 그에 비해 연약할 뿐이었다 해도 주께서 우리로, “주께서는 만세 전부터 계시지 아니하시니이까? 우리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리이다.” 하는 데서 다시금 확신을 갖는다. 진정한 사망은 이 땅에서의 일이 아니다. 이런저런 작은 일로 우리는 당장 죽을 것처럼 힘들기도 하지만, 그래서도 주께 아뢰는 것이다.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거짓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도 잠잠하시나이까(13).” 하여 오늘도 주께 바라는 것은,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를 영원히 부끄럽게 하지 마시고

주의 공의로 나를 건지소서

내게 귀를 기울여 속히 건지시고

내게 견고한 바위와 구원하는 산성이 되소서

주는 나의 반석과 산성이시니

그러므로 주의 이름을 생각하셔서

나를 인도하시고 지도하소서

(시 31:1-3).

 

우리로 주께 바랄 수 있는 능력을 더하사,

 

내가 허탄한 거짓을 숭상하는 자들을 미워하고

여호와를 의지하나이다

내가 주의 인자하심을 기뻐하며 즐거워할 것은

주께서 나의 고난을 보시고

환난 중에 있는 내 영혼을 아셨으며

나를 원수의 수중에 가두지 아니하셨고

내 발을 넓은 곳에 세우셨음이니이다

(6-8).

 

그러므로

 

여호와여 그러하여도

나는 주께 의지하고 말하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였나이다

나의 앞날이 주의 손에 있사오니

내 원수들과 나를 핍박하는 자들의 손에서

나를 건져 주소서

(14-15).

 

이는,

 

여호와를 찬송할지어다 견고한 성에서

그의 놀라운 사랑을 내게 보이셨음이로다

내가 놀라서 말하기를

주의 목전에서 끊어졌다 하였사오나

내가 주께 부르짖을 때에

주께서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셨나이다

너희 모든 성도들아 여호와를 사랑하라

여호와께서 진실한 자를 보호하시고

교만하게 행하는 자에게 엄중히 갚으시느니라

(21-23).

 

그리하여,

 

여호와를 바라는 너희들아

강하고 담대하라

(2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