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 하였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합 2:1-2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 32:1
우리로 어떠한 상황을 통해 여호와를 인정하게 하신다. 이를 위하여 광야로 내몰고 가나안의 전쟁을 두고 보신다. 슬픔도 기쁨도 그 목적은 모두 여호와를 인정함으로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다. 이에 오늘 하박국은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함이니라(14).” 하는 데서 우리의 소망을 모은다. 새벽 더욱 깊은 때 날이 곧 밝을 무렵이 가장 춥고 어두운 것과 같다. 이에 하박국은 겸손히 하나님을 주목한다.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 하였더니(1).”
어떤 말씀이 언제 어떻게 주어질지 알 수 없어서,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이는 행위와 장소가 명확히 드러나게 하였다. ‘성루’가 암시하는 대로 파수꾼으로 직무를 수행하는 성벽 파수대에 섰다. 실제 하박국이 파수꾼이었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 다만 우리도 같은 의미로 파수꾼의 심정이 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리며 하나님과 교통하기를 바란다. 이는 “오직 나는 여호와를 우러러보며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나니 나의 하나님이 나에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미 7:7).”
그리하여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
(시 5:3).
하는 심정으로 오늘도 화들짝 놀라듯 일어나 교회로 나왔다. 그리고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시는지,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나의 심정도 ‘보리라.’ 하는 것이다. 하박국이 파수대에 선 것은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기 위한 것이다. 하박국의 태도는 오늘 우리의 심정과 같다. 주께 바라는 여러 형편과 사정을 두고 하나님의 응답을 간절히 기다리는 모습은 이상하지 않다. 누군 일흔이 넘은 부친의 무릎 수술을 알아보다, 치매가 가속되고 있는 듯하여 더욱 더 마음만 어려웠다. 기도를 바라면서 본인은 여전히 나중으로 미루며 기존의 삶을 유지하려 한다.
‘내 안에’ 하나님을 바라는 마음의 비중과 그 간절함이 어떠한지, 오늘 본문은 스스로 묻길 원한다. 스가랴도 이런 표현을 많이 했다. “내가 말하되 내 주여 이들이 무엇이니이까 하니 내게 말하는 천사가 내게 이르되 이들이 무엇인지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니(슥 1:9).” 하는 것 같이 ‘내가’ 주 앞에 고하고 묻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내게 말하는 천사에게 선한 말씀, 위로하는 말씀으로 대답하시더라(13).” 그러할 때, “네가 어디로 가느냐 물은즉 그가 내게 대답하되 예루살렘을 측량하여 그 너비와 길이를 보고자 하노라 하고 말할 때에(2:2).” 누구에게라도 대답할 수 있다.
오늘 하박국도 파수대에 서서 잠잠히 그 속으로 주께 귀를 기울인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태도를 보여준다. 그리할 때,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합 2:2).” 여기서부터 본장 전체에 하박국의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계속된다. 하나님께서 하박국에게 응답 받을 준비를 갖추도록 조치하시고, 악인과 의인의 차이점이든가 침략자 갈대아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리라는 사실을 알게 하신다. 갈대아 사람들이 비록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었더라도 그들의 탐심과 잔인성, 허탄한 삶의 태도가 용서될 수 없다.
이에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하실 때 우선은 ‘묵시’다. 앞서 1장 1절에서도 사용되었던 표현으로 하박국이 성루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린 결과 받게 된 핵심적인 내용이 무엇인지 밝힌다. 하나님은 모세에게도 그리하셨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고 여호수아의 귀에 외워 들리라 내가 아말렉을 없이하여 천하에서 기억도 못 하게 하리라(출 17:14).”
이를 오늘 하박국에게는 특별히 판(板)에 기록하여 미래의 정한 때까지 보존하도록 하셨다. 이런 조치는 많은 ‘거짓 예언’으로부터 ‘참된 예언’을 보호하고 전수시키려 하심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새긴 판은 돌이나 점토 혹은 금속 등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서판에 쓰인 메시지는 통보자에 의해 전달되었다. 통보하는 방식이 그것을 가지고 달리는 것이다. 여기서는 특별히 하박국의 선지자적인 역할을 염두에 둔 것으로 읽을 수 있다. “이 선지자들은 내가 보내지 아니하였어도 달음질하며 내가 그들에게 이르지 아니하였어도 예언하였은즉 그들이 만일 나의 회의에 참여하였더라면 내 백성에게 내 말을 들려서 그들을 악한 길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게 하였으리라(렘 23:21-22).” 그렇듯 거짓도 부지런하다.
하여 오늘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포위된 도성의 성벽 위에, 또는 침략 받은 나라의 변경에 파수꾼으로 서서 정보를 얻으려고 크게 고심할 것이다. 나는 위를 바라보고, 돌아보고, 안을 바라보고,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주의 깊게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듣고 조심스럽게 그의 섭리와 발자취를 살펴 교훈이나 지시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가 내 속에 하실 말씀을 기다리고 바라보리니 내 속의 예언의 영이 내 불평에 대한 응답으로 나에게 받아 새기게 할 것을 보리라.’ 하는 의미로 읽는다. 묵상하는 마음도 같다. 말씀 앞에 앉을 때면 같은 심정으로 기다린다.
일상적인 방법으로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실지 우리는 가늠하기 어렵다. 당장의 어떤 현실을 놓고 가타부타하기 쉬우나 더러는 오판이 심하고, 하나님의 생각을 비껴가기도 한다. 그때마다 우리 자신의 양심에 의해 우리 속에 말씀하시며 속삭이시기를, ‘이것이 길이니 그리로 걸으라’고 하는 성령의 내주 임재하심을 느끼고 확신해야 한다. 더러는 그것이 내 뜻과 생각을 뒤집는다 해도 말이다. 오늘의 어떤 상황이나 형편을 두고 뭐라 지레짐작하기보다 가만히 주의 뜻을 기다리며 온 마음과 정성을 기울이는 게 중요하겠다.
그럴 때 우리의 인내와 지속적인 삶의 태도가 확신을 더하게 한다. 정해진 루틴을 따라 그 동선에서 일관된 삶을 살면서 한 가지는 확실해졌다. 가령 나는 이 시간을 하루 중 늘 최우선을 놓는다. 자면서도 몇 번씩 시간을 확인하다, 오늘도 4시가 넘은 것을 보고 화들짝 놀라 씻고 나왔다. 사실 그럴 이유가 내게는 없다. 그러면서도 나는 언제부터 언제까지, 무엇을 하던 것에 늘 일정하다. 그리하려고 노력한다. 이를 위해 다른 데 시선을 두지 않는다. 우선은 아침의 묵상시간이다. 이 시간을 소중히 하며 오늘 하박국이 받은 명령처럼 글로 쓴다. 나의 서판에 묵상을 글로 적어둔다. 언제든 읽고, 누구라도 읽게 한다.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2).” 하심을 나는 나의 일상에서 어디서든지 열어볼 수 있게, 그렇게 있는 그대로 따른다. 이러한 공간에 글을 적어두는 것도 그런 편의가 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또한 수시로 아무 때나 다시 읽을 수 있도록 한다. 곧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3).” 하심을 말씀에서 말씀으로 확신을 갖는다.
‘종말’은 예수가 오시고 부활 승천하신 뒤로 매일 매순간이다. 히브리어로 뜻은 ‘어떤 목적, 행위’ 또는 ‘사기의 끝’을 의미한다. 예레미야는 전하길, “그들이 우리의 걸음을 엿보니 우리가 거리마다 다 다닐 수 없음이여 우리의 끝이 가깝고 우리의 날들이 다하였으며 우리의 종말이 이르렀도다(애 4:18).” 곧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날들을 살면서 우린 너무 막연하게 미래지향적으로 살려 한다. 이 땅에서의 노력이나 성취가 모두 그럴 텐데, “너 인자야 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땅에 관하여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끝났도다 이 땅 사방의 일이 끝났도다 이제는 네게 끝이 이르렀나니 내가 내 진노를 네게 나타내어 네 행위를 심판하고 네 모든 가증한 일을 보응하리라(겔 7:2-3).” 하심을 에스겔은 기록으로 남겼다.
일련의 일들을 관찰자로 지켜보면서 아흔둘의 장모는 백 세 이상의 삶을 꿈꾸고, 이런저런 돈벌이나 인간관계에 연연하는 이들은 엊그제도 누가 이곳까지 왔다가 돌아갔다면서 술을 한 잔 해서 불 켜진 것을 보고도 그냥 갔다고 했다. 저야말로 심장 수술로 언제라도 멈춘다 해도 놀랄 일이 아닌데도 그렇게 쉰이 다 되고 보니 ‘에이, 설마’ 하고 오늘도 미루듯 산다. 예배를 미루고 주를 온전히 바라기를 미룬다. “너 극악하여 중상을 당할 이스라엘 왕아 네 날이 이르렀나니 곧 죄악의 마지막 때이니라(21:25).” 하심 같이 언제 어느 때 우리에 임할지 모를 날이다.
이를 알면서도 “네게 대하여 허무한 것을 보며 네게 대하여 거짓 복술을 하는 자가 너를 중상 당한 악인의 목 위에 두리니 이는 그의 날 곧 죄악의 마지막 때가 이름이로다(겔 21:29).” 오늘도 다만 막연할 뿐이다. 이에 ‘묵시’의 직접적인 내용은 바벨론 압제의 종식을 가리킨다(합 2:4-20). 기록된 묵시는 현재적인 의미뿐 아니라 미래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시간의 최종적인 순간까지 이 묵시는 계속될 것이다. 이에 시인은 우리에게 전하기를,
밤에 부른 노래를 내가 기억하여
내 심령으로, 내가 내 마음으로 간구하기를
…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시 77:6, 73:17).
우리의 깨달음, 하나님의 섭리를 아는 일은 어떤 찰나의 뻔쩍하는 깨우침이 아니다. 우리로 성소에 들어가서, 거기서 이 일들의 종말을 깨닫기 위해 애써야 한다는 사실을 시편이 고한다. 우리의 의지대로 내 임의로 의심을 그대로 놔두지 말고, 그것으로 주 앞에 나아가 성소에 앉아, 주신 상황 속에서 망루에 서듯이 나의 파수대를 지키면서도 기다림이다. 인내는 거기부터다. 우리의 기도가 조급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불평이든지, 소원이든지 하나님에게 쏟아놓을 때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이 비천한 말에 주목하신다. 말씀을 주시고 영을 열어주신다. 그리고 그의 섭리에 대한 답이 무엇인지 살피는 정도로 깨닫게도 하신다. 간절함의 무게로 감사가 달린다. 이러한 간절함은 다윗이 유난스러웠다.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
(시 5:3).
뿐만 아니라 고라 자손들도 같았다.
내가 하나님 여호와께서 하실
말씀을 들으리니 무릇 그의 백성,
그의 성도들에게 화평을 말씀하실 것이라
그들은 다시 어리석은 데로
돌아가지 말지로다
(시 85:8).
이에 오늘 본문은 여러 경고를 더한다.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 2:4).” 하신 말씀을 전제로 하여 세상이 우릴 조롱할 때도, “그 무리가 다 속담으로 그를 평론하며 조롱하는 시로 그를 풍자하지 않겠느냐 곧 이르기를 화 있을진저 자기 소유 아닌 것을 모으는 자여 언제까지 이르겠느냐 볼모 잡은 것으로 무겁게 짐진 자여(6).” 또한 우리 힘으로 어찌 방책을 세우려는 것에 대하여도, “재앙을 피하기 위하여 높은 데 깃들이려 하며 자기 집을 위하여 부당한 이익을 취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9).”
그러다 부당하게 건축하는 일에 대하여, “피로 성읍을 건설하며 불의로 성을 건축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12).” 그리고는 술취하고 방탕하여 스스로 분노하는 자에게, “이웃에게 술을 마시게 하되 자기의 분노를 더하여 그에게 취하게 하고 그 하체를 드러내려 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15).” 하나님께서 그로 인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그러나 마침내 그날은 꼭 올 것이다. 그것은 지체되지 않을 것이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 3:9).”
우리로 이 묵시를 붙들고 기다릴 때 그대로 우리의 신앙과 인내의 작용이 나올 것이다.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 2:4).” 그러므로 교만하게 이 묵시를 멸시하지 않기를. 진실로 선하며 그 마음이 하나님께 정직한 자로 약속의 가치를 붙들고 살 수 있기를. 그때에 알 것은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풍요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하지 아니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전 5:10).” 세상에서의 어떤 추구도 그러하여,
여호와께서는 그의 성전에 계시고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그의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의 안목이 그들을 감찰하시도다
…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
(시 11:4, 115:3).
이에 오늘 하박국은 종국에는 “민족들이 불탈 것으로 수고하는 것과 나라들이 헛된 일로 피곤하게 되는 것이 만군의 여호와께로 말미암음이 아니냐?” 하고 물으며(13), 비로소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함이니라(14).” 곧 이 땅의 끝이 우리의 살 길이다. 결국이 우리의 시작이다. 이에 스스로들 열심히 “새긴 우상은 그 새겨 만든 자에게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부어 만든 우상은 거짓 스승이라 만든 자가 이 말하지 못하는 우상을 의지하니 무엇이 유익하겠느냐(18).” 하고 물으며 이와 같은 어리석음을 풍자한다. “나무에게 깨라 하며 말하지 못하는 돌에게 일어나라 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그것이 교훈을 베풀겠느냐 보라 이는 금과 은으로 입힌 것인즉 그 속에는 생기가 도무지 없느니라(19).”
이에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땅은 그 앞에서 잠잠할지니라 하시니라(20).” 다른 데 어디 그럴듯한 곳을 기웃거리는 어리석음을 멈추기를. 오늘도 스스로 어찌해볼까 하는 마음으로 허튼 수고와 노력으로 주 앞에 불평하지 않기를. 하여, 오늘도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 32:1-2).
오늘 우리가 누리는 복의 실체라,
주는 나의 은신처이오니 환난에서 나를 보호하시고
구원의 노래로 나를 두르시리이다 (셀라)
내가 네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
(7-8).
그러므로 부디 고집을 버리고,
너희는 무지한 말이나 노새 같이 되지 말지어다
그것들은 재갈과 굴레로 단속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가까이 가지 아니하리로다
(9).
그러할 때,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칠지어다
(1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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