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합 3:2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찬송은 정직한 자들이 마땅히 할 바로다
시 33:1
기도밖에 답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 사람을 의지하지 않는다. 사람을 의지하느라 여기저기 기웃거리지 않고, 그들과의 관계를 위해 ‘~척’ 하지 않는다. 오늘 여기 하박국 선지자의 기도가 있다. “시기오놋에 맞춘 선지자 하박국의 기도라(1).” ‘시기오놋’은 감정이 격앙된, 열정적이고 급박한 찬양이나 기도의 형식이다. 위기 상황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기도한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2).”
이 선지자는 ‘그는 선지자다.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라.’ 하심 같이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보내지 아니하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반드시 죽을 줄 알지니라(창 20:7).” 하신 데서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선지자로 표현하셨다. 선지자란 ‘하나님의 특별한 부르심을 받은 자’이다.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렘 1:5).” 이는 오늘 우리의 성도들로 하나님의 특별하신 부르심으로 여기에 있다.
이와 같은 경험은 “내가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하니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아이라 말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령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렘 1:6-7).” 하신 말씀에 응하는 일이다. 이에 “여호와께서 그의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며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9).” 하여 모든 예언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쓰인 성경으로 시작한다. 기도는 이를 바탕으로 하나님께 향하는 통로다. 우리로 하나님의 마음을 익히 아는 자로 자신을 위하여서만이 아니라 남들을 위하여서 기도한다. 이에 ‘하나님께서 그의 귀를 우리에게 기울이셨으므로 우리는 그에 따라 우리가 사는 날까지 그를 부르기로 결심한다.’
오늘 하박국은 ‘내가 주께 대해 들었다’고 한다. ‘주는 우리로 듣게 하신다’는 것도 안다. 앞서 그는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 하였더니(2:1).” 곧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 하여 하나님의 대답을 기다렸다. 이에 대해 지혜자는 “사람이 귀를 돌려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잠 28:9).” 하였는데, 다시 말하면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는 기도는 가증하다.
자기 요구만 바라는 게 기도가 아니다. 대부분은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신다. 그럼에도 기도하는 것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 하심인데, 그렇듯 기도하다 보면 어느 순간 하나님의 뜻을 바라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기도의 공식과도 같아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하심과 같이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11:26).” 하고 우리로 인정하기까지이다.
그리하여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시며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눅 10:21).” 하여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22:42).”
오늘 하박국은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하고 직접 하늘로부터 온 메시지로 놀라움을 표현한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2).” 다시 보면 ‘시기오놋’은 시편 제 7편의 표제로 사용된 ‘식가욘’과 동일한 의미다. <다윗의 식가욘>이라,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를 쫓아오는 모든 자들에게서 나를 구원하여 내소서
(시 7:1).
급박하고 다급하게 구하는 것이다. 선지자는 앞선 두 차례에 걸쳐 질의응답을 통해 범죄한 유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 및 유다를 심판하기 위해 선택받아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될 바벨론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놀라운 계획을 접하였다. 이에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과 경외의 마음이 충만한 가운데서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속히 이루어질 것과 비록 하나님의 진노 중에라도 선민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실 것을 간구하고 있다.
심판자로 오시는 하나님의 영광과 권능을 찬양하고(3-7), 하나님의 역동적인 심판과 구원 사역을 찬양한다(8-15). 하박국은 하나님의 영광과 권능의 임재 및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 사역을 상징적인 언어로 장엄하게 또한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특별히 이 부분은 미래에 있을 일을 현재의 일처럼 묘사하고 있다. 미래에 일어날 일을 현재 일어나는 일처럼 느끼게 하는 서술이 오늘 이 한 문장의 핵심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이로써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하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다.
우리가 사는 데 있어 성도의 통로는 경험으로다. 하나님의 손길을 누구보다 잘 느끼고 알았다. 그리하여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하고 아뢰며 주 앞에 고한다. 그러면서도 두려운 것은 심판이라,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하는 간구가 저절로 나온다(2). 이어서 ‘심판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모든 것을 잃게 되는 처지에 이르게 된다 할지라도 <구원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할 것’임을 알린다(16-19).
성도의 기쁨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삶에서 나온다. 하여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17-18).” 하는 고백이 가능해진다.
이는,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19).” 하는 데서 확신을 더한다.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선지자의 응답이다.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2:4).” 성경에 여러 곳에서도 이를 바탕으로 설교하는데,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 하신 데 따른 의이다.
곧 우리가 어떤 수고와 노력으로는 이룰 수 없고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갈 3:11).” 하신 데서 더욱 확신을 갖는다. 하여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 10:38).” 이로써 우리가 성도인 것을 증거한다.
성도라 하는 자면 사명을 받은 바로 부르심에 응한 것이다. 하여 위의 길은 하나님의 은혜로 걷는 것이고 이를 더하면서 믿음은 더욱 더 단단하여진다. 오늘 본문은 자신의 질문에 대한 하나님 의 응답을 받은 하박국 선지자의 반응으로 나오는 기도이다. 그러고 이는 단순한 기도가 아니라, 수금에 곡을 붙인 시요, 노래이다. 이러한 하박국 선지자의 기도의 첫 부분을 보면 선지자는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하고 입을 뗀다. 여기서 ‘주께 대한 소문’은 하나님에 관한 소문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하나님께서 들려주신 말씀 곧 자신의 질의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을 말한다. 다시 말해 선민 유다에 대한 심판(1:5-11)과 선민 심판의 도구로 사용될 바벨론에 대한 심판(2:2-19)에 관하여 하나님께서 선지자에게 계시하신 말씀이다.
다시 말해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다.’ 곧 하나님의 말씀을 앞서 들으며 놀랐다. ‘주께 대한 소문’은 오늘 우리도 듣는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17-18).” 하는 찬송이 나온다는 것은 격정적이다. 이를 기반으로 구한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2).” 오늘도 이 작은 교회에 혼자 앉아 내 뜻대로는 아무 것도 이루어지지 않는 것 같은 ‘교회 일’, 누구의 어떤 사연과 저에게 권한 말들이 이루어지지 않는 데 대해 답답해하며 구하는 기도와 같다.
그래서도 같이 예배를 권하고 예수를 영접하기를 바라는데, 그것만은 다들 뒤로 미룬다. 그저 자기 이야기만 들어주길 바란다. 가까운 사이나 아는 사람일수록 이는 더욱 두드러진다. 십 수 년이 지났는데도 저들 눈에는 ‘교회’가 아니라, ‘사무실’이다. 전화를 해서도 ‘사무실인가?’ 하고 물으면 나는 ‘교회’라고 정정한다. 그러기를 수차례인데도 일부러 그러는 것 같이 교회로 인정하지 못함는 것인지…, 그래서도 나 역시 오늘은 이 기도를 문자적으로 따라하며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하고 바란다. 사람이 많고 적고, 규모가 어떠하고 한 것에 연연하지 않는다고는 하나 그게 또 그렇지가 못하다. 하여 부디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하는 나의 기도는 나의 허물과 약함을 동시에 아뢴다.
여호와여 주께서 행하신 일로
나를 기쁘게 하셨으니
주의 손이 행하신 일로 말미암아
내가 높이 외치리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행하신 일이
어찌 그리 크신지요
주의 생각이 매우 깊으시니이다
(시 92:4-5).
하고 주 앞에 엎드릴 때,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9-10).” 하심을 따라 읊조리며 앉아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26:39).” 하고 구한다. 이는 주가 가르치신 바,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6:33).” 하심으로 오늘도 주 앞서 선다.
이에,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찬송은 정직한 자들이 마땅히 할 바로다
(시 33:1).
결국,
여호와의 계획은 영원히 서고
그의 생각은 대대에 이르리로다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선택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
(11-12).
그리하여,
우리 마음이 그를 즐거워함이여
우리가 그의 성호를 의지하였기 때문이로다
여호와여 우리가 주께 바라는 대로
주의 인자하심을 우리에게 베푸소서
(21-2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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