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그의 구원을 기뻐하리로다

하현. 2026. 5. 12. 06:02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

습 2:3

 

내 영혼이 여호와를 즐거워함이여 그의 구원을 기뻐하리로다

시 35:9

 

 

어려움과 고난은 매일반이다. 서로 예외는 없다. 그리하여 누구는 어떠해도 우리는 주를 바라며 ‘정의와 겸손’을 구하게 된다. 비가 오고 날씨가 궂어 아프기 좋은 날, 기어코 진통제 주사를 한 대 맞고 돌아와 몸을 놀렸다. 그러면서 드는 생각은 모든 게 매일반이구나, 하는 것이다. 악인이나 의인이나, 주를 믿는 자이거나 안 믿는 자이거나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전 1:3).” 하고 물었던 지혜자의 심정처럼 결국은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4).” 그것이 자연의 이치고 하나님의 섭리일 텐데, 다들 사느라 고생이 많다.

 

“해는 뜨고 해는 지되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아가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바람은 그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강물은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5-7).”

 

이 모든 게 돌아가기까지일 뿐일 텐데…. 앞 장에서 스바냐는 무서운 심판에 대해 본의 아니게 절망을 주었다. 그러나 절망을 주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에 대한 의무의 길로 인도하려는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 더하시는 어려움도 그러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아플 때면 자주한다. 주님, 하고 되뇌어 몸을 건사하든 마음을 다스리든 할 때면 우매하게 굴던 나의 일상의 소소한 염려나 근심들이 하찮고 부질없게 여겨진다. 그래서 회개가 나오고 주를 바라는 마음이 곧아지는 것일까? 오늘 본문에서는 백성들을 모은다.

 

“수치를 모르는 백성아 모일지어다 모일지어다(습 2:1).”

 

‘수치를 모른다’는 것보다 더 모욕적인 게 있을까? 그럼에도 결국 자신이 부끄러움을 알지 못하면 그것으로 이미 수치스럽다. 주를 믿는 자로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면, 무감각하게 살아가고 있다면 이 또한 수치를 모르는 것이다. 그러한 저들에게 ‘모일지어다!’ 하고 소집한다. 찾아라, 굴복하라, 하는 의미를 내포하는 단어이다. 스바냐는 심판의 날 곧 진노의 날인 ‘여호와의 날’이 이르기 전에 모여 ‘하나님을 찾으라’고 권하고 있다. 나는 종종 어디가 아플 때 또한 힘들고 쓸쓸할 때 주를 바람으로 위로를 얻는다는 게 실감을 한다. 평소는 막연하던 감정이 더는 감정의 표현으로 어찌 해석할 수 없는 영역의 ‘사랑’을 생각하게 된다. 실제 사랑은 감정의 단어로 표현할 수 없다. 오히려 설레다, 바라다, 간절하다 하는 감정의 모든 표현이 관념적으로 복합된 단어라고 한다.

 

여기서 ‘모일지어다.’ 하고 소리치는 것은 1장 끝에서 하나님이 ‘이 땅 모든 주민을 급히 멸절하리라.’ 하신 데 따른 다급한 마음으로의 소집이다. “그들의 은과 금이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할 것이며 이 온 땅이 여호와의 질투의 불에 삼켜지리니 이는 여호와가 이 땅 모든 주민을 멸절하되 놀랍게 멸절할 것임이라(1:18).” 그리고 오늘 이어지는 2절 말씀은 “명령이 시행되어 날이 겨 같이 지나가기 전, 여호와의 진노가 너희에게 내리기 전, 여호와의 분노의 날이 너희에게 이르기 전에 그리할지어다.” ‘~하기 전’에 모이라는 것이다.

 

곧 그 다음에는 ‘흩어지라. 빨리 피신처를 찾아 도망하라.’ 하고 외쳐야 할 것 같다. 예루살렘이 로마인들에 의해 최후 멸망을 하리라는 선언이 있었을 때 그러한 충고가 있었다.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마 24:16).” 하여 “그러면 사람들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광야에 있다 하여도 나가지 말고 보라 골방에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26).” 하셨다. 그러나 오늘은 사정이 다르다. 하나님은 치지 않을 지도 모른다고 경고했고, 공격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앞서 예고하셨다. 하나님은 그 백성에게 자기의 분노를 돌이킬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라고 촉구하신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소환을 바라지 않았던 백성들은 누구냐 하면 ‘수치를 모르는 백성’들이다. 곧 이를 ‘원치 않는 백성’은 하나님을 원치도 않으며, 그의 이름을 기억하기도 싫어하는 자들이다. 그의 은혜나 호의를 도무지 바라지 않는다. 거기에 냉담하고, 그래서 회개하는 마음조차 없다. ‘그러나 모이라, 그러면 서로 격려하여 소망할 것이 있는지 알게 되리라.’ 하고 외친들, 그런 저들에게 ‘자기를 찾거나 구하지 아니한 자’라고 지목하시며, “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물음을 받았으며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에게 찾아냄이 되었으며 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나라에 내가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노라 하였노라(사 65:1).”

 

저들은 누구인가? 오늘 그 실체가 그대로 드러난다. 그들에게 무슨 친밀감을 가질 만한 것도 없고, 하나님께 칭찬받을 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자들이다. 이스라엘 땅은 쾌적한 땅이요, 기쁨의 땅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바람직하지 못한 나라’가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내게서 떠나라’ 하신 그런 나라가 되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본심이 아니시라,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게로 모이라. 그리하면 혹시 이 파멸을 막아낼 어떤 방도가 있는지를 알게 되리라. 모이라.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너희 자신을 낮추고, 금식하며, 기도하고 내 얼굴을 구하라. 모여서 상의하고, 이 결정적 시기에 할 일을 서로 의논하면서, 각자가 신중히 생각하여 의견을 주고 받으며, 앞으로 할 일은 만인의 동의에 의해서 하는 일, 그래서 거족적인 행동이 되게 하라.’

 

가끔 누구의 어떤 사연을 듣다 우리가 아는 하나님을 되살려 기억하게 하고 싶어진다. 대체로 저이들은 어릴 때, 한때는 믿던 자들이라고 스스로들 그리 말한다. 하여, ‘너희 자신을 살피라. 너희 자신을 심문하라. 너희 양심을 심사하고, 마음을 들여다보라. 너희 자신을 살펴 하나님을 멀리하게 하는 그 속의 죄를 찾아내라.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 갈 길을 찾으라.’ 하는 의도로 여러 각도의 말을 돌려한다. 물론 이런 말을 들으려하는 사람은 드물다. 그만큼 마음이 굳어서 자기 사연으로 굳어졌다. 억울하고 분한 심정만 가득하다. 자신은 나름 최선을 다해 살았노라고 호소한다. 안다, 우리 주님도 안다! 그러니까 우리로 이와 같은 대화의 기회를, 주를 찾을 수 있는 자리를 열어주신 것일 테니.

 

하나님이 우리와 다투시는 듯한 상황에서 주를 바랄 수 있는 게 복이었다. 나는 아플 때면 이를 직접적으로 듣는다. 누구의 안타까운 사정을 들을 때면 그게 보인다. 그래서도 나에게 보이는 게 저이에게도 들리기를 구한다. 내가 듣는 것을 저이도 볼 수 있기를 구한다. 누구라도 아픈 게 좋을 리 없고 그에 따른 치료 과정이나 그러한 상황이 달가울 리 없다. 모두가 매일반이다. 인생을 지나는 동안에는 피할 자 없다. 하여 “명령이 시행되어 날이 겨 같이 지나가기 전, 여호와의 진노가 너희에게 내리기 전, 여호와의 분노의 날이 너희에게 이르기 전에 그리할지어다(2).” 하고 오늘 말씀은 다급한 어조로 전하는 것이다.

 

‘그 날은 여호와의 큰 날이다. 이는 두려운 일이다.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도다 가깝고도 빠르도다 여호와의 날의 소리로다 용사가 거기서 심히 슬피 우는도다(1:14).” 그런데도 그 날을 대비하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 저의 자녀가 전조증상으로 흔들리고 이상하게 변해간다. 하는 일이 뒤틀리듯 혼란스럽다. 자신의 몸에서 여러 증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모든 게 주를 찾으라는 신호다. 주의 분노의 날이 이르기 전에 돌이켜 찾으라고 알려주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날이 올 지 모른다.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잠 27:1).”

 

나는 아플 때 종종 이를 확신한다. 오늘 이 하루, 이 순간이 귀한 것을 더욱 실감한다. 나중을 운운하기에는 서로가 알 수 없는 날들이다. 이에 회개하지 않는 자로서는 어렵겠다. 이런 말씀에도 전혀 개의치 않는 영혼으로는 소귀에 경 읽기다. 아무리 뭐라 한들, 모든 세계가 자기 위주로 돌아가는 사람에게는 별 수 없다.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허락된 시간’이 있다. 하나님이 자기들과 다투고 계실 때, 이때가 기회인 것을. 하나님과 화합할 수 있는 기회인 것을 아는 것이 지혜이다. 곧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가 닥쳐오기 전에, 돌아갈 수 없는 그 도중에 있을 때에는 늦는다.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오늘 이 말씀이 증거하는 핵심이다. 하여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3).” 찾고, 구하고, 숨김을 얻으라! 그러면 하나님의 자비를 얻게 될 것이다. 법칙이 그러하다. 찾으라, 그리하면 얻을 것이다. 온 국민에게 모이라고 한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런 것을 기대할 수 없다. 그 땅이 구원받으려면, 경건한 소수의 힘과 중재의 기도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그러한 자들에게 특별히 이와 같은 말씀이 내려진다.

 

우리는 ‘그 땅의 조용한 자들’이다.

 

무릇 그들은 화평을 말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평안히 땅에 사는 자들을 거짓말로 모략하며

또 그들이 나를 향하여 입을 크게 벌리고

하하 우리가 목격하였다 하나이다

(시 35:20-21).

 

그러니 우리가 뭐라 이른다 해도 저들이 듣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세상은 요란하고 삶은 부질없어서 저들도 이를 앎으로 기를 쓰는 사는 동안 누리는 데 여념이 없다. 그런 가운데 우리는 가만히 ‘여호와를 찾는다.’ 그의 사랑과 은총을 구하고, 모든 사정을 그에게 아뢴다. ‘의를 찾아야 한다.’ 이는 하나님께 가서 약속의 말씀을 붙드는 일이다. ‘구하고 찾으라.’ 하신 말씀도 그러해서다.

 

우리는 ‘겸손히 구해야 한다.’ 겸손은 하나님의 섭리를 통해 기회를 얻는다. 은혜를 베푸셔야 겸손의 미덕도 실행할 수 있다. 모든 사람에게 범사에 겸손을 보일 수 있게 된다. 그날이 그러하듯이 우리로는 또한 그럴 수 있게 하시는 주의 권능이 임할 것이다. 그리하여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를 강하게 할 것이요 너에게 복을 받게 할 것이며 내가 진실로 네 원수로 재앙과 환난의 때에 네게 간구하게 하리라(렘 15:11).” 하심을 붙든다. 곧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것을 인정할 때 이와 같은 말씀이 귀에 들어온다. 하나님은 우리를 ‘안전의 방’에 숨겨 주신다. “내 백성아 갈지어다 네 밀실에 들어가서 네 문을 닫고 분노가 지나기까지 잠깐 숨을지어다(사 26:20).” ‘엉덩이 주사’라도 한 대 맞고 와서 누워 있을 때 이와 같은 말씀이 실감난다.

 

우리가 주를 바란다는 것은 막연하지 않다. 주의 사랑은 관념적인 언어가 아니다. 그렇다고 감정의 언어로만 표현되지도 않는다. 때론 표현이 어려운데 그런 가운데서 느껴지는 어떤 복합적인 감정이 있다. 말씀은 때가 되면 이루어질 것이다. “성문이여 슬피 울지어다 성읍이여 부르짖을지어다 너 블레셋이여 다 소멸되리로다 대저 연기가 북방에서 오는데 그 대열에서 벗어난 자가 없느니라(사 14:31).” 하는 말씀으로 달려가서 저를 붙든다. 아이 일로 힘에 겨워하고, 모친의 자살로 자신의 삶을 놓아버린 어느 신학생의 중단된 신앙을 향해 외친다.

 

“수치를 모르는 백성아 모일지어다 모일지어다(습 2:1).” 하고 여기에서 기다린다. 이는 “여호와의 분노의 날이 너희에게 이르기 전에 그리할지어다.” 하는 심정이 되어 권한다(2). 그렇게 우리로 “구하라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 하심은 그리하실 것을 약속하시는 것이다(3). 오늘 말씀에서 나의 일상의 힘에 겨운 날을 생각하다, 누구의 어떤 사연을 두고 저를 위해 기도한다. 줌으로라도 같이 예배드리자. 모이자. 하고 권해보지만 이상할 정도로 그것만은 싫다는 것이다. 늘어놓고 넋두리하다 우는 게 무슨 해결이 될까? 그래놓고 감사하다고 하면 나 혼자 머쓱해서 이해가 어렵다.

 

세상의 요지경이 우리로 우리 자신을 고소하게 하는 듯하다. 때가 되면 알게 될 것이다. 그때는 이미 늦었는지도 모른다. “너는 암몬 족속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주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 성소가 더럽힘을 받을 때에 네가 그것에 관하여, 이스라엘 땅이 황폐할 때에 네가 그것에 관하여, 유다 족속이 사로잡힐 때에 네가 그들에 대하여 이르기를 아하 좋다 하였도다(겔 25:3).” 하여 예수님은  <롯의 처를 기억하라>고 하신 것이다. 더는 기회가 없는, 다시 되돌릴 수 없는, 마지막 그 어떤 기회마저 잃고 난 뒤의 일에 대하여…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모압과 세일이 이르기를 유다 족속은 모든 이방과 다름이 없다 하도다(8).” 이는 두려운 일이다.

 

믿는 자의 끝이 안 믿는 자의 끝과 같다면…

 

사람의 행사로 논하면

나는 주의 입술의 말씀을 따라 스스로 삼가서

포악한 자의 길을 가지 아니하였사오며

나의 걸음이 주의 길을 굳게 지키고

실족하지 아니하였나이다

(시 17:4-5).

 

부디 나의 고백이 이러하기를. “여호와가 그들에게 두렵게 되어서 세상의 모든 신을 쇠약하게 하리니 이방의 모든 해변 사람들이 각각 자기 처소에서 여호와께 경배하리라(습 2:11).” 행여 우리가 꿈꾸던 세상에서 “이는 기쁜 성이라 염려 없이 거주하며 마음속에 이르기를 오직 나만 있고 나 외에는 다른 이가 없다 하더니 어찌 이와 같이 황폐하여 들짐승이 엎드릴 곳이 되었는고 지나가는 자마다 비웃으며 손을 흔들리로다(15).” 이러한 결과로 마지막을 맞이하지 않기를.

 

내 영혼이 여호와를 즐거워함이여

그의 구원을 기뻐하리로다

(시 35:9).

 

우리의 기쁨은 다른 데 있다.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의 공의대로 나를 판단하사 그들이

나로 말미암아 기뻐하지 못하게 하소서

그들이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아하 소원을 성취하였다 하지 못하게 하시며

우리가 그를 삼켰다 말하지 못하게 하소서

(24-25).

 

오늘의 어떤 어려움이 오히려 어려움에 처한 영혼에게 위로가 되기를. 곤고한 자에게 기쁨이 되기를. 하여서 우리가 같이 주를 바랄 때,

 

나의 의를 즐거워하는 자들이

기꺼이 노래 부르고 즐거워하게 하시며

그의 종의 평안함을 기뻐하시는

여호와는 위대하시다 하는 말을

그들이 항상 말하게 하소서

(27).

 

그리하여,

 

나의 혀가 주의 의를 말하며

종일토록 주를 찬송하리이다

(2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