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하현. 2026. 5. 13. 06:03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습 3:17

 

진실로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 주를 아는 자들에게 주의 인자하심을 계속 베푸시며 마음이 정직한 자에게 주의 공의를 베푸소서

시 36:9-10

 

 

우리의 곤고하고 연약함이 주를 바라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바울의 표현과 같이 약한 데서 주의 능력이 나타난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그렇게 하여 “그 날에 사람이 예루살렘에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시온아 네 손을 늘어뜨리지 말라(습 3:16).” 하며 위로하는 것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17).”

 

가끔은 아주 가끔은 왜 나 같은 자를 이처럼 사랑하시는가? 하는 의문이 들 때도 있다. 너무 부족하여 연약하여 할 수 있는 게 없는 가운데서도 주의 사랑하심만큼은 확실히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길이 이 땅의 실적에 의한 게 아님을 분명히 하시는 듯도 하다. 그렇게 하여 “내가 곤고하고 가난한 백성을 네 가운데에 남겨 두리니 그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의탁하여 보호를 받을지라(12).” 오늘 우리의 형편으로는 다른 것으로 의탁할 수 없다. 받아주거나 인정하지도 않는다. 그러니 “이스라엘의 남은 자는 악을 행하지 아니하며 거짓을 말하지 아니하며 입에 거짓된 혀가 없으며 먹고 누울지라도 그들을 두렵게 할 자가 없으리라(13).” 우리로 이 시대에 남은 자로 삼으신 것을 안다.

 

혼자 사는 누가 어려운 몸을 이끌고 하루하루를 버틴다. 그렇게 더 어렵고 힘들어지면서 주를 더욱 바라고 의지하는 것을 본다. 오늘 오전 8시에 성경공부를 권하려고 한다. 오후 3시에는 아이가 온다. 같이 말씀을 읽기로 했다. 스스로 괜찮다고 하는 이들은 모두 나름의 여건을 들어 나중에, 혹은 다음에 하고 미루던 것을 저들은 기꺼이 그럼 감사하다며 응하였다. 신기하지?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마 22:14).” 하신 말씀이 더러는 확증된다. 이런저런 사연을 듣다 같이 예배를 권하고 성경공부를 원하나 저들 가운데 응하는 자는 적다. 당장 어떤 일로 타는 목마름을 느끼면서 죽을 것처럼 힘겨워하다가도 위로의 생수를 건네면 한사코 이는 거절한다.

 

당장의 현실이 우선인 것이다. “잔치할 시각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이르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하매(눅 14:17).” 어찌 저들은 하나 같이 나름의 사연으로 거절하는 것일까?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밭을 샀으매 아무래도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장가 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18-20).” 요 며칠 다녀간 이와 대화를 나눈 이들의 돌아온 대답이 그러하였다.

 

자신이 건사해야 할 아이와 일과 당장의 형편으로는 어렵다는 것인데, 여기까지 보내심을 받고 이런저런 이유에서 자신의 어려움을 토로하다 울기도 하였으나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다음에, 또는 나중에, 하고 뒤로 미루기 일쑤다. 이를 오늘 본문의 첫 구절로 읽어버리면, “패역하고 더러운 곳, 포학한 그 성읍이 화 있을진저(습 3:1).” 이들은 복수다. 다 일치하는 ‘성읍’이다. 여기서 이 성읍이 어디를 의미하는지 분명하지 않으나, 이후 선지자, 제사장, 성소 등이 언급되는 것으로 보면 예루살렘을 의미하는 것이 분명하다. 다시 말해 저마다 하나님을 알거나 믿었거나 믿고 있다고 착각하며 사는 무리들이다. 대체로 내가 만나는 사람들도 그러하다.

 

선지자 스바냐는 예루살렘의 죄악에 대해 세 가지 수식어로 정의하고 있다. 패역하고, 더럽고, 포학하다. 패역은 하나님의 뜻에 반역하여 순종하기를 거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가 명령을 듣지 아니하며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의뢰하지 아니하며 자기 하나님에게 가까이 나아가지 아니하였도다(2).” 그래서 저들을 ‘더러운’으로 표현하는데, 이것은 이교도들이 우상을 숭배하는 것 같이 의식적인 불결함을 나타낸다. “그의 선지자들은 경솔하고 간사한 사람들이요 그의 제사장들은 성소를 더럽히고 율법을 범하였도다(4).”

 

예루살렘은 외적으로 깨끗한 것 같으나 실제적으로 매우 부패하였으며 부정하였다. 이를 율법으로 강제하여 겉만 그럴듯한 의식적인 행위로는 선하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셋째로 ‘포학한’이라고 저들을 지칭하는 것은 거주하는 백성들 간의 관계를 나타낸다. 타인의 권리와 위치를 무시하고 조금의 힘만 있어도 광포하게 대하는 것을 뜻한다. “그 가운데 방백들은 부르짖는 사자요 그의 재판장들은 이튿날까지 남겨 두는 것이 없는 저녁 이리요(3).” 곧 예루살렘 거민들은 자신들의 선민의식으로 가나안 사람들이나 과부나 고아들의 권리를 무시하고 함부로 대했다.

 

이는 ‘그가 명령을 듣지 아니하기 때문이다.’ 또한 ‘자기 하나님에게 가까이 나아가지 아니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예루살렘의 대표적인 죄악은 겉으로는 다르게 패역이었다. 그들은 삶속에서 하나님의 명령-말씀을 듣지 않았다. 자신들이 소유한 재물을 의지하였다. “막데스 주민들아 너희는 슬피 울라 가나안 백성이 다 패망하고 은을 거래하는 자들이 끊어졌음이라(1:11).” 또한 그들은 인생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아가기를 거절하였다. 자신들의 생각과 방법대로 살기를 바랐다. 이전에 얼마 후 바로 연결되어 대화를 나누었던 청년은 더 이상 오지 않고 연락도 없다. 사뭇 저의 사연이 뇌리에 남아 떠오를 때면 안타까울 따름이다.

 

혼자 사는 아무도 그렇다. 저는 쉰 살이 된 아이 같다. 자기 말이나 생각만 들어주길 바란다. 사실 오늘 오전 8시로 통화하기로 하였는데 아직 성경공부를 권하지도 못했다. 저는 가끔 사소한 일상의 농담이나 이런저런 말동무로나 원한다. 뭐라 하면 일방적으로 가르치려고 한다고 싫어한다. 그러니 그냥 옳다, 좋다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내버려두자니 것도 마음에 걸리고… ‘그 가운데 백방들은 부르짖는 사자요’ 하는 표현이 내심 그의 영혼은 아닐까?

 

“그 가운데 방백들은 부르짖는 사자요 그의 재판장들은 이튿날까지 남겨 두는 것이 없는 저녁 이리요(3).” 여기서 ‘방백들’은 모든 일을 정의와 공평으로 행해야 할 지도자들이거나 귀족들이다. 그들이 백성을 잘 인도하기보다 먹이를 찾아 부르짖는 사자처럼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채우기에 급급했다. 곧 우리 안에 또는 우리가 누구를 대할 때 자신의 욕구를 따라 이를 바라고 구하는 게 너무 자연스러운 일 아닌지? 목사가 되고 느끼는 것은 가장 가까운 친구들의 외면이다. 나의 이런 시각과 말이 부담스럽다. 서로가 잘 아는 것이 걸림돌이 되는 것인지, 그들은 배를 곯은 짐승이 먹이를 남겨두지 않고 한꺼번에 먹어치우는 것처럼 세상에 대한 관심과 사는 일에 대한 연연함이 말씀을 나누며 신앙으로 하나 되는 것을 꺼려하게 한다.

 

그러다 자칫 ‘경솔하고’ 간사하게 나 역시 저들과 예전처럼 지내는 것을 좋아할 때가 있다. 악하고 방탕한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 나는 이를 가리켜 그리 말하는 것 자체가 듣기 거북하게 여겨지는 이유를 안다. 나의 가까웠던 이들은 대부분이 교회를 다니고 믿는다는 사람들이었다. 하나님을 무시하거나 거절하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간사하다’는 것은 신실하지 못한 것이다.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기란 우리가 아는 세상의 여러 유익을 포기하게 만든다. ‘술 권하는 사회’처럼 서로가 묵인하거나 동조하여 하나님을 뒤로 물리는 사이였다.

 

정작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이 교회를 어지럽힌다. 믿는다는 사람들이 진리를 왜곡한다. 거룩한 것을 싫어한다. 적당히, 다들 그러고 사는 것처럼 의식적으로 의식하고, 형식적으로 믿는 것을 꺼려하지 않는다. 신실할 수 없는 이유다. 나름은 행한다고 행하며 살고 있으니까, 그들은 율법을 준수해고 직분을 가지고도 말이나 행동, 생활 전반에서 안 믿는 자와 구별되지 않는다. 그런데 문제는 ‘그 중에 거하신 여호와’이다. 저는 ‘의로우시다. 아침마다 간단(間斷)없이 자기의 공의를 나타내시기를 원하신다. “그 가운데에 계시는 여호와는 의로우사 불의를 행하지 아니하시고 아침마다 빠짐없이 자기의 공의를 비추시거늘” 그러나 우리는 주를 믿는 자로 산다면서 “불의한 자는 수치를 알지 못하는도다(5).”

 

일련의 여러 사람이 내란재판으로 이어지며 구형을 받고 판결을 받는데도 한 사람, 진심으로 뉘우치며 용서를 구하는 이가 없다. 무슨 지시를 안 했다고 끝까지 거짓말로 일관하다 여러 정황과 증거가 밝혀지자 혹시나 형을 높게 받을까 하여 이제야 지시했다며 자백하는 자도 있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 그리 명령에 따른 것이라는 게 저의 변명이다. 그러니 모름지기 사람은 갈 데까지 가야 하는 것인지?!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이 예외 없이 불의를 행한 반면 여호와는 공의를 행하신다. ‘아침마다 공의를 나타내시거늘’ 그러나 예루살렘의 재판장들은 먹이를 탐하는 짐승 같이 아침까지 내버려두지 않는다! “그 가운데 방백들은 부르짖는 사자요 그의 재판장들은 이튿날까지 남겨 두는 것이 없는 저녁 이리요(3).”

 

그럼에도 어김없이 아침마다 해가 돋고 빛을 비추는 것처럼,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호 6:3).” 이와 같은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변개함 없으신 공의 앞에 우리는 승복해야 한다. 지속적으로 공의를 행하심은 불의한 자로 수치를 알게 하시기 위한 것이다. 불의한 자는 지도자들이 많다. 하나님께서 아침마다 공의를 드러내시나 예루살렘 거민들은 완고하여 자신들의 죄악과 수치를 깨닫지 못한다! 이러한 견줌이 긍휼이겠는데, 곧 때가 이를 것이라 여겨진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므로 내가 일어나 벌할 날까지 너희는 나를 기다리라 내가 뜻을 정하고 나의 분노와 모든 진노를 쏟으려고 여러 나라를 소집하며 왕국들을 모으리라 온 땅이 나의 질투의 불에 소멸되리라(습 3:8).”

 

곧 ‘내가 일어나 벌할 날까지 너희는 나를 기다리라.’ 하심이 두렵고 무겁게 다가와야 한다. ‘나를 기다리라.’ 하고 명령을 받는 사람은 그래도 돌이켜 주 앞에 자복할 수 있는 대상이다. 그렇지 못한 이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이를 듣지 못할 것이다. 들어도 무슨 의미인지 알지 못할 것이다. 이에 하나님은 ‘내가 뜻을 정하고, 열국을 모으리라. 온 땅이 나의 질투의 불에 소멸되리라.’ 하고 강하게 천명하셨다. “내가 뜻을 정하고” 하심은 하나님께서 결국 심판하시기로 작정하셨음을 시사한다. 심판은 열국을 통해 이루어진다. “온 땅이 나의 질투의 불에 소멸되리라.” 하나님의 우주적인 심판을 뜻한다. 예외는 없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땅 위에서 모든 것을 진멸하리라 내가 사람과 짐승을 진멸하고 공중의 새와 바다의 고기와 거치게 하는 것과 악인들을 아울러 진멸할 것이라 내가 사람을 땅 위에서 멸절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1:2-3).”

 

심판은 하나님의 목적이 아니다. 하나님은 죄를 싫어하시며 죄에 대하여 분노하시는 것이다. 온 땅이 이를 알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를 아는 자들이 근신하고 깨어서 두려워할 줄도 안다. “그 때에 내가 여러 백성의 입술을 깨끗하게 하여 그들이 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한 가지로 나를 섬기게 하리니 내게 구하는 백성들 곧 내가 흩은 자의 딸이 구스 강 건너편에서부터 예물을 가지고 와서 내게 바칠지라.” 하는 것이 심판의 결론이다. ‘그 때에 내가 너의 중에서 교만하여 자랑하는 자를 제하여’ 버리실 것이다. 그러나 ‘유다의 남은 자들’은 수치와 멸시를 당하였으나 이제 하나님께서 그들을 우선하여 회복하실 것이다. 여기서 ‘교만하여 자랑하는 자’는 상대적으로 자신들을 높이며 즐거워하는 자들이었다. 유다의 남은 자들 중에 결코 교만한 자들이 없을 것이며, 오직 겸손한 자들만 남게 될 것이다.

 

“내가 곤고하고 가난한 백성을 네 가운데에 남겨 두리니 그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의탁하여 보호를 받을지라(12).” 이에 돌아온 남은 자들은 교만한 자들이 아니라 ‘곤고하고 가난한 백성들’이다. 이것은 종말론적 의미를 지닌다. 있는 그대로 예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자들이다. 우리가 누려야 할 ‘팔복’ 중에서 첫 번째와 동일하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 자들은 심령이 가난한 자들이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 5:3).” 하여 저들은 “애통하는 자”들이었고 이제는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4).” 그렇게 ‘곤고하고 가난한 자들’의 구원 사상은 신약뿐 아니라 구약도 뼈대처럼 강한 진리다.

 

오늘 우리의 어려움이 우리로 주 앞에 더욱 의지하게 한다. 하여서 이런 우리로 하나님이 기뻐하신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습 3:17).” 그러니 오늘의 현실로 기죽을 거 없다. 손을 늘어뜨리고 낙심할 이유가 없다. “그 날에 사람이 예루살렘에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시온아 네 손을 늘어뜨리지 말라(16).” 주가 계신다. 우리로 주를 바라게 하신 이가 늘 항상 함께 하셨다. 오늘의 사정과 우리의 형편이 우리로 겸손을 배우게 한다. 주를 의뢰하고 의탁하게 한다.

 

겸손한 자는 먹고 배부를 것이며

여호와를 찾는 자는 그를 찬송할 것이라

너희 마음은 영원히 살지어다

 

온유한 자를 정의로 지도하심이여

온유한 자에게 그의 도를 가르치시리로다

 

여호와는 궁핍한 자의 소리를 들으시며

자기로 말미암아 갇힌 자를 멸시하지 아니하시나니

 

여호와께서 겸손한 자들은 붙드시고

악인들은 땅에 엎드러뜨리시는도다

(시 22:26, 25:9, 69:33, 147:6).

 

그리하여 오늘도 겸손히 하나님을 신뢰하며 의지하고, 하나님의 보호를 기대하는 자들이 복이 있다. “가난한 자의 장자는 먹겠고 궁핍한 자는 평안히 누우려니와 내가 네 뿌리를 기근으로 죽일 것이요 네게 남은 자는 살륙을 당하리라(사 14:30).” 주 앞에 우리의 궁핍과 좌절과 더러는 고통으로 일그러진 영혼으로 엎드릴 때,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습 3:17).” 하심을 붙들며,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에 있고

주의 진실하심이 공중에 사무쳤으며

주의 의는 하나님의 산들과 같고

주의 심판은 큰 바다와 같으니이다

여호와여 주는 사람과 짐승을 구하여 주시나이다

(시 36:5-6).

 

이에 오늘도,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하심이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사람들이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피하나이다

 

주를 아는 자들에게 주의 인자하심을 계속 베푸시며

마음이 정직한 자에게 주의 공의를 베푸소서

(7, 10).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