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

하현. 2026. 5. 14. 05:57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희는 자기의 행위를 살필지니라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성전을 건축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것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으리라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학 1:7-8

 

주께서 내 귀를 통하여 내게 들려 주시기를 제사와 예물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하지 아니하신다 하신지라 그 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

시 40:6-7

 

 

바벨론에 포로로 있던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노래를 못 부르며, 예언자도 없다’는 것이 불만이었다. “우리의 표적은 보이지 아니하며 선지자도 더 이상 없으며 이런 일이 얼마나 오랠는지 우리 중에 아는 자도 없나이다(시 74:9).” 그런데 실상은 그들이 예언자들을 조롱한 벌이었다. 그들의 귀환 중에 예언자들에 대한 기록이 없다. 구약의 예언은 소멸하기 전에 마지막 몇몇 찬란한 광채를 뿜을 참이었다. 그리하여 하늘로부터 내린 특별한 사신의 임무를 띤 첫 인물이 학개이다. 당시는 “다리오 왕 제 이 년 여섯째 달 곧 그 달 초하루에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로 말미암아 스알디엘의 아들 유다 총독 스룹바벨과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1)” 하고 말씀이 문을 연다.

 

다리오 왕 이 년 유월 곧 그 달 초하루면 주전 522년으로 이 연대는, 고레스가 스룹바벨을 총독으로 하여 포로인 유대인을 귀환시킨 연대를 주전 538년으로 보았다. 그럼 무려 18년이 지났음을 암시한다. 스룹바벨을 위시하여 귀환한 유대인들은 18년이란 기간 동안 성전을 완공하지 못한 상태로 있었다. 선지자 학개가 본 예언을 시작하면서 연대를 분명하게 밝힌 의도는 귀환한 유대인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성전을 완공하지 못했는지를 지적하기 위한 것이다. 한편 ‘유월’은 히브리 월력으로 유다의 추수시기에 해당한다. 또한 ‘초하루’는 새로운 달을 나타내는 월삭으로 거룩한 날이었으며 안식해야 하는 날이었다. 그날은 사람들이 모여 희생 제사를 드리는 날이었다.

 

하나님은 이날 선지자 학개를 통해 모인 사람들에게 자신의 말씀을 선포하셨다.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로 말미암아” 할 때 이와 같은 표현은 예언서에서 찾아보기 힘든 문구이다. 그것은 오직 본문과 말라기에서 나온다. “여호와께서 말라기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 경고라(말 1:1).”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곧 예언자 학개로 하여금 자신의 말씀을 계시하게 하셨다는 것을 시사한다. 이를 “스알디엘의 아들 유다 총독 스룹바벨과 여호사닥이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에게 임하니라” 즉 학개가 전할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 수신자들이 누구인지를 알려준다.

 

여기서 ‘스알디엘의 아들 유다 총독 스룹바벨’이라는 표현은 약간의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대상 3장 16-19절에서 보면 스룹바벨의 아버지는 브다야이며 스알디엘은 아버지 브다야의 형제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숙부인 스알디엘이 스룹바벨의 아버지로 되어 있는 것은 아마도 스룹바벨이 아들이 없었던 스알디엘의 장자로 입양되었던 까닭이다. 동시에 스룹바벨은 다윗 왕조에 속한 여호야긴의 자손이었다.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예수아’이다. “요사닥의 아들 예수아와 그의 형제 제사장들과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그의 형제들이 다 일어나 이스라엘 하나님의 제단을 만들고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율법에 기록한 대로 번제를 그 위에서 드리려 할새(에스라 3:2).”

 

다리오 히스타스레스의 통치는 바사 제 3대 왕의 통치 제 2년에 이 예언자 학개가 파견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임했다. 하나님은 그를 통해 유대 지도자들에게 말씀을 전하셨다(1). 그 최고의 통치자는 ‘스룹바벨’ 곧 ‘스알디엘의 아들’이었다. 그는 다윗 가문 출신이다. 그는 포로 귀환 시 유대 총사령관이었다. 교회에는 ‘여호사닥의 아들 여호수아’가 있었는데, 그가 대제사장이었다. 이들은 지위 높은 자들이요 선량한 자들이었다.

 

곧이어 당시의 유대인들의 죄를 알린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여 이르노라 이 백성이 말하기를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시기가 이르지 아니하였다 하느니라(2).” 그들은 포로생활에서 떠나오자마자 제사를 위한 제단을 만들었고, 1년도 안 가서 성전의 기초를 놓았다. “건축자가 여호와의 성전의 기초를 놓을 때에 제사장들은 예복을 입고 나팔을 들고 아삽 자손 레위 사람들은 제금을 들고 서서 이스라엘 왕 다윗의 규례대로 여호와를 찬송하되(스 3:10).” 그 때에는 그 일에 열심인 것 같았다. 그런데 바사 왕궁의 금지령이 작용하고 있었고, 그 금지령은 그런 일을 계속하지 못하게 했다. 저들은 사실상 바사 왕의 휘하에 있었으며 그 힘에 굴복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런 통치에서 벗어나고도 저들은 성전을 다시 지을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가 다시금 그들의 의무를 깨우침 받게 된 것이다. 그들은 서로 이런 말을 했다.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시기는 아직 오지 않았다. 우리의 손실이 회복되지 않았다. 우리 같은 초보자들에게는 그 일이 너무 어렵다. 먼저 우리의 집을 짓고, 그 다음에 교회 건물을 의논하자. 그러는 동안에는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랬듯이 그냥 제단에다가 제사를 드리자.’ 하는 것으로 자신들을 합리화했다. 오늘 본문은 이를 지적하는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성전을 짓지 않겠다고 말하지 않았다. 다만 ‘아직은 때가 아니다. 좋은 때가 오리라.’ 하는 식으로 우선은 회피하고 뒤로 미루었던 것이다.

 

이러한 태만이 오늘 예언자 학개를 통해 하나님의 지적과 함께 어떤 벌이 따를 것인지를 알게 한다. 우선은 그들 일상의 수확이 구멍 뚫린 전대 같을 것이다. “너희가 많이 뿌릴지라도 수확이 적으며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실지라도 흡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일꾼이 삯을 받아도 그것을 구멍 뚫어진 전대에 넣음이 되느니라(6).” 이를 오늘 우리의 생활에서도 그대로 찾아볼 수 있다. 보면 어려울 때 가장 먼저 줄이는 게 교회 헌금이나 헌신이다. 그러면서 스스로 좀 나아지면 다시 회복할 것이라고 스스로를 합리화한다. 그런데 그렇듯 모은 것들이 “삯을 받아도 그것을 구멍 뚫어진 전대에 넣음이 되느니라.” 같이 오히려 늘 빈손이다.

 

나는 한바탕 요란하게 이 소란을 겪었다. 그때는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하나님을 몰아치시며 초자연적인 역사로 나를 휘감으실 때였다. 결국은 파산절차를 밟다 회생을 신청하였고 5년 간 매월 60만원 돈을 매달 물어가면서 근근이 신대원을 마칠 수 있었다. 바로 그 앞전에 생활이 어려워지자 나는 십일조를 끊었고 주일헌금도 반으로 줄였다. 그러면서도 쓸 건 다 쓰면서도 말이다. 그 모든 시절이 오늘의 나로 두 손 들고 살게 하였다. 나의 수입이란 게 없지만 나는 나에게 들어오는 모든 것을 교회로 돌린다. 가령 누가 생일이나 어떤 축하의 의미로 주는 돈은 모두 다 헌금이다. 나의 한 달 가용하는 돈은 목회활동비로 10만원이다. 가끔 아이나 누가 성경공부를 하고 같이 나가 차를 한 잔 할 때 쓴다.

 

그렇듯 “너희가 많은 것을 바랐으나 도리어 적었고 너희가 그것을 집으로 가져갔으나 내가 불어 버렸느니라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것이 무슨 까닭이냐 내 집은 황폐하였으되 너희는 각각 자기의 집을 짓기 위하여 빨랐음이라(9)” 하는 말씀이 나의 지나온 시절을 돌아보게 한다. “그러므로 너희로 말미암아 하늘은 이슬을 그쳤고 땅은 산물을 그쳤으며 내가 이 땅과 산과 곡물과 새 포도주와 기름과 땅의 모든 소산과 사람과 가축과 손으로 수고하는 모든 일에 한재를 들게 하였느니라(10-11).” 이는 여력이 안 된다는 이유로 교회를 등한히 할 때 오는 생활의 어려움이다. 이러한 어려움이 복인 것은 그리하여 깨달을 때이다.

 

하나님이 섭리를 통해 그들을 뒷자리에 머물러 있게 하고, 그들이 성전을 짓지 아니함으로써 막으려 했던 가난이 성전을 짓지 아니함으로 더욱 심해졌다. 그 심판은 그들의 죄에 마땅한 보응이 되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만이 아니라 그의 징계를 통해 그의 뜻과 의미를 깨닫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심판이 아니라 그의 손의 심판을 통해 다시 돌이키려 하시는 하나님의 예언의 의미를 바로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그들을 다시 포로 생활로 보내거나 외국 군대를 끌어들이지 않으셨다. 다만 그들이 뿌리는 ‘씨앗’에 수확의 축복을 주지 않으셨다. ‘그들은 많이 뿌렸다.’ “너희가 많이 뿌릴지라도 수확이 적으며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실지라도 흡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일꾼이 삯을 받아도 그것을 구멍 뚫어진 전대에 넣음이 되느니라(6).” 경작지도 많았다. 오래도록 땅은 묵고 있었고, 안식을 누렸다. 그들은 그런 땅에 씨를 많이 뿌렸고, 그것으로 많은 수확을 거두리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실망이다. ‘그들은 수입이 적으며 아주 적었다.’ 그들은 최선을 다했으나, ‘그것은 적었다(9).’

 

그들이 실망했다. “그러므로 너희로 말미암아 하늘은 이슬을 그쳤고 땅은 산물을 그쳤으며 내가 이 땅과 산과 곡물과 새 포도주와 기름과 땅의 모든 소산과 사람과 가축과 손으로 수고하는 모든 일에 한재를 들게 하였느니라(10-11).” 그리하신 이가 하나님이심을 밝힌다. 하늘은 이슬을 그쳤다. 구름의 열쇠를 쥐고 계신 분이 구름을 닫아 비가 내리지 않게 하셨다. 그래서 땅도 그 산물을 그쳤다. 하늘이 놋이 되었다면, 땅은 쇠같이 되었다. 하나님은 자연의 반응을 통해 우리로 항상 주를 의지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신다. ‘더 이상 하나님과 그의 섭리를 바랄 필요가 없다.’ 하고 생각하지 못하게 하신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날에 내가 응답하리라 나는 하늘에 응답하고 하늘은 땅에 응답하고 땅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에 응답하고 또 이것들은 이스르엘에 응답하리라(호 2:21-22).”

 

하나님의 응답에 주목해야 한다. 내가 땅에 가뭄을 불렀다. 기후가 극히 뜨겁게 하였다. 땅의 산물이 모두 타버리게 했다. 태양의 열은 식물에게 생명을 주며, 봄에는 땅의 얼굴을 새롭게 해 준다. 그러나 그것이 지나치면 모든 것을 망친다. 이 가뭄이 ‘산 위에’ 있다. 처음에는 멀리 있어 설마, 하겠지만 곧 산들은 그들의 목장을 덮칠 것이고 양떼로 굶게 할 것이다. 가뭄이 곡식에, 새 포도주에, 기름에 연쇄적으로 영향을 끼친다. 그래서 모든 것이 뜨거운 기운으로 망쳐진다. 하나님이 왜 이러시는지, 그 원인을 찾아야 한다. 결국 돌아오면 주리라고 약속했던 은혜를 하나님이 거절하신 것인가? 백성들이 거절한 것인가? 이를 회복할 수 있는 길은 하나다. 다시 돌아서야 한다. 그러기만 하면,

 

“시온의 자녀들아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그가 너희를 위하여 비를 내리시되 이른 비를 너희에게 적당하게 주시리니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예전과 같을 것이라 마당에는 밀이 가득하고 독에는 새 포도주와 기름이 넘치리로다(욜 2:23-24).”

 

보면 어떤 이는 너무 잘 돼서 교회를 떠나 있고, 어떤 이는 어려움이 봉착되고 떠나 있다. 어쨌든 그런 우리로 돌아오게 하시려고 하나님은 이를 일깨우신다. ‘그것은 내 집이 황무하였기 때문이니라.’ 하나님의 신호다. ‘성전의 기초석은 놓여졌다.’ 하고 주가 일깨우신다. ‘그러나 건축이 계속되지 아니했다.’ 하는 게 오늘 본문의 발단이다. ‘모든 사람이 자기 집으로 달려갔다. 그 일을 버려 두고 말이다.’ 먼저들 자기 살 길을 찾는 것은 당연한데, 보면 또 해야 할 것이라고 하면서 명절 때면 예전과 같이 인사로 과일을 돌린다. 어디 경조사에는 남의 이목을 의식해서 아낌이 없다. 그런데 ‘하나님의 전에 대해서’ 우선적으로 줄이거나 인색해진다.

 

이에 학개는 희망을 주는 설교를 한다(12-15). “그 때에 여호와의 사자 학개가 여호와의 위임을 받아 백성에게 말하여 이르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스알디엘의 아들 유다 총독 스룹바벨의 마음과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마음과 남은 모든 백성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그들이 와서 만군의 여호와 그들의 하나님의 전 공사를 하였으니 그 때는 다리오 왕 제이년 여섯째 달 이십사일이었더라(13-15).” 저들의 복종은 하나님의 격려를 받으리라고 했다. 이 설교를 들은 모든 사람들이 거기에 감동했다. 총독 스룹바벨은 그 당시 뛰어난 인재였다. 이 같은 책망에 대해 자신의 옛 공적을 주장하지 않았다. 대제사상 여호수아 역시 즐거이 학개의 충고와 교훈을 받았다. ‘백성의 남은 자들’ 모두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음성을 들었다.’

 

곧 그들은 명령의 멍에를 기꺼이 진 것이다.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남은 모든 백성이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와 선지자 학개의 말을 들었으니 이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를 보내셨음이라 백성이 다 여호와를 경외하매(12).”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 한 구절의 의미다.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와 선지자 학개의 말을 들었으니” 곧 그들은 그 예언자를 하나님의 사신으로 우러렀고, 그의 말은 여호와의 말씀이라고 받았다. 그들은 그의 말을 인간의 말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서 돌이킬 수 있었다.

 

주께서 내 마음을 넓히시면

내가 주의 계명들의 길로 달려가리이다

(시 119:32).

 

이 또한 주가 행하심이다. 공포에 사로잡혀 좌절하지 않을까 하여, 하나님은 그들의 마음을 분발시키셨고, 유쾌하고 담대해지게 하셨다. 그들은 온갖 정력을 다해 자기들의 사업에 열중하게 되었다. 각자가 각자의 능력에 따라 그 선한 사업을 추진하는데 노력했다. 하나님이 은총을 베푸사 자기 백성과 맺으셨던 계약 관계를 생각한다면, 그들은 그를 위해 분발하고, 자기들 중에 세워질 하나님 나라의 권세를 위해 투신할 수 있었다. 오늘 이 교회를 이뤄가는 데 있어 나에게 우선 필요한 말씀이다. 며칠씩 종일 혼자 교회를 지키며 앉았을 때면 희망이 없는 것 같다. 저녁에 들어가면 아내는 버릇처럼 아무 일 없었어? 하고 묻는다.

 

어제는 아이가 순종하여 퇴근하고 들러 같이 에베소서 1장을 30분 정도 나누었고 기도하다 돌아갔다. 같은 마음으로 오전에 그리하려 권하였던 이는 소망하는 바가 서로 다른가,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다음으로 미뤘다. 어떠하든지 나는 권할 뿐이고 하고 안 하고는 저들 몫이다. 나 역시 이는 같다. 오늘 선지자 학개가 이 설교를 한 것은 6월 1일의 일인데, 3주 후에, 그들이 모두 ‘자기 하나님의 집을 짓느라’고 분주해졌다. 시간을 잃은 자들은 그만큼 시간을 서둘러야 할 필요가 있다. 여전히 한가하고 뒤로 미루는 자들에게는 뭐라 할 말이 없다. 벌써들 쉰, 예순이 지나고 있는 데도 아직 남은 날이 많다고 여기는지 다음으로 미룬다.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

(시 40:1-2).

 

묵묵히 주를 바람은,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

(3).

 

하여 우리는 믿음의 열정과 신앙의 불이 꺼지지 않게 해야 한다. 빛으로 오신 이가 생명이 되신 것 같이 우리도 그리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여호와를 의지하고

교만한 자와 거짓에 치우치는 자를

돌아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4).

 

나는 그렇듯 가급적이면 지나간 사람을 되돌려 저들 삶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행하신 기적이 많고 우리를 향하신

주의 생각도 많아 누구도 주와 견줄 수가 없나이다

내가 널리 알려 말하고자 하나 너무 많아

그 수를 셀 수도 없나이다

(5).

 

나는 이제 이와 같이 하나님으로 얻은 경험과 생활의 고백을 나누기를 원한다. 매일 매순간이 앞으로 나아가는 걸음이어야지 뒤로 물러서는 뒷걸음이어서는 안 된다. 요즘 아흔이 넘은 장모는 부쩍 옛날 사람들, 그 우상의 땅에 있던 자들을 되찾으며 교류하려 한다. 어제는 가정예배를 드리며 그러한 문제를 지적하였는데, 노인의 특징이 점점 더 듣는 데는 인색해지는 것 같다.

 

그 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

(7-8).

 

그리하여

 

여호와여 주의 긍휼을 내게서 거두지 마시고

주의 인자와 진리로 나를 항상 보호하소서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나

주께서는 나를 생각하시오니

주는 나의 도움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라

나의 하나님이여 지체하지 마소서

(11, 1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