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내가 너희와 언약한 말과 나의 영이 계속하여 너희 가운데에 머물러 있나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학 2:5
내 원수가 나를 이기지 못하오니 주께서 나를 기뻐하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시 41:11
주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을 느낀다. 삶으로 이를 증명한다. 애굽, 나의 옛 생활에서 놓여나서 사는 동안 주의 영이 나로 강권하심을 안다. 하여 나의 원수, 어떤 어려움으로도 나를 이기지 못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이를 오늘 새롭게 성전을 건축하는 데서 축복을 찬송한다. “일곱째 달 곧 그 달 이십일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1).” 7월 21일, 건축자들이 공사를 약 일 개월 간 했을 때였다. 하나님의 사업에 성실한 자들은 그 일에 전진하라는 새로운 격려를 받았다. ‘수레바퀴를 움직이라, 그리하면 하나님이 거기에 기름을 치실 것이다.’ 마치 ‘요단을 건너라, 하나님이 강을 마르게 하실 것이다.’
더러 우리더러 앞서 순종하게 하신다. 넘실거려 창궐한 물을 딛고 들어서라는 데서 뒤로 물러날 것인지 앞으로 나아갈 것인지… 다 녹슨 수레바퀴를 먼저 굴릴 것인지 기름칠을 먼저 구할 것인지…. 더러는 우리의 현실이 우리로 결정을 요구한다. 이때 “너는 스알디엘의 아들 유다 총독 스룹바벨과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남은 백성에게 말하여 이르라(2).” 곧 ‘이르라’ 하신다. 스룹바벨과 여호수아와 남은 백성은 ‘여호와의 음성을 청종한’ 바로 그 사람들이다.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남은 모든 백성이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와 선지자 학개의 말을 들었으니 이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를 보내셨음이라 백성이 다 여호와를 경외하매(1:12)” 하나님이 그들 마음을 분발시키셨던 바로 그들이다. “여호와께서 스알디엘의 아들 유다 총독 스룹바벨의 마음과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마음과 남은 모든 백성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그들이 와서 만군의 여호와 그들의 하나님의 전 공사를 하였으니(14).
앞서 그들을 의기소침하게 했던 것은 그 기초를 놓고 난 다음에도 여전히 그들에게 방해거리가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솔로몬이 세웠던 그런 화려한 성전을 지을 수는 없었다. 오늘 본문은 이를 환기시킨다. “너희 가운데에 남아 있는 자 중에서 이 성전의 이전 영광을 본 자가 누구냐 이제 이것이 너희에게 어떻게 보이느냐 이것이 너희 눈에 보잘것없지 아니하냐(2:3).” 곧 저들은 이미 70년의 포로 생활로 그 세대가 지나갔다. 앞서 솔로몬의 영광이 깃든 성전은 폐허가 되었다. 다시 그 칫수를 정하였을 때 많은 사람들은 슬픔의 눈물을 흘렸다.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나이 많은 족장들은 첫 성전을 보았으므로 이제 이 성전의 기초가 놓임을 보고 대성통곡하였으나 여러 사람은 기쁨으로 크게 함성을 지르니(스 3:12).”
이제 솔로몬 성전이 무너진 지 70년이 지났다. 그 성전을 목격하고 그 모습을 기억하는 자들도 더러 있었다. 어떤 자는 그 성전에 입혀진 황금을 추억했다. 어떤 자는 보석과 현관과 기둥들을 기억했다. 그런데 그런 것이 지금 어디에 있는가? 노인들은 이전 시대의 찬란했던 업적을 들추어 추억한다. 추억은 그리움을 기반으로 하는 우울함의 또 다른 배면이다. ‘예전이 지금보다 낫다’는 말은 어리석다. “옛날이 오늘보다 나은 것이 어찜이냐 하지 말라 이렇게 묻는 것은 지혜가 아니니라(전 7:10).” 오직 예전에도 나쁜 점은 있었고, 지금에도 좋은 점은 있을 것이다. 그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라는 것이다.
외형적으로 초라한 그 사업을 계속하라는 격려다. “그러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스룹바벨아 스스로 굳세게 할지어다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야 스스로 굳세게 할지어다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 땅 모든 백성아 스스로 굳세게 하여 일할지어다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학 2:4).” 그러나 지금, 이 현실을 놓고 판단하고 초라하게 여겨 이도저도 아닌 것처럼 굴고 있는 자들이 있다. 이에 ‘스룹바벨아, 굳세어라. 여호수아야 굳세어라.’ 하고 당시 그들, 지도자들은 자기들이 바라는 만큼 잘 할 수는 없는 것이라고 각오해야 한다. 자기들이 할 수 있는 만큼은 잘할 수 있다. 오늘을 견디는 힘이 된다. 이와 같은 것으로 주신 이를 인정하는 게 된다. 찬송이 된다.
이와 같은 격려에는 근거가 있다. 하나님 자신이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내가 너희와 언약한 말과 나의 영이 계속하여 너희 가운데에 머물러 있나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지어다(5).” 그러므로 ‘너희는 두려워 말라’는 것. 우리에게도 같이 계시는 하나님은 ‘만군의 주님’이시다. 우리의 모든 두려움을 무찌르기에 넉넉하시다. 여전히 또 무력하고 할 수 있는 게 없는 것 같은 때도, 나는 다만 주어진 상황을 충성으로 받아낸다. 고작 몇 명이 됐든지 설교원고를 일주일 내내 작성한다.
아이와 성경공부를 할 때도 알아듣든지 못 알아듣든지, 주가 주신 마음으로 아이의 열심을 축복한다. 나의 현실을 받아낸다. 아내의 무릎 때문에 병원에 갔다가 얼결에 나 역시 진찰을 받았다. 사진으로 보는 나의 인체는 비루하였다. 인위적으로 세워놓은 한쪽 어깨는 건드릴 수 없다. 각각 하나씩 나의 다리와 팔을 그 구실을 두 배로 다하며 보기에도 힘에 겨운듯하다. 의사도 딱히 다른 말은 없고 늘 통상적인 말들, 잘 관리하면서 살라는 정도이다. 그렇듯 실망스럽고 낙심이 될 법도 한데 나는 여전히 고만고만한 것으로도 위로가 되었다. 그것을 가지고 하루를 살며, 내게 맡긴 이 자리를 지켜낸다.
유대인들에게도 저들을 치려하는 무리가 있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만군의 하나님이 함께 계셨다. ‘그가 채찍으로 저들의 범죄를 징책하시나’ 그의 신실하심은 결코 포기하지 않으신다. 그들로 바벨론에게서 나올 마음을 먹게 하신 이도 하나님이시었다. “이에 유다와 베냐민 족장들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그 마음이 하나님께 감동을 받고 올라가서 예루살렘에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고자 하는 자가 다 일어나니(스 1:5).” 곧 나로 결국은 애굽 같은 옛 생활을 떠나게 하신 것도, 오늘의 형편과 사정에서 이와 같은 목회를 감당하게 하신 것도, 그 한 성령이 지금 성전을 건축할 마음을 주신 것도 다 동일하다. “여호와께서 스알디엘의 아들 유다 총독 스룹바벨의 마음과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마음과 남은 모든 백성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그들이 와서 만군의 여호와 그들의 하나님의 전 공사를 하였으니(학 1:14).”
그런 거 보면 누가 교회로 오거나 전화로나마 상담을 하고 자신의 어려움을 토로하게 하시는 이도 하나님이시다. 내가 나서서 홍보하고 사람을 들쑤시며 다닌다고 될 일이 아니다. 그렇게 해서 누구는 가까운 교회에 등록을 하고 새신자 성경공부도 시작했다는 반가운 소식도 듣는다. 이번 달도 어찌 감당하나 하고 현실적인 염려를 할 때도 주가 채우시는 것을 알게 된다. 곧 목회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은총으로 이뤄진다. 주의 영으로 인도하신다. 때로는 강권하심으로 이끄신다. 머잖아 메시야가 있게 되리라는 것을 암시한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조금 있으면 내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를 진동시킬 것이요 또한 모든 나라를 진동시킬 것이며 모든 나라의 보배가 이르리니 내가 이 성전에 영광이 충만하게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2:6-7).”
‘조금 있으면… 진동시킬 것이요.’ 여기서 ‘조금 있으면’은 곧, 다시 한 번, ‘다시 한 번 조금 있으면’을 뜻한다. 이것은 종말론적 어구이다. ‘짧은 시간’을 가리킨다. 이것이 역사적으로는 터무니 없는 긴 시간 같으나 ‘곧 임박 할’ 일이다. 마치 내가 언제 환갑이 될 나이가 되었다. 나의 60년의 세월이 까마득하다가도 한 획 같이 짧게 여겨진다. 어제도 나의 인체를 사진으로 보며 의사의 말처럼 ‘퇴행성관절염’이라 하여 퇴행이란 말이 오히려 신선하게 들렸다. 하긴 저 다리와 팔이 나로 이 세월을 살아있게 움직였겠구나, 하는 생각으로 경이로웠다.
곧 어떤 사건을 의미한다거나 역사적으로 그것과 연결될 만한 명확한 사건을 요구하지만 짧은 찰나의 시간을 지난 뒤에나 그렇게 여겨진다. 마치 우리의 시간의식이 직선으로 이어져서 아흔이 넘은 노모의 시간은 길고 혹독하였을 먼 옛날이야기에서부터 들려온다. 그러나 그것은 도리어 그리스도의 도래를 가리킨다. 우리로 얼른 연관 짓게 한다. 오늘 본문의 이로부터 수백 년 후의 일인데도 곧 있을 장차, 장래의 일이다. ‘조금 있으면’ 이 짧은 기간을 가리키기 때문에 수백 년 후에 있을 그리스도의 도래는 상관이 없다고 여겨지기도 하겠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간은 ‘천 년이 하루 같다,’ 더러 우리가 살면서 ‘하루도 천 년 같을 때가 있는 것처럼.’
그의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의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복이 있도다
(시 2:12).
그때에 온 우주가 진동하며 하나로 움직인다. 곧 목회를 초자연적인 은총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그 이상의 현실들이 켜켜이 쌓여 오늘에 이르렀다. 나의 보잘것없는 날들도 돌아보면 모든 게 다 은혜 아니었던 게 없다. 어릴 적 나환자촌에서의 생활과 가난으로 인해 지하와 옥상을 오가며 난감하였던 생활도 이제는 돌이켜 볼 때 은혜이었다. 그럼에도 그릇 행하여 문학을 하고 시를 쓰겠다고 어울리며 배회하던 사람들 사이에서도 하나님은 한 사람을 두어 나로 신학부에 편입하여 수업하도록 모든 학기의 학비를 충당하게 하신 일도 거짓말 같은 사실이다.
그러다 또 어긋나서 십 수 년을 엇나가다 주의 강권하심으로 붙들렸을 때도 나는 염치없게도 신대원 6학기 내내 학비를 한 번도 내 돈 주고 낸 적이 없다. 물론 그때는 글방에 아이들도 적당하여 여느 봉급쟁이 수준의 수입은 있었는데, 회생 중이라 매월 이를 감당하고 글방을 운영하고 살림에 보태는 데 적당하게 하셨다. 딱 그만큼, 그러다 글방이 교회가 되면서 그곳에서 예배를 드리는 순간 마치 모든 게 거짓말처럼 정리되고 증발하여 수입이 끊겼다. 곧 내가 힘써 돈을 벌던 삶에서 벗어나게 하셨다. 그리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래저래 만난 사람들이 마치 바람 같아서 다들 흩어져 사라진 듯한데, 저들의 기도와 후원으로 교회는 유지되고 있다. 같이 예배는 드리지 못해도 그리하는 이들이 어떤 마음으로, 어째서, 어떤 계기로 그리하는지 나는 모른다. 다만 말씀은 이르기를,
“나의 영이 계속하여 너희 가운데에 머물러 있나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하시는 오늘 말씀의 근거가 나의 생활에 깃든다. 이 교회를 유지한다.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하신다. 그렇게 ‘진동시킬 것이요’ 하는 지속적인 ‘진동’이 우리 안에서 요동친다. 이 우주적 대진동은 하나님의 역사와 개입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여호와의 날에 우주적인 대변동이 일어날 것이고, 하나님의 역사로 인해 온 세계가 영향을 받게 될 것인데, 이것은 “그 때에는 그 소리가 땅을 진동하였거니와 이제는 약속하여 이르시되 내가 또 한 번 땅만 아니라 하늘도 진동하리라 하셨느니라(히 12:26).” 하심으로 오늘도 이렇게 곧 그리스도의 도래와 깊은 연관을 묵상하게 한다.
그리하여 ‘만국의 보배가 이르리니 내가 영광으로 이전에 충만케 하리라.’ 하심은 우리 안의 ‘열망’ 혹은 어떤 ‘사모하는 마음’ 또는 ‘귀중히 여기는 무엇’을 가리키는 게 보배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우리 안의 성령으로 우리로 삶의 현실에서 만나게 하는 하나님의 실상이다. 즉,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전에 임하실 때 온전한 영광으로 가득 차게 될 것을 시사한다. 또한 이것이 은과 금과 같은 귀중한 것들을 가리킨다. 곧 만국이 가져오는 재물로 지은 하나님의 성전의 영광이다. 이전의 솔로몬이 지었던 성전보다 훨씬 더 영광스러울 것을 시사한다. “이 성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이 곳에 평강을 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9).”
이것으로 오늘도 교회는 여기 있다. 나는 이를 지킨다. 찾는 이를 맞고 저의 상한 심령을 두고 같이 듣고 위하여 기도한다. “그 때에 네가 보고 기쁜 빛을 내며 네 마음이 놀라고 또 화창하리니 이는 바다의 부가 네게로 돌아오며 이방 나라들의 재물이 네게로 옴이라(사 60:5).” 남들 눈에는 교회 같지도 않을 작은 터이나 이곳에서 전하여지는 말씀으로 상한 영혼이 돌이켜 온전하여지고, 침체된 영혼이 다시금 새 힘을 얻어 주의 길을 갈 수 있다면… ‘열방이 재물을 가지고 오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자신들의 소중한 것으로 주를 찬양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오늘도 그리스도를 고대하며 바라게 되는 믿음으로 오늘을 또 감당한다.
어제는 사위 첫 번째 생일이라 집으로 불러 같이 저녁을 먹었다. 딸애와 둘이 하나 되어 이룬 가정이 작은 교회인 것을 말해주었다. 오늘 여기 하나님의 성전을 짓기 위해 재물을 가지고 오는 백성들처럼 우리는 오늘도 저마다의 성전을 지으며 보존하는 사명으로 산다. 그렇게 말씀은 선포되어 “너는 유다 총독 스룹바벨에게 말하여 이르라 내가 하늘과 땅을 진동시킬 것이요 여러 왕국들의 보좌를 엎을 것이요 여러 나라의 세력을 멸할 것이요 그 병거들과 그 탄 자를 엎드러뜨리리니 말과 그 탄 자가 각각 그의 동료의 칼에 엎드러지리라(2:21-22).”
누구도 우리의 길을 막을 수 없다. 가난도 장애도 어떤 불운한 일들도 우리를 굴복시키지 못하게 하실 것이다. ‘네가 직접 고하라.’ 하고 이른다. 하나님은 이에 말씀하셨다. ‘그에게 가서, 그와 그의 남은 자에게 일이 잘 될 것임을 알게 하라.’ 그리하여 “그것으로 땅 끝을 붙잡고 악한 자들을 그 땅에서 떨쳐 버린 일이 있었느냐(욥 38:13).” 우리는 그리 살아왔고 살아간다. 하여,
어떤 사람은 병거,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시 20:7).
세상 그 무엇도 우리를 굴복시킬 수 없다. 이 길을 가는 동안에 주를 더욱 바랄 뿐이다. 그러할 때, “너희는 오늘 이전을 기억하라 아홉째 달 이십사일 곧 여호와의 성전 지대를 쌓던 날부터 기억하여 보라(학 2:18).” 여기까지 온 것이 주의 은혜가 아닌 것이 무엇인가? “곡식 종자가 아직도 창고에 있느냐 포도나무, 무화과나무, 석류나무, 감람나무에 열매가 맺지 못하였느니라 그러나 오늘부터는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19).” 주가 감당하시고 책임지실 일이다. 나는 다만 말씀으로 주의 전을 지킬 따름이다.
가난한 자를 보살피는 자에게 복이 있음이여
재앙의 날에 여호와께서 그를 건지시리로다
여호와께서 그를 지키사 살게 하시리니
그가 이 세상에서 복을 받을 것이라
주여 그를 그 원수들의 뜻에 맡기지 마소서
(시 41:1-2).
주 앞에 구하며,
내 원수가 나를 이기지 못하오니
주께서 나를 기뻐하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11).
오늘까지 그러했던 것처럼,
주께서 나를 온전한 중에 붙드시고
영원히 주 앞에 세우시나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영원부터 영원까지
송축할지로다 아멘 아멘
(12-13). 아멘.
'[묵상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나를 네게 보내신 줄 알리라 (0) | 2026.05.17 |
|---|---|
|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0) | 2026.05.16 |
|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 (0) | 2026.05.14 |
|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0) | 2026.05.13 |
| 그의 구원을 기뻐하리로다 (0) | 2026.05.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