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 조상들을 본받지 말라 옛적 선지자들이 그들에게 외쳐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악한 길, 악한 행위를 떠나서 돌아오라 하셨다 하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고 내게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였느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슥 1:4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시 42:11
우리 영혼이 불안해 할 때 사람을 의식하고 주변을 살피게 된다. 이는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하고 두리번거리는 것과 같다(시 42:2). 오늘 본문에서 스가랴 선지자는 회개를 촉구한다(1-6).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셨다.’ 말씀이 들어오면 죄가 기억난다. 죄를 주 앞에 아뢰면 주만 의지하게 된다. 욥이 그러하여서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욥 13:15).” 하고 죽는 것 따위 두려워하지 않았다.
스가랴는 백성에게 하나님의 입과 같은 역할을 하라는 위임을 받았다. 그것과 함께 말할 것도 지시받았다. 또한 백성들에게 전달할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로 향하였다.’ 이것은 성령의 증거와 임재로 그리된 것이다. 우리가 누굴 만날 때, 만나서 주의 나라와 그의 의를 이야기하게 될 때 이는 우연히 그리 된 것이 아니라 택정하시고 예정하신 바, 그리 되어진 것이다. 곧 오늘의 모든 일은 이미 오늘 전에 이루어질 것을 계획하신 하나님의 섭리에 따른 것이다.
오늘 본문은 ‘다리오왕 2년’의 일이다. “다리오 왕 제이년 여덟째 달에 여호와의 말씀이 잇도의 손자 베레갸의 아들 선지자 스가랴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슥 1:1).” 다리오 왕 이 년 팔 월이면 주전 520년 10-11월이다. 앞서 학개서 1장 1절에 따르면, 학개 역시 그의 예언 사역이 다리오 왕 이 년 유월 첫날, 곧 주전 520년 8월 29일에 시작되고 있다. “다리오 왕 제이년 여섯째 달 곧 그 달 초하루에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로 말미암아 스알디엘의 아들 유다 총독 스룹바벨과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학 1:1).” 그렇듯 스가랴는 학개 선지자와 동시대 인물이다.
두 선지자의 사역은 공통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격려하여 성전을 재건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그런 가운데 스가랴는 ‘영적 갱신’에 더 실질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다. 오늘 본문 2-3절에서 보면 “여호와가 너희의 조상들에게 심히 진노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너는 그들에게 말하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이르시되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는 저들이 주를 멀리 떠나 있음을 알게 한다. 물리적으로 그렇다는 게 아니라 심적으로, 그 마음이, 영혼이 침체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한다. 그 원인은 다음에 나온다.
“너희 조상들을 본받지 말라 옛적 선지자들이 그들에게 외쳐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악한 길, 악한 행위를 떠나서 돌아오라 하셨다 하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고 내게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였느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4).” 여기서 보면 먼저는 말씀을 듣지 않는다는 데 문제가 있다. 그 이유가 조상들을 따라 살려하기 때문이란 것도 알 수 있다. 바벨론에 붙잡혀 갔던 포로들이 이스라엘로 귀환할 즈음에는 왕이 따로 없었다. 학개의 경우와 같이 스가랴도 유다의 군주로 있는 페르샤의 왕인 다리오의 통치 아래서 이 글을 기록하였다. 그러다 보니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못하고, 늘 그러했던 관례에 따라 조상들과 같이 “악한 길, 악한 행위를” 따랐다. 이를 “떠나서 돌아오라.” 하고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주의 말씀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 때, ‘여호와의 말씀’이 임한다. 오늘 본문은 ‘잇도의 손자 베레갸의 아들 선지자 스가랴에게 임하였다.’ <선지자>란 히브리어의 뜻으로 ‘하나님에 의해 대변인으로 부르심을 받는 자’이다. 스가랴가 자신을 특별히 선지자로 묘사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자’로서 자신의 사명을 확증해 주는 것이다. 스가랴는 또한 ‘잇도의 손자 베레갸의 아들’로 소개한다. 스가랴는 의도적으로 자신의 가문에서 두 조상의 이름을 먼저 소개하면서 자신을 전하는데, 각각 그 이름에는 뜻이 있어서이다. 잇도는 ‘주께서 기억하신다.’ 하는 의미이고, 베가랴는 ‘축복하실 것이다.’ 하는 것이고 스가랴 자신의 이름은 ‘적절한 시기’란 의미를 갖는다.
곧 이들 조상의 이름을 연결하여 소개한 의도는 ‘주께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기억하사 적절한 시기에 축복하실 것이다.’ 하는 것을 간접적으로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곧 스가랴서의 주제이기도 하다. 잇도는 스룹바벨과 여호수아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제사장 중의 한 사람이다. 스가랴는 포로로 끌려간 70년 사이에 태어났다. 이스라엘로 귀환할 당시 저는 어렸을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기 전에 제사장이었다. 스가랴는 이 다리오왕 2년 8월에 그의 첫 설교를 행했다. 학개는 같은 해 6월에 설교를 시작했다(학 1:1). 백성이 기꺼이 학개의 입에서 나오는 여호와의 말씀에 순복하자, 하나님께서는 스가랴까지 보내주시는 축복을 더해주었다. 순종은 더 많은 축복으로 돌아온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길,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마 13:12).”
오늘 본문에서 또한 주목하는 것은 ‘잇도의 손자, 베레가의 아들, 선지자 스가랴’라 자신을 소개하는 대목이다. 학개는 ‘선지자’로만 불렸던 것과 대조적이다.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로 말미암아(학 1:1).” 곧 베레가의 아들인 스가랴는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성전 재건 수년 후에 ‘성전과 재단 사이에서 죽임을’ 당했다고 하셨던 바로 그 사람이다.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마 23:35).” 즉 훗날에 스가랴의 끝은 순교였음을 알 수 있다. 저들 조상들, 유대인들이 흘린 무죄한 피를 언급하시며 ‘아벨에서 시작하여 거룩한 예언자들의 마지막 사람’ 스가랴에게서 말을 끝맺기 때문이다.
반면,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 다음에도 많은 예언자들과 의인들이 죽임을 당했다. 스가랴가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 속에 그가 팔리고, 그의 친구들의 집에서 상처를 입고, 목자가 살해되는데 대하여 말했던 것이 그 예언자 자신에게서 실증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의 예비 된 형벌의 표징이 되었다. 그는 박해자의 공격에 제사장들의 뜰을 피난처로 택하였다. 그리하여 입구와 제단 사이에서 죽임을 당하였다. 이를 비극적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 죽어주신 예수의 모형이 되었다.
스가랴의 목회의 첫 열매는 ‘환상과 계시’를 접하고 설교를 행하기 전에 그는 평이하고 실제적인 설교를 했다. 이는 그것부터 시작하는 것이 최선의 길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주어진 일상을 소홀히 여기면서 ‘성령의 능력’만을 구하는 어리석은 자리에 빠지는 경우도 흔하다. 누가 전화로 묻기를 성령을 받아야 합니까?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을 때, 나는 다소 당황하였지만 이상을 사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주어진 일상은 성령의 터전이다. 남들 시선과 평가에 굴할 게 아니다. 비록 보잘것없는 목회이고 가난한 교회이나 주신 바, 오늘의 형편으로 최선을 다하는 것은 내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이 하시는 일이다. 나는 그리 확신한다. 새벽 4시, 교회로 나와 혼자 말씀을 펴고 365일 새벽 제단을 지키는 것도 나의 의지는 아니다.
오늘 스가랴는 이와 같이 자신의 일상에서 우선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긍휼의 약속들을 발표하기 전에 ‘회개하기’를 먼저 촉구하였다. 흔히 우리는 회개에 대해 주 앞에 아뢰고 기도함으로 끝났다고 하지만 이를 증명할 수 없다. 잘못했어요, 용서해주세요, 한다고 하여 회개가 이루어진 게 아니다. 이에 따른 증거는 그의 일상에서 드러난다. 곧 ‘여호와의 길이 예비되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진실로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시리이다
(시 76:10).
나는 이 구절을 묵상할 때마다 친구의 누이를 생각한다. 당시 누이는 환갑을 갓 넘긴 목회자 사모님이었다. 일생을 그 친정엄마를 위해 기도하였다고 했다. 장례식장에서 만났을 때 목사가 된지 얼마 안 된 내게 하소연하듯 말했다. 엄마가 끝내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 안 하고 눈을 감았다. 저는 숨이 넘어가기 직전까지 엄마에게 물었다고 했다. 엄마는 왜 한 번도 나를 따뜻하게 불러주지 않았어? 왜 끝까지 한 번도 안아주지 않았어? 그러나 사경을 헤매던 노모는 아무 말 없이 눈을 감았다. 저의 안에 노여움이 얼마나 깊고, 넓고, 높은지 나는 알지 못한다. 다만,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3:18-19).”
우리의 노여움, 어떤 불안과 원망과 원통함이 얼마나 크고 높고 깊고 넓은지 알 수 없으나 주의 사랑은 이를 모두 채우고도 남을 정도로 충만하시다. 오늘 본문의 스가랴는 주의 백성들이 회개할 것을 촉구한다. 회개는 용서를 빌고 용서 받은 것으로 끝이 아니다. 마치 아이가 잘못을 구하고 용서함을 받았다면 일상이 변해야 하는 것과 같다. 그럼에도 여전하여 그 마음에 노여움이 남았다면 참된 회개라고 할 수 없다. 오늘 본문은 이에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하고 부른다. ‘와서 하나님과 화해하라.’고 한다.
“그러므로 너는 그들에게 말하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이르시되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슥 1:3).”
저들이 돌아오고 하나님도 돌아가심으로 화해가 교제로 바뀐다. 궁극적으로는 이를 위하여 예수께서 화목제물이 되신 것이다.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욥 22:21).” 하신 것도,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롬 5:10).” 하여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20).” 이것이 우리 신앙의 소명이며 사명이어서 또한 누군가에게 나의 이야기는 하나님을 나타내는 이야기가 되어야 한다. 전에는 숨기고 이를 피하여 아닌 척, 괜찮은 척, 사람들을 의식하며 사느라 급급하였지만 이제는 나의 부끄러움, 나의 연약함을 자랑한다.
이는,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그렇게 나는 이제 누구와 상담을 하거나 어떤 슬픔을 마주할 때 기꺼운 마음으로 나의 허물을 자랑한다. 나의 가장 가까웠던 친구들부터 자주 어울리던 이들은 이런 나를 이상하게 여긴다. 그때는 모든 것을 숨기고 사느라 급급했던 것인데, 그래서 더 밝고 명랑하게 사느라 산다고 산 것인데 이제는 나의 약하고 비루함을 마다하지 않고 사랑하고 자랑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것으로 주의 영이 일하신다.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다. 나로 하여금 찬송이 되게 한다.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엡 1:11-12).” 곧 오늘의 나는 주의 걸작이다. 어릴 때 나의 부친이 나에게 하신 말씀도 ‘특별히 너를 사랑하신 증거’로 나의 약함을 자랑스러워했다.
그로 인해 나환자촌에서의 생활과 그곳에서 만난 나환자 소경 장로님의 관심과 사랑도 두고두고 내 안에 사랑의 빚진 마음이 되었다. 이를 더욱 심화시키기 위해 하나님은 나의 불안과 우울과 공포까지도 사용하신다. ‘그런 사람들’이 오고, 자신들의 힘듦을 말하다 울 때 나는 저를 위해 기도한다. 나의 위로의 하나님이 저의 위로가 되시기를. 그리하여 저의 슬픔이 기쁨이 되고, 오늘의 고통이 감사의 찬송이 되기를.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그의 길을 바꾸신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 조상들의 날로부터 너희가 나의 규례를 떠나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런즉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하였더니 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 하는도다(말 3:7).”
그런 가운데 오늘 스가랴는 이상을 본다. ‘말과 화석류’, ‘나무의 이상’이다(7-17). 하나님께서는 스가랴를 통하여 백성의 주의를 환기하고, 말씀에 대한 그들의 경외와 겸손한 탐구를 종용하고, 그들의 마음과 기억 속에 더욱 확신을 더하시기 위해 선지자로 이상을 보게 하신다. 이 이상은 스가랴가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하고 회개하라는 설교 후에 3개월이 지난 11월 24일에 임하였다. “다리오 왕 제이년 열한째 달 곧 스밧월 이십사일에 잇도의 손자 베레갸의 아들 선지자 스가랴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니라(7).”
먼저는 골짜기 속에 숨겨져 있어 똑바로 주목하지 않으면 알아 볼 수 없는 <화석류나무>의 침침하고 작은 숲을 보았다. 그 나무 사이에 선 자가 있다. “화석류나무 사이에 선 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땅에 두루 다니라고 보내신 자들이니라(10).” 이는 교회의 낮고, 어둡고, 고독하고, 침울한 상태를 대변한다. 그들은 그들의 모든 이웃들에 의해 파묻혀 무명지사가 되었다. 그들이 가졌던 모든 친구들이 감추어졌다. 그들에게 구원과 원조의 길은 나타나지 않았다. 교회는 그렇듯 눈에 띄지 않게 살아 역사한다. 가끔은 ‘광야의 여자’처럼 감추어져 있다. “그 여자가 광야로 도망하매 거기서 천이백육십 일 동안 그를 양육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곳이 있더라(계 12:6).”
곧 ‘여호와의 군대장관으로, 칼을 빼어 손에 들고’ 활과 면류관을 가지고 요한에게 나타났던 그분으로, 그는 화석류나무에 숨겨졌으며, 매복하여 있듯 숨어서 그의 백성의 때에 맞은 구원을 위해 나타날 준비를 한다. 이것이 우리의 ‘행복한 경이’를 낳았다.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사 45:15).” 저는 우리를 도우시려 하늘을 타고 오신다. “여수룬이여 하나님 같은 이가 없도다 그가 너를 도우시려고 하늘을 타고 궁창에서 위엄을 나타내시는도다(신 33:26).” 그는 승리하는 군주와도 같다. “에돔에서 오는 이 누구며 붉은 옷을 입고 보스라에서 오는 이 누구냐 그의 화려한 의복 큰 능력으로 걷는 이가 누구냐 그는 나이니 공의를 말하는 이요 구원하는 능력을 가진 이니라(사 63:1).” 그리하여 위로가 되신다. 오늘 스가랴는 이를 선포한다.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로, 교회에게 위로와 승리를 갖다 주신다. “서쪽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두려워하겠고 해 돋는 쪽에서 그의 영광을 두려워할 것은 여호와께서 그 기운에 몰려 급히 흐르는 강물 같이 오실 것임이로다(사 59:19).” 오늘 우리의 형편과 사정이 어떠하든지, 비록 우리 교회가 작고 보잘것없다 해도 숨겨져 있는 하나님의 권능을 믿는다. 모두가 그렇게 왔다 그렇게 지나가는 자들 같이, 세례요한의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 같이 흩어져버리는 것 같아도 각자 섬기는 교회로 돌아가서 또는 그 일상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행복한 경이로움으로 찬송하게 하실 것이다. 찬송이 되게 하실 것이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시 42:5).
이는 우리로 주를 찾게 하실 때 이루신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1-2).
할 때에 우리 영혼은 사람들로 시달릴 때,
내 하나님이여
내 영혼이 내 속에서 낙심이 되므로
내가 요단 땅과 헤르몬과 미살 산에서
주를 기억하나이다
(6).
그 어렵고 힘든 시절을 생각하며 주를 찬송하게 하심은,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의 인자하심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의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
(8).
그러므로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1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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