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나를 네게 보내신 줄 알리라

하현. 2026. 5. 17. 06:08

 

그 날에 많은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여 내 백성이 될 것이요 나는 네 가운데에 머물리라 네가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네게 보내신 줄 알리라

슥 2:11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시 43:5

 

 

스가랴는 어제에 이어 ‘측량줄 환상’을 본다(1-5). 스가랴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백성들에게 ‘예루살렘 위에 먹줄이 쳐지리라.’ 하신 예언을 받았다. “그러므로 여호와가 이처럼 말하노라 내가 불쌍히 여기므로 예루살렘에 돌아왔은즉 내 집이 그 가운데에 건축되리니 예루살렘 위에 먹줄이 쳐지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1:16).” 이는 재건축을 위한 측량으로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심으로 “돌아왔은즉 내 집이 그 가운데 건축되리니” 하심으로 재차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위의 13절에서 언급된 ‘선한 말씀, 위로하는 말씀’을 보다 긍정적이고 구체적으로 언급한 것이다. “여호와께서 내게 말하는 천사에게 선한 말씀, 위로하는 말씀으로 대답하시더라(1:13).” ‘그러므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대해 질투하기까지 분노하시고 계시기 때문에 다음에 언급되는 약속의 말씀이 성취될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또한 여호와께서 12절에 언급된 ‘여호와의 사자’의 중보에 대한 응답으로, 예루살렘에 대한 자신의 자비를 다시 보이시겠다고 약속하셨던 것과 같다. “여호와의 영광이 동문을 통하여 성전으로 들어가고 영이 나를 들어 데리고 안뜰에 들어가시기로 내가 보니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에 가득하더라(겔 43:4-5).” 한편 ‘내 집’이라 표현하심은 곧 성전을 재건하리라고 것을 긍휼하심으로 그리하실 것을 뜻한다. 이를 이어서 오늘 본문은 듣는 이들에게 확신시키라는 명령을 받았다. 여기서 약속은 확증되며, 스가랴는 더욱 더 명확하고 확신 있게 자기 메시지를 전하게 된다. 그는 환상 중에, 한 사람이 예루살렘을 측량하러 가는 것을 본다. “내가 또 눈을 들어 본즉 한 사람이 측량줄을 그의 손에 잡았기로 네가 어디로 가느냐 물은즉 그가 내게 대답하되 예루살렘을 측량하여 그 너비와 길이를 보고자 하노라 하고 말할 때에(1-2).”

 

하나님께서 그에게 매우 고무적인 장면을 보이셨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대장장이 네 명을 내게 보이시기로(1:20)” 그로 인해 이제 그는 ‘또 눈을 들어서 보았다.’ 우리 앞에 지나가는 하나님의 자비와 유쾌한 광경을 보았다. 다시금 눈을 들어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 우리에게 주어지는 새로운 것을 추구하시도록 해야 한다는 것을 확신하게 된다. 왜냐하면 아직 더 볼 것이 남았기 때문이다. 우리의 가야 할 길은 끝나지 않았다. 생을 다하는 동안 주가 이루시는 구원 사역의 현장을 살아가는 것이다. 주가 이루시는 일이 우리 앞에서 펼쳐질 것이다. 스가랴는 예루살렘의 대적들이 좌절되어 꺾이는 것을 보았다. 이제 예루살렘이 파멸되지 않을 것이라고 바라기 시작한다. 그것은 그를 아직 행복하게 하기에 충분하지 못하다. 약속된 것의 전부는 아니다. 여기 더 행해야 할 일이 있다. 다윗은 자기가 ‘악인의 뿔을 다 베기로’ 결정하였을 때, ‘의인의 뿔은 높이 들겠다’고 작정하였다.

 

나는 야곱의 하나님을

영원히 선포하며 찬양하며

또 악인들의 뿔을 다 베고

의인의 뿔은 높이 들리로다

(시 75:9-10).

 

그리고 ‘다윗의 자손’이 여기서 그렇게 한다. 왜냐하면 오늘 스가랴는 ‘그 손에 측량줄을 잡은’ 것을 본 바로 그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을 직접적으로는 알 수 없었겠으나 믿음으로 바라고 구하여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는 교회의 건축기사이다. “그는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 만한 것이 마치 집 지은 자가 그 집보다 더욱 존귀함 같으니라(히 3:3).” 측량줄과 수평자에 의하여 정밀하게 오늘도 이 교회를 지으신다. 개개의 교회가 구별되어 있으나 실은 하나다. 우리 신체의 모든 구성이 각각은 다르다 해도 한 몸을 이룬 것과 같다. 그러므로 우리 이 작은 교회가 할 수 있는 일은 미약할 뿐이지만 대부분은 교회마다의 작은 조직을 이루는 이들 가운데 상하고 다친 영혼들이 온다. 차마 자신들 교회에서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심정을 토하여 주 앞에 아뢰고 간다. 나는 저들로 용기를 얻을 수 있도록 듣고 기도하며 사연을 나눈다. 교회는 그 사명을 다하기까지 생물과 같이 움직인다.

 

스가랴는 오늘, 용감하게 묻는다. ‘어디로 가십니까?’ 또한 그 측량줄로 ‘무엇을 계획하십니까?’ 하고 말이다. 종종 나의 심정도 그러할까? 이 작은 교회에서 몇 명의 작은 숫자로 대체 무얼 할 수 있을까요? 우린 어디로 가는 것일까요? 하고 묻는 것도 그래서이다. 그러나 그는 즉시 ‘예루살렘을 측량하러, 즉 그 장광을 각각에 따라 재어 그 둘레에 세울 벽을 만드는데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산정해 보며, 그 치수를 그 안에 거주할 수 많은 사람들과 비교하여 그들을 수용하는데 필요한 부가물이 무엇인지 알아보러 간다.’고 말씀한다.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집결할 때가 올 것이다.

 

“네 눈을 들어 사방을 보라 무리가 다 모여 네게로 오느니라 네 아들들은 먼 곳에서 오겠고 네 딸들은 안기어 올 것이라(사 60:4).” 곧 ‘그 장막터를 넓힐’ 때가 온다. “네 장막터를 넓히며 네 처소의 휘장을 아끼지 말고 널리 펴되 너의 줄을 길게 하며 너의 말뚝을 견고히 할지어다(54:2).” 이사야가 듣는 답으로 가름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교회의 크기를 감안하시며, 잔치에 올 수많은 영혼들이 초대될 때, 여전히 ‘자리가 있도록’ 주선할 것을 알게 하신다. “종이 이르되 주인이여 명하신 대로 하였으되 아직도 자리가 있나이다(눅 14:22).” 곧 새 예루살렘 위에 있는 ‘나의 아버지 집에는 거할 곳이 많도다’ 하는 것과 같다.

 

아직은 살아서 산 자의 고귀함은 아직 이 기회가 닿기 때문이다. 더는 소용이 없는 문이 닫히고 난 뒤를 생각해야 한다. 우리가 아직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거나 거부하거나 싫다거나 할 수 있는 것도 은혜이다. 이 시간마저 점점 줄어들다 어느 날 번쩍, 문이 닫히고 나면 끝장이다. 오늘 스가랴는 이 환상이 예루살렘에게 좋은 뜻을 가지며, 그가 본 측량줄은 ‘혼란의 줄’이 아니며 멸망을 위해 측정하는 줄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처녀 시온의 성을 헐기로 결심하시고 줄을 띠우실’ 때와 같지 않다(애 2:8). 오히려 그것은 그가 ‘줄로 저희 기업을 분배하실’ 때의 것이다.

 

또 나라를 그들의 앞에서 쫓아내시며 줄을 쳐서

그들의 소유를 분배하시고 이스라엘의 지파들이

그들의 장막에 살게 하셨도다

(시 78:55).

 

오늘 스가랴와 ‘말하던 천사’는 그의 계획대로 ‘예루살렘을 측량하러 나갔다.’ 그리고 이 환상을 먼저 예언자에게 설명해 주어 그로 하여금 불안해하지 않게 하였다. “네가 어디로 가느냐 물은즉 그가 내게 대답하되 예루살렘을 측량하여 그 너비와 길이를 보고자 하노라 하고 말할 때에(슥 2:2).” 여기서 나는 알 수 없는 희망을 이해한다. ‘물은즉 그가 내게 대답하되’ 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더러는 혼자서 회의와 갈등으로 힘들 때가 있다. 이렇게 하고 있는 게 맞나? 싶을 때는 뭐라도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하는가? 불안도 드는데, 이상한 것은 그때마다 또 알 수 없는 어떤 확신이 내 안에 있다. 이는 ‘물은즉’ 곧이어 ‘대답하되’ 하는 것 같이 빠른 안정이다. 곧 내 안에 불안과 안정이 동시에 오가면서 주를 더욱 바라게 한다. 그럴 때면 내가 있어야 할 자리가 더욱 확실해진다. 우리 교회의 역할이 분명한 것이다.

 

이어 ‘다른 천사가 나와서 그를 맞았다.’ “내게 말하는 천사가 나가고 다른 천사가 나와서 그를 맞으며(3).” 나는 어릴 때부터 늘 교회에서 생활 했다. 싫든 좋든 교회 사람들과 어울렸고 교회 안에서 주의 일에 같이 쓰임을 받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다를 게 없이 어수룩하고 부족하기 짝이 없지만 그때 주일학교 선생님으로(당시 나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교사를 했다), 만났던 아이들이 이제는 다들 성인이 되어 가정을 이루고 부모가 되었다. 이런저런 우여곡절은 있었으나 여전히 보면 나는 저들이 아이 같은데 실은 나이 차이가 별로 나지 않는, 같은 또래의 중년이 되었다는 데서 놀라고는 한다.

 

오늘 스가랴도 그런 느낌일까? 예언자로 저는 젊었을 때도 예언자직을 맡기 시작했으나 하나님께서 이처럼 그를 높이 들리게 함으로, 아무도 그의 젊음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셨다. 그는 젊고 경험이 없으므로, 최악의 사태를 두려워할 듯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그에게 최선을 바라라고 명하시는 말씀으로 읽힌다. 오늘 내게도 다르지 않다. 09학번으로 신대원을 해서 13년도 목사안수를 받았으니 이제 고작 13년 차의 목회활동에 지나지 않는 셈이다. 물론 더 어릴 때부터 교사로 선생으로 불리며 교회에서 지냈으나 여전히 나는 불안할만한 경험으로 ‘이 길이 맞나?’ 하고 갸우뚱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늘 그랬듯 때로는 막무가내로 이 일을 수행한다. 주의 일은 안전하고 위대하다. “이르되 너는 달려가서 그 소년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예루살렘은 그 가운데 사람과 가축이 많으므로 성곽 없는 성읍이 될 것이라 하라(4).”

 

여기 주 앞에 나아오는 자는 주가 돌보심을 알게 한다. 놀랍도록 주의 은총은 더욱 더 선명하다. 마치 가장 큰 성벽을 가진 듯이 우리 교회는 안전할 것이다. 그 가운데서 사람과 유축이 많다. 이는 최선의 성벽이다. 식량은 물론 우리가 사는데 따른 필요한 것으로 공급될 것이다. ‘큰 축복’은 안정이다. 여기에 오는 이들이 돌아가서 자신들 교회를 섬길 때에 안심하고 안정되이 주를 찬양할 수 있다. 이는 저들로 위로를 더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는 동안에 하나님의 축복의 열매요, 더 큰 축복의 징조라는 점에 주목하게 될 것이다. 곧 ‘하나님의 임재가 있기 때문에’ 안전을 느끼며 그 영혼은 어떠하든지 평안하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불로 둘러싼 성곽이 되며 그 가운데에서 영광이 되리라(5).”

 

여기서도 하나님께서 친히 그 사면에서 불을 둘러 성곽이 되게 하실 것이라 한다. 이는 성령으로 우리 영혼을 강하게 붙드시고 보호하심을 뜻한다. 사실 예루살렘은 사면의 성곽이 없었으며, 외부에 노출되어 드러나 있었다. 이전에 성곽이 있었을 때, 원수들이 그 벽을 부숴버렸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서 불로 그 성곽이 되실 것이라 하신다. 덩그러니 나만, 우리 교회만 이러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가 또 불안이 감돌 때도 있는데 실은 주가 보호하시고 계셨다. 가령 그 극한 고난 중에도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그리하셨다. “주께서 그와 그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울타리로 두르심 때문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의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의 소유물이 땅에 넘치게 하셨음이니이다(욥 1:10).” 이는 사탄도 다 알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오늘을 살면서 대책이 없는 듯 난감하게 느껴질 때도 있으나 그렇지 않다. 우리 주위에는 이미 성과 누곽을 만드셨다. “그 날에 유다 땅에서 이 노래를 부르리라 우리에게 견고한 성읍이 있음이여 여호와께서 구원을 성벽과 외벽으로 삼으시리로다(사 26:1).” 이는 그 무엇도 때려 부술 수 없다. 우리 주위에 산처럼 에워싸서 보호하시는 이가 있다.

 

산들이 예루살렘을 두름과 같이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두르시리로다

(시 125:2).

 

곧 이 산은 그 무엇도 정복할 수 없다. 그 사면에는 불 성곽이 되시리니, 이는 부숴질 수 없다. 파괴될 수도 없다. 그 기초가 파헤쳐질 수 없다. 공격당하나 무너지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우리 주위에 ‘불 성곽’을 만드시고 둘러서 보호하신다. ‘우리 하나님은’ 나와 교회를 대적하는 자들을 ‘사르는 불’이 되신다. 감히 누가 나를, 교회를 어쩌지 못하는 것은 이 교회를 피 값으로 사셨기 때문이다. 사면 전체를 성령의 불로 성곽을 이루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 가운데서 영광이 되실’ 것이다. 여기서 위대해질 것이다. 가끔 나는 하나님의 ‘특수한 임재’와 ‘은혜의 증거’를 보면서도 느끼지 못할 때가 있다. 느끼면서도 실감이 안 날 때도 있다.

 

스치듯 만나거나 광야의 외치는 소리 같이 흩어져 사라진 줄 알았는데, 그 한 영혼을 지탱하고 있었다. 어릴 때 선생으로, 오늘 여기 작은 교회의 목사로 전한 말이 저의 심령에 박히고 뇌리를 떠나지 않아 결정적인 순간에 주의 이름을 부르게 하였다. 죽으려고 했던 이가 기억났고, 더는 교회를 상관하지 않고 살려던 이가 돌이켜서 교회를 다닌다. 나로서도 저는 이제 끝났구나, 하고 여겼던 이가 갑자기 그와 같은 고백을 할 때 경이롭다. 이에 오늘 스가랴는 전한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불로 둘러싼 성곽이 되며 그 가운데에서 영광이 되리라(5).” 이는 전적으로 ‘여호와의 말씀’으로 그러하다.

 

“여호와의 말씀에 시온의 딸아 노래하고 기뻐하라 이는 내가 와서 네 가운데에 머물 것임이라(10).” 주의 인재는 바람 같고 아침 햇살 같다. 어둠을 거두고 우리 곁을 가득 채우신다. “그 날에 많은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여 내 백성이 될 것이요 나는 네 가운데에 머물리라 네가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네게 보내신 줄 알리라(11).” 이를 알게 될 때 우리는 찬송하고 저들은 놀라한다. 누군가의 기도로 내가 결국 주의 길을 가게 되면서 알았다. 가령 딸애 내외가 다음 주에 여수 애양원교회에 간다고 해서 나는 누구의 묘를 찾아보고, 주일에 그 예배당에서 예배드릴 수 있기를 당부하였다. 그때의 어린 나는 오늘의 나를 알고 있었을까? 소경 장로들이 모여앉아 새벽마다 내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던 그 기도의 응답이 이렇듯 기어이 주의 길을 가게 할 것이란 사실을.

 

“여호와께서 장차 유다를 거룩한 땅에서 자기 소유를 삼으시고 다시 예루살렘을 택하시리니 모든 육체가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 것은 여호와께서 그의 거룩한 처소에서 일어나심이니라 하라 하더라(11-12).”

 

말씀은 응하여 현실이 되고 그 자리에 설 때에야 비로소 알게 된다. 우리가 볼 것이다.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이는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 장차 당할 일을 우리에게 진술하라 또 이전 일이 어떠한 것도 알게 하라 우리가 마음에 두고 그 결말을 알아보리라 혹 앞으로 올 일을 듣게 하며(사 40:5, 41:22).” 오늘도 이처럼 말씀 앞에 장래의 일을 본다. 하여 더러는 오늘이 힘들고 어렵더라도,

 

하나님이여 나를 판단하시되

경건하지 아니한 나라에 대하여

내 송사를 변호하시며

간사하고 불의한 자에게서 나를 건지소서

주는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이시거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억압으로 말미암아

슬프게 다니나이까

(시 43:1-2).

 

주 앞에 모두 고할 때,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시어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거룩한 산과 주께서 계시는 곳에

이르게 하소서

(3).

 

그리하여 오늘도,

 

그런즉 내가 하나님의 제단에 나아가

나의 큰 기쁨의 하나님께 이르리이다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4-5). 아멘.